다. 잘못된 가치판단의 원인

만일 다이아몬드와 금덩어리가 앞에 떨어져 있다고 하자. 대부분은 다이아몬드를 주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보통 사람과 달리 금덩어리를 주을 수도 있다. 여기서 다이아몬드가 옳고 금덩어리가 틀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이아몬드가 더 나은 판단이라고 일단 가정해보자. 그럴 때 어떤 이들이 금덩어리를 선택하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처음부터 다이아몬드가 단순한 유리인 줄 잘못 알아서 이런 잘못된 사실판단을 기초로 잘못된 가치판단을 한 경우도 있다.[잘못된 사실판단의 왜곡(歪曲)] 또는 언제나 금이 최고다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어 가치판단이 비틀어지는 경우도 있다.[편견, 고정관념으로 인한 가치판단의 왜곡] 또는 자신은 지금 당장 금의 노란 빛깔이 더 좋아 보여 끌려서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감각적 왜곡] 또는 자신의 부모나 사랑하는 친한 이성 친구가 금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도 따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친밀함의 왜곡] 또는 보통 다른 이들 대부분이 금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수의 왜곡] 또는 특정 권위자나 지도자, 또는 인기인이 금목걸이를 좋아하는데 자신도 이를 따라 금이 좋아 보였다는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권위나 힘의 왜곡] 또는 종전까지 금을 계속 소중하게 지녀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관습적 왜곡] 또는 반대로 금이 난생 처음 대하는 신기한 물건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모험적 왜곡] 어떤 이가 특정한 가치 관념을 형성하는 데는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다양한 형태로 개입한다.

그런데 여하튼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갖고 생활한다. 그래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사는 이들은 서로 상대방이 마치 쓰레기와 같은 것을 추구하며 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반대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다른 이의 입장에서는 또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무시되는 것이다.

라. 가치판단의 어려움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가치판단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나을까?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면 우리는 확고부동한 답을 얻을 수 없다. 이런 가치판단의 어느 쪽이 낫다라고 확고하게 세울 수 없는 이유는 그 기초에 좋음의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좋음의 느낌은 각 주체별로 또 대상별로 상황별로 다 다르다. 그래서 어떤 대상은 언제나 늘 좋다라는 식으로 법칙을 세울 수 없다. 사실상 어떤 주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것을 좋다라고 할 때 그것이 왜 그런가 역시도 답하기 곤란하다. 어떤 주체가 어떤 상황에서 좋음을 느낄 때, 다른 주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또 좋음을 느낀 그 주체도 다른 상황에서는 좋음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좋음의 느낌은 주체 대상 상황 등에 유동적이다. 따라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기가 곤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배가 고플 때는 국수를 좋게 느낀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국수가 싫어진다. 그러다 점심에는 다시 과일이 입맛에 당기게 된다. 이런 식으로 변화무쌍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처럼 변하고 일정하지 않은 좋음의 느낌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그래도 확고한 것은 어찌되었든 ‘좋음’의 느낌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좋음의 느낌을 기초로 일단 가치판단을 세울 수는 있게 된다. 그래서 좋음의 느낌을 주게 하는 것은 그 때 그 때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좋음을 주는 것들 가운데에서는 일단 그 주체에게 오랜 기간 좋음을 가져다 줄 것인지로 우열을 나눌 수 있다. 또 어떤 상태가 얼마나 많은 주체들에게 좋음과 나쁨을 가져다주는지를 기준으로 우열을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여러 주체에게 높고 많은 좋음의 느낌을 장기간에 걸쳐 가져다 준다면, 이를 높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제시하는 최상의 가치의 판단도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구조에 서 있다. 가장 근본적으로 어떤 경우에서나 어떤 주체에게나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확고한 좋음을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모든 생명의 주체는 ‘좋음의 느낌’을 그 때 그 때 가진다는 사실을 기초로 위와 같이 그런 좋음이 어떤 경우에 가장 많은 주체에게 많은 양의 좋음을 장기간에 걸쳐 주는가를 기준으로 최상의 가치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즉 A와 B 가운데 어떤 것이 가치가 많은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판단방법을 취할 수 있다. 우선 A가 일정기간 동안 인과관계상 관련 맺는 다양한 현상을 A의 원인과 A의 결과와 영향[결과의 결과들]들로 묶는다. B도 마찬가지다. 그 다음 고려범위에 드는 일정한 다수 주체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이런 각각의 변화에 상응하여 좋음과 나쁨 등을 어떻게 변화하며 느끼는가를 살필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각 주체가 일정 단위기간 느끼는 좋음과 나쁨은 평등한 값을 갖는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양자를 비교한다. 그 결과 좋음과 나쁨의 총차이를 계산하여 그 차이를 많이 가져다 주는 쪽이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 전제에는 물론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 문제점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어떤 현상을 기초로 할 때 그것과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현상의 범위는 그것이 실제 발생하기까지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하나의 불이 단지 추위를 없애는 데 그칠 지 아니면 집을 전부 태우는 화재의 원인이 될지는 사실 명확한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주체를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고려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특정 소수의 인간에서부터 곤충이나 미생물까지 주체의 범위를 넓히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범위를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 결과는 늘 유동적이 된다. 한편 좋고 나쁨의 정도에는 한 주체를 놓고 생각해도 각기 상대적인 우열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주 좋은 상태, 또는 조금 좋은 상태, 그냥 보통 좋은 상태와 같은 정도의 우열이다. 그런데 이런 정도차이를 수치로 명확히 계산해 표현하는 것 은 어렵다. 여하튼 이런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고 각 주체의 좋고 나쁨이 모두 평등한 값을 갖는다고 단정하기도 곤란하다. 또 좋고 나쁨은 정신 내면의 내용이다. 따라서 어떤 이의 좋고 나쁨을 외부에 명확히 표현하거나, 다른 이가 뚜렷이 관찰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더 나아가 다른 타인의 것과 명확히 그 내용을 비교하는 데에도 한계를 갖는다. 한편 범위가 넓어질수록 이를 모두 종합하여 결과를 얻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는 이론상의 주장에 불과하며, 실제 경험상으로 이런 이론에 따라 어떤 값을 얻는다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또 현실에서 내려지는 각종 가치판단의 내용은 이런 이론과는 또 다른 이유로 거리가 멀어진다. 예를 들어 역사현실에 존재하는 종교규범, 윤리규범, 법률 등의 내용은 사실상 위와 같은 이론적인 가치평가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우선 실제 현실에서는 자신의 판단과 뜻을 관철(貫徹)할 수 있는 힘[事實力, 權力, 權威]을 갖는 이의 판단이 우선한다. 그리고 이 판단자는 판단과정에서 타인의 뜻을 고려하기 보다는 그 자신의 의사가 곧 일반인의 의사라고 생각하는 왜곡을 일으키게 된다. 비록 타인의 판단을 고려할 때에도 그 타인이 갖는 사실력의 정도가 고려의 비중을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곧잘 여자나 어린이, 노예, 외국인 등의 의사는 무시된다. 또 고려범위는 통상 모든 생명체로 확대되지 못하고, 인간 그것도 동류의식을 갖는 집단 정도만을 고려대상으로 삼게 된다. 또 판단시 미래나 과거의 좋음보다 현재 및 가까운 기간의 좋음에만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그리고 매순간 좋음의 느낌을 일일이 경험한 뒤 이를 종합해 판단한다기보다는 일정한 좋고 나쁨의 고정관념을 기초로 해서 추리를 행한다. 그 결과 사실은 어림짐작하여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 보통이 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행해지는 가치판단의 내용은 앞에서 제시한 이론적인 모형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다만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고, 또 비교적 각 주체의 사실력의 정도나 관계가 서로 평등해지거나, 또는 모든 생명이 다 같이 좋고 나쁨을 느끼는 생명주체라는 공통성을 인식하고 또 그런 바탕에서 타 생명의 좋음을 존중해주려 노력하고, 더 나아가 서로가 타 주체의 입장을 서로 바꿔 헤아려 보려는 노력이 행해지고, 서로의 견해를 존중하려는 입장이 강해져가면, 그런 바탕에서 행해지는 가치판단의 내용은 점점 앞의 이론적인 모형에 가까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순수한 이론적인 모형에 서서 각종 상태에 대한 비교를 행한다면, 그 결과 가장 나은 최상의 상태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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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행복의 객관적 주관적 조건

앞에서는 선 - 행복의 우선 순위를 보았다. 그런데 결국 선의 개념은 각 주체의 행복으로 분해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행복을 얻는가 못 얻는가가 최상의 판단에 중요하다. 따라서 행복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특히 객관적 상태와 주관적 마음상태가 어떤 관계로 화합할 때 행복이 얻어지게 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행복은 단순히 어떤 외부 현실 상태나 자신의 신체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만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행복은 외부 현실상태 및 자신의 신체상태 [이상을 객관상태라고 하자] 그리고 마음상태[이를 주관상태라고 하자]가 함께 관계 화합하여 얻게 된다.

행복이 이들 요소들을 기초로 어떤 관계에서 얻어지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일반적으로 좋은 느낌을 갖게 될 현실 상황에 어떤 이가 놓여 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아늑한 침대[외부환경]에 건강한 신체상태[주체]로 누워 있다고 하자. 만일 좋음이 이런 객관상태만으로 얻어지게 되는 것이라면 모든 주체가 이런 상황에 놓이기만 하면 다 좋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어떤 이의 마음상태가 화가 나있거나, 다른 실현 곤란한 희망을 갖고 있다거나 또는 이미 성취된 현실 상태로부터 심한 무료감을 느끼고 있는 등과 같이 일정한 경우에는, 이런 상황에서도 좋음의 느낌을 갖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일반적으로 나쁜 느낌을 갖게 될 상황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무덥고 눅눅하며 습기찬 움막[외부환경]에 병든 신체[주체]로 누워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모든 이가 다 똑같이 나쁜 느낌 불쾌감 등만을 얻는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어떤 이의 마음상태가 현실에 감사하려는 마음에 차있거나, 다른 걱정이나 두려움 등을 막 없애고 장차 희망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믿음에 가득 차 있는 일정한 경우에는 결국 좋음의 느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예에서 마음상태가 행복에 중요한 기능을 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행복을 얻는 데는 이제 마음상태만이 중요하며 객관적 현실 상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쉽다. 과연 그러한가를 살펴보자.

우선 일정한 마음상태는 일정한 객관적 상황과 신체조건을 당연한 필수조건으로 하여 얻어진다. 따라서 이런 이유에서라도 좋고 나쁨을 얻는데 객관적 상황 및 신체조건이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어떤 객관적 상황 및 신체조건이 전혀 갖춰지지 않는 데 어떤 특정한 마음상태만 홀로 있을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객관적 상황이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경우를 또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마음상태는 일정하게 유지해도, 주위환경이나 신체조건이 바뀌면 다시 좋고 나쁜 느낌이 변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객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좋고 나쁨을 얻는 것이 달라진다고 봐야 한다.

모든 주어지는 상태에 감사하려 하고, 만족을 느끼려 하며, 선한 희망을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굳게 믿는 마음태도가 행복에 중요함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오직 이것만으로 행복이 얻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우선 위와 같은 마음 상태를 갖고 있는 이가 예를 들어 전혀 식사를 할 수 없고 아무런 옷도 없이 몹시 추운 극한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태에서는 계속 굶주림과 추위 등이 주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결과 이런 상태에서 좋음의 느낌을 계속 얻는 것은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리고 만일 이런 상황을 변경시키려 노력하지 않고 그대로 오래 머무르게 되면 결국 질병이나 죽음을 맞이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극단적으로 고집하면 이런 극한 상황에 있더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마음상태만은 좋은 느낌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상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건전한 행복의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일반적인 상황을 놓고 보면 이런 극한 상황에 몰려서는 대부분 평정심(平靜心)을 잃고 불쾌와 고통을 겪게 된다고 봐야 한다.

한편 반대로 마음상태가 욕구 불만에 차있고 화가 나있는 경우라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에도 그 자신이 원하는 상태들이 하나둘씩 실현돼 가면 마음이 만족스러워지고 화가 풀리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객관적 상황과 신체조건은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를 통해 외부환경과 주체의 객관적 현실상태 그리고 마음상태는 어떤 하나만이 행복을 단독으로 얻게 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들은 서로 관계하여 행복의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불행한 상태에 있을 때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앞의 두 요소의 변경에서 찾아야 한다.

결국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한 방면의 노력만으로 곤란하다. 객관적 현실 상태와 함께 주관적 마음상태 양 측면을 함께 원만하게 변경시켜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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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행복, 선(善), 뜻의 실현의 상호관계

++ 업데이트 2008년-1-18일 오후 5:49 +

++ 업데이트 2008년-1-22일 오후 6:59 +

여기서는 1차적으로 어떤 주체의 행복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 어떤 뜻에 일치하는 객관 상태가 실현되어도 ‘좋음’이 얻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실 어떤 뜻에 맞는 상태가 성취되면 그 부분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뜻의 성취상태가 곧 행복과 동일시되지 않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우선 어떤 상태가 실현되었는데 그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원하던 집을 장만했는데, 새집에 하수도가 막히거나, 난방시설이 고장나거나 하여 불편하게 되는 경우와 같다.

또 실현된 상태에 집착하다 보면 이미 이룬 상태가 언젠가 사라지지 않을까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또 어떤 상태가 막상 실현되면 이후에는 그전까지 희망을 그려가던 때와 달리 허무감을 느끼거나, 의욕이 사라지고 권태를 느낄 수도 있게 된다. 또 어떤 상태가 실현되어도 또 다른 희망들이 다시 생겨나 불만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집을 장만했는 데 이제는 좋은 자동차를 갖고 싶다고 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상태가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외부상태가 거의 극한적으로 충족되어진 상태를 상상해보자. 예를 들어 광대한 땅을 차지한 황제가 된다고 생각해보자. 이제 이로써 행복이 완전하게 얻어진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아무리 이런 상태라도 다시 더 큰 욕망을 품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외부적 조건의 충족이 제한되는 것과는 달리, 정신세계에서 욕망은 거의 제한 없이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한한 욕망에 비교하면 아무리 극한에 가깝게 성취시킨 상태라도 늘 작게 느껴지는 법이다. 득롱망촉(得隴望蜀)이란 고사는 이런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중국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는 한나라의 왕족이긴 하였으나, 한나라가 신(新)에 의해 멸망한 때, 그는 일개 평민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후에 뤄양[洛陽]에서 한왕조(漢王朝)를 재건하여 왕이 된다.[AD 25] 그리고 유수는 당시 각지에 할거하고 있던 세력들을 하나씩 모두 정벌하여 중국대륙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고 아직 농서와 촉만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농서 지방을 얻게 된다. 이 때 유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람은 만족할 줄 몰라 이미 농서를 평정했는데 다시 촉을 바라게 되는구나. 군사를 출동시킬 때마다 그로 인해 머리가 희어진다(人固不知足 旣平隴復望蜀 每一發兵 頭髮爲白)”

사실 일개 평민의 지위에서 왕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 그리고 왕이 돼서도 그토록 갈망하던 농서땅을 다시 차지하니 또한 만족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유수가 스스로 한탄하며 말하듯,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르고 또 다시 차지하지 못한 촉 땅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의 욕망은 무한해서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해도 욕망은 끝이 없어, 이를 다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결국 아무리 많은 뜻을 실현해도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끝없이 불러 일으켜 번뇌를 만들 수 있고, 또 한편 이루어진 상태가 언제 무너질까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불안해할 수 있다. 또 뜻이 이뤄진 후 욕망의 실현에 허무감을 느끼고 이젠 의욕이 사라져 권태를 느낄 수도 있고 또 보다 큰 욕망이 언제든지 나타나 이로 인해 불만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실현된 상태에 만족이나 감사를 느낄 줄 모르고, 번뇌, 걱정이나 두려움, 권태, 불만 등에 싸여 있게 되면, 이런 마음상태를 가진 이에게는 어떤 외부적 조건의 실현도 행복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태가 실현된다고 하여 곧 행복이 얻어진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반면 어떤 객관 상태가 성취되지 않더라도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비록 희망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감사해하고, 희망을 그려가며 즐거워하며, 그 희망의 실현 과정자체에서 즐거워하며 또 한편 그 실현을 굳게 믿는 경우 등이다.

이런 두 경우에서 만일 한 주체만을 놓고 보면 ‘어떤 객관 상태가 성취되지 않더라도 행복을 얻는 상태’가 더 낫다고 해야 한다. 왜냐 하면 어떤 객관 상태를 추구한 것은 본래 행복을 얻기 위함이었고 행복이 얻어지지 않는 상태의 실현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어 한 주체의 입장에서는 칭기즈칸처럼 온 세계를 정복하고 온갖 재화를 다 소유하고, 또 장수한다 하더라도 만일 그 상태에서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허름한 집에서 병든 몸으로 짧게 살다 죽더라도 정신적으로 행복하게 살다가는 상태가 더 낫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어떤 객관 상태를 단순히 성취함을 최상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또 있다. 생각해보면 어떤 상태는 그것을 성취시키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 술이나 도박 마약 등과 같이 일시적으로는 즐겁지만 장기적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가 그 하나다. 또 다른 생명을 해치거나 괴롭히는 등으로 악한 상태를 실현하는 경우가 또 다른 하나다. 이처럼 어떤 상태나 그 실현과정에서 장기적으로 행복을 감소시키게 되거나, 다수 주체가 장기간 많은 손해와 불쾌를 얻게 되는 경우에는 그것을 성취하지 않는 상태가 더 낫다고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에서 행복이 어떤 단순한 객관상태의 실현보다 더 나음을 보았다. 그런데 어떤 뜻의 실현으로 장기적으로 행복이 감소되면, 원래 상태를 실현하여 추구한 본 목적에 위반된다.

또한 앞에서 선(善)은, 자신을 포함하여 가장 다수의 주체에게 가장 많고 가장 오랜 기간의 행복을 주는 상태, 그리고 타 주체가 선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게 하는 상태, 그리고 이런 상태를 남도 좋고 나도 좋은 방법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결국 선은 행복이란 요소가 주체면에서 그리고 질(質), 양(量) 기간(期間)적인 면에서 겹쳐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행복이 단순한 객관상태의 실현보다 낫다고 보았다. 그런데 선은 그런 행복이 중첩된 상태이므로 당연히 선은 단순히 뜻이 실현된 상태보다 나은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또 행복과 선과의 관계에서는 같은 이유로 선이 행복보다는 높은 가치를 갖는다고 해야 한다. 물론 이런 결론은 자신의 개인적 행복과 사회적 선이 충돌할 때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도 갖는다. 왜냐 하면 순수히 개인적인 입장에서만 보면 자신의 행복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장 최대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하게 판단하면, 한 개인을 넘어 다수 주체의 높고 많은 장기간의 행복을 실현하는 선이 더 가치를 갖는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행복과 어떤 뜻의 객관적 성취 사이에서는 어떤 것이 상위의 가치를 갖는다고 할 것인가?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순수하게 주관적인 면만 기준으로 한다면, 앞에서 본 이유로 행복의 성취를 더 상위에 놓아야 한다. 그런데 다수 주체와 관련되는 객관적인 면을 기준으로 할 때는 이렇게 단순하게만 평가를 할 수 없다. 어떤 객관적 상태는 또 다른 주체들의 행복과 관련되고 다시 이를 기초로 선의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선(善)이 행복 보다 우선한다고 한다면, 어떤 상태의 실현이 선의 실현과 관련되면, 그로 인해 객관적 상태의 실현은 행복에 우선하게 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상태가 선의 문제와 관련되지 않고 한 주체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오로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가치 밖에 갖지 못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행복이 더 우선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선과 행복의 관계 그리고 어떤 상태의 실현이 이들과 갖는 관련성을 함께 고려해야 해결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런 이유로 선 - (선한) 상태의 객관적 실현 - 행복 - [단순한 상태의 실현]의 순으로 우선 순위를 제시하기로 한다.

그런데 사실 어떤 뜻의 객관적 실현이 선한 경우에는, 선과 (선한) 상태의 실현이 선을 두 번 중복해 나열하는 면이 있다. 선은 이미 선한 뜻의 실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그래서 선(善)과 ‘선한 상태의 실현’이 어떻게 구별되는가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선의 본래 의미는 선한 뜻을 가져 선한 상태의 실현함을 함께 의미한다. 따라서 선- 상태의 실현의 순서로 나열하는 것은 앞에서 보듯 일부 의미가 중복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원래 처음에 행복 또는 선의 실현상태와 어떤 객관적 상태의 단순한 실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가가 문제시되었다. 그래서 이런 문제의식에서 선 - 상태의 실현의 순위를 나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열에는 또 다른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도 함께 포함시켜 순서가 배열된 것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우선 선한 뜻이 실현되어지는 상태를 자세히 보면 다양한 경우를 예상할 수 있다. 처음부터 선한 뜻을 갖고 그 뜻을 그대로 실현하여 성취‘하는’ 상태가 있다. 물론 이런 상태를 가장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선(한 뜻) + (그 선한 뜻에 맞는) 상태의 실현 ]

그런데 선이 성취‘되어지는’ 상태에는 또 다른 경우들도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을 의식함이 없이, 또는 반대로 악을 추구하려고 하는 가운데 어떤 상태를 뜻대로 실현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객관적으로는 선한 상태로 평가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물건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편의를 주게 되는 경우, 또는 남의 물건을 훔쳤는데, 그것을 안 훔쳤으면 사회적으로 더 나쁜 결과가 발생했을 경우 등과 같다. 그런데 이렇게 발생한 그 객관적 상태는 그 행위자의 원래 의식과 별개로 선한 상태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한편 또 선한 뜻을 갖던 나쁜 뜻을 갖던 원래의 의도와 달리 어떤 상태가 실현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예를 들어 물건을 주으려 했는데 뜻과 달리 떨어져 깨진다거나 하는 경우다. 그런데 이처럼 처음 의도와 달리 실현된 어떤 상태가 결과적으로 선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도 앞의 경우처럼 그 결과만 보면 선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선한 의식없이, 또는 의도와 달리 상태가 실현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선한 객관적 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다. [선한 뜻이 없거나, 악한 뜻을 갖는 경우 또는 원래의 선한 뜻과 다른 내용으로 (선한) 상태의 실현 ] 그런데 이런 경우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선하여 다수 주체에게 많은 장기간의 행복을 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단순한 행복보다는 우위에 넣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선한 상태가 실현되는 경우 등은 일단 앞의 경우 즉 처음부터 선한 뜻을 갖고 그것을 실현시킨 경우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별도로 ‘상태의 실현’을 선의 뒤에 다시 나열할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한편 선- 상태의 실현은 선한 의사와 결과간의 우위도 나타내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다. 뜻은 선하지만 선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한편 뜻은 선하지 않지만 선한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들 사이에 그 우열이 다시 문제된다. 나타난 객관적 결과만 중시하면 결과의 선함을 더 중시할 수 있다. 그러나 목표의 선택과정을 고려하면, 의식의 내용을 먼저 중요시해야 한다. 그래서 의도와 다르게 또는 실수를 통해 선이 실현되는 경우를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하기가 곤란하다. 의도와 달리 또는 실수로 결과가 나타나도 결과가 선하면 되니까 마음에서는 악을 추구해도 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선택과정에서 이런 실수를 미리 고려하여 최상의 선택행위를 하라고 할 수도 없다. 예상치 못한 결과나 실수를 통해 선이 실현되도록 선택 추구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선한 뜻을 갖는 것이 최상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선- 상태의 실현의 순위는 선한 뜻이 객관적 상태보다 더 우위를 갖는 의미를 나타내는 기능도 하는 것으로 한다.

한편 선한 뜻을 갖더라도 늘 뜻과 일치하여 선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선- 상태의 실현’의 나열은 선한 뜻을 갖는 것이 가장 우선이고, 그 다음 그 상태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별도의 의미도 갖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선한 뜻이 뜻과 같이 실현되고, 실수로 또는 의도와 달리 악한 결과를 낳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지혜를 더 발휘하는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지혜를 다음 덕목으로 다시 나열한다. [선- 상태의 실현 - 지혜]

한편 여기서 상태의 실현 안에는 비록 의도된 경우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선이 실현되는 경우를 포함시켜 이해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단순한 지혜나 단순한 행복보다는 우위에 있음을 그 배열이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물론 이런 각기 다른 차원의 의미를 보다 자세하게 분별하여 나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선한 뜻의 실현 - 선한 의사 (선하지 않고 악하지 않은 결과) - ( 선하지 않고 악하지 않은 의사) 선한 결과 - 선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혜 - 단순한 행복 - 선한 의사 (악한 결과), (악한 의사)선한 결과 - 선악에 해당하지 않는 단순히 뜻에 일치한 상태의 실현 - 의도와 다른 단순한 상태의 실현 - 악한 의사로 악한 결과 실현 - 등으로 나열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각 선악의 크기 정도나 행위과정의 선악 등까지 포함하여 더 세세하게 분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번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앞에서 나열한 의미를 단순히 함께 아울러 표현하는 방법으로 선- 상태의 실현 - 지혜 - 행복의 순으로 간단히 우위를 표현해 나열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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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다음의 전체적인 글의 일부입니다.
無名 著, <가칭><<최상의 행복 총론>>, 목차

이 글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교정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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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상의 상태의 판단과정

그런데 이 같은 상태가 왜 최상의 상태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먼저 일어날 수 있다. 어떤 것이 현실에서 추구할 최상의 상태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다양한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이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앞에서 내린 결론이 타당함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희망의 종류

우선 사람들은 제 각기 다양한 상태를 원한다. 이런 희망들은 가지가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은 그 희망의 대상과 내용을 기준으로 유형화하여 다음과 같이 묶어 나열할 수 있다. 즉 그것들은 건강(健康), 시간(時間, 장수), 쾌락(快樂), 지혜(智慧), 지식(知識), 아름다움[美], 인격(人格), 힘[活力], 직업(職業), 물질적부(物質的富), 명예(名譽), 원만한 인간관계(人間關係), 사랑[愛], 결혼(結婚), 자손(子孫), 권력(權力), 자유(自由), 타 생명에 대한 가지가지의 희망(希望), 사회에 대한 가지가지의 희망, 일반 자연현상에 대한 가지가지의 희망 등으로 묶어 볼 수 있다.

---주

사람들이 희망하는 바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유형화할 수 있다. 앞에 나열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배열한 것이다. 먼저 자신의 신체와 기초조건과 관련해서는 건강과 시간 [및 공간]을 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상태에 대해서는 즐거움과 지혜, 지식을 갖추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와 마음으로 구성된 자신의 종합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아름다움, 인격, 직업 등을 원한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물질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부를 원한다. 또 주위의 사람들과 자신의 관계에서는 명예, 원만한 인간관계, 사랑, 결혼, 가정, 권력, 자유 등을 원한다. 한편 자신 이외의 다른 타인, 타 생명, 사회, 물질현상 등에 순수하게 갖는 희망들을 다시 나열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다양한 형태는 다음과 같은 희망들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활동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기를, 또는 주어진 시간을 가치 있게 늘려 사용하기를, 또는 건전한 취미 오락 등을 통해 생활에서 즐거움을 맛보기를, 또는 삶과 세계를 이해하고 올바른 삶의 방향을 판단할 수 있는 적절한 지혜와 지식을 갖추기를, 또는 자신과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얻기를, 또는 올바르고 선한 인격을 갖추기를, 또는 매일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또는 생활필수품과 함께 자신의 선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적절한 물질적 부를 갖추기를, 또는 스스로 및 타인으로부터 존중받는 명예를 갖추기를, 또는 다른 이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루기를, 또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로부터 사랑을 받아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관계를 이루기를, 또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랑하는 자녀를 낳아 그들이 올바르고 선한 행복을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양육해나갈 수 있기를, 또는 자신의 권익을 침해받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의 선한 희망을 실현시킬 권력을 갖기를, 또는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이나 외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기를,...바란다. 그 외에도 타인, 타 생명 및 사회 그리고 일반 자연현상들을 향해 이들이 각기 자신이 원하는 일정한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내일 비가 왔으면, 하는 희망과 같은 것들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한 둘의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 물론 이 모두를 골고루 다 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런 각각의 희망에서 어느 특정한 것에 대해 그 최대한의 상태를 실현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은 특별히 건강이 뛰어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선수가 되기를 희망하거나... 또는 어떤 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또는 어떤 이는 모든 생명이 올바르고 선한 행복을 얻고 또 그렇게 모든 생명이 살아가게 되는 이상사회를 만들기를 원하는 등으로 다 다를 수 있다. 물론 희망은 끝이 없으므로 각 분야의 극한을 모두 모아 추구하는 상태도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이 가운데 실제 어떤 구체적인 상태를 선택하고 추구하느냐는 각각의 구체적인 상황과 능력 소질 적성 등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이처럼 다양한 상태 가운데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또 무엇을 추구하며 또 그것을 어떻게 실천시켜나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하나의 상태는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만과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희망이 생기면, 단순히 그 희망이 이뤄진 상태와 그 정도를 기준으로 최상을 판단하기 쉽다. 예를 들어 자신이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가장 많은 부를 가진 상태를 최상의 상태라고 하고, 그 다음 가진 부의 양에 따라 순위를 정하고,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상태는 최하의 상태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최상의 상태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단지 어떤 목표를 극대로 실현시키면 되고 또 그렇게 하는 방법만 찾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최상을 판단함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우선 어떤 상태든지 단순히 이를 실현시키는 것이 언제나 낫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애써 어떤 객관 상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 주체의 입장에서는 1차적으로 그 상태가 자신에게 좋음, 행복 등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현되면 자신이 행복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를 추구하는 것이다. 또 한편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추구한 상태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여러 주체가 그로부터 얼마만한 기간 동안 좋음을 느끼는가 여부로 사회적인 평가가 뒤따르게 된다. 즉 최종적으로 그 뜻이 선한가 악한가가 최종적으로 문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어떤 상태를 실현했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어 그는 원하는 대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부자가 되어 보니 그 자신이 행복하지도 않고 또 그가 부자가 되는 과정과 그 이후의 과정에서 오히려 많은 불쾌와 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또 그가 부을 얻은 방법과 그 부를 유지하는 태도는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피해를 주게 되는 악한 상태라고 하자. 이렇다면, 이런 상태를 부자가 되지 못하지만, 행복하고 선한 경우에 비교해 더 낫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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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데이트 2008 02 20+

++ 업데이트 2008 02 28+

++ 업데이트 2008 03 01+


6. 최상의 요소에 대한 다른 기준들

앞에서는 선-실현-지혜-행복을 가지고 최상을 판단하였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최상을 판단하는 입장들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런 다양한 입장들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가. 선과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적 요소들

건강, 시간, 즐거움, 지혜, 지식, 아름다움, 인격, 직업, 물질적 부, 명예, 인간관계, 사랑, 결혼, 권력, 자유 ...등등의 요소는 앞에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들로 제시하였다. 다만 이렇게 제시한 수단들을 선과 행복보다 최상의 요소로 보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선과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적 요소들은 선과 행복보다 더 상위개념이 될 수 없다. 이들이 아무리 많이 실현되어도 최종적으로 선과 행복을 주지 못하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이런 수단들의 가치는 그것이 선한 행복에 얼마나 이바지 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아 평가해야 한다. 결국 이런 수단 요소들은 선과 행복의 측면에서 하위의 수단적 요소들이다. 따라서 여러 형태의 선과 행복 사이에서 우열을 측정하는데에도 다시 이들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음도 이미 보았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살폈다. 따라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나. 다른 기준들

앞에서는 최상의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선한 뜻-그 뜻의 실현-진리-행복만을 들었다. 그런데 가치를 판단하는 데는 다른 기준들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완전성, 자아실현, 신의 뜻, 신의 구원, 시간적 영원성, 열반, 해탈, 등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는 최상의 상태를 정할 수는 없는가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선 이들 가운데 몇몇은 앞의 개념에 일부 포함되는 내용이다. 또 이들은 어느 정도 그 뜻이 모호하다. 또 이들을 최상의 상태의 요소에 넣는 데 곤란한 사정이 있다. 이런 사정을 다음에서 살피기로 한다.


1) 완전성

보통 어떤 기준을 놓고 이를 전부 충족시키면 완전하다고 말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지식과 능력을 많이 갖추어야 함을 기준으로 놓고 완전을 요구하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해야 완전한 것이 된다. 또 어떤 곳이던지 존재해야만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면 편재성(遍在性)을 완전성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밖에도 무엇을 완전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그 기준은 다양하게 정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완전 불완전을 서로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게 된다. 예를 들어 100 미터에 딱 맞는 것을 요구하면, 그렇게 일치하는 것이 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는 10 미터보다 작은 것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불완전한 것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한편 어떤 조건이든지 다 응할 수 있는 상태가 돼야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야만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완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완전 불완전을 판단할 기준 자체를 미리 정하지 않고 논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는 그 기준 개념 자체가 모호한 경우도 있다. 또 기준이 어떤 절대값을 정할 수 없는 무한개념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최대로 큰 수를 완전한 수라고 정하는 경우와 같다. 산수에서 어떤 큰 수를 생각하더라도 다시 이에 더하기 1이나 곱하기 2 등은 늘 가능하다. 또 최소로 작은 수를 원해도 같다. 음수를 생각하면 빼기 1은 항상 가능하며, 양수에서는 나누기 2 등은 무한히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랜 수명, 가장 많은 돈, 가장 많은 권력, 가장 많은 영토 등과 같은 것을 완전함의 조건으로 세울 때에 이런 현상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완전함을 찾으려면 무한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일단 어떤 기준을 놓고서 이를 충족시키는 것을 완전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완전이 최상의 상태라는 것이 된다. 만일 완전의 조건이 선한 행복의 실현일 때는 완전과 선한 행복은 같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의 기준이 다른 조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장 건강하게 오래사는 것, 또는 가장 많은 부를 쌓는 것을 완전함의 조건이라고 내세울 수도 있다. 이처럼 각기 다른 기준에서 완전함을 정할 때, 그런 완전함과 선한 행복과는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인가?

우선 어떤 완전함의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렇지만, 그런 상태가 선하지도 않고 또 행복하지도 않다고 하자. 또 다른 경우로, 어떤 조건을 다 충족하지 못하여 불완전하다고 하자. 그렇지만, 그런 상태가 선하고 행복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두 경우에서 어떤 것이 나은가. 이를 생각해보면 행복과 선한 입장이 더 상위에 있다고 할 것이다. 개별주체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고 나아가 가능한 많은 주체에게 가능한 오랜 기간 행복을 가져다 주는 선이 아닐 때는 어떤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자아실현

자아실현을 삶의 목표나 교욱이나 도덕의 궁극목적, 윤리의 핵심요소로 제시하는 입장들이 있다. 여기서 자아실현[自我實現, self-realization]이란, 하나의 가능성으로 잠재된 자아(自我)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이 자아실현을 위한 자아의 잠재적 가능성의 실현과정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합리성으로 보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발휘함으로써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교 관념주의자들 가운데는 자아실현을 신의 의지가 구현(具現)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개체의 목적과 본질을 중시하는 교육사상가들은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참고: 두산백과사전]

여기서 자아(自我)란 곧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아의 실현이란, 자신의 본질,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실현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런 자아의 본질과 가능성 잠재력의 구체적 내용을 각 개인마다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모호하다. 물론 무엇이든 결과가 나타나면 그것은 자아의 잠재적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상 어떤 결과가 나타날 때 어떤 것은 자아가 실현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은 그 실현이 방해되어 나타나지 못한 상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각기 그런 것인지를 판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본질의 내용이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미리 무엇을 자아의 본질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키가 100 센티미터이고 운동을 잘하는 한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가 현재 키가 그러한 것은 자아의 본질이 실현된 결과인가? 아니면 더 클 수 있는데 영양부족 등으로 방해된 결과인가? 그 외에 또 어떤 내용들이 자아의 본질적 내용이며 또 어떤 것은 아닌가? 이런 내용을 미리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한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의 미래에 실현되야 할 자아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실 애매하다. 100억을 벌어 부자가 될 가능성이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또는 현재 가난한 상태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자아의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자아의 본질이란 개념은 모호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내용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가 어려운 것이다.

자아의 잠재력, 가능성, 본질 이런 것 등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뭐라고 제시하든 명확히 입증할 근거도 없고 또 반박할 근거도 없다. 무엇이든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보면 없는 그런 애매함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이는 모든 내용을 다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일정한 명칭이나 슬로건(slogan)으로서는 그럴 듯하다. 그러나 실제 그 구체적인 내용은 극히 모호하게 된다.

자아의 본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는 애매하기 때문에, 단순히 자신이 희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려 하기 쉽다. 왜냐 하면 자신이 자신에 대해 갖는 희망이 곧 자신의 본질이라고 믿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갖는 희망은 자아실현과는 조금 다르다. 왜냐 하면 반드시 자신의 본질내용만을 희망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질은 여러 면에서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이런 제한을 넘어 무한히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희망은 자신에 국한되지 않고 외부나 자연현상에 대해 가질 수도 있다. 여하튼 그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희망은 그것이 본질에 대한 것이든 아니든 모두 희망의 한 형태에 넣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이미 앞에서 ‘희망의 실현’이라는 항목에 넣었다. 따라서 굳이 이를 최상의 기준에 별도로 넣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편 자아실현이 되었더라도 여전히 행복한가, 선한가 등의 판단은 별도로 행할 수 있다. 물론 자아의 본질은 오직 선한 행복이어야 한다고 제한하면, 자아실현과 선한 행복은 동의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한 개인의 자아의 본질이 오로지 선한 행복으로만 구성된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자아의 본질에는 어떤 악도 포함될 수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자아의 실현을 통한 궁극의 목적을 행복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악한 행복도 포함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떤 악한 행복이 실현된 경우, 이 역시 자아실현이 된 것이기 때문에 허용해야 할 것인가도 문제된다.

다음에는 자아의 실현과 선한 행복 가운데 무엇이 더 가치있고 우선돼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앞에서도 자신의 본질의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내용이 무엇이든 어떤 내용을 자아의 본질이라고 정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제 그것이 실현된 상태에서 행복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은 상태가 있다고 하자. 반대로 그런 자신의 본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행복하고 선하기도 하다고 하자. 이 두 경우를 비교하여 보면, 여전히 뒤의 경우가 낫다. 어떤 본질이 본질로서 실현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일시적 성질이나 거짓된 성질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의미 밖에는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개별주체들에게 행복을, 더 나아가 가능한 많은 주체에게 가능한 많은 기간 행복을 가져다 주는 선한 상태가 아니면 어떤 것이 본질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과 행복을 우선시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3) 신의 뜻 구원

한편 신(神)을 믿는 입장에서는 신을 믿고 사랑하고 찬양하며 신의 명령[戒律]을 따르고 복종하고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은혜로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과 행복을 얻는 것 등을 최상의 목표로 하게 된다.

신을 전제로 한 종교에서는 구체적인 신의 형태, 수(數), 중간의 구제자나 예언자, 구제원리, 세계관, 신의 계율 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시하는가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종교가 성립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영향력이 큰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이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종교 안에는 세세한 교리의 차이로 매우 많은 분파가 있다. 또 현실에서는 이외에도 어떤 초월자를 내세우는 매우 다양한 종교 형태가 생겨날 수 있다.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 종교에서는 다음의 여러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 그런 신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생활하는가? 또 그런 신의 존재여부는 인간이 어떻게 증명하고 확인할 수 있는가. 신의 뜻은 어떻게 인간이 정확히 알 수 있는가. 신의 명령 계율 등은 과연 정말 신의 뜻이며 또 과연 선(善)과 일치하는가? 신의 계율은 인간이 만든 것은 혹 아닌가? 각 종교가 제시하는 세계관은 정말 진리인가. 예를 들어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그런 능력들을 갖는가. 세계의 창조이전에 신은 홀로 존재했는가, 신은 다른 창조자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었는가. 신은 또 다른 존재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었다면 인간은 왜 반드시 창조주가 있어야 존재하게 되었는가? 신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면 인간이 악하게 되는 것을 미리 알 수도 있고 또 미리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신은 인간을 악하게 방임하거나, 또는 창조해 놓고, 그 책임이나 과오를 신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 인간에게 묻는가. 그리고 왜 인간을 처벌하거나 구원하는가, 신이 전지전능하지는 않다면, 위 질문은 피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신은 정말 단지 인간보다 조금 우월할 뿐 전지전능하지는 못한 것인가? 그러나 단지 우월할 뿐이라면, 더 우월한 신은 없는가? 또 그가 단지 우월한 뿐이라면 그의 신적 능력도 함께 의심받아야 하지 않는가? ... 등등으로 신을 전제로 한 종교관에는 많은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여기에는 많은 종교마다 각각의 해석과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서 그 옳고 그름의 문제는 경험적인 검증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많은 주장이나 명제가 현실에서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참으로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경험되지 않는다고 하여 반드시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종교적 주장[命題]들은 대부분 이런 성격을 갖는다. 때문에, 종교는 참거짓이 검증되는 과학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믿음[信仰]의 영역에 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각 개인에게는 그런 명제들을 믿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로 될 뿐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신을 전제로 한 종교는 대부분 신을 인간보다 능력이 우월한 존재로 제시한다. 또 인간은 이런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 복종 찬양 등을 통하여 그 신으로부터 구원이나 보답을 받는 구조라는 점에서는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신은 앞에서 보듯 그 존재를 보통의 인간이 직접 경험하여 검증할 수는 없다. 이러한 신의 존재를 개인이 믿고 받아들이는 계기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을 어떤 인과관계에 의한 현상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초월적 존재인 신(神)에 의한 것이라 믿기도 한다. 또 개인에 따라서는 신의 예지(叡智)나 계시(啓示)를 직접 들었다거나, 개인적인 초월적 경험을 통해 신의 존재를 확인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박한 위험이나 질병 등에 당면할 때 이를 해결해줄 초월적인 존재를 찾고 의지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위험 등을 여하튼 극복하게 되었을 때 신에 의존했던 이들은 그것을 신의 도움이라고 믿기도 한다. 불치의 질병이 신에 기도한 후 나았다던지 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그 개인은 이를 확신해도 객관적으로 다른 이들이 이를 검증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일들에 관련된 것으로 믿는 어떤 존재를 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契機)는 그 존재가 자신보다 매우 우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다. 자신보다 뒤떨어진 능력을 갖는 존재를 자신이 믿고 복종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신이 갖춰야 할 1차적 특성은 일단 매우 뛰어난 힘 또는 지혜, 능력 등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자신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진 어떤 존재를 모두 믿고 따르기는 어렵다. 우월한 능력을 갖지만 사악한 존재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도 우월하기에 신이라고 한다면 신을 다시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선신만을 신(神)이라고 하고 우월한 악한 존재는 악마(惡魔)라고 구분해야 할 것이다. 신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든 일단 선한 우월적 존재와 악한 우월적 존재를 구분할 필요는 있다. 마치 어린이가 볼 때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은 많지만 이들 가운데는 경찰도 있고 깡패도 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는 선신과 악신으로 개념을 구분하기로 하자.

그래서 만일 우월한 존재에 선신과 악신의 구분이 있다면 자신이 어떤 우월한 존재의 도움을 받거나 만나게 되었더라도, 무조건 이를 따르려하기 전에 그 존재가 선한가 악한가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살핀 선악의 구분원리는 여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떤 힘과 지혜를 통해 가능한 다수의 생명이 가능한 오랜 기간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한다면 그는 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선하지 않은 것이다. 각 생명은 행복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런 선악판단에 다 함께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어떤 존재가 초월적 힘과 지혜를 갖지만, 그 힘과 지혜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그로 인해 다른 생명들이 모두 고통과 괴로움을 받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힘이 우월할 뿐 악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악신이 비록 능력이 우월해도 이에 복종하거나, 추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월한 존재를 의식할 때 이런 선악 판단을 하지 않거나 자신이 우월자에 비해 열등하므로 우월자의 선악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다고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저 자신보다 우월하기만 하면 그가 범죄인이거나, 경찰이거나 그저 믿고 따르려 하는 어린이와 같은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게 된다.

한편 일반적으로 신은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를 추종하면, 그에 따라 보답을 하고 구원을 준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관계에 대해서도 선악의 원리에 따라 생각을 해봐야 한다. 각 주체는 어떤 우월자가 자신에게 불행을 주면 그를 선한 구원자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반대로 각 주체는 어떤 우월자가 자신에게 특별한 이익을 주기만 하면 선한 존재라고 믿게 되기 쉽다. 자신과 신만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좋은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자신과 다른 존재들의 이익이 충돌할 때 자신의 이익만 보장되면 그것이 곧 선이라고 믿는 것과 같이 잘못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모든 생명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가를 생각하여 선악의 구분을 행해야 한다. 어떤 상태가 자신에게 오랜 기간 행복을 주기만 하면 자신의 입장에서는 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악에 쉽게 동의하고 빠지기 쉽다. 따라서 어떤 구원이 최종적으로 가능한 많은 생명에게 또 가능한 오랜 기간 행복을 주는 선하고 정의로운 구원이 아니라면 이를 거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선과 자신의 개인의 행복이 충돌할 때, 선을 선택하고 자신의 행복을 거부해야 하는 원리와 같다.

또 한편 악신의 지혜와 능력이 자신보다 월등할 때, 그런 악신이 일시적으로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악신은 자신을 계략에 이용만하고 버리는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 또 잠시간 이익을 받지만, 그 결과 다시 오랫동안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은 이익을 받더라도 그것이 전체 생명의 입장에서는 악의 실현이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조직의 두목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면, 악한 두목은 그에 따라 보답을 하게 된다. 그것은 그 두목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악하다면, 그런 도움은 결국 그 악한 두목이 악을 펼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 이런 경우 악에 협조한 자신도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 우월한 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비록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우월적 존재가 있더라도 그 존재가 과연 선한가 악한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잘못하면, 어떤 어린이가 어떤 힘센 사람의 도움을 받고 따르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악행에 이용당하고 악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경우처럼 어리석은 것이 된다.

따라서 자신이 무조건 신에 충성하고 추종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선악과 관계없이 구원을 받는 관계라면, 일단 그 신의 선악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자신의 선악과 관계없이 보답을 받는 관계는 정의와 선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가능한 다수의 생명에게 가능한 오랜 기간 행복을 주는 선과 관련되지 않는데도, 오직 자신에 대한 추종 찬양 등의 이유만으로 보답을 하는 것은 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상의 논의에서, 어떤 우월적인 존재를 정말 확인하였는가. 또 그 존재가 선한가 악한가를 구별할 수 있는가, 또 선신이 자신을 구원해 주는 데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선에 합당한가 등을 검토해야 함을 보았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신의 존재 문제와 함께 개인이 경험으로는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믿음 여부에 돌아가는 것이다.

만일 이처럼 그 참 거짓이 불분명하여, 단지 믿음과 불신(不信)의 선택문제로 돌아갈 때 우리는 어떤 방식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인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 일단 그 명제들의 참거짓은 불분명하다. 따라서 그런 선신과 악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중간 영역에서부터 검토하자. 그래서 선신이 없다면 없을 때에도 후회하지 않을 가치로운 삶을 살아가고, 선신이 있다면 있을 때도 가치로운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신의 구원까지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이 비교적 현명한 방책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다음을 생각해보자.
일단 선신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선신에 의한 구원도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 자신은 자신의 행복이 중요하고 또 여러 형태의 행복 중에서는 선한 행복이 가장 최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만을 자신이 독자적으로 추구하였다고 하자. 이럴 때 자신은 이를 통해 최상을 추구했으므로 후회할 일은 없다고 해야 한다.

한편 선신이 존재하고, 선신에 의한 구원이 있으며, 또 자신이 믿는 대상이 바로 그 선신이라고 가정하자. 이 때 단순히 오직 그런 신의 은혜로운 구원만을 기다리며 신의 명령을 따르는 행위만을 할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에 덧붙여 자신의 능력 범위에서 직접 선한 행복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어떤 쪽이 더 나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연히 신의 구원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선신이 실현할 선한 행복을 자신도 직접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따라서 어느 경우나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이와 달리 신의 구원을 찾지 않고 오직 선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경우는 어떨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만일 우월적 존재가 선신이라면, 선신은 비록 자신을 찬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더라도 어떤 주체가 선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의 선한 행복을 방해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를 키워주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우월한 존재가 인간이 선한 행복을 추구하지만, 단지 자기를 믿고 따르지 않고 찬양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거나 박해를 가한다면, 그런 존재는 바로 그런 이유로 선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단순히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도, 그 우월적 존재가 선신인 이상 또한 함께 허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어떤 가정에서도 자신이 선한 행복을 추구하여 실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신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중간영역에서 판단한 경우다.

반면 신을 믿는 입장에서는 신을 믿고 따를 때 신이 존재하면 당연히 좋고,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큰 손해는 없기 때문에 어느 경우나 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좋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단순히 마음에서 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면 이 말이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떤 신을 믿는가에 따라 매일 참배나 일정한 의식을 한다거나, 또는 선하게 쓰이는지 악하게 쓰이는지 모르면서 일정 재산을 종교 단체에 내어야 한다든지, 또는 신에 제사나 희생(犧牲)을 바쳐야 한다는 경우 등이 있게 된다. 따라서 신을 믿고 안 믿고가 단순히 아무런 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실제 이런 식의 생각은 많은 미신이나 징크스(jinx)에 마음을 얽매이게 하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검은 신발은 신으면 사고가 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는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그 믿음이 정말이면 큰 손해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신발하나 검은색으로 신지 않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가 있다. 실제로 번거로운 편지를 똑같이 기재하여 다른 사람에게 7통씩 보내지 않으면, 불운이 따른다는 식의 편지를 받을 때도 사람들은 위와 같은 근거로 그것을 따르기 쉽다. 그러나 이미 삶의 과정에서 그런 잘못된 믿음을 고려하게 되고 이에 자신을 얽매이게 하며 그 결과 정작 중요한 것을 지나치게 되는 것이 이미 큰 손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참거짓이 불분명한데도 누군가에 의해 주장되면 그것을 존중하고 다 받아들여야 한다면 온갖 미신과 모든 종교의 신들을 다 존중해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선한 행복에 이바지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면, 이를 존중하고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며 무시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 자신에게 확고한 신념이 이미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때는 그 신념을 기초로 하되 다시 선의 원리가 그런 신념과 일치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우선 그 우월적 존재가 선신인 이상 그 계율이나 명령은 일반적인 선의 원리와도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선신이 요구하는 계율이나 명령이 악의 원리이면서 그 신이 선한 신일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신이 선신인 이상 신을 찬양 기도하고 계율을 따르며 신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은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도 조화되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신을 믿고 따르는 신념과 행위가 일반적인 선의 원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일단 다음을 주의해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자신이 믿는 신이 존재하는가 또 그 존재가 선한가 악한가는 헤아리기 힘들다. 그런데 자신은 자신이 믿는 신이 존재하며 그 신이 선신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선신을 믿고 따르는 방식이 많은 다른 생명의 행복을 오랜 기간 방해하고 해치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최소한 그 범위에서는 결국 그 신과 자신이 함께 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악이 허용되는 경우는 결과적으로 보다 더 큰 선이 오직 그런 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 경우 더 큰 선이 반드시 그런 악을 통해서만 가능한가에 대한 검토를 해야 한다. 즉 다른 선한 방식으로는 그 선이 실현될 수는 없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신의 모든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그 신이 선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존재가 선신인 근거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한다. 만일 이런 검토를 충분히 하지 않고 막연히 신의 뜻이라며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악신의 계략에 이용되는 경우이거나, 자신과 자신이 믿는 신이 모두 악한 경우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자기 생각만으로 악행을 하며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한편 더 나아가 자신이 어떤 악한 행위를 하던 그 우월적 존재만 믿고 충성하고 따르고 사랑하고 찬양하면, 그 신이 그런 조건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믿음이라면, 그런 믿음은 사실 선보다는 악에 가깝다. 악신이나 악마나 현실 속의 범죄조직의 두목이나 다 그와 같은 원리로 자신의 조직을 운영할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이런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국 악한 믿음을 갖고 행위하는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는 신의 존재와 신의 구원이 선한 행복 보다 최상의 가치기준이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미 보았듯 선한 행복은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최상의 원리가 된다. 또 어떤 우월적 존재가 있더라도 그를 믿고 따르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우월한 존재라서라기 보다는 그 존재가 선한 행복을 실현해주는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능력의 우월성보다는 선한 행복의 실천여부가 더 최상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우월적 존재가 선신인 이상,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를 마땅히 존중하고 보답을 해줄 것이다. 따라서 선한 행복은 어느 경우나 추구해야 할 최상의 기준이 된다. 더 나아가 선한 행복을 실현하는 것과 선신의 구원은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신을 믿게 된 경우 선한 신의 구원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선한 행복을 실현하는 길에 도움되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자신에게 일시 도움이 되더라도 결과적으로 선한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우월자의 구원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한다. 자신의 악한 뜻의 실현은 자신에게 잠시는 이롭겠지만 오래 이롭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악한 뜻에 대한 우월자의 도움 또한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어떤 우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 추종 찬양 등은 그것이 선한 행복의 실현과 관련되는 범위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최상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선한 행복의 실현이라고 해야 한다.


4) 영원성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쉽게 허물어지고, 변화한다는 데에서 허무감, 무상함, 아쉬움을 느낀다. 앞에서 본 선한 상태의 실현, 행복 등과 같은 것들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무언가 좋은 것이 영원하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대할 때 어떤 것이 영원히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영원(永遠)함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게 된다.

그런데 우선 영원한 것을 찾을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현실적으로 영원히 불변하고 고정된 존재는 찾기 힘들다. 그러나 일단 영원한 것이 있다고 전제하자. 그럴 때 그것이 단지 영원한 것이기에 이를 최상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한편 영원함을 최상의 상태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최상의 상태는 현실에서 찾기 힘들고 실현하기 힘든 목표가 된다. 물론 대신 가능한 오랜 기간 지속하는 것을 차선으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영원함을 추구하면, 현실의 모든 것에 대해 그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주의 비관주의에 쉽게 빠지게 된다. 즉,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사라진다. 따라서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또 이런 전제에서는 앞에서 본 선(善), 뜻의 실현, 지혜, 행복 등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처럼 영원함을 가치있다고 보고 대신 선-뜻의 실현-지혜-행복 등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무가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이런 문제들을 여기에서 검토해보기로 한다.

가) 영원성의 개념정의와 영원성의 존재여부

영원성을 논의할 때 가장 먼저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 영원한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를 밝히려면 먼저 ‘영원함’의 개념을 정의해야 한다. 영원함의 논의에서 논자별로 영원함의 개념정의를 달리하기 때문에 혼동이 일어나기 쉽다. 따라서 영원함의 개념정의를 먼저 살피기로 한다.
우선 가장 단순히 생각하면 영원함이란 어떤 것이 전 시간대에 걸쳐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일정기간 동안에는 없더라도 나머지 시간대에 무한하게 존재하는 경우 이를 영원하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없었지만 미래로는 무한하게 존재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또 반대로 과거 방향으로는 무한하게 존재했지만 현재와 미래로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무한 개념을 영원개념에 넣을 수 있는지가 문제된다. 무한은 그것이 지속되지 않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는 점에서 전 시간대에 걸쳐 지속되는 영원과는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무한도 그 끝을 설정할 수 없이 무한히 지속되는 점에서 영원과 유사할 수 있다.

한편 영원함은 어떤 것의 ‘성질’이 전 시간대에 걸쳐 지속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대상은 여러 성질을 갖는다. 이 때 그것이 영원하려면 그것이 갖는 모든 성질이 전혀 변하지 않아야 하는가 아니면 본질적인 성질 외에는 변화해도 되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을 갑이라고 파악하게 하는 성질은 C 라고 하자. 그런데 갑이 갖는 다른 성질이 a에서 b로 변할 수 있다. 이 경우 아주 엄밀히 보면 약간의 성질이라도 변했으므로 일단 ‘a갑’이 사라지고 새로운 ‘b갑’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성질이 변하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조금 완화된 입장에서는 변화 전후에 갑을 갑으로 파악하게 하는 본질 C는 그대로이고 일부 성질만 a에서 b로 변했으므로 갑은 계속 유지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차가 노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차는 그 기간 동안 형체를 계속 유지했으므로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런 형태로 영원성을 인정할 여지도 있다.
한편 더 완화된 입장에서는 갑을 갑이라고 파악할 때 사용하는 성질을 C, D, E ..등으로 여럿 놓고 그 가운데 하나의 성질이라도 있는 채 변화하면 그것은 갑이라고 완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형체가 있을 때는 형체 때문에 계속된 것이고 형체가 바뀌어도 엔진이 계속되면 그것 때문에 여전히 그 자동차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한편 이를 더 완화시키면 어떤 것은 C가 있기 때문에 갑이고, 또 어떤 것은 그 C가 변화하거나 C와 동일하다고 볼 F가 있기에 갑이 계속된 것이라는 식으로 갑의 본질적 성질의 범위를 더 완화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처음 산 부품과 형체를 모두 바꿨지만 하나씩 바꾸는 과정동안 계속 형체와 부품이 인과관계나 동일성을 갖고 이어져 왔으므로 그 차는 계속된 것이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영원을 말할 때는 이렇게 다양하게 완화해서 이해할 수도 있다.

또 한편 어떤 성질의 계속성을 영원의 개념으로 요구할 때 그 성질 자체에 변화가 포함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쉽게 생각하면, 변화와 영원의 개념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이를 인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입장에서는 어떤 고정된 성질이 영원히 지속돼야 하는 것으로 엄격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할 때는 의외로 그 안에 이미 변화의 개념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영원히 살고 싶다’고 희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산다는 개념 자체에는 식사나 활동 등 일종의 변화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악기(樂器)가 영원히 어떤 소리를 계속 낼 수 있다면 하고 바랄 수도 있다. 이때에도 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변화다. 그래서 영원하기를 바라는 성질의 개념 자체에 이미 변화가 포함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는 어떤 변화를 하기는 하지만, 그 변화를 기초로 파악되는 특성이 기간적으로 영원히 유지되는 것을 영원성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사실 이처럼 영원의 개념을 제시하는 방안이 여럿이므로, 각 개념에 따라 영원을 파악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특히 이런 개념정의가 문제되는 것은 생명의 영원성을 논의할 때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인간은 본래 어린아이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계속하여 모습이나 내용이 달라진다. 사람을 구성하는 신체나 감각, 생각, 행위, 의식 등의 정신적 요소가 모두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실 한 사람의 일생동안 전혀 변하지 않고 지속해 온 요소를 찾으면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이를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그 기간 동안 한 주체가 계속해 존재했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서 변화 전후의 주체를 모두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는 근거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이 경우 변화전후를 하나의 자신으로 파악하는 근거를 하나의 특정한 성품이라고 제시할 수는 없다. 이 경우 사람이 변화하면서도 스스로 일정한 ‘나’라는 관념을 세우는 근거는 전후 요소들의 인과관련성, 특징의 유사 공통성, 기억에 의한 과거의 포섭관계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엄밀히는 전후로 다른 요소를 모두 모아 하나의 통일된 주체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에서 자동차의 부품이 계속 바뀌면서도 하나의 자동차로 보는 관계와 유사하다.

한편 인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할 때는 나를 파악하게 하는 요소가 단지 전 시간대에 걸쳐 고정된 상태로 계속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와 같은 삶, 즉 생활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희망을 이해해보면 삶의 변화를 인정하면서 다시 그런 변화하는 생활 자체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은 그 안에 당연히 변화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이런 변화 가운데 일정하게 유지되기를 희망하는 요소는 분명 있다. 그것은 자신을 자신의 속성으로 파악하게 하는 요소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만, 만일 이런 연속적인 변화도 하나의 주체로 이어 계속된다고 이해하면 영원에 넣을 범위는 매우 넓어진다. 대부분의 변화는 인과관계를 설정할 수 있으므로, 아무리 변화해도 영원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더욱이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죽음 이전만을 자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다른 형태로 이어져 윤회한다는 불교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동일성의 근거를 좀 더 완화하면 모든 생명은 윤회를 통해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물론 이는 불교의 주장이 진리임을 받아들이는 전제에서다. 그러나 일단 인간이 영원히 살고 싶다는 희망과 관련된 영원의 개념은 매우 완화된 영원의 개념이다.

이런 예에서처럼 무언가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성질에서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또 변화하지 않는 요소나 성질을 얼마만큼 요구하는가에 따라 영원성의 개념이 조금씩 다르게 된다.

나) 영원에 대한 증명방법

한편 위와 같이 영원함에 각기 다른 개념정의를 한다면 다시 그에 해당되는 것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각기 영원한 것이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주장이 나뉠 수 있다. 이 때 이들은 각기 주장에 대해 어떤 증명을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내용을 살펴보자.

영원함에 대해 가장 완화된 개념정의는 모든 변화에 인과관계를 인정하여 계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심지어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의 변화마저도 변화의 한 형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영원을 이해하면 변화하던 변화하지 않던 간에 또 나타나던 사라지던 간에 모든 것이 다 영원하다고 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영원과 변화함 사이의 의미 구분 자체가 없게 된다. 또 이런 의미에서는 별도로 영원을 찾는 것도 의미가 없게 된다. 거의 모든 것이 이런 의미에서는 영원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영원의 개념은 개념 자체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또 달리 완화된 영원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윤회와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윤회관념은 한 생명형태가 죽음 이후 다른 생명 형태로 바뀌며 이들간에 연속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는 변화는 변화지만 한 생명이 죽은 후 다른 생명으로 변화한다는 특수한 형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런 윤회관념은 불교나 힌두교에서 특히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윤회관념을 받아들이면, 이를 통해 생명의 영원한 지속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 물론 실제로 윤회함을 입증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우선 죽음 전후의 각기 다른 생명형태가 무엇을 근거로 하나의 주체가 연속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된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양쪽 존재가 죽고 생겨나는 과정에 있는 인과관계관련성, 또는 뒤 존재에는 어떤 형태로든 앞 존재와 공통성이나 앞 존재의 의식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등을 그 근거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 양 존재를 관찰하고 또 이들이 인과관계나 공통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등을 입증하는 것은 보통사람에게는 어렵다. 불교경전에서는 지옥이나 하늘에서의 수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다고 제시된다. 예를 들어 타화자재천과 같은 하늘에서의 수명은 9,216,000,000 년 이라고 제시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죽으면 또 다른 세계의 생명으로 윤회를 한다고 제시된다.[신수대장경 : 2-219b] 그런데 이를 관찰하려면 92억년 이상을 살면서 이들이 죽어 어디에서 태어나는가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보통 사람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다. 한편 불교에서는 이런 윤회를 끊음도 제시한다. 따라서 영원한 윤회가 항상 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다. 여하튼 이런 내용들은 초월적 존재인 붓다에 의해 관찰되고 가르쳐진 내용으로서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어떤 과학적 입증을 통해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한편 어린아이부터 노인이 돼서 죽기이전까지의 일생을 한 주체의 계속된 삶으로 보기도 한다. 일반 사람이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고 할 때는 이런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사실상 대부분 없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를 입증하는 것 자체는 쉽지 않다. 죽음은 태어남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역(演繹)되어지는 결론은 아니다.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려면 많은 기능이 원할히 작용해야 한다. 각 기관과 기능은 정상이어야 하고 매끼 식사와 배설을 하고, 죽음에 이를 사고를 당하지 않아야 하는 등 많은 조건들이 갖춰져야 한다. 이처럼 많은 조건 중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면 사람은 삶을 지속할 수 없다. 따라서 확률상 이런 조건들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갖춰질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는 적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조건으로부터 사람은 몇 년 후에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필연적으로 끌어내기는 힘들다. 따라서 사람이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연역적 논리에 의한 필연적(必然的) 추론보다는 일종의 귀납적(歸納的) 개연적(蓋然的) 추리에 근거한다. 즉, 지금까지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을 귀납해서 개연적으로 세운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 보면 지금 살고 있는 사람, 또 앞으로 태어날 사람에 대해 관찰은 아직 완전히 행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누군가 앞으로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런 주장을 완전히 깨뜨릴 입증방법을 발견하기는 곤란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주장보다는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라는 귀납적 개연성을 보다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희망은 이런 전제에서는 실현불가능에 가깝다고 이해해야 한다.

영원한 것이 있다거나 없다는 증명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개념에 따라 일부 살펴봤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하여 일반적인 경우, 영원성의 존부에 대해서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 대상이 영원한지 안 한지를 밝히려면 관찰자가 최소한 그에 버금가거나, 그를 초월한 기간동안 그 대상을 꾸준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어떤 시기에는 몇십년에서 때로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시기에 따라 변화해 간다고 제시한다. 물론 불교에서 수명이 길어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거나, 아니라거나 어느 쪽으로 증명하려면 최소한 만년은 생존하면서 관찰할 수 있어야 참거짓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단순히 이런 주장이 아니라, 영원한가 아닌가의 주장의 참거짓을 밝히려면 관찰자는 영원에 상당한 기간동안 생존해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이것이 실현 곤란함은 명백하다. 어떤 대상이 현재의 관찰에서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이 관찰된다면 최소한 그것이 전시간대에 걸쳐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로써 다른 시간 방향으로 무한하지 않다고 할 수 있거나, 또는 다른 곳에 영원한 것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어떤 것이 최소한 우리의 삶의 기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밝히기는 힘들다. 관찰 이후에 그것이 언젠가 파괴되어 사라진다는 증명도 또는 계속 유지된다는 증명도 모두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한편 여기에는 공간적인 한계도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의 짧은 관찰에서는 영원한 것을 찾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전 우주에 걸쳐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증명한 것은 아니다. 한편 자신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실험 관찰할 수는 없다. 만일 이처럼 관찰이 가능하지 않다면, 어딘가에 영원한 것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참이나 거짓 어느 쪽으로도 입증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따라서 정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주장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관찰자 자신이 짧은 시간 동안 살다가고, 또한 제한된 공간에 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있는가 없는가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로 남기 쉽다.

그러나 영원성을 어떤 고정된 현상적(現象的) 성질이 모든 시간대에 걸친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 정의하면, 어떤 직접적인 관찰을 모두 걸치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연역적(演繹的)방법으로 그런 영원성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성질(性質)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정신기관이 상대적으로 개입하여 변화과정을 통해 파악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물은 우리가 눈을 떠서 봄으로써 그 모습을 보게 된다. 소리는 귀를 대하여 듣는다. 관념은 또 이들을 기초로 인식기관으로 얻게 된다. 이처럼 모든 성질과 존재성은 우리의 감관과 인식기관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성질이 되었든 그것은 우리의 감각, 인식기관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고 또 그 관계를 떠나면 모두 사라지고 만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으로 대한 모습은 눈을 감으면 모두 사라지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만일 영원해야 할 성질을 이렇게 우리의 정신이 관계하여 파악한 내용들로 제한해 정의한다면 그런 전제에서 모든 성질들은 다 이런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비록 전 우주에 걸쳐 그리고 전 시간대에 걸쳐 일일이 관찰을 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그런 성질은 모두 감각, 인식기관이 관계할 때 나타나고 그 관계가 사라지면 역시 사라지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이든 정신이 파악할 성질은 영원할 수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감각, 인식기관과 관계하여 파악되는 성질을 근거로 정신에 그런 모습을 맺히게 한 실재대상[#]을 다시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실재대상[#]이 그 자체로 갖는 성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정신과 관계하여 우리가 감각, 인식하는 것과 같은 성질을 맺히게 해주는 실재적 성질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을 뜨면 눈앞에 꽃모습[!]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가 눈을 뜨고 감음에 관계없이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는 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또 그 실재의 꽃[#]이 갖는 실재적 성질[#]이 있지 않을 것인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추리되는 실재대상[#]의 있고 없음과 그 모습 등에 대해 생각하면 그 결론을 얻기 힘들게 된다. 왜냐 하면 우리는 실재대상[#]을 직접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감각기관과 인식기관을 통해서만 감각내용[!]과 관념내용[@]을 얻는다. 그래서 이런 정신기관을 떠나서는 어떤 내용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것이 감각, 인식기관을 떠나서 어떤 형태로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내용이나 증거도 얻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그렇게 추리되는 실재대상[#]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등등의 어떠한 판단도 단정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실재대상[#]은 이렇게 끝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된다. 이렇게 실재대상이 그에 대해 어떤 내용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공(空)하다라고 표현한다. 즉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그 내용을 어떤 언어로 나타낼 수도 없고,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또는 각 실재대상은 단일하다, 여럿이며 서로 다르다, 고정되어 있다, 변한다 등등의 어떠한 판단도 할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나타내 공(空)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없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다라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결국 실재대상에 대해 깊이 궁구하다보면 그것은 공(空)하여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만 이르게 된다. 그런 실재대상은 그 자체로서는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각 감관과 관계해서는 현상에서 우리가 얻는 색깔[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관념내용[法] 등과 같은 다양한 내용[!]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재대상[#]이 이렇게 공하여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하다 또는 영원하지 않다는 등의 어떠한 결론도 얻을 수 없는 상태가 됨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얻는 현상적 성질을 기초로 그 대상에는 그런 성질을 나타내게 하는 영원불변하고 절대적으로 고정된 실체적 존재[$]나 성질[$]이 있는가도 문제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추리를 근거로 한다. 꽃[!]을 보면 그것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또 꽃의 모습[!]은 밝은 곳에서 보거나 또는 어두운 곳에서 보면 그 모습이 각기 달라진다. 색안경을 쓰거나 벗어도 그렇다. 또 눈 이외에 코로 맡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할 때도 각기 다른 내용을 준다. 그렇게 꽃은 매번 일시적이며 각기 다른 모습을 준다. 그렇지만 또 한편 그 꽃은 조금씩은 다르지만, 오늘 보아도 또 내일 보아도 일정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추리를 하게 된다. 즉, 우리가 대하는 현상(現象)은 매번 변하고 다른 거짓된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그 현상의 뒷면이나 그 안에 꽃의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본체(本體)[$]가 있기 때문이라고 추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본체[$]라는 개념을 정하고 그에 일치되는 내용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이 때의 본체[實體]는 영원 불변 고정된 내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 하면 그것이 만일 또 다시 일시적이고 변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감각기관이나 인식기관으로 얻은 성질과 질(質)적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은 굳이 찾아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본체[$]를 영원 불변 고정된 내용으로 정하고 그런 본체에 해당한 것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본체는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연역을 통해서 밝힐 수 있다. 우선 그런 본체가 있다면, 그 개념정의에 따라 그런 본체는 감관과 상대하여 변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그렇게 본체를 정의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본체가 우리의 감관이나 인식기관과 상대하여 변화한다면 본체의 개념정의와 위배되는 것이다. 한편 만일 이 우주 어딘가에 어떤 조그마한 본체라도 있다면, 그 개념에 요구한 절대적 영원성, 불변 고정성 때문에, 나머지 다른 모든 영역도 이와 관계하여 절대적으로 영원하고 불변 고정되어야 한다. 만일 다른 영역의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변하게 되면, 그에 따라 앞에 정의한 본체 부분도 상대적으로 변화한 것으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잠시간이나마 또 아주 조그마한 영역에서나마 현상의 성질을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반대로 아주 조그마한 부분에서도 본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앞의 사실이 이런 연역적 추론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이런 본체적 성질을 자성(自性)이라고 표현하고 그런 자성은 없다고 제시한다.[無自性] 또 자기 자신에 있어서 이런 불변하는 본체[實體]를 아(我)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그런 아(我)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교는 제시한다.[無我] 결국 불교는 일체에 무아, 무자성이라는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실재(實在)의 모습이 공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감관을 떠나서 있다고 추리되는 실재의 모습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등을 단정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영원불변 고정된 실체적 존재는 없다[無]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결국 불교에서는 현상적 모습[!]에는 영원함이 없음[無常], 실재내용[#]은 공함[空], 영원불변한 실체[$]는 없음[無自性, 無我]를 모든 일체의 존재에 공통적으로 관련된 진리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실재대상[#]의 공함과 실체[$]의 존부 등에 대해서는 현상의 진리론에서 자세히 논하게 된다. 따라서 그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상 영원이란 개념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각기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시간대에 걸쳐 고정된 현상적(現象的) 성질로서의 영원함은 부정(否定)될 수 있다. 그러나 성질의 의미를 실재적 성질 또는 변화에 기초한 성질 등으로 정하거나 영원성의 개념을 한 시간 방향으로의 무한성 등을 의미한다고 달리 설정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각 개념에 따라 다르지만, 영원성의 존부는 일일이 입증하여 단정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영원한 것이 있는가 없는가와 관계없이 우리는 영원함에 대한 희망을 계속 가질 수 있다. 자신의 관념적인 희망과 일치하는 현실을 끝내 실현할 수 있든 없든 희망은 계속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희망은 그것을 갖는 한 우리 삶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 된다. 이하에서는 일단 관념적으로 영원함을 정하고 추구할 때 과연 그런 영원함이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또 한편 영원하지 않다고 하면 반대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무시해야 하는가의 문제도 함께 살펴본다.

다) 영원함의 가치문제

영원함의 존재 가능성 여부를 떠나, 어떤 것이 단지 영원하기만 하면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는가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질병이나, 불구와 같은 것이 영원하게 ‘나쁨’을 준다면, 어떨 것인가. 영원함 여부를 최상의 가치의 기준으로 두면, 이 경우에도 영원하기 때문에 가치를 둬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영원함을 단지 그것이 영원하다고 하여 좋다고 할 수는 없게 된다.

영원에 가치를 두는 것은 우리가 좋다고 느낀 것이, 계속되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에 그것이 오래오래 머무르게 되기를 바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즉, 영원함이 가치를 갖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우선 어떤 좋은 것이 짧게 지속되고 사라진다. 그래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쉬움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어떤 좋은 것이 많이 또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또 더 나아가 그것이 영원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런 영원함은 얻어지지 않는다. 단지 오래 지속되는 것도 매우 드물게 얻을 수 있다. 그것이 드문 만큼 그 가치는 올라간다. 따라서 얻어지지 않는 영원함에 대해서는 매우 높은 가치를 설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영원함을 바라는 희망대로 어떤 좋은 것이 무한하거나, 더 나아가 전 시간대에 걸쳐 완전하게 영원하게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실제 그렇게 된다고 가정할 때 그것에 대해 계속해서 좋게 느낄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물론 우리 자신은 현실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또 어떤 영원한 대상도 쉽게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실제 실험을 통해서 결론을 얻을 수는 없다.

특히 영원성의 개념을 고정된 성질의 시간적 지속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현실에서 이런 상태에 계속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가까운 상태로 우리가 잠시간이라도 어떤 상태로 고정된 자세로 있게 되면 우리는 시간이 감에 따라 많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어떤 삶의 형태에 한해 그것이 계속 유지되어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완화하여 보더라도 어떤 상태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오래 지속될 때 그것이 계속 좋음을 줄지는 의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는 있다. 일단 가정하여 어떤 상태가 영원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그에 대한 가치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본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것이 일시적일 경우보다 더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상태가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함, 일시적임, 많음, 적음 등과 가치의 관계는 이렇게 단순하게 제시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의 좋고 나쁨은 반드시 이런 시간적 지속성, 수량의 많고 적음하고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갖는 특성, 그리고 그를 대하는 주체의 상황 등이 함께 화합하여 좋고 나쁨을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독(毒)이나 고통과 같은 것은 아무리 적고 일시적이더라도 그 적다는 사실만으로 좋게 평가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또 한편 이들도 이를 갈구할 만한 특수한 상황의 사람에게는 좋음을 주기도 한다. 한편 꽃이나 즐거움이 많고 오래 지속된다고 하여 일반적으로 싫음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그것이 싫음을 주는 경우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한편 어떤 상태가 계속될 때 그것이 주는 느낌은 계속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시간적 지속성에 따라 좋고 나쁨을 느끼는 관계도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어떤 것은 오래 지속됨으로써 계속 더 좋아지는 것도 있다. 또는 반대로 처음에는 좋았던 것이 싫어지는 경우도 있다.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지만 사람마다 살아가며 이런 변화를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향기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이 계속됨에 따라 더 좋아질 수도 있다. 반면 어떤 음식은 처음에는 좋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계속 이를 대하다보면 이들이 다시 싫어지게 변하기도 한다. 또는 어떤 음악은 처음에는 좋다가 또 그 후에는 싫어지다가 또 계속 들으면 다시 좋아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 관계는 쉽게 유형화할 수 없다. 단지 구체적인 상황에서 각 주체와 대상과 각 시기 각 상황에서 이들이 화합함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을 주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일반적으로만 평가하면, 어떤 것이나 그것이 흔하게 대할 수 있게 되면 그 가치가 그만큼 낮게 평가되기 쉽다고는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양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가치를 발휘하는 반대 예도 예상할 수 있다. 또 어떤 것이 영원하게 되어도 상대적으로 여전히 다른 것에 비해 드물게 얻어진다면 상대적인 가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흔하게 대할 수 있게 되면 일반적으로 그에 대한 가치감은 적어진다고 볼 수 있다. 물이나 음식이 금보다 낮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선한 행복과 같은 좋음을 주는 상태가 계속될 때도 마찬가지다. 선한 행복을 주는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좋은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다. 일단 어떤 상태가 인과관계상 최종적으로 좋음을 많이 줄 때 그것을 곧 선과 행복을 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 자체가 오래 지속하거나 영원하게 되면 과연 다시 좋음을 최종적으로 많이 주게 될 것인가는 앞에서 본 사유로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어떤 상태가 계속 유지됨에 따라 좋고 나쁨이 일률적이지 않음만을 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어떤 좋음의 느낌이 다시 영원하게 되면 어떠할까를 살펴보자. 실제 좋음만 계속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는 일단 문제 삼지 않기로 하자. 그래서 단순히 이론상 각 순간에 걸쳐 좋음만 계속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에는 이론상 가장 좋은 상태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좋음은 나쁨과의 교차 변화나 비교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실제로 마음에서 좋음만 계속해서 느끼는 것은 힘들다. 따라서 이런 가정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일단 어떤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기 쉽다. 마치 하얀 벽면을 오래 보고 있으면 나중에는 멍해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것과 같다. 그 결과 그것에 대해 느끼던 가치감도 잃어버리게 되기 쉽다. 마치 손과 발은 사실 좋은 것임에도 그것은 보통 늘 있다. 때문에 평소에는 이들에 대해 그다지 좋음을 느끼지 못한 채 생활한다. 그러나 손과 발에 부상을 입은 뒤 낫게 되면 매우 기뻐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실 우리가 어떤 것에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변화를 통해 일시적으로 주어지고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예들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원함이 실현된다고 가정하면, 좋은 것이 영원하기를 바랬던 우리의 원래 희망과는 관계없이 곧 좋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 이러함에도 어떤 좋은 것이 영원함에 대한 희망과 가치감은 통상 꾸준히 유지되기 쉽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 영원함이 앞과 같은 가정과는 달리 사실상 얻어지지 않는 상태로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영원함의 희망이 실현된다면 앞의 가정처럼 가치가 떨어지거나 오히려 불쾌함을 주고, 더 나아가 이제는 반대로 영원함을 바라지 않고 빨리 사라지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원함은 얻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계속 바라게 되고 그 희망은 실현되지 않는 채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역으로 영원함이라는 관념은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 상태로 이념상 머무른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영원함도 그것이 얻어지고 흔하게 되면, 반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나쁨만 영원히 얻게 되는 경우를 영원하기 때문에 좋다고 할 수 없음은 이미 보았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무조건 영원이 최고의 가치라고는 할 수 없다. 영원함이 가치를 갖는 것은 어떤 것이 영원하여 최종적으로 좋음을 가장 많이 주는 경우로 제한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영원함보다는 좋음이 더 상위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결국 영원성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다. 또 같은 근거로 잠깐 동안만 있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도 그것이 전체적으로 좋음을 가장 많이 줄 때는 그것이 오히려 가치를 더 갖는다고 해야 한다.

영원함보다는 좋음이 더 상위에 있는 가치임을 보았지만, 이제 결론적으로 선(善), 행복 등과 영원함 가운데 어떤 것이 더 가치를 갖는가를 비교해보자. 좋음이 양적 질적 기간적으로 조화있게 주어지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가능한 다수 주체에게 가능한 장기간 좋음을 가져다 주는 상태를 선(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과 행복이 결과적으로 영원함보다 가치 있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상태들을 비교하여 살펴보자.

선한 행복이 가능한 영원에 가깝게 유지된다면 물론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들이 서로 모순될 때 어느 것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좋지 않은 불행한 상태가 영원한 것과, 좋은 행복한 상태가 일시적인 상태를 비교해보자. 이 경우에 그것이 비록 일시적이라도 좋은 행복한 상태가 더 낫다고 본다.
또 악한 상태가 영원한 것과, 선한 상태가 잠시간 지속되는 것을 비교해보자. 이 경우에도 뒤의 것이 더 낫다. 따라서 영원함보다는 좋음, 행복, 선 등이 더 상위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좋음이 모여 쌓인 선이 가장 상위의 가치를 갖는다. 결국 선, 선한 뜻의 실현, 지혜, 행복이 영원성보다는 우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열반, 해탈

가) 불교의 궁극적 목적상태

불교가 제시하는 목적상태에는 다양한 내용이 있다. 불교도가 갖는 네 가지 큰 서원[四弘誓願]에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는 것 등이 있다. 한편 불교의 최종목적 상태로는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 열반(涅槃, nirvana), 해탈(解脫)을 들기도 한다. 여기서 열반이란 본래 불어 끈다는 뜻을 갖는다. 곧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아주 없애서,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 bodhi)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또 해탈이란 번뇌에 묶인 미혹(迷惑)의 고통에서 풀려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탐욕 성냄 등의 번뇌를 없애는 것을 심해탈(心解脫), 지혜에 의하여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혜해탈(慧解脫)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열반과 해탈은 불교의 수행 실천의 궁극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나) 사홍서원과의 관계

그런데 이들과 선-뜻의 실현-진리-행복 등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먼저 사홍서원 가운데 중생을 제도(濟度)하여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게 함은 가능한 많은 생명을 오랜기간 행복하게 만들고 그리고 각 생명이 선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드는 선(善)의 개념에 넣어 이해할 수 있다. 또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것과 같게 볼 수 있다. 또 법문을 배움은 진리를 파악함과 같게 볼 수 있다.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는 것은 앞의 세 덕목이 완성에 이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앞에서 제시한 모든 뜻이 실현 완성됨과 동일시할 수 있다.
한편 해탈이나 열반이 번뇌에서의 벗어남, 진리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도 결국 앞의 내용에 포함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범위에서 이들은 본서에서 제시하는 최상의 상태 선-뜻의 실현-진리-행복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열반 해탈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입장도 있다. 그리고 윤회를 끊는다는 목적상태는 선한 행복의 실현과는 일단 동떨어진 측면이 있다. 이들이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 윤회를 끊음과의 관계

우선 불교에서는 특별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 즉, 모든 생명[衆生]은 하늘,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6 가지 세계에서 끝없는 윤회(輪廻)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 수행의 최종상태에서는 이러한 윤회를 끊음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먼저 중생은 생전, 사후에 윤회의 과정을 정말 거치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윤회한다면, 왜 다시 태어나 살아가는 것 자체를 끊으려 하는가? 그냥 계속 그렇게 살아가면서 가장 좋은 상태로 계속 바꿔 태어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할 수 없는가? 또 윤회를 끊으면, 그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또 본래 윤회를 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라면, 어떻게 그 윤회를 끊는 것이 가능한가? 또 그 방법은 무엇인가? ...등이다.

사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경험을 통해 실증해 제시할 길은 막연하다. 왜냐 하면 보통의 사람이 하늘, 아수라, 아귀, 지옥이란 세계에 걸쳐 어떤 생명의 생전과 사후 양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또 그 관계를 반복 실험해보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회를 하는지 또 어떻게 윤회를 끊을 수 있는지 여부는 종교적 믿음의 문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모든 생명이 윤회를 한다는 것은 어떤 생명체가 한 번의 생애를 마친 이후에 또 다른 생명 형태로 삶을 계속해서 이어감을 의미한다. 물론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한다. 그런데 윤회의 주장은 이런 변화 가운데에서도 생사에 걸친 특수한 변화를 의미한다. 즉, 생명 형태는 죽어서 또 다른 생명 형태로만 변화함을 주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물질의 단순한 변화와는 차이가 난다. 또 일반 물질에서 생명이 만들어지고 생명이 죽으면 단순히 다시 일반 물질로 돌아간다는 생각과도 다른 주장이 된다.

생명의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는 또 다른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후 영혼이 신으로부터 심판받아 영생의 천국 생활 아니면 지옥생활을 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또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한 번 태어나 죽으면 그것으로 전부이며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 있다. 또 다른 여러 주장들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에서 어떤 것이 참일까?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이 끝없이 바뀌어 감을 알 수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새 물질을 흡수하고 기존 물질을 배설하면서 끝없이 물질이 변화한다. 그러다 생명이 죽으면 이런 작용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분해되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이가 죽은 후 그로부터 이어진 또 다른 세계의 또 다른 생명체를 우리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보통 경험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변화의 내용은 이 정도다.
그런데 일단 이와는 별도로 또 다른 세계의 생명으로 윤회한다면, 이전의 생명체에서의 무엇이 어떻게 이어진다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앞에서 관찰된 물질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 과거의 감각이나, 생각, 작용, 분별과 같은 정신내용 자체가 이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엄밀히 보면 육체나 정신요소는 한 생에 있어서도 고정되지 않는다.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과 정신적 요소로서 감각, 생각, 작용, 분별 등은 예를 들어 유아기 청,장,노년기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느 한 요소도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생에 있어서는 우선 육체나 정신은 앞 시기와 뒤 시기에 걸쳐 인과관계상 연결되어 있다. 또 전후기에 걸쳐 유사하고 공통적인 면도 찾을 수 있다. 또 한편 후기의 육체와 정신은 전기의 일부 특징이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년기나 청년기 때의 과정은 노년기의 모습을 만드는 원인들로 이해된다. 또 이들 각 시기의 모습은 어느 정도 유사하다. 또 노년기에는 그 이전 시점의 일들에 대한 기억들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유아기 청,장,노년기의 일생을 하나의 개체의 변화로 이어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생명이 윤회를 한다면, 앞 생과 뒷 생에 걸쳐 어떤 관계로 이를 이어줄 수 있을 것인가? 인과관계, 유사 공통성, 일부요소의 포함 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윤회 전후의 각 생명체 사이에서 어떤 연결 관계가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된다. 그런데 불교의 유식학파에서는 전생의 삶과 후생의 삶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상속(相續)으로 해석한다. 아뢰야식의 개념은 현실세계의 모습을 일으키는 원인요소[種子]를 안에 포함하여 현실의 모습을 변화해 일으키며, 나타난 현실의 모습에 애착을 갖고, 또 현실에서 일어난 결과를 담아 놓는 일종의 미분화된 잠재적 정신체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학파에 따라 아뢰야식 대신에 유분식(有分識), 보특가라(補特伽羅) 등을 이런 요소로 내세우기도 한다. 다만 이런 요소가 실제로 존재하며 작용하는가 또 이런 요소에 의해 전 후생이 계속 이어지는가, 또 전생의 요소와 후생의 요소의 소멸 발생이 서로 인과관계에 있는가, 등등은 일반적인 관찰로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생명이 모두 윤회를 한다면, 현재의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그것을 이미 오랜 기간 경험해왔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의 생애에서의 모습이나 감각이나 생각, 작용, 분별의식내용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 물론 3 년 전에 한 식사의 내용이 오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여 3 년 전에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사람이 전생의 어떤 과거도 떠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과거의 삶을 연결해 찾을 근거를 발견하기 힘든 것이다.
다만 불교수행의 한 방법인 선정(禪靜)을 깊이 들면 이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거나, 또는 오늘날 최면(催眠)을 통하여 이런 전생을 의식할 수 있다거나, 또는 어떤 초월자나 부처 등은 타 주체의 전 후생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런 당사자의 주관적 경험으로 될 수는 있지만 널리 일반인의 객관적 검증 대상이 되기는 힘들다. 따라서 불교가 제시한 많은 내용이 과학적 철학적 기초를 갖지만, 경험을 통하여 확인할 수 없는 육도윤회등의 내용은 일반인에게는 결국 종교적 믿음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다만, 윤회를 한다고 받아들일 때, 왜 윤회를 끊은 상태가 최종목적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도 의문이 된다. 일반인은 보통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여타의 종교에서도 신의 구원은 행복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윤회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비록 죽음으로 끝나지만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일 모든 생명이 윤회를 한다면, 비록 죽음과 새로운 출생이 반복되지만,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은 어느 정도 성취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렇게 계속해 이어지는 삶을 이미 모든 생명의 현실에 주어져 있는 것으로 놓는다. 그리고 이제 반대로 생(生)의 연속이라 할 수 있는 그 윤회를 끊는 것을 목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선뜻 불교의 목적이 이해가 가지 않게 된다.

우선 불교가 제시하는 6도 윤회관은 다음과 같다. 아귀나 지옥 축생에 태어나는 원인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집착, 악행 등이다. 또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은 선한 뜻과 말과 행위다. 그리고 하늘에 태어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 행복을 누리며 산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불교는 선업(善業)을 쌓아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삶에도 죽음이 있으며, 죽은 후에는 다시 업에 따라 윤회를 한다고 제시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진정한 최종목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 많은 하늘 가운데 하나인 화락천(化樂天)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인간의 8백 년은 화락천의 하루낮 하룻밤이다. 이와 같이 30일을 한 달, 열 두 달을 1년으로 하여, 화락천의 수명은 8천 년이다. [800*30*12*8000=2,304,000,000년] 그런데,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거기서 목숨을 마치면 지옥·축생·아귀 속에 난다. 그러나 많이 들은 성인의 제자는 거기서 목숨을 마치더라도 지옥·축생·아귀 속에는 나지 않느니라." [신수장경 : 2-219b] 이런 설명을 통해 보면 마치 인간의 수명이 세균과 같다면 하늘의 수명은 인간의 수명과 같이 길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비록 죽어서 다시 윤회를 거듭하더라도 무려 23억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하늘에서 한 번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궁극적 목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왜 불교에서는 이를 목적으로 제시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가능한 해석으로는 다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무리 하늘에서의 행복의 시간이 길더라도 윤회를 끝내 끊지 못하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윤회과정에 필연적으로 생노병사의 괴로움이 따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윤회를 하는 이상 지옥 아귀 축생의 상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윤회를 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예 윤회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윤회를 끊으면 나쁜 고통을 겪지 않지만 좋은 즐거움도 함께 끊어야 한다. 그래서 고통이 없는 점에서는 긍정적 가치를 갖지만, 반대로 즐거움이 없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 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오직 좋은 것만 계속 누리며 윤회를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계속 좋은 상태로만 윤회를 할 수는 없지만,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괴로움을 끊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에 윤회를 끊으려 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윤회를 끊으면 어떤 상태로 되는가가 의문이 될 수 있다. 윤회를 끊었다고 제시되는 아라한(阿羅漢)이나 여래(如來)는 윤회를 끊은 이후 특히 죽은 이후 어떤 상태로 되는가. 윤회는 이번 생을 마치고 다른 생으로 이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단 표현으로만 추리해 본다면, 윤회를 끊음은 생을 마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경우로는 우선 어떤 생명이 계속해 살고 죽지 않아 다른 생명체로 변해 태어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삶이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석존이 스스로 윤회를 끊었다고 하지만, 그나 다른 아라한이나 모두 죽었다. 따라서 최소한 불교에서 이런 형태로 윤회를 끊음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죽어 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경우는 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생명체가 죽은 후 단순히 물질상태만 남을 뿐 다시 생명체로 태어나는 그 무엇을 남기지 않는 경우다. 이런 상태는 우선 현실에서 바위나 물[水]과 같은 무생물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생명체가 아니므로 처음부터 윤회를 하는 주체에서는 제외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만일 이전에는 생명체였고 윤회를 했던 존재의 자취라고 가정하면, 지금 이런 무생물체 상태만 남고 다시 다른 생명체로 되는 무엇[영혼 등]이 없음은 윤회를 끊은 상태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실 일반 물질은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일단 무생명체의 상태는 그런 목적이 성취된 것과 같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윤회를 끊은 상태는 번뇌도 없고 ‘깨달음도 갖춰진’ 어떤 궁극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단순히 바위나 물처럼 무생물체의 상태를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무생물체처럼 생명활동은 이어지지 않지만, 여타의 무생물체와는 구분되는 깨달음을 갖춘 제 3의 상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래나 아라한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다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옳은 답이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불교경전에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옳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음 내용이 나온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5가지 요소<물질, 감각, 생각, 작용, 분별의식[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5 온(蘊)>는 항상되지 않다.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거기서 나와 다른 나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색,수,상,행,식은 각기 여래가 아니다. 색,수,상,행,식을 떠나서 여래가 없다. 색,수,상,행,식 안에 여래가 없다. 여래 안에 색,수,상,행,식이 없다. 그와 같이....여래가 본 법은 진실하다.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데에 머무르는 것처럼, 무엇이 있어 주장하는 것도 없다.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열반을 깨닫는다....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 염마경 1-123 신수장경 2-30C / 잡아함경 1-130, 신수대장경 2-32C /]

그러나 앞에서 설한 항상되지 않음, 괴로움, 실체적 내가 없음, 그리고 색수상행식과 어떤 주체와의 관계 등은 모든 생명 주체에게 공통된 사항으로 붓다에 의해 제시된 내용이다. 즉, 그것은 윤회를 끊은 여래나 아라한에게만 특수한 사항이 아니다. 만일 윤회를 끊음이 단지 이런 의미라면 그것은 모든 생명체도 이미 다 같다. 따라서 윤회를 끊음이 이런 의미라면 모든 생명체가 다 그러한 것이 된다. 그래서 윤회를 끊음은 결국 일반 생명체가 윤회를 끊지 못한 상태와 근본적인 질적 차이는 없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단지 그 공통된 사항에 대해 범부는 이를 알지 못하고 여래는 이를 깨달았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한편 이외에도 석존 당시에 여래[=붓다]가 사후에 존속하는가, 존속하지 않는가 등의 질문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석존은 직접 대답을 하지 않은 것[無記]으로 전해진다. 대답을 안함은 사후 존속한다거나 존속하지 않는다는 어느 쪽으로도 해석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과연 사후에 여래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석존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단지 이렇게 답을 하지 않은 이유로는 그것은 이치와 맞지 않고 법과 맞지 않으며, 또 깨끗한 행[梵行]이 아니어서 지혜로 나아가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아함경 3-408 신수장경 1-804a 전유경(箭喩經)]
또 마하가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여래가 후세에 나고 죽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형상이 되는 것이요, 만일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형상이 되는 것이다. 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든가. 혹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형상이 되는 것이다. 여래는 형상이 이미 다하고 마음이 잘 해탈하였다. 그러므로 후세의 나고 죽음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옳지 않고, 후세의 나고 죽음이 없다거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거나, 또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옳지 않다. 여래는 형상이 이미 다하고 마음이 잘 해탈하여, 매우 깊고 넓고 크며 한량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적멸이요 열반이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 2-404 신수장경 : 2-226a 등]

여하튼 석존이 윤회를 끊은 상태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더 이상 명확한 내용을 찾을 길은 없다. 결국 이 상태는 직접 윤회를 끊어보지 않는 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의문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윤회를 끊음의 상태는 약간은 신비한 수수께끼처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로 불교의 최종목적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단순한 상상적 해석만이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여지도 있다. 사실상 부처나 아라한이 되어도 일반 생명처럼 윤회는 한다. 그러나 윤회과정에 실체적인 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이런 깨달음을 갖추면 사실상 윤회를 계속 해도 윤회의 고통은 끊어진 것이라고 이해할 여지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자신의 실체 없음[無我] 등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모든 생명체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사항이다. 또 한편 어린이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윤회를 한다거나 자신에게 영원한 실체가 있다는 의식 자체가 원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끊어야 할 실체나 윤회의 관념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윤회를 알려주고 다시 윤회를 계속하는 실체적인 나의 관념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을 불어 넣는 것은 오히려 번거로운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편 윤회를 끊음이 목적상태가 된다고 하자. 그런데 한편 윤회는 생명의 자연적인 법칙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자연스런 법칙을 거슬러 윤회를 끊을 수 있는 것인가도 의문이다. 윤회가 자연적인 법칙이라면 생-노-병-사_ 그리고 또 다른 생명체로의 생-노-병-사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계속된 과정에서 이 자연스런 과정을 거슬러서 어느 한 부분을 끊어야 윤회가 끊어질 것이다. 다만 윤회를 끊어야 함을 제시한 석존도 현생에서의 죽음이전에 죽음의 단계를 끊어[즉 죽지 않아서] 윤회를 끊지는 않는다. 따라서 일단 현생에서 생-노-병-사의 과정은 받아들이고, 단지 다음 단계에서 새로운 생-노-병-사로 이어짐을 끊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한편 윤회를 끊는 방안으로 불교에서 제시하는 방안은 결국 불교의 여러 수행방법이 된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 윤회를 끊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는 윤회가 있는가의 문제와 함께 역시 종교적 믿음의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한편 불교 경전에서는 석존 이후 다음에 부처가 되는 이로 미륵을 들고 있다. 그런데 미륵이 붓다가 되는 데는 단 1번의 생애와 함께 약 56억7천만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시간은 정말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붓다가 되리라고 석존으로부터 예언되는 이들이 붓다가 되는 시간으로 보통 몇 겁(劫)의 세월과 수없는 윤회의 반복을 요한다고 제시되어 있다. 사실 겁(劫)의 세월은 산수로서는 그 숫자를 제시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림을 의미한다. 이런 것을 받아들이면 보통사람의 기준에서 100 년의 삶 안에 달성할 목표로 윤회를 끊는 것을 제시하기는 사실상 힘들게 된다. 물론 긍정적으로 보면 불교의 입장이 윤회를 끊는 것이 불가능함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내용들은 보통사람에게는 한 생애 또는 1, 2회의 윤회를 통해서는 윤회를 끊는다는 것이 ‘거의’ 실현불가능함을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사실 불교가 윤회와 관련하여 제시한 설명과 목적 그리고 그 실천방안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윤회를 정말 하는 건지 또 윤회를 끊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확실히 알기 힘들다. 따라서 윤회를 끊음을 목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일단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먼저 윤회를 한다, 안 한다, 윤회를 끊지 않으면 -게 된다. 끊으면 -하게 된다. 윤회를 끊을 수 있다, 없다, 윤회를 끊는다, 끊지 않고 계속 윤회를 한다 등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무엇이 더 나은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 때 그 답은 결국 선과 행복을 기준으로 하여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윤회를 끊는 것이 좋다면 그것이 좋은 이유는 바로 선한 행복의 실현 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윤회를 끊는 것이 선과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단지 생사의 반복의 고통만을 피해 윤회를 끊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선-뜻의 실현-진리-행복에 이들을 모두 포함시켜 이해하여도 무방하다고 볼 것이다. 즉, 선 행복을 기준으로 그것이 선, 행복에 도움 된다면, 윤회를 끊고 안 끊고의 희망을 세워 실현을 하면 되리라 본다.

실제로 대승불교에서는 수행이 깊어 이미 부처가 될 수 있으나, 생명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보살의 상태로 계속해 남는 존재가 나타난다. 이들은 모든 생명이 부처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먼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결국 이들의 이념은 선한 행복을 모든 중생이 이루기 전까지는 윤회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계속하겠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보살은 윤회를 끊어 개인적인 안락을 얻는 것보다는 선의 실현에 우선을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선한 행복의 실현은 윤회를 끊음보다 우선해야 할 가치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라) 불교의 무상(無常) 무아 공 등의 일반 진리개념과 선한 행복

한편 불교에서는 일체에 적용되는 진리사항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한다. 먼저 감각[!]과 관념[@] 언어[%]의 현상(現象)적인 차원에서 일체 모든 것은 그 영원성이 얻어지지 않는다고 한다.[諸行無常]. 그런데 이런 현상에는 그 현상을 일으키는 영원불변 고정된 실체[$]가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렇게 실체의 존부를 문제삼는 차원에서는 모든 것에는 영원불변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한다.[無自性] 그리고 생명에도 자아의 실체는 없다고 한다.[諸法無我] 또 어떤 대상이 우리의 감각과 관념을 통해 파악되는 것과 별개로 그 자체의 실재적인 면[#]은 어떤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렇게 실재의 내용을 찾는 차원에서는 다시 그런 실재내용은 얻을 수 없으며 공(空)하다라고 한다. 즉, 그 실재(實在)는 실체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실재내용은 있다-없다, 이다-아니다, 같다- 다르다 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다[一切皆空]고 한다.

여기서 다양한 차원들이 논의되고 있다. 이를 잠깐 살피기로 한다. 우선 꽃을 생각해보자. 이 꽃에 대해 다양한 차원의 논의가 가능하다. 우리는 꽃을 보고[감각차원!] 눈을 감은 뒤 꽃의 모습을 관념으로 떠올릴 수 있다[관념차원@] 한편 이들을 꽃이라 부른다[언어차원%] 그리고 눈을 뜨거나 감거나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꽃의 모습을 보이게 한 실재하는 꽃[실재내용#]을 추리할 수 있다. 또 이와는 별개로 꽃을 일정하게 꽃으로 나타나게 하는 영원불변고정된 실체로서의 꽃[실체$]도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꽃이라는 언어[%]로 함께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차원의 내용이므로, 각기 다른 기호[!.@.#.$.%]로 표시한 것이다.

여기서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앞의 영원성 문제에서도 일부 살폈다. 여기서는 이런 주장들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는다. 여기서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경우, 이런 판단들이 우리의 삶의 목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살피기로 한다.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이며 공(空)하다는 이 말은 옳을 수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이런 진리의 내용을 깨닫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며, 부처가 되거나 아라한이 되기 위해 깨달아야할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런 진리는 선하거나 행복하거나, 또는 악하거나 불행하거나 모든 현상에 평등하게 적용된다. 그런데 이런 진리를 깨닫는 것을 강조하다보면, 때로 선 악 행복 불행 등을 차별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비약(飛躍)되기 쉽다. 실제로 불교 몇몇 종파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본 평등성이 근거가 된다. 즉, 악한 것이거나 선한 것이거나, 그것은 모두 함께 무상하고, 무아이고, 또 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자칫 모든 것이 평등하게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므로 아무렇게나 행위하고 선택해도 된다는 주장으로 흐르기 쉽다.

사실 이런 잘못된 판단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뤄질 수 있다. 우선 부처와 같은 상태를 목적으로 추구한다. 처음부터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을 실현 목표로 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이미 현실에 있는 진리내용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를 목표로 한다면, 현실의 어떤 것이든 그런 조건을 다 충족하므로 무엇이든 거림낌없이 다 선택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무런 선택기준이 없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 보다는 다음과 같은 논리 과정을 거친다. 먼저 부처나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부처나 깨달음이나 일반 악인이나 어리석은 상태나 모두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인 점은 같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부처나 일반 악인이나 이점에서는 평등하다. 따라서 굳이 특별히 부처가 되는 것은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런 잘못된 결론을 얻기 쉽게 된다.

그러나 일단 부처나 어떤 수행 목표는 그것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기 때문에 부처나 수행 목표로 제시된 것이 아니란 점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그런 특성 때문에 어떤 존재가 부처나 목표로 제시되었다면, 거기에 해당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물론 부처나 어떤 수행목표가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의 특성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처나 수행목표는 그 외에도 다른 특성을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라는 진리와 선악에 대한 깨달음, 번뇌를 벗어남, 중생을 제도함과 같은 특성이 그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음, 탐욕, 성냄에 집착함, 악행에 빠짐 등과 같은 특성과 차별된 것이다. 또 이런 차별적 특성 때문에, 부처나 목표가 제시된 것이며, 공통적 특성인 무상, 무자성, 무아, 공 등의 특성 때문에 이들이 제시된 것이 아닌 것이다.

한편 불교의 이런 진리에 대한 주장은 모든 대상이 공통적으로 갖는 진리를 제시할 때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공통된 성질을 제시할 때 그것들은 물론 모두 평등해진다. 예를 들어 ‘경찰관이나 도둑은 각기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인간’이다’는 말처럼 공통성을 제시하면 같은 측면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살인하거나, 폭행하거나, 훔치거나, 또는 반대로 사람을 살리거나, 돕거나, 남에게 물건을 베풀어 주거나 이들 모두는 영원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며 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라는 것과 그 중 어떤 것이 가치있고 선하며 어떤 것을 추구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만일 공통성과 평등성에 기초해 판단하면 어떤 선택이나, 의사결정을 하기 어렵게 된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라는 사실을 같지만, 그 중 어떤 것은 좋음을 주고 어떤 것은 나쁨을 주며 더 나아가 어떤 것은 가능한 많은 주체에게 오랜 기간 좋음을 주고 어떤 것은 반대로 가능한 많은 주체에게 오랜 기간 나쁨을 준다. 그리고 이런 차별성에 기초하여 행복, 불행, 선, 악의 구분이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치판단, 의사결정을 할 때는 각 행위나 대상이 갖는 차별성에 기초해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노란 색이나 푸른 색이나 흰색이나 모두 색이라는 점에서는 평등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에서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싫다는 차별적인 판단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방의 색을 칠할 때는 같은 색이지만 어떤 색으로 칠해햐 가장 좋은 느낌을 받게 되는가를 판단하여 선택하는 것이다. 또 사람을 살리고 베풀어주거나 또는 살인 도둑질 등이 다 같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살인 도둑질하는 것이 무방하고 괜찮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모두 진리의 측면에서는 같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선악을 차별적으로 판단하여 선한 것을 선택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택과정에서 가치판단을 하는 문제와 모든 현상에 대해 공통된 진리를 파악하는 문제를 혼동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든 현상이 다 무상하고, 무자성, 무아이며, 공하지만,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 선한 행복을 실천하는 것인가를 고려하여 선택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최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역시 선-뜻의 실현-진리-행복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6) 결론

이상, 보통 최고의 가치로 거론될 수 있는 요소들로 완전성, 자아실현, 신의 구원, 시간적 영원성, 열반, 해탈, 윤회의 끊음, 무상, 무아, 공의 깨달음 등을 나열해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사회적 정의 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의는 선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를 선(善)에 넣어 이해하고 별도로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이들 내용들은 어떤 경우에는 선한 행복과 같은 내용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이 선한 행복을 의미하지 않을 때는 최종적으로 선한 행복이 더 상위에 놓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이들 각 목표는 잘못된 내용으로 흐르기 쉽다. 선한 행복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 이들 목표가 초래하는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완전성은 무의미한 기준 충족에 불과하게 된다. 또 자아실현은 무의미하거나 악한 본질의 실현이 될 수 있다. 또 신의 구원은 악한 우월자인 악신에 의한 악한 구원이 될 수 있다. 또 영원성은 무의미하거나 악한 불행상태의 시간적 지속에 불과할 수 있다. 또 윤회를 끊음도 단순히 무의미한 생의 단절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이들이 목적으로 제시될 때에도 다시 그 내용들이 그 보다 상위개념인 선한 행복으로 보충되고 통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무의미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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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다음의 전체적인 글의 일부입니다.
無名 著, <가칭><<최상의 행복 총론>>, 목차

이 글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교정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최종 완성되기 전에 미리 여러분의 거리낌 없는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본 책은 각 부분이 교정되는 대로 그 각 부분을 인터넷에 공개하며,
책 전체분량의 최종 완성 이후전 내용을 계속 인터넷상에서 무료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공개된 내용은 자유롭게 이용하시되,

다만 어느 경우에나 저작자의 허락없이 내용을 임의로 변경하여 이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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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최상의 상태의 구성요소간의 우열

가. 가치의 전도(顚倒)현상

앞에서 가치의 우위의 순위로 선- 선한 상태의 실현 - 지혜 - 행복 - 일반적인 상태의 실현 등을 보았다.
그런데 어떤 가치 없는 것에 집착하면, 보다 가치 있는 것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게 된다. 이처럼 뒤바뀐 가치판단을 하고 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가치전도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가 뒤바뀔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란 간단하다. 희망을 그리고, 추구하고, 실현하는 과정은 이 두 경우 모두 비슷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기준이 달라 선택하고 추구한 내용이 다르게 되고 또 그 결과 나타나는 모습이 다르게 된다. 만일 뜻대로 성취된 경우를 예를 들면, 선과 행복을 추구한 사람은 선과 행복의 증진을 거둘 것이다. 그러나 객관상태를 선과 행복보다 우선시킨 사람은 어떤 객관상태는 이루지만, 선과 행복은 얻지 못할 수 있다. 뜻대로 성취되지 않는 경우 그 결과는 물론 각 경우마다 달라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경우에도 그 마음상태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치의 전도현상은 우리의 주변에서 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늘 이를 주의하여 항시 올바른 가치판단과 선택이 행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1) 선보다 행복의 우선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으키기 쉬운 뒤바뀐 가치판단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사회적선보다 개인의 자신만의 행복을 절대시하기 쉽다. 각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가장 집착하는 일반적인 심리를 보통 벗어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만이 지상 최대의 목적이며 사회적 선은 아예 무시하거나 자신의 행복 다음의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각 생명이 가장 범하기 쉽고 일반적으로 행하는 가치전도가 된다. 더 나아가 마음의 행복을 절대시한 나머지, 사회적 선을 실현할 외부 상태를 마련하거나, 이에 필요한 지혜를 갖추는 것을 경시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가치를 뒤바꿔 판단한 것이 된다.


2) 객관상태의 우선

두 번째는 또 다른 이유로 내심의 행복 보다 바깥모습이나 물질적 상태를 절대시하는 가치전도 현상이 있다. 물론 외관이나 물질적 상태가 사회적 선과 관련되어 이를 중시하는 것은 가치의 전도로 볼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차원이 아니고 순수이 개인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심의 상태보다 외관(外觀)에 보다 비중을 두는 경향이 나타나기 쉽다. 물론 물질적 상태 등이 내심의 상태와 함께 행복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심의 상태나 외부 물질적 상태는 다 함께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앞에서 보듯 실제 어떤 객관상태가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각 개인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보다는 외부 객관상태 자체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객관상태를 서로 비교해 서열을 나누고 여기에 보다 많이 집착하게 된다. 이는 주종(主從)이 뒤바뀐 상태다. 그리고 이런 뒤바뀐 가치판단을 고집하는 한 현실에서는 그에 따른 왜곡(歪曲)현상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실제 이런 집착현상은 현실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집착을 통해 객관상태는 실현해 얻어도 여기로부터 최종적으로 얻어야 할 행복은 얻지 못한 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객관상태는 행복에 이바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마음상태에서 어떤 주체가 행복한가 여부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어떤 집에 살고 있다고 할 때 그가 그 곳에서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 여부는 사실상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는 쉽게 파악할 수 없다. 또 행복과 불행의 정도를 일정한 수치로 나타낸다거나 이를 서로 비교 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이에 반해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지위에 있는가와 같은 일정한 객관상태는 쉽게 겉으로 드러난다. 또 그런 객관상태는 물리적 양이나 수치나 서열로서 쉽게 비교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주체들이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할 때, 또는 자신 스스로 타 주체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려 할 때, 또는 자신이 그런 타인의 자신에 대한 평가내용을 의식해 추리해보려 할 때, 또는 어떤 상태를 그냥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 좋고 나쁨을 평가하려 할 때에 이런 객관적 상태를 비교하여 낫고 못하고를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객관상태에 대한 가치평가에는 다음 문제가 있다. 이 같은 평가는 보통 객관상태가 좋음에 얼마나 이바지할까를 추리 판단하여 행한다. 그런데 이는 그 상태에서 어떤 주체가 실제 느끼는 좋음과는 분리된 평가가 된다. 이는 각 상태에서 좋음의 느낌을 직접 경험한 뒤 비교 평가한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상태에서 ‘실제로 누군가가 좋음을 느끼는가’와 ‘그 상태가 보기에 좋다고 생각한다’는 추상적 가치평가가 서로 분리된다. 이는 미세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주체가 각 상태에서 어느 정도로 좋음을 얻을 것인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각 주체는 그와 관계없이 어떤 객관 상태를 띄어 놓고 희망을 갖거나, 비교하여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단지 외관을 놓고 볼 때 무엇이 무엇보다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판단과 희망을 서술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이런 평가는 각 상태의 모든 면이 아니라, 외부에 드러난 한 두가지 측면을 피상적(皮相的)으로 평가한 결과가 되기 쉽다. 외부 관찰과정에서는 드러난 사항만 평가되기 때문이다. 또 이는 그것을 행한 각 주체별로 또 각 주체가 놓인 구체적인 상태별로 달라진다.

그런데 각 상태의 가치는 최종적으로 그 상태가 구체적인 주체에게 실제로 좋음[행복]을 주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외관상 평가에서 ‘좋음을 준다고 보인다’는 평가는 많은 경우에 실제로는 좋음을 주는데 실패한다. 좋음을 얻는가 못얻는가는 어떤 주체가 그 상태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가에 따르게 된다. 또 그가 무엇과 그 상태를 비교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실제로 받는 내용’과 ‘외관상 보여진 내용’과는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0억을 갖고 있는 이는 외관상 다른 이에게 좋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가 200억을 갖고 있는 이와 자신을 비교하여 불만에 빠져 있다거나, 또는 건강이나 명예와 같이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그 상태를 평가하여 불만에 빠져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차이가 발생할 때, 수단인 바깥 외관(外觀)은 다른 주체에게 보이고 평가받는 반면, 목적인 내심의 행복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수단인 바깥 외관을 더 중시하는 왜곡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정말 내심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보다는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타인의 인정이나 부러움들을 받기 위해 일부로 그렇게 보이도록 외관을 중시하고 꾸밀 뿐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주체는 타인의 인정이나 평가가 주어질 때 주로 이를 통해 만족해하게 된다. 물론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경우도 비록 특수한 방식이지만 최종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얻는 것은 다른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주체는 행복을 얻는 주된 수단으로 특별히 타인의 평가에 크게 의존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런 경우, 무엇과 비교하는가에 따라 만족과 불만이 크게 달라지고, 주체적인 확고성을 잃고 사는 면이 나타난다. 또 이런 주체는 자신의 내심에서 스스로 평가하는 내용은 가볍게 대하기 쉽다. 그것이 어떠하든 다른 주체에게 잘 보이지 않고 평가받지 않기 때문에 경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자신은 옷이 불편하거나 예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 옷을 좋다고 한다. 이런 경우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불편한 옷을 골라 입고 만족해 하게 된다. 이른바 일종의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이 행세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평가나 인정이 행복을 얻는 과정에 전혀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타인의 평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내심의 요소를 포함하여 다른 외부 요소들과도 평등하게 자신의 행복에 봉사하는 한 요소로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만일 이들 사이에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일방에만 치우치게 되면 행복의 평가에 주체성을 잃고 가치비중이 뒤바뀌는 결과를 낳게 된다.

수단과 관련한 행복의 문제는 이외에도 많다. 행복의 실현에 각 수단은 실제 어느 정도 필요한가, 또 왜 행복 추구과정에서 수단에 집착하게 되는가 등이 그런 문제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론부분에서 별도로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
참조
\g\3R\r890.hwp 수단과 행복의 문제에 대하여


3) 수단의 목적에 대한 우선

세 번째는 행복을 위해 어떤 수단을 추구하고 또 그 수단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수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우위가 뒤바뀌는 경우이다. 앞에서 본 내용도 이들 가운데 하나의 예가 된다. 그러나 수단과 그 하부 수단들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은 일어난다. 예를 들어 행복을 위해 부를 추구하고 부를 얻기 위해 직업을 구하고 또 그러기 위해 어떤 전문지식을 습득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수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하나에 집착하게 되면, 이제는 실제로 그 보다 최상의 가치를 갖는 요소들을 이로 인해 무시하고 경시하기 쉽다. 집착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면 쉽게 그것이 잘못된 집착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당면한 어떤 것에 집착하고 나면 그 이후 그 가치가 확대되어 인식되는 현상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면 조그만 물체가 전 우주처럼 확대되어 의식된다. 그래서 자칫 원래 현미경을 보게 했던 원래의 근본목적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실제 수단에 불과했던 것에 과도히 집착하여 본 목표나 보다 상위의 가치를 무시하고 희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를 주의해야 한다.

한편 최상의 상태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선_실현_진리_행복]은 물론 모두 갖춘다면 가장 좋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이들 요소 간에 우선 순위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현실에서 최상의 상태를 향해 가는 데는 이들 각 요소가 서로 충돌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들 요소가 서로 충돌될 때는 무엇을 희생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이 경우 잘못하여 하위의 가치를 위해 상위의 가치를 희생하면 이것도 가치의 전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먼저 밝히면 선한 뜻이 가장 우선이고 그 다음이 실현이며, 그 다음이 지혜이며 그 다음이 행복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를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한편 최상의 상태를 위와는 다른 내용으로 생각하는 입장도 있다. 그런데 앞의 입장에서는 다른 내용을 앞에 제시한 것보다 우선시하면 가치전도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다른 입장에서는 앞에서 밝힌 내용이 오히려 가치전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최상의 요소로 거론될 수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들 문제는 아래에서 차례대로 살피기로 한다.

나. 우열판단기준

삶에서 목표와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최상의 상태를 판단함이 필요함을 보았다. 그리고 앞에서 제시한 기준은 선함, 실현, 진리, 행복이라는 요소를 통해 선택해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삶을 살아가면서 악한 희망, 실패, 거짓, 불행을 피해야 함을 의미한다.

만일 이들 요소를 고루 갖출 수 있다면 가장 낫다. 그러나 선함-실현-진리-행복이라는 각 요소가 모두 충족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그래서 만일 이들이 서로 충돌되어 어느 일부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하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여기서 앞에 나열한 것은 뒤에 나열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앞에 나열한 요소를 뒤에 나열한 요소보다 우선시해야 한다. 여기서는 그 이유와 근거를 밝히기로 한다.

무엇이 더 낫고 더 중요한가를 판단하고자 할 때는 다음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즉, 비교되는 둘 가운데 각기 어느 하나를 갖추고 다른 하나는 갖추지 못한 두 상태를 놓고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나은가를 판단함으로써 가능하다. 또는 어느 하나를 갖추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의 것을 갖춘 상태를 놓고 서로 비교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선함-실현-지혜-행복이라는 각 요소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살필 때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경우를 나열할 수 있다.

먼저 선(善)과 다른 요소를 비교해보자. 여기서는 대조를 쉽게 하기 위해 정반대의 경우를 놓고 비교하기로 한다.

① 뜻은 선하지만 실현이 되지 않은 경우 - 뜻이 악하지만 실현이 된 경우
② 뜻은 선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경우 - 뜻은 악하지만 지혜로운 경우
③ 뜻은 선하지만 행복하지 못한 경우 - 뜻은 악하지만 행복한 경우

이제 뜻의 실현과 다른 요소와의 비교다.

④ 뜻이 실현되었지만 지혜롭지 못한 경우 - 뜻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지혜로운 경우
⑤ 뜻이 실현되었지만 불행한 경우 - 뜻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행복한 경우

지혜와 행복의 경우와의 비교다.

⑥ 지혜롭지만 행복하지 못한 경우 - 어리석지만 행복한 경우

이들 여러 경우를 비교해보건대, 선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 뜻의 실현, 지혜, 행복의 순으로 중요하다. 참고로 주관적인 행복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뜻의 실현, 지혜보다는 행복이 우선한다는 결론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뜻의 실현과 지혜는 그것이 선한 뜻의 실현과 관련하여 중시되는 요소다. 그리고 선이 행복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하는 전제에서 이들이 선의 실현과 밀접하게 관련되므로 행복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처럼 간단하게 결론을 밝혔지만 이런 우열판단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각 경우를 나누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선과 뜻의 실현의 우열관계

뜻은 선하지만 실현이 되지 않은 경우 - 뜻이 악하지만 실현이 된 경우

선한 뜻을 잘 실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선과 뜻의 실현이 서로 충돌될 때는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선한 뜻과 달리 자신이 실현시키고 싶은 뜻이 있을 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선과 ‘뜻의 실현’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판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대조되는 두 경우를 생각해보자. 즉, 뜻이 ‘선’하지만 뜻의 실현을 못한 경우와 - 뜻이 악하지만 ‘뜻을 실현’하는 경우이다.

선하지만 뜻의 실현을 못한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남을 도우려 했는데, 실제로 가진 것이 없어서 돕지 못한 경우가 있다. 이처럼 그 동기와 의도가 선하지만 희망은 실현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또 원래의 뜻은 선하지 않지만, 결과만 선하게 된 경우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밖에 나가려 했는데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철수를 돕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선하게 되었지만 원래의 뜻을 실현하지 못한 경우이다. 또 철수를 도우려 했는데 철수는 돕지 못하고 대신 영희를 돕게 된 경우가 있다. 즉 동기와 발생한 결과가 모두 선하지만 원래의 뜻은 실현하지 못한 경우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훔치려는 뜻을 갖고 그것을 잘 실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 뜻이 실현되지만 동기와 결과가 모두 악한 경우이다. 이런 예들을 통해 볼 때 악하지만 뜻을 실현하는 경우보다 실현을 못하지만 선한 경우가 낫다고 할 것이다.

정반대로 경우를 놓지 않고 살펴도 같다.
뜻은 선하지만 실현되지 않은 경우 - 뜻은 선하지 않지만, 실현된 경우도 위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뜻이 선하지 않은데 실현된 경우는 개인의 성취 만족감에는 1차적으로 이바지한다. 그러나 그 결과가 나타났어도 다수 주체의 행복과 무관하므로, 높은 가치 평가를 받기 곤란하다. 이에 반해 뜻이 선하지만 실현되지 않는 경우는 결과는 비록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주체의 인격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게 된다.
2) 선과 진리의 우열관계

뜻은 선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경우 - 뜻은 악하지만 지혜로운 경우

선함과 지혜[진리]가 서로 충돌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선함과 지혜는 사실상 함께 갖춰야 할 요소다. 왜냐 하면 선의 판단, 선을 실현시킬 방안 등을 진리에 기초하여 찾지 않으면 선을 제대로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지혜로운 선과 지혜롭지 못한 선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지혜로운 선이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혜롭지 못하고 선한 경우에는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선을 추구한다거나, 또는 실현방안이 잘못 되어 결과적으로 악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진리는 선한 뜻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사실은 이 둘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진리를 제대로 아는 바탕에서 진리에 상응하여 선한 목적과 실현 방안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부득이 이 둘이 충돌되어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진리가 갖는 효용을 먼저 살펴보자.

우선 진리는 그 내용을 어떤 이가 잘못 알더라도 그 진리의 대상이 갖는 내용이 바꿔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술을 누군가가 물이라 잘못 안다고 하여 술이 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즉 이런 점에서는 진리를 아나 모르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진리에 상응하여 제대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어떤 차이를 갖는 것인가. 우선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어떤 내용을 알고자 할 때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욕구의 충족을 가져다 준다. 두 번째는 이런 지식을 토대로 가치판단을 하고 목적을 설정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 다음 그 목적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실현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습득함으로써 그 주체의 인격전반에 변화가 오게 된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행위를 하여 다른 외부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진리의 내용을 모르거나 잘못 알게 될 때는 잘못된 앎을 토대로 잘못된 뜻을 설정하게 되고 또 잘못된 실현방안을 찾고 이에 기초해 행위 하여 외부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진리가 갖는 의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진리를 알고 또 목적을 설정하고 방법을 찾고 실현하는 등으로 무언가를 행할 때, 그런 모두가 최종적으로 어떤 가치를 갖는가는 결국 선악의 판단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선함이 진리보다 중요하다고 해야 한다.

두 가치가 충돌될 때의 판단을 쉽게 하기 위해 서로 대조되는 두 경우를 들어 비교해보자. 즉, ‘선’하지만 진리를 틀리게 아는 경우 - 악하지만 ‘진리’를 잘 아는 경우를 비교해보자.

진리는 앞에서 본 것처럼 사실에 대한 판단- 가치에 대한 판단 - 목적설정 - 실현방안의 도출 등에 매우 필요하다.

이제 진리를 잘못 알지만 선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구체적인 예를 들어 영희는 술을 물이라 잘못 알았다. 또 철수가 목이 말라 하지 않는데 목이 말라하는 것으로 잘못 안다. [사실판단의 잘못] 한편 철수는 사람들을 해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영희는 그것을 모르고, 상대가 누구이든 또 어떤 방법이든 남을 도와주기만 하면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가치판단의 잘못] 따라서 영희는 사람들을 해치려는 뜻을 갖고 있는 철수를 도울 생각으로 [목적의 잘못] 우선 물이라 생각하고, 그 술을 훔쳐서 술을 마시게 한다. 또 철수가 술을 많이 마신 후 어지러워하자 병이 난 것으로 잘못 알고 그 병을 고치려 점술이나 부적 등을 통해 낫게 하려 노력했다.[실현방안의 잘못]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철수가 술이 깨게 되고 마음을 돌려 남을 해치지 않게 되었다고 하자. 이상과 같이 영희의 매 판단은 진리의 내용과 어긋나 있다. 그러나 그 의도나 결과가 선한 모습을 띄는 부분이 있다.

반면 진리에 상응된 내용을 제대로 알지만 악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위와 같은 예에서 어떤 이는 술을 술이라 제대로 알고, 또 철수가 남을 해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하자. 그 외에도 그는 세계의 본질 및 구조 등에 관해 수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또 자신의 목적을 실현시킬 방안도 정확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악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남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철수를 돕기로 하고 철수가 뜻을 쉽게 이루게 하기 위해 술을 먹이고 흉기를 건네주고 뜻을 부추겨서 철수가 많은 사람을 해치게 만들었다고 하자.

우리는 이런 두 예에서, 진리를 잘못 알지만, 그래도 선한 의도를 갖거나 선한 결과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나음을 볼 수 있다.

간단하게 어리석어 잘 모르고 그 뜻도 잘 실현시키지 못하지만, 그 뜻은 널리 생명에게 행복을 주려는 경우가 낫다. 반대로 많은 것을 사실대로 잘 알고 지혜롭지만 그런 지식과 지혜를 자신이 이익만을 추구하여 다른 생명을 괴롭히는 목적에 사용하는 경우는 그 악의 해악이 보통의 악보다 더 커진다. 따라서 악한 경우에는 차라리 지혜롭지 못한 것이 낫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어리석더라도 선한 경우에는 지혜로운 악보다는 낫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3) 선과 행복의 충돌

뜻은 선하지만 행복하지 못한 경우 - 뜻은 악하지만 행복한 경우

만일 한 주체가 선한 상태를 추구하면서 행복을 얻는다면 이 경우가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선한 행복과 선하지 않은 행복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좋음이 더 많은 선한 행복 쪽이 낫다. 행복은 하나로도 가치가 있다. 그런데 행복이 여러 주체와 기간에 걸쳐 많이 쌓인다고 하여 그 가치가 나쁘게 바뀌지는 않는다. 이런 사실을 기초로, 선(善)한 행복의 경우가 단순한 하나의 행복보다는 낫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선한 상태가 어떤 한 주체에게는 불행을 주는 경우처럼 선과 행복이 엇갈리는 경우가 있다.

앞에서 보았듯 선악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선(善)을 만일 완전한 개념으로 하여 어떤 상태와 관련된 주체 ‘전부’와 기간 ‘전부’에 걸쳐 ‘좋음’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이런 개념정의에서는 ‘선’한데 어떤 주체가 ‘불행’한 경우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완전 선을 예상할 수 없다. 따라서 선의 개념을 완화하여 가능한 경우들에서 가장 상대적으로 많은 주체들이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좋음의 차이[좋음-나쁨]를 주는 상태를 선(善)으로 설정했다. 물론 가장 적은 경우는 악(惡)이 된다. 그 중간영역은 선과 악의 중간상태로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선을 정의하면 어떤 상태가 선하지만 어떤 한 주체에게는 나쁨을 주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 만일 어떤 한 상태가 모든 생명 주체에게 동일한 형태로 좋음과 나쁨을 준다면 원천적으로 이런 선과 행복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 주체가 행복을 느낄 때 다른 모든 주체도 같이 행복을 느끼므로 행복과 선의 방향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한 상태는 모든 주체에게 동일하게 좋음을 주지 않는다. 어떤 주체에게는 좋음을 주고 또 다른 주체에게는 나쁨을 주는 등으로 서로 엇갈리게 된다. 선과 행복의 충돌은 이런 사실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상태 A는 원인-결과-영향의 면에서 여러 주체를 놓고 볼 때 좋음의 차이[좋음-나쁨]을 가장 많이 가져다 줄 수 있다. 따라서 선한다고 평가하게 된다. 그런데 그 A의 상태가 원인-결과-영향의 면에서 어떤 한 주체에게는 전체적으로 좋음의 차이[좋음-나쁨]을 적게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래서 그 주체는 이 경우를 불행한 상태에 넣게 된다.

이렇게 두 가치가 충돌될 때는 어떤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 판단을 쉽게 하기 위해 서로 대조되는 두 경우를 들어 비교해보자. 즉, ‘선’하지만 불행한 경우와 악하지만 ‘행복’한 경우를 비교해보자.

우리는 이 두 경우의 비교에서 선하지만 불행한 경우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데 쉽게 동의할 지 모른다. 예를 들어 남들을 괴롭히고 재산을 모두 훔치면서 자신은 행복한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보다 자신은 고통받고 괴롭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주체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되는 경우가 낫다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경우에 만일 ‘공평한’ 제 3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이 판단할 것이다. ‘공평한’ 입장이라면 어떤 한 주체의 좋음을 특별히 다른 주체의 좋음보다 더 비중을 둬야 할 근거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이들 각 주체를 각기 평등하게 놓는다. 그리고 각 주체들이 받는 좋음과 나쁨도 평등하게 놓는다. 그 다음 이들 모두가 받는 [좋음-나쁨]의 총량을 비교하여 전체적으로 좋음의 차이[좋음-나쁨]가 많이 나타나게 될 상태를 더 낫다고 평가하게 된다. 이것이 앞에서 본 선악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물론 실제 이론처럼 엄밀하게 그 값을 계산하고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이런 이론이 하나의 추상적 평가기준이 되어줄 수 있다. 그리고 자신과 이해관계, 친밀, 원한관계 등이 전혀 없는 타 주체와 타 주체간에 충돌이 일어날 때는 사실 이런 식으로 평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반적인 판단과 달리, 자기 자신의 행복과 선이 충돌하게 되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쉽게 자신의 행복을 우선하기 쉽다. 예를 들어 자신의 콩팥을 떼 내면,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는 경우라고 가정해보자. 또는 매달 한 번씩 헌혈을 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막상 수술이나 헌혈의 고통을 택하려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한 주체는 자신의 좋고 나쁨의 느낌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직접적으로 느낀다. 그러나 먼 미래의 좋음이나 타 주체의 좋고 나쁨은 추리를 해야 비로소 생각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명확하지 않고 또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느낄 수 있는 좋고 나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혀 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이 때 그는 그 고통을 다른 사람의 다리가 잘려지는 고통보다 더 크게 생각하게 된다. 또 기쁨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자신이 느끼는 좋고 나쁨에 더 비중을 두기 쉽다. 어떻게 보면 이는 각 생명이 갖는 본능에 충실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생명체가 이성(理性)이 발달하면 자신의 선택으로 먼 시간 후에 받게 될 좋고 나쁨도 계산하여 행동하게 된다. 또 더 나아가 다른 주체가 받을 좋고 나쁨도 고려하게 된다. 그래서 만일 먼 미래의 좋음이나 타 주체의 좋음을 모두 현재 느끼는 느낌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이 경우에는 그 모두의 좋음을 현재 순간에 자신이 직접 느끼는 것과 같이 받아들임으로서 당연히 그 좋음의 차이[좋음-나쁨]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개인의 행복도 충돌할 여지가 없다. 왜냐 하면 타 주체들이 느낄 좋고 나쁨도 한 주체 안에서 모두 함께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리되는 좋고 나쁨은 인격적 수련이 되지 않은 경우 직접 느끼는 좋음에 우선하기 힘들다. 그래서 보통 이들이 충돌되면 직접 느끼는 좋고 나쁨에 더 이끌리게 된다. 물론 이는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성적 판단과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담배나 술이 장기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때 그 때 욕구가 밀려오면 이를 끊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타 주체의 좋음 등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의 주관적 행복의 내용에는 잘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선과 행복은 구체적으로 일치되지 않게 나타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다음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선 자신이 먼 미래에 느낄 좋음은 현재에서는 추리되는 내용이다. 그렇더라도 미래의 순간이 찾아오면 자신이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장기간에 걸쳐 좋음의 차이를 많이 가져다 줄 쪽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예를 들어 약이 당장은 쓰지만 그것을 먹고 병이 낫아 오래 좋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또 반대로 미래에 잠시간 좋기 위해 오늘 과다한 희생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현명하다.

하지만 타 주체의 좋음은 이와 약간 다르다. 그것은 추리되는 타인의 좋음의 느낌을 미래의 순간에 자신이 직접 느끼게 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 주체의 좋음도 일정한 경우에는 자신의 좋음과 관련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위의 원리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즉, 현재 타 주체를 위해 희생하면 그것을 원인으로 자신이 미래에 좋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반대로 자신의 좋음을 위해 타 주체에게 해를 끼치면 그로 인해 미래에 나쁨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미래의 좋고 나쁨을 계산하여 앞에서 본 원리를 통해 비교하여 선택할 수 있다.

또 자신의 자녀, 부모, 형제 연인 등과 같이 자신이 친밀감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타 주체의 좋고 나쁨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선택한 장난감이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처음에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자녀의 입장에서 느끼는 기쁨을 다시 자신의 기쁨처럼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타 주체의 좋고 나쁨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여 이를 함께 비교하면, 선택할 길이 열린다.

한편 더 나아가, 타 주체들에게 친밀감, 동질감을 느끼도록 노력하여 앞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을 시도할 수도 있다. 즉 타 주체들이 느끼는 좋고 나쁨을 자신이 느끼는 것과 동일시하게 되면, 이들이 자신의 좋고 나쁨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이들 경우에서는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행복의 선택이 선의 방향과 같아질 수 있다. 그래서 선과 자신의 행복의 충돌이 해결될 수도 있다.

물론 다른 정반대의 예도 있다. 예를 들어 앞과 반대로 타 주체들과 미움, 원한관계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타 주체가 좋고 나쁨을 받을 때 자신은 이와 반대형태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경우는 정반대가 되어 오히려 더 해결하기 힘들게 된다.

이런 경우 외에도 쉽게 타 주체의 좋고 나쁨이 자신의 것으로 바뀌지 않는 경우는 많다. 이런 경우 타 주체와 자신의 입장을 동일시한다거나, 상대와 입장을 전환하여 상대의 입장이 되어 공감해보지 않는 한 그 좋고 나쁨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것은 추리되는 불명확한 내용으로 남게 된다.

이런 경우 다음과 같이 충돌을 해소하는 방법이 다시 남아 있다. 한 주체가 선을 선택하면 나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를 대하는 마음태도를 변경하면 좋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충돌현상을 조화롭게 해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선택한 내용에서 만족을 찾으려 노력하거나, 감사하려하거나, 다른 나쁜 상태와 비교하는 등으로 만족을 얻는 경우다. 그래서 처음 나쁨을 주는 상태에서 좋음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누구의 마음태도를 그렇게 바꿀 것인가에 따라 두 가지 방안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선과 한 주체의 좋음이 충돌된다고 하자. 이 때 그 주체가 선을 선택하고 나쁨을 주는 상태에 스스로 마음을 바꿔 좋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상태를 선택하고 타 주체들의 마음을 변경시킬 수도 있다. 또는 타 주체들이 스스로 마음태도를 변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들이 좋음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하나의 상태에 대해 함께 좋음을 느끼게 된다면 선과 개인의 행복의 충돌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방안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태도 변경도 현상상태의 변경처럼 한계를 갖고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뜨거운 불에 손을 넣은 상태에서 단지 마음태도를 변경해 좋게 느끼려 해도 잘 되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안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어느 한쪽을 반드시 희생해야 할 상황에서의 선택문제가 남는다.

우선 주관적인 입장, 또는 행복 지상주의의 입장에 선다면, 자신의 행복이 선보다 우선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는 왜 타 주체를 고려해 자신의 좋음을 희생해야 하는가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 이론상 설득은 되더라도 실제 선택과정에서는 실행하지 않기 쉽다. 즉 추상적인 선보다는 자신이 직접 느낄 행복을 우선시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런 행복 지상주의자의 입장을 관철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선을 파괴하는 것도 허용하게 된다. 그것은 곧 악한 행복을 허용하는 것이 된다.
한편 이런 행복 지상주의 입장은 타 주체들도 동일하게 취할 수 있다. 행복지상주의들 간에 충돌이 일어날 때는 단순히 사실력[힘]이 앞선 자의 행복이 실현되게 된다. 각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힘의 우열 외에 이들의 충돌을 해결해줄 다른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력의 우열에 따라 때로는 자신에게 유리할 때도 있지만 불리할 때도 있다.

반면 선(善) 우선주의는, 이런 경우 물론 선한 쪽의 행복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선 우선주의에서도 어떤 개인이 항상 유리한 입장에 놓일 수는 없다. 그러나 행복지상주의보다는 훨씬 합리적인 원칙으로 자신의 행복을 보호받게 된다. 즉 단순히 힘이 우위에 있을 때 자신의 행복을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이 전체의 입장에서 많은 좋음을 주는 선의 입장에 있을 때 보호받게 되는 것이다.

힘이 우세한 자는 행복지상주의가 선 우선주의보다 자신의 행복이 실현될 가능성을 많이 준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행복 지상주의자들도 타 주체간에 충돌이 있으면, 선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이 관련되지 않는 사항이기 때문에 쉽게 이성적인 공평한 판단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지상주의자가 선을 우선하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계기는 다음과 같다. 즉, 타 주체간의 충돌 사항에 자신이 공평한 제 3자의 입장에서 내렸던 판단 원칙을 자신이 타 주체와 충돌하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시켜야 한다는 이성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면 먼 시간 후의 좋음이나 또는 다른 주체가 받는 좋음도 자신이 현재 느끼는 좋음과 평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여기서는 물론 선이 행복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결론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천적으로 어떻게 이런 이성적인 결론에 따라 늘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가 문제된다. 그것은 선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해야할 상황에서 특히 요구된다. 이런 경우 앞에서 충돌이 해결되는 예들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타 주체의 좋음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좋음으로 연결됨을 생각해보는 노력, 타 주체와 동일감, 친밀감을 가져보려는 노력, 입장을 바꿔 생각해 타 주체와 공감해보려는 노력 등을 통해 자신의 행복과 선의 입장이 같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는 선한 상태를 선택한 뒤 그 상태에 맞춰 자신의 마음태도를 바꾸도록 노력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행복한 상태에 상대도 좋음을 느낄 수 있도록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종적으로는 공평한 제 3자의 이성적인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선과 자신의 행복의 상태를 일치시키려는 노력 등이 필요하다.

앞에서는 정반대의 경우를 비교하였다. 그러나 뜻은 선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경우 - 뜻은 선하지 않지만, 행복한 경우도 이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다.
4) 뜻의 실현과 지혜[진리]의 우열관계

뜻이 실현되었지만 지혜롭지 못한 경우 - 뜻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지혜로운 경우

뜻을 실현함과 지혜는 그것이 선의 실현을 위할 때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이 둘은 선한 뜻과 관련해 같이 요구되는 요소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둘 가운데 굳이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이 우선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뜻을 실현’하였지만 그에 관계된 진리를 모르는 경우와 뜻을 실현 못했지만 그에 관계된 ‘진리’를 잘 아는 경우를 비교해보자. 그리고 이것을 비교함에 있어 모두 그 뜻이 선한 경우로 제한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만일 뜻이 악한 경우라면 반대의 결론을 취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물을 석유로 잘못 알고 있다. 또 불을 끌 때는 석유를 부어도 꺼질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다고 하자. 그는 불을 끄기 위하여 석유를 붓는다고 부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속에 물이 들어 있어서 불을 끌 수 있었다고 하자. 생각해보면 위험천만한 경우다. 그러나 다행히 목적을 이룬 경우에 해당한다.
이제 반대 예를 들어보자. 어떤 이는 물을 물로 제대로 안다. 그리고 불을 끄기 위하여 물을 부어야 함도 제대로 안다. 그리고 불을 끄기 위해서 물을 붓는다. 그런데 물이 부족하거나 우연이 개입해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하자.

이 경우에서 무엇을 중요시하는가에 따라서 판단이 엇갈릴 수 있다. 그 1회의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어리석지만 어찌되었든 의도한 뜻을 실현시킨 경우가 당연히 낫다. 그러나 한편 진리를 잘 안다는 것은 비록 그 경우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많은 경우에 뜻을 성취시킬 가능성이 보다 높다. 따라서 진리를 잘 아는 경우를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진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올바른 사실 판단을 기초로 올바른 목적설정을 하게 하고 또 올바른 실현방안을 찾아내는 데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된다. 따라서 진리의 가치는 매우 높다. 그래서 우연한 1회의 성공보다 진리를 앎이 우선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뜻의 실현에 중점을 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잘 아는 것이 요구된다. 선한 뜻을 갖더라도 실현방안이나 진리를 모른 채 행위하면 엉뚱하게 오히려 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진리를 잘 모르면, 뜻의 실현을 일단 미루고 우선 다른 경험자로부터 진리를 배우려는 자세가 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노력으로 모든 경우에 필요한 진리를 다 알 수 없다. 처음 새로 만나게 되는 현실은 대부분 그런 경우다. 그런데 정확히 진리를 모르는 한 뜻을 절대 실천하지 않아야 한다면, 새로운 상황에 처하면 거의 모든 경우에 아무런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진리를 알 수 없고 뜻의 실현도 마냥 미룰 수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정확히 진리를 모른다 해도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선한 뜻의 실현을 위해 돌진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결국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그러나 사실 진리는 이런 실패와 시행착오의 반복을 통해서 얻게 된다. 즉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지 않고서, 그냥 머릿속만의 생각으로 진리를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행착오나 실패를 두려워하고 먼저 진리만을 얻으려 하면 오히려 끝내 그 진리를 얻어내지 못한 채 머무르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상황에서는 선한 뜻을 갖는 이가 실패를 각오하고 선한 뜻을 향해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큰 가치를 갖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실패의 결과가 얻어져도, 그것은 그렇게 하면 실패한다는 하나의 경험과 진리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한 뜻을 실현하려는 이런 자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런 노력 끝에 뜻이 성취되었다고 하자. 비록 이 경우 진리를 모르고 했지만 그러나 이런 성취도 사실은 하나의 진리의 측면이다. 많은 실패와 성공은 그것 자체로 진리의 한 내용물이 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선한 뜻이 성취되는 결과는 선을 단지 관념 속에서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실제로 현실에 나타나게 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한편 진리가 본래 중요시되는 것은 그것이 최종적으로 ‘선한’ 뜻의 ‘실현’에 크게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결국 진리가 갖는 가치의 근거는 선한 뜻의 ‘실현’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뜻의 실현이 결국 진리의 파악보다는 우선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뜻의 실현과 진리 이 두 요소는 선한 뜻과 관련해 함께 요구된다. 그런데 둘 가운데에서 뜻의 실현이 좀 더 우선한다는 점은 다음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비록 어리석더라도 뜻의 실현을 위해 성실한 노력을 먼저 반복해서 어떻게 하든 선한 상태를 실현해내는 것이 단순히 지혜가 많은 것보다 더 우선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간접경험이나 교육을 통해 지식을 미리 습득한 후에 실행에 착수해 뜻을 실현하는 것은 훌륭하다. 그러나 뜻을 이루기 위해 실제 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고 어떤 지식을 미리 다 갖춘 다음에 시도하겠다는 자세는 대부분의 경우 뜻을 이루기 어렵게 만든다. 왜냐 하면 현실에서는 매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일보다는 새롭게 나타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매번 반복되는 일들은 미리 경험한 이들의 경험을 기초로 지식을 갖추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는 일이 더 많다. 또 매번 반복되는 일에 대한 지식도 사실 그 기초는 최초에 무모하게 그에 도전해 뛰어들어 노력했던 사람들의 시행착오와 실패의 경험이 쌓여 얻어지는 것이다. 물론 실행을 앞세우는 이는 처음 이에 필요한 지혜가 없어서 잦은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실패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지혜 또한 최종적으로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뜻의 실현을 지혜나 진리보다 앞세우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5) 뜻의 실현과 행복과의 우열관계

뜻이 실현되었지만 불행한 경우 - 뜻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행복한 경우

뜻의 실현과 행복 사이에서는 어떤 것이 보다 우선해야 하는가.
물론 뜻도 실현하고 행복한 경우가 가장 좋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둘이 함께 할 수 없는 경우에 어떤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이를 위해 불행하지만 ‘뜻을 실현’하는 경우와 - ‘행복’하지만 뜻을 실현하지 못한 경우 -를 비교해보기로 한다.

이 문제는 앞에서도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되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어떤 뜻이 순수하게 한 주체의 내부에만 머무를 수 있다면 행복이 뜻의 실현보다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뜻이 다른 주체와도 관련되면 선악의 문제가 나타난다. 이런 경우 앞에서 이미 선이 행복보다 우선함을 보았다. 그리고 뜻의 실현은 그것이 선과 관련되는 한 행복보다 우선되는 것이다. 결국 선이 우선하고, 그 선한 뜻이 실현되는 상태는 한 주체의 행복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뜻의 실현과 행복이 엇갈릴 수 있다는 데에 의문을 가지기 쉽다. 즉, 어떤 뜻이 성취되면 곧바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뜻을 ㉠ 외부객관 상태를 변경시키려는 뜻과 ㉡ 자신의 마음태도를 변경시키는 뜻 두 가지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행복은 사실 이 두 방향의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원만하게 성취된다. 그래서 어느 한 방향의 뜻만 성취될 때는 행복이 얻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외부객관상태를 변경시키려는 뜻을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뜻이 성취된 상태에서 정작 뜻을 가질 때 기대했던 행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희망은 좋음에 대한 관념을 단순히 재생하거나 또는 이들을 조합(組合)하여 만들어진다. 그 결과 희망의 내용은 실제 좋은 느낌을 주는 경우와는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희망은 성취되기 전의 생각과는 달리 성취된 상황이 정작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음식을 맛보기를 희망했지만, 막상 먹어보니, 그 맛이 좋지 않은 경우와 같다.
한편 희망이 성취된 새로운 상황은 그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불쾌와 번민을 갖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좋은 집을 샀는데 그 후로 다른 사람들과 많은 분쟁이 그 집으로 인해 나타나게 되는 경우와 같다.
또 어떤 희망을 실현시켜도 그 만족은 일시적으로만 머무르고 곧 사라져간다. 그래서 오랫동안 만족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한편 어떤 한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하여 인간의 모든 욕구불만이 함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람들의 희망은 매우 다양하다. 또 끝이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모든 희망을 다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비록 상상 가능한 모든 희망을 다 성취시켰다고 가정해도 다시 또 다른 희망은 생겨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희망을 성취시켰더라도 또 다시 다른 성취되지 않은 희망으로 인해 욕구불만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끝없는 희망을 정리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 채우려는 것과 같다. 따라서 몇몇의 희망이 성취된다고 하여 욕구의 충족감을 얻지 못하게 된다.
한편 희망의 성취가 반대로 늘 이뤄지기 때문에 오히려 성취감을 제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걸어다니고 많은 일들을 한다. 그러나 이런 매 순간 단지 불만을 느끼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정작 좋음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일반인은 병자가 병이 나아 다시 걷게 될 때 느끼는 기쁨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성취가 반복됨으로 인해 좋음을 특별히 느끼는 의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희망을 성취해도 정작 행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사정도 있다.

또 반대로 희망을 성취 못해도 행복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희망이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진 상태를 받아들이고 만족을 얻는 자세에서 행복을 얻기도 한다. 또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또 다른 희망의 실현을 그려가고 또 그 실현을 굳게 믿을 때도 행복이 얻어진다.

한편 ㉡ 자신의 마음태도를 변경시키는 뜻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언제나 만족을 하고 감사를 느끼고 희망을 그려가고, 또 그 실현을 굳게 믿는 마음태도를 얻으려 하고 이것을 성취시켰다고 하자.
그러나 외부객관상태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한계를 넘게 되면 역시 행복을 얻는데 실패하게 된다. 그런 극한 상황은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많다. 예를 들어 물이 없이 사막에서 견뎌야 한다든지, 칼과 송곳으로 몸을 찔리는 고문을 받는다든지 오직 마음태도만으로 그것을 견딜 수 없는 한계는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행복은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게 된다.

이제는 ‘행복’하지만 뜻의 실현을 못한 경우와 - 불행하지만 ‘뜻을 실현’하는 경우를 비교해보기로 하자.
우선 한 개인차원에서만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돈, 권력, 명예를 다 갖추는 데 성공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재산을 관리 유지하고 사람을 자신의 뜻에 따르게 조종하고, 자기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들에 일일이 신경을 쓰느라 지치고 힘들어 불행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하자.
또 한편 어떤 사람은 돈, 권력, 명예를 원했지만 이를 하나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여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고 하자. 이 두 사람의 경우에 어떤 상태가 더 낫다고 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어떤 뜻의 실현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일단 그 주체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을 주지 못하는 뜻의 실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경우 실패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그 실패가 희망의 실현보다 낫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다시 어떤 상태는 전체에 어떤 좋음을 가져다 주는가에 따라 선악의 평가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선은 이런 행복보다 우선하게 됨을 앞에서 보았다.
그래서 앞의 예에서 비록 한 개인이 불행하지만 그 성취가 어떤 선악의 평가를 전체적으로 받는가에 따라 결론을 달리해야 한다. 물론 뜻의 실현이 항상 선하지는 않다. 또 반대로 뜻을 실현하지 않는 것이 항상 선하지도 않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선악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뜻의 실현이 선한 상태인 경우에는 그것의 실현이 개인의 행복의 성취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나열된 실현은 그런 전제에서 앞에 나열된 것이다. 즉 여기서 실현은 곧 ‘선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갖고 제시된 것이다. 그래서 뜻의 실현이 행복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6) 진리와 행복의 우열관계
지혜롭지만 행복하지 못한 경우 - 어리석지만 행복한 경우

행복을 진리에 기초하여 함께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만일 행복과 진리가 서로 충돌될 때는 어떤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지혜롭지만[진리를 잘 알지만] ‘행복’하지 못한 경우와 - 어리석지만[진리를 잘 모르지만] ‘행복’한 경우를 비교해보자.

이를 다음의 예를 통해 살펴보자. 예를 들어 자신이 병인지 모르고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다. 또 수술을 받으러 가는데 자신은 잠깐 잠자러 가는 줄 알고 즐거워한다고 하자. 또 수술 후 흉터가 남았는데 그것에 신경쓰지 않고 또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보자.
반대로 어떤 환자는 자신이 심한 병을 걸렸음을 제대로 알고 이에 대해 걱정과 불안에 싸여 있고, 또 이 병을 수술로 고치고자 하면서도 두려움에 떨고, 올바른 수술을 하여 병이 나았음을 아는데도 수술로 생긴 흉터 때문에 매우 큰 불쾌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자.
이 두 예는 진리를 제대로 아는 것과 행복함이 서로 하나만 갖춰진 경우를 비교하는 것이다. 이런 예에서 개인적인 입장만 고려한다면 단순히 진리를 제대로 아는 것보다는 행복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모든 것의 최종적인 가치는 행복여부가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진리가 최종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그것이 어떤 주체에게 행복을 보다 효과적으로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진리는 행복이라는 목적에 이바지할 때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개인적인 입장을 떠나면 달리 생각할 문제가 된다. 선한 뜻의 실현과 행복과의 관계는 앞에서도 보았다. 지혜 및 진리의 파악은 사실상 행복과 함께 선한 뜻의 실현에 필요하다. 그런데 선은 행복보다 우선한다. 따라서 지혜가 선의 실현에 이바지하는 경우에는 지혜가 개인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봐야 한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은 비교를 해야 한다. 지혜를 갖추면 선을 실현할 수 있는 데 불행한 경우와 - 지혜가 없어 선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지만 행복한 경우의 비교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교에서는 선이 행복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지혜가 또한 행복보다 우선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한 돼지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은 이치에 닿게 된다.

그러나 만일 지혜가 악에 이바지한다든지, 또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경우 등에서는 그 판단은 또 달리 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 지혜는 그것이 선의 실현에 필요한 요소라는 전제에서 앞에 나열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런 범위에서 지혜가 행복보다 우선한다는 결론을 취한다.


다. 결론
이상의 검토를 통하여 살펴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선한 뜻이며, 그 다음이 그 뜻의 실현이며, 그 다음이 진리[지혜]며 그 다음은 행복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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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다음의 전체적인 글의 일부입니다.
無名 著, <가칭><<최상의 행복 총론>>, 목차

이 글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교정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최종 완성되기 전에 미리 여러분의 거리낌 없는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본 책은 각 부분이 교정되는 대로 그 각 부분을 인터넷에 공개하며,
책 전체분량의 최종 완성 이후전 내용을 계속 인터넷상에서 무료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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