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데이트 2008년-2-16일+

++ 업데이트 2008년-2-20일+

라. 행복의 상태에서의 우열문제

앞에서 선(善)과 선한 뜻의 실현이 행복보다 중요함을 보았다. 그리고 또 한편 순수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행복이 단순한 뜻의 실현보다 중요함도 보았다. 이와 같은 결론을 또 다른 입장에서 도출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행복을 얻은 여러 상태를 놓고 이 가운데 어떤 상태가 가장 나은 상태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제 행복을 얻은 상태로는 여러 상태를 예상할 수 있다. 이들은 일단 행복을 얻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여러 측면에서 다를 수 있다. 이런 경우 이들에 대해 어떻게 우열을 나눌 수 있는 지를 생각해보자.


1) 행복을 얻는 수단에 따른 우열판단

우선 앞에서 행복은 객관적 상태를 변경시키거나 또는 마음상태를 변경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위 두 방법 가운데 어떤 우열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또 객관적 상태에 대한 희망은 여러 가지다. 그런데 이런 각 희망의 종류로 우열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물질적 부의 성취가 권력의 성취보다 낫다거나 못하다는 등의 차이를 세울 수 있을까. 또 객관적 상태에서 갖는 양의 크기를 분별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물리적 양으로 우열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부의 크기에서 100억의 성취가 1억의 성취보다 100배 낫다거나 아니면 여하튼 나은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현실에서는 그런 식으로 가치판단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마음상태를 변경시켜서 행복을 얻는 것이 항상 낫다고 생각할 입장도 있을 수 있다. 또는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또 명예가 권력보다 낫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또는 단순히 어떤 객관적인 상태의 물리적인 양이 극대(極大) 또는 극소(極小)가 되는 상태가 최상이라고 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각 입장에서는 그렇게 우열판단을 해나가고 실제 그렇게 우선 순위를 두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들이 1차적으로 각 주체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각 주체의 행복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각 수단이 동일하게 행복에 이바지한다면 행복에 이바지하는 측면에서는 특별한 차별을 세울 수는 없다. 물론 다음에서 자세히 보듯, 이들은 행복의 기간적 질적 차이나 선의 측면에서 평가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측면을 제외하고는, 이들에서 어떤 특별한 우열을 나눌 근거는 없다. 왜냐 하면 이들은 모두 각기 행복을 주는데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가) 마음의 변경과 객관의 변경

우선 마음상태의 변경을 통한 행복의 실현이 객관적 상태를 변경시켜 행복을 얻는 것보다 낫다거나 또는 그 반대라는 식의 판단은 타당하지 않다. 누군가 100억의 재산으로 얻는 행복을 어떤 이는 단지 마음의 수련만으로 얻을 수 있다. 이를 비용관념으로 생각하면 어떤 이가 100억으로 비싸게 실현한 행복을 다른 어떤 이는 거저 마음의 변경만으로 얻기에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의 예에서 100억의 재산은 행복을 구입한 뒤 대신 사라지는 비용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행복을 얻게 한 수단 과정일 뿐이며, 행복을 얻은 후에도 그대로 어느 정도 유지되어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폐가 사라지고 대신 어떤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의 비용 관념과는 차이가 난다. 그래서 동일한 행복을 비싼 비용으로 얻기에 열등한 방법이다는 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물론 100억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렵고 마음의 변화는 쉽기 때문에 쉬운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입장은 힘든 정도를 각 경우에 제대로 평가한다면 타당한 면이 있다. 왜냐 하면 이는 행복의 총계가 전 과정에 걸쳐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힘든 정도는 마음의 수련도 동일하게 힘든 것이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우열을 나누기는 힘들게 된다. 결국 어떤 방법을 통해서 행복을 실현하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그 행복에 기여한 만큼 동일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나) 수단의 종류

한편 행복을 주는 수단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런 각 수단은 예를 들어 물질적 부나 명예 건강 등이 각기 현상적으로 다른 특성을 갖는다. 또 이런 특성의 차이 때문에 행복에 이바지하는 양이나 기간 등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지혜나 명예 건강이 부나 권력보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것은 통상 지혜나 명예 등이 보다 오래 지속되고 또 많은 행복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을 기초로 한다. 한편 더 나아가 이런 모든 수단에 각기 가중치를 두어서 종합적으로 모두 골고루 얻어낸 상태로 최상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의 전제처럼 구체적인 경우에 이들이 결과적으로 같은 양의 행복을 준다는 조건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또 다른 기준으로 이들의 우열을 분별하기는 힘들다. 한편 지혜는 부나 권력보다 늘 오래 좋음을 준다거나, 또는 그 반대다라는 식으로 평가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예를 들어 부로 인해 행복한 자가 권력을 통해서 얻는 이보다 낫다거나 못하다거나 하는 분별을 일률적으로 행하기 힘들게 된다.

어떤 수단이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주체에게 좋음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돈이 많다거나, 시간이 무한히 있다는 등의 상태를 예로 들어보자. 이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사실 이를 생각하면 이는 일정하지 않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좋을 수도 있고 또 나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런 시간이 무한하다는 것이 공포를 줄 수도 있다. 또 부는 이를 통해 필요로 하는 것을 구입할 때는 좋다. 그러나 때로는 부를 가짐으로써 해결해야 할 문제가 수없이 많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부가 번뇌와 고통을 주는 것이며 따라서 많은 것이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짓지 않고, 어떤 수단을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근거에서 어떤 수단을 다른 수단보다 늘 낫다거나 못하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있게 된다. 사실 이런 수단들은 때로는 행복을 주지만, 때로는 행복을 주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행복을 주지 않는 부나 시간 건강 ...등등의 모든 요소들은 그 주체에게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나 건강 시간 등등의 제 상황 및 수단적 요소들이 만일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중요하게 된 이유는 그것이 일단 각 주체에게 행복을 주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어떤 수단이 주는 행복의 크기가 단순히 같다면, 어떤 한 아이가 장난감에서 얻는 행복을, 장삿꾼이 100억의 부에서 얻거나, 또는 학자가 진리를 통해 얻거나, 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못하다거나 낫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본다.

또 이런 사실을 역으로 응용한다면 행복이란 기준에서는 모두가 쉽게 최상의 상태에 오를 수 있다. 물론 그런 마음상태를 갖는다는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 자신이 매우 졸리울 때, 이 세상에 어떤 다른 상태와 잠을 자는 상태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황제가 되어 진기한 음식으로 향락을 누린다거나, 히말라야 산의 정상에 선다거나, 기타 등등의 상태와 비교하여 자신이 졸리울 때 잠을 자는 것을 이들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당신이 정말 졸리웁다면, 그런 수많은 상태보다는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을 택한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졸리울 때는 자는 것이 가장 많은 만족을 주고 그것이 최상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잘 수 있다면 당신은 또한 하나의 최상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배가 고플 때 식사를 하는 것, 책을 보고 싶을 때 책을 보는 것, 한가하게 쉬고 싶을 때 쉬는 것 등등도 모두 같다. 이런 평범한 일상사들이 모두 생각하기에 따라서 가장 최상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런 식으로 각기 다 사실상 최상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은 스스로 그렇게 인식하지 못한다. 또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지내게 된다. 그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고집하는 일정한 최상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각 수단들이 행복을 주는 크기가 같다면 이들을 다시 수단으로 차별할 근거는 없다. 이들 사이에서 우열의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은 행복이나 수단의 종류의 차이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뒤에서 보는 선악의 평가 면에서 나타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 수단의 객관적 물리적 양

한편 하나의 수단을 기준으로 할 때 그 수단의 물리적 양, 강도, 질, 기간의 우열을 생각할 수 있다. 행복을 얻는 수단에서 이런 객관적 물리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쉬울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크기를 가지고 우열을 분별할 입장도 있다. 예를 들어 부라면 100억과 1억의 차이라거나, 건강이라면 100m를 몇초에 뛰는가 등의 물리적 양을 기준으로 우열을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최상이란 말은 일반적으로는 생각하면 오히려 이런 의미들과 더 가깝게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서로 다른 종류의 수단에서는 이런 물리적 크기를 비교할 기준 단위를 정하기 힘들다. 따라서 여기서는 같은 종류의 수단을 놓고 비교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한 개인은 어떤 수단이 갖춰진 상태들에 대해 ‘--이 --보다 좋다 나쁘다’는 식의 판단을 계속해서 행할 수 있다. 물론 이 평가는 객관적 상태의 물리적 양에 언제나 비례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물의 온도가 어느 정도가 좋은가, 키는 얼마나 큰 것이 좋은가, 집의 크기는 얼마나 커야 좋은가 등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어느 정도에 이르기까지는 양이 증가함에 따라 이에 비례하여 좋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정한 정도에 이르고 나서는 그런 관계는 깨진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비교를 계속함에 따라 각 개인별로 각자 최상의 상태로 생각하는 물리적 양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한 개인은 예를 들어 키가 150 센티미터인 것보다는 160 센티미터가 낫고 또 160 보다는 170이 낫지만 이제 오히려 180보다는 170 센티미터가 낫다고 생각하여 그는 170 센티미터가 가장 낫다는 식으로 최상의 기준을 정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각 주체가 절대적 극대나 극소를 최상으로 판단하지 않고 일정한 절대 값으로 최상을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는 많으면 많을수록 무한히 좋은 것, 또는 적으면 적을수록 무한히 좋은 것에 대한 관념을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화폐는 교환가능한 물건이나 일[用役]을 모두 대표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개개의 사물은 어떤 한계를 갖지만, 이들을 모두 대표할 화폐는 오로지 많으면 많을수록 무한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시간, 지혜, 지식, 권력 등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념을 갖기 쉽다. 그래서 이런 요소에서는 비교판단을 할수록 언제나 더 나은 다른 상태가 있게 되는 ‘비교의 함정(陷穽)’에 빠지기 쉽다. 즉 어떤 양도 최상의 만족을 주지 못하고, 항상 더 높은 것이 있고 이와 비교하면 부족감을 느끼고, 불만에 빠지는 상태가 초래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어떤 것이 양에 비례하여 계속해 좋다는 판단은 어느 정도 그것들이 필요하고 좋았던 상황에서의 판단을 기초로 한다. 즉 옷, 먹을 것, 집 등이 필요해 그것을 돈을 가지고 살 수 있었을 때 돈은 좋은 것이라는 판단을 한다. 또 시간이 부족해 일을 못 끝마쳤을 때에 시간이 있으면 좋았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런 판단을 기초로 돈이나 시간은 많게 되면 그만큼 비례하여 그것은 좋다고 평가를 하게 된다. 그래서 사실 어떤 주체가 부나 시간 등에서 더 이상 좋음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부나 시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가치가 있다고 고집하게 된다. 여기에는 무엇이든지 물리적 양의 크기에 비례하여 좋고 나쁨도 함께 비례한다는 잘못된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삶에서 가치의 우열을 뒤바꿔 살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도 바로 이런 뒤바뀐 가치판단에 있다. 어떤 수단이 정말 좋음, 행복, 선 등의 순수한 대표물이라면 이런 무한 비례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 감사하는 마음, 선한 희망을 갖는 것 등을 이런 예로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행복을 얻는 데 사용하는 수단들에서는 좋음을 그대로 대표하는 대표물을 찾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화폐는 좋음을 느끼는 물질이나 용역을 교환해 살 수 있는 대표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이 좋음을 느끼는 일부만을 제한적으로 대표한다. 화폐는 교환가능한 재물이나 용역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정한 한계를 갖게 된다. 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화폐가 선과 행복에 기여하는 양도 다른 수단들처럼 동일한 한계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화폐도 무조건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 비례하여 선과 행복에 이바지 한다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는 어떤 일정 정도 이상의 부는 오히려 그에게 번뇌와 부담을 가중(加重)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 사회적으로도 화폐의 양이 단순히 증대된다고 사회적 정의나 선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부가 각 주체 간에 균등히 배분되면 균등하기에 능력자나 노력을 많이 행한 쪽에서 불만을 갖는다. 또 반대로 차별이 있으면 차별이 있어서 그 차별정도에 따라 불만을 갖는 쪽이 어느 쪽에서도 생길 수 있게 된다. 이런 문제는 단순한 부의 양적증대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와 마찬가지로 건강, 시간, ...명예, 권력... 등등이 모두 같은 문제점을 갖는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입장을 고집하면, 극단적으로 이런 물리적 양의 무한 극대 또는 극소가 최상의 조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런 경우 무한(無限)의 개념이 의미하듯 어떤 고정된 절대적인 극대값을 제시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제시된 어떤 값 더하기 1 또는 곱하기 2는 항상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수단의 물리량에 대해 어떤 절대값이든 또는 무한 극대 극소값이던간에 그 값을 구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최상으로 판단한다고 일단 가정하자. 그런데 이런 어떤 물리량을 최상으로 판단하게 된 근거는 어떤 주체가 그것을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행복 간에서 다시 이런 물리적 양의 크기로 우열을 비교하여 평가한다는 것은 순환적이 되어 의미가 없게 된다. 그것은 다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수단의 양들이 각 주체들에게 동일한 행복을 주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이 행복들을 행복을 준 그 수단의 물리적 양의 크기에 의해 우열을 나눈다고 하자. 그런데 각기 다른 물리적 양이 우열의 가치를 갖는 것은 그것이 각 주체에게 일정한 행복을 달리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기 다른 물리적 양이 만일 각 주체에게 동일한 행복을 준다면, 이들은 서로 값은 달라도 사실은 각 주체사이에서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행복을 그 수단의 물리량으로 우열을 나누려는 것은 무의미한 순환관계(循環關契)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만일 어떤 수단의 양들이 각 주체에게 동일한 행복을 주는 전제에서는 그 수단의 양을 기준으로 다시 비교할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한편 행복이 주관적인 것처럼 어떤 수단이 과연 각 주체에게 얼마만한 행복을 주는가는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어떤 행복의 우열을 각 물리량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세워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량은 오직 그것이 각 주체에게 주는 행복의 양에 의해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어떤 주체에게 어떤 물리적 양의 상태가 최상인가는 그에 대한 각기 다른 주관적 평가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키가 170 센티미터인 것을 최상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160 어떤 이는 180 센티미터를 최상의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최상으로 인정하는 물리적 양은 각 주체마다 다르다. 또 상황마다 다르다. 더욱 한 주체에게서도 그 값이 고정되지 않고 변화해 나가는 유동성(流動性)을 갖는다. 예를 들어 키가 큰 것이 농구를 할 때는 좋지만, 숨거나 울타리를 기어 갈 때는 안 좋다는 식이다. 그래서 어떤 물리적 양이 가장 적정하고 표준적인 최상의 값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런데 만일 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물리량의 크기에 의해 서열을 세우거나 비교하면, 정작 각 주체가 각 상황에서 느끼는 좋고 나쁨의 양과는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단순히 어떤 물리적 양을 정해 그것을 모든 주체의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최상의 상태라고 정할 수 없다.

한편 이처럼 각 주체는 각기 서로 다르게 최상을 정하고 또 이를 기준으로 비교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주체의 입장에서 분명 그 자신이 바라는 최상을 실현한 이가 현실에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자신이 최상에 머무른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0억을 최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갖기를 바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100억을 가진 이가 분명 현실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100억을 가진 이는 200억을 갖는 것을 최상으로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상태를 최상으로 여기고 아무도 자신이 최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반대로 적용하면 모두가 다른 이를 최상으로 보지 않지만, 각자는 스스로 최상이라고 인정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한편 어떤 최상의 값이 일단 정해진다고 하자. 그러면 이에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깝고 멈에 따라 상대적 우열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각 상태에서 각 주체가 무엇과 비교하여 행복을 느끼는가는 다 다르다. 이런 이유로 단순히 양의 상대적 우열이 판단되어도 이로써 행복의 우열을 결정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물리적 양을 놓고 비교할 때는 A의 소유 재산은 10억인데 B의 소유 재산은 5억이며 10억이 더크고 낫다라는 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A는 사장인데 B는 부장의 지위를 맡고 있어서 서열상 A가 B보다 높고 따라서 더 낫다라는 식으로 비교 평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10억이 5억보다 더 낫다거나 사장인 A가 더 낫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각 상태에서 그런 값들이 실제 각 주체에게 행복을 주는 정도는 이런 우열에 반드시 따르지 않는다. 비교의 함정(陷穽)에서 나타나듯 각 주체는 자신보다 더 높은 것과 비교하여 한없는 불만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비교의 함정을 반대로 보면, 각 주체는 자신보다 더 낮은 것과 비교하여 반대로 늘 만족을 얻을 수도 있다. 이 가운데 각 주체가 어떤 상태를 비교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상태를 판단할 것인가는 그 때 그 때 다르다. 극대량을 가지고 비교하는 이는 늘 불만과 불쾌에 빠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극소량을 가지고 비교하는 이는 늘 만족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물리량의 상대적 우열은 오직 각 주체가 그 비교기준을 함께 평가기준으로 받아들일 때만 의미를 갖는다. 그 외의 경우에는 그런 우열평가는 각 주체가 느끼는 행복감의 상대적 우열을 그대로 대표해 주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비교기준이 다르면 어떤 이는 만원을 얻고도 기뻐하는데, 어떤 이는 1억을 얻고도 불쾌해 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이를 종합해 보면 어떤 물리적 양이 최상인가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떤 주체에게 얼마만한 만족감이나 행복을 주는가를 기준으로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래서 만일 최종적으로 어떤 각 다른 상태나 수단이 ‘동일하게’ 행복에 이바지한다면, 다시 이런 수단의 물리량을 기준으로 행복의 우열을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즉, 수단의 질적 차이나 물리적 양 등이 한 번 일정한 행복을 준 이상, 일정한 행복을 다시 이런 물리적 양을 기준으로 세워 우열을 나눌 근거가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일정한 행복을 그것을 얻게 한 수단의 물리적 양으로 다시 우열을 평가할 수 없음을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수단이나 객관적 상태를 오히려 행복보다 우선시 하는 가치전도 현상이 문제된다. 이는 가치의 전도현상 현상으로 뒤에서 함께 묶어서 보기로 한다.

2) 행복의 양과 질에 의한 우열

앞에서 행복을 얻게 하는 수단은 그것이 각기 얼마나 행복에 이바지하는가로 우열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뿐임을 보았다. 그리고 이미 행복으로 동일한 평가를 받은 상태에서는 다시 이들을 얻게 한 수단의 종류나 크기 등으로 우열을 나눌 수는 없음을 보았다. 그러나 행복은 어떤 의미에서의 또 다시 우열판단이 필요한가를 다음에 이어서 살펴보자.

가) 전과정에서 얻는 행복의 크기

우선 어떤 한 주체가 어떤 한 상태에서 얻는 행복에서는 같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한 상태는 다른 상태들과 인과관계로 묶여 있다. 그래서 행복의 크기를 비교한다면 이 전체 상태에서 얻는 행복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어떤 행복한 상태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원인과정이 필요하다. 또 어떤 상태는 그 이후에도 인과관계에 기초하여 다른 상태를 나타나게 한다. 따라서 이 전 과정을 종합하여 얼마만한 좋음을 얻는가를 비교 판단할 필요가 있다.

(1) 추구 원인과정

우선 원인과정에서는 다음의 측면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상태나 객관상태를 일정하게 변경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불쾌한 경우에 이를 참고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일정한 불쾌와 고통을 견디는 노력을 해야 한다. 또 행복한 생활을 위해 집을 짓기로 한다면,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비용을 사용하고 집을 짓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불쾌나 고통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일정한 좋음을 얻는 과정에서 실제 얼마만한 고통이나 불쾌를 치뤘는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일정한 좋음을 얻는데 일정한 나쁨을 치뤘다면 이 차이[좋음 -나쁨의 총계]를 가지고 비교해야 한다.

그런데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은 불행한 가운데에서 출발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와 행복한 가운데에서 다시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는 행복한 가운데에서 다시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가 당연히 더 낫다. 그것은 곧 불쾌한 가운데 희망을 실현해 가는 것보다는 즐거운 가운데 자신의 희망을 실현해나가는 것이 양적으로 기간적으로 보다 많은 좋음을 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론상 어떤 상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오직 즐거움만 얻는 경우는 전혀 치룬 희생[불쾌]가 없이 어떤 상태의 좋음만을 순수하게 얻은 것이 된다. 그래서 이런 방식이 가장 나은 것이 된다.

(2) 인과관계상의 결과 영향 상태들

한편 어떤 상태가 이뤄진 뒤에는 그 상태는 인과관계선상으로 다시 많은 다른 상태를 발생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집을 지었다면 그 이후 이 안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편안하게 생활을 할 수 있다. 또 결혼을 하였다면 그 후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등의 상태 등도 같다. 또 자신이 분노를 참는 마음과 태도를 훈련해 그런 인격태도를 얻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이후 웬만한 일들로는 화를 내지 않게 된다는 변화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그 이후 상태들이 다시 주게 되는 좋고 나쁨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에서 얻는 좋고 나쁨의 차이도 위 평가에 함께 넣어야 할 것이다.

결국 A와 B의 행복 측면에서 우열을 비교하려면,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우선 각기 그것을 얻는 원인과정- 결과[ A 또는 B ] - 그 이후의 영향 면을 모두 통틀어 얻게 되는 좋음과 나쁨의 차이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서 그런 종합적인 차이로 얻어지는 좋음의 양이 큰 쪽이 더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인과관계로 연결된 모든 원인-결과-영향의 내용을 다 미리 예측하고 나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를 예측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따라서 그것이 예측되는 범위에서는 마땅히 이를 고려의 대상에 넣어 우열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느 한 시점에서 얻는 행복의 크기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과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나) 행복의 구성요소를 기준으로 한 평가

한편 어떤 상태가 주는 좋음의 우열을 평가할 때는 다시 다음도 고려해봐야 한다. 우선 행복에 해당하는 마음상태는 앞에서 본 행복의 정의에서처럼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앞에서 행복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즉, ① 만족, 또는 ② 기쁨과 즐거움, 또는 ③ 보람과 가치감, 또는 ④ 평온과 안정, 또는 ⑤ 희망을 그림과 의욕, 또는 ⑥ 희망의 실현과정을 통한 결과(희망의 성취, 불성취)에 대한 또 다른 만족...등등의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에 마음이 머무르는 상태 또는 이들 각각이 포괄되어진 상태 또는 이러한 요소들 사이를 순환하는 상태로 행복을 규정했다. 이런 각 요소는 행복을 구성하는 좋음을 양과 질 기간 등의 여러 면에서 달리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일정한 좋음에 해당하는 마음 상태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만족만 얻는 상태, 또는 만족과 함께 보람과 가치감도 얻는 상태, 또는 만족과 평온과 안정을 얻는 상태 등등으로 다양한 마음의 상태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상태는 만족, 기쁨, 즐거움, 보람, 가치감, 평온, 안정, 희망을 그림, 의욕 등과 같은 여러 상태를 골고루 다 갖추거나, 이들 상태를 골고루 순환하며 변화해 가는 상태가 낫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도 여러 행복의 상태를 우열을 나눠볼 수 있다.

3) 선악에 따른 우열 [타 주체에 대한 영향에 의한 행복의 우열]

이제 다시 여러 행복의 상태에서 어떤 상태가 보다 나은가를 생각해보자.
앞에서는 한 주체가 얻게 되는 좋음 즉 개인차원의 행복만을 가지고 비교해 보았다. 그런데 어떤 한 주체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여 마음태도나 객관상태를 변경시키면, 이로 인해 다른 주체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돈을 벌려고 장사를 하니,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보다 쉽게 얻게 되는 이익을 주는 경우가 있다. 또는 반대의 경우로, 돈을 벌려고 자신이 물건을 싸게 파니 그 동안 장사하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화를 내면 주위 사람들도 불안해하고 불쾌를 많이 겪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이가 화가 날 때마다 참는 습관을 익혔다고 하자. 그래서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이후에 함께 좋은 느낌을 많이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또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이가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고 만족을 얻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로 인해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 더 불쾌해하고 이후 관련된 더 많은 사람을 괴롭히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어떤 한 상태는 한 주체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여러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여러 행복 사이에서 다시 우열을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어떤 한 사람이 행복을 얻게 된 그 상태나 과정, 또 그 이후의 영향에서 다시 얼마나 많은 주체들이 어떤 형태의 얼마만한 양의 좋음과 나쁨을 얼마만한 기간동안 얻게 되는가를 통해 비교해볼 수 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주체가 보다 오랜 기간 동안 보다 많은 좋음의 차이[좋음-나쁨]을 얻은 경우를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비교하여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비교는 어떤 상태에 대한 선악(善惡)의 평가문제와 깊이 관련된다. 그래서 단순하게 말하면 선한 행복이 악한 행복의 상태보다 또는 선하지 못한 행복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가) 선의 개념종류

이렇게 선악이란 표현을 빌어 표현할 때는 다시 선(善)이란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서 많은 복잡한 논의가 일어난다. 그러나 여기서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1) 절대적 선악

먼저 이론상 어떤 상태가 그것을 얻는 원인과정 및 그 이후 인과관계상 나타나는 영향의 측면에서 관계되는 모든 주체에게 모든 기간 동안 오로지 좋음만을 가져다 준다면 이런 상태를 선하다고 말하는 데에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상태가 있다면 이를 완전한 선(善)이라고 할 것이다. 또 그 반대로 모든 경우에 오로지 나쁨만을 준다면 이를 악하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 없다. 그리고 이를 완전한 악(惡)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에서는 이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떤 상태는 어떤 주체에게는 좋음을 주나 다른 주체에게는 나쁨을 주기도 한다. 또 어떤 동일한 상태는 어떤 기간 어떤 상황에는 좋음을 주지만 또 다른 기간 상황에서는 나쁨을 주기도 한다. 그런 결과 선악평가에 혼돈이 일어나게 된다. 즉 동일한 하나의 사태로부터 좋음을 얻는 입장에서는 이를 선(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로 나쁨을 얻는 입장에서는 악(惡)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갈등은 쉬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경우 이론상으로 어느 입장에 치우쳐 선악을 나눠 평가하기가 곤란하게 된다.

(2) 비교평가하의 선악

다만 이런 경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선악의 개념을 세워 볼 수 있다. 우선 이론상 좋고 나쁨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생명 주체가 각기 느끼는 좋음과 나쁨은 각기 평등한 값을 갖는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실제 어떤 사태와 원인-결과 관계에 있는 전 사태를 나열하고, 또 그것이 나열되는 전 기간에 걸쳐 관계되는 모든 주체의 좋고 나쁨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하자.
그래서 각기 평등한 값을 갖는 좋고 나쁨을 계산하여 좋음의 양이 나쁨의 양보다 많으면 좋음의 양이 보다 많다는 의미에서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좋음과 나쁨의 양을 비교해 차이를 구했으므로 ‘비교 차이 평가하의 선’이라고 하자. 물론 이 때 나쁨의 양이 좋음의 양보다 많으면 ‘비교 차이 평가하의 악’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위 이론대로 그 값을 실제 엄밀하게 관찰해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의 관찰능력과 관계없이 각 주체는 그 상태로부터 좋음과 나쁨 등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된다. 또 우리는 위 이론을 하나의 기준으로 놓고 현실의 고려범위에서 대략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따라서 비록 이론적인 개념이기는 하지만, 위 개념이 지향하는 선의 방향을 현실목표로 잡고 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할 것이다.

(3) 상대적 선악

그러나 한편 현실적 한계상황에서는 선택 가능한 경우에 반드시 이런 선만이 나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잘라 내거나, 아니면 방치해 죽이거나 해야 하는 상황처럼 어느 선택이나 불쾌 고통을 일으키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 하나의 나쁨은 그 보다 더 큰 나쁨에 비교하여 이것도 일종의 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앞처럼 좋음과 나쁨의 양을 비교하여 좋음의 양이 더 많다는 의미의 선은 아니다. 그러나 A라는 상태의 [좋음-나쁨]은 B와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더 낫다는 의미에서 선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A를 다른 B와 상대적으로 비교할 때 더 낫기에 선하다고 평가한다는 의미에서 ‘상대적 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런데 이 ‘상대적 선’은 어떤 상태와 비교하는가에 따라 선악 개념이 수시로 바뀔 수 있다. 즉 A는 B와 비교할 때는 상대적 선인데, 또 다른 C와 비교할 때는 상대적 악으로 바뀔 수 있다. 이 상대적 선은 앞에서 말한 ‘‘비교 차이 평가하의 선’과는 별개의 개념이 된다. 이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비교 차이 평가하의 악’도 경우에 따라 상대적 선이 될 수 있다. 더 큰 나쁨과 비교하면 상대적 선이 되는 것이다. 또 반대로 ‘비교 차이 평가하의 선’도 상대적 악이 될 수 있다. 즉 보다 더 큰 선에 비교하면 상대적 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상대적 선악은 어떤 것과 비교하는가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 가장 우선순위의 상대적선

그러면 이런 다양한 선악개념을 기초로 할 때 우리는 현실적 상황에서 어떤 상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일단 생각해보면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경우 수에서 가장 많은 좋음의 차이[좋음-나쁨]을 가져다 주는 상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를 위에서 나열한 선악의 개념을 빌어 표현하면 그것은 선택 가능한 것들 가운데에서 가장 우선순위의 상대적 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상태가 앞에서 본 완전한 선이라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에서는 어떤 것을 선택하든 또는 전혀 선택하지 않더라도 좋음과 나쁨이 엇갈리는 상태를 만나게 된다. 이런 경우 완전한 선 다음으로는 좋음의 총량(總量)이 나쁨의 총량보다 더 많은 ‘비교 차이 평가하의 선’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좋음의 차이[좋음-나쁨]을 주는 것을 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 가능한 것들이 모두 좋음의 양보다 나쁨의 양이 많은 ‘비교 차이 평가하의 악’인 경우들도 있다. 이 때에도 선택은 행해져야 한다. 그래서 그 가운데 가장 적은 나쁨을 주는 것을 택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선택은 결론적으로 선택 가능한 것들 가운데에서 어느 것과 비교한다 해도 상대적 선인 상태가 선택돼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우선 순위의 상대적 선’을 택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장 우선 순위에 놓이는 상대적 선이 실현되는 행복을 다른 행복의 상태보다 더 낫다고 하게 된다. ‘가장 우선 순위로 상대적으로 선한’이란 긴 표현을 간단히 ‘선한’이라고 줄인다면, 이는 간단히 말해 선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 풀어서 말하면, 보다 많은 주체에게 보다 오랜 기간 동안 보다 많은 좋음의 차이[좋음-나쁨]을 주는 ‘한 주체의 행복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다) 주관-객관-평가 등의 불일치 문제

이렇게 여러 행복 가운데에서 가능한 ‘선한[=가장 우선 순위로 상대적으로 선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할 때는 다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어떤 이의 주관적 마음태도와 객관적 현상상태, 수단, 과정, 결과 그리고 주관적 평가와 객관적 평가 등등에서 서로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 경우 어떤 방식으로 선을 평가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들 경우들을 살펴보자.

(1) 주관적 마음태도와 객관의 불일치

우선 어떤 상태를 추구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를 추구하는 이가 마음에서 뜻을 결정한다. 그 다음 행위[말, 글, 동작, 태도] (준비-착수-완료) - 결과발생 - 영향[결과의 결과]의 발생 등의 연쇄과정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선(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들 모두가 선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주관과 객관의 모습은 많은 경우 서로 엇갈린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갖고 있는 인과 예측과 실현 능력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즉 마음에서 뜻하는 바를 외관(外觀)과 결과(結果)에 그대로 일치 대응시켜 나타나게 하는 데 많은 한계를 갖는다. 우선 의사설정과정에서 인과관계상 실현가능하지 않은 뜻을 갖기도 한다. 이를 추구할 때는 당연히 뜻과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또 뜻을 실현할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기도 한다. 또 실현과정에서의 노력방법과 그 정도가 맞지 않아서 원래 뜻이 실현되지 않거나, 다른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 다른 외부요소가 개입하여 뜻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현상이 서로 관계하여 변화하는 과정은 긴 시간에 걸쳐 복잡하고 다양하다. 따라서 자신의 뜻과 현상을 매번 일치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불가피하게 차이가 발생한다면, 이 가운데에서 어느 쪽에 중점을 두고 선악을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한 주체의 마음상태와 객관적으로 발생한 사실을 놓고 보면 이들은 다른 주체의 좋고 나쁨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다르다. 한 주체의 뜻과 행위 -결과 -영향의 측면을 생각해보면 마음속의 뜻은 다른 주체들에게 잘 파악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주체들은 사실상 객관상태로부터 좋음과 나쁨을 주로 받게 된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선악평가를 할 때는 결과적으로 객관상태에 더 비중이 두어지게 된다. 또한 선도 이런 다수주체가 어떤 상태에 느끼는 좋음과 나쁨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한 주체가 혼자 생각한 내용은 그 자체로서는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의사는 그것이 기초가 되어 말이나 글 동작 태도 등의 객관상태의 모습으로 나타나 실제 다른 주체들에게 좋음과 나쁨을 가져다 줄 때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고 선악평가를 받게 된다.

물론 단순한 내심 속의 의사는 그것이 외부에 드러나는 경우를 가정하여 평가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실제로 외부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외부에 드러나고 실현되는 상태를 가정하여 내리는 가정적(假定的)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에서 그린 상태는 마음에서만 있었을 뿐 실제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 다른 주체가 좋음을 느낀 사실이 없게 된다. 마음 속 상태는 그 주체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의 마음속 내용만을 중시하고 객관상태를 전혀 무시하면 다음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마음에서 그리는 상태는 현실의 한계를 넘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무한히 모든 주체에게 좋음을 주는 상태를 그려 내고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벌어지는 현실은 이와 달리 악한 상태가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경우 그의 마음 속 뜻이 선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 일어난 악한 객관상태를 선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런 경우 실천과정에서도 노력을 하여 객관상태가 그 뜻과 일치되도록 했어야 한다고 요구하게 된다. 또 한편 그가 미리 현실내용과 인과관계의 파악에 더 지혜를 발휘했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다. 결국 각 주체가 객관상태에 비중을 두고 판단하고, 그 가운데에서 최선의 상태를 선택해 실현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마음 속 뜻이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 왜냐 하면 마음 속 뜻은 그런 선한 객관상태를 일으키는 가장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객관상태가 나타나는 데에는 많은 요소가 개입된다. 그래서 이 객관상태의 전부가 어떤 한 주체만으로 일어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어떤 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행위자가 어떤 의사를 가졌는가가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된다. 이런 점과 함께 선택과정에서 최상의 선택을 논의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주관의 내용에 보다 비중을 두게 된다. 이 내용은 뒤에서 별도로 살피기로 한다.

(2) 수단-과정-결과에서 평가의 차이

한 주체가 뜻을 갖고 결과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선택하는 수단,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 또는 그 이후의 영향이 인과관계로 묶여 펼쳐지게 된다. 그런데 이 각각의 여러 상태에 대해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과정은 선한데 결과는 악하다거나 그 반대인 경우가 있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이 각각의 단계로부터 각 주체가 어떤 좋음을 얻게 되는가를 총량을 통해 비교하여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수단, 과정, 결과나 영향이 주는 좋음이 전체적으로 어느 쪽이 더 많은가에 따라서 판단하면 될 것이다. 물론 수단, 과정, 결과, 영향이 모두 선한 경우가 가장 나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뤄질 수 없다면, 가급적 이 전체에서 좋음과 나쁨의 차이가 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 수단과정은 보통 일시적이고 그로 인해 남는 결과나 영향은 장기적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과나 영향에서의 좋음이 더 비중 있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비교 평가가 필요하다.


(3) 사실과 평가면에서 주관과 객관의 차이

주관과 객관에는 앞에서 보듯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즉, 마음상태와 객관상태는 서로 대응되어 일치되기 어렵다. 이런 차이는 의도한 ‘사실’과 발생한 ‘사실’에서 서로 차이가 있는 1차적 차이다. 이런 사실의 차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또 어떤 사실에 대한 선악의 ‘평가’가 서로 차이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갑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는 선한 뜻으로 차를 대접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에 대해 입맛이 맞지 않아 모두 불쾌를 느끼고 불편해 할 수 있다. 여기서 차를 대접하겠다는 뜻과 발생한 사실사이에서는 차이가 없다. 단지 갑은 그것을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은 불쾌해하고 결과적으로 서로 불일치가 발생한 경우다. 물론 이런 평가의 차이가 발생할 때 사실의 차이도 함께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또 한편 여기서 각 주체의 내심상태도 사실상태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를 사실에서의 차이로 함께 묶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평가를 구별해 보기로 한다. 그래서 어떤 주체의 내심에서의 평가와 사실상 일어난 다수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다시 문제된다.

이제 이런 평가의 차이가 발생하는 경우 어떻게 선악의 평가를 할 것인가. 사실상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한 주체의 평가에서도 선하고 또 타 주체들의 평가들도 선한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서로 엇갈려 나타난다면 선악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앞에서 선에 대해서 논의할 때 한 상태에서 각 주체별로 각 시기 상황별로 좋음의 평가는 고정되지 않고 달라질 수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엇갈리게 좋음과 나쁨을 느끼면, 각 좋음과 나쁨을 합해 그 차이를 비교하여 선악평가를 내린다고 보았다. 어떤 발생한 사실에 원래 이를 의도한 한 주체의 평가와 다수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이와 같다. 따라서 관계된 모든 주체의 좋음과 나쁨을 합해 그 차이를 비교하여 판단하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결국 선악의 판단은 어떤 상태로부터 영향 받는 모든 주체들이 실제로 받는 좋음과 나쁨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 선택과정에서의 객관과 주관의 우위문제

앞에서 보았듯 선악의 판단 자체는 객관상태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한 주체가 어떤 결과를 만드는 과정은 마음속의 뜻의 결정 - 행위[말, 글, 동작, 태도] - 결과 - 영향의 발생 등의 연쇄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선악판단은 다수주체가 갖는 좋음과 나쁨의 평가다. 다수주체는 앞의 연쇄과정에서 주로 말과 글 이후의 객관상태로부터 좋음 나쁨을 갖게 된다. 따라서 선악의 평가에서는 내심(內心)의 뜻보다 말과 글 이후의 외부 객관상태에 중점이 두어지게 된다. 그리고 또한 어떤 이가 선을 추구할 때는 이런 객관상태가 선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1차적인 목적 상태가 된다.

그러나 한 주체의 선택과정에서 최상을 논의하는 경우에는 선한 뜻을 갖는 주관이 객관보다 다시 우위에 놓이게 된다. 이는 앞에서 객관상태가 좀 더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는 입장과는 약간 모순적인 결론처럼 보인다.

이렇게 주관적인 내용이 보다 다시 우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앞에서 본 것처럼 객관상태가 객관적 선악 평가에서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객관상태의 평가와는 별도로 한 주체가 최상의 선택을 해야 할 범위는 자신과 인과관계가 있으며, 어떤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경우에 한정된다. 만일 객관상태만을 단순히 강조하면 자신과 인과관계없는 객관상태들을 모두 자신의 최상 안에 포함해 넣을 우려가 있다. 각 주체는 자신과 인과관계가 있는 범위에서 객관상태를 선하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 속 뜻이 선할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한편 마음 속 뜻은 만일 그 주체가 지혜를 갖추고 그에 따른 실천이 있으면 뜻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결과가 발생하게 된다. 객관적 결과가 선하게 되는 것은 이 경우 바로 뜻이 선하기 때문이다. 뜻은 이들 과정을 지휘 조종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따라서 마음 속 뜻을 그에 종속해 나타나는 결과보다 우선적으로 중요시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과관계를 파악할 지혜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경우에서는, 선택 과정에서 나타날 결과의 모습은 불명확하게 된다. 또 지혜가 전혀 없으면, 결과를 뜻과 같이 변경시키는 데에 많은 한계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떤 선택에 따라 결과가 선악 어느 방향으로 나타날 지가 불확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차선책으로 먼저 자신에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자신의 힘으로 변경 가능한 범위에서는 선을 실현해야 한다. 또 자신에게 가장 분명한 뜻은 가장 먼저 선하게 가질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 경우에서도 단순히 뜻과 달리 결과만 선하게 된 경우를 선한 뜻보다 우선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결과는 자신의 요소와 많은 외부 환경요소가 결합하여 나타난다. 그런데 뜻과 행위, 결과의 내용들이 일치되지 않을 때는, 그 주체는 자신의 인격을 대표하는 요소로 뜻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 그 주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행위나 결과는 뜻을 배반하여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경우 뜻과 다른 결과는 그의 인격이 거둔 결과는 아니라고 해야 한다. 한 주체의 고유한 요소들을 통제하는 것은 결국 그 주체가 갖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주체들이 타 주체에 선악평가를 할 때에도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이유들로 마음의 내용이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결국 선의 평가에서 객관적 요소에 중점이 가지만, 그 객관적 요소를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 자신의 인격을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 주체의 선택과정에서는 주관의 뜻을 먼저 우위에 두고 최상의 내용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이런 내용은 앞뒤가 약간 모순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이런 관계가 나오게 되는 근거들에 대해서 아래에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선택과정에서 문제되는 객관상태의 범위

앞에서 한 주체의 주관적 내용과 객관적 내용 등은 서로 일치되지 않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음을 보았다. 뜻과 결과가 서로 다른 경우 어디에 비중을 두고 우열판단을 해야 할 것인가가 여기에서의 문제의 핵심이다. 물론 객관적인 평가를 중시하면 객관적 결과를 더 중시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 객관적인 평가에 담겨 있는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어떤 객관상태가 가장 선하면 그 객관상태가 최상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어떤 한 주체가 추구해야 할 최상의 상태와는 관계가 없을 수가 있다. 우선 가장 지혜가 깊은 경우에도 인과관계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자연현상처럼 인과관계상 가능해도 어떤 한 주체와 인과관계로 관련되기 힘든 현상들은 한 주체의 선악평가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연현상을 생각해보자. 날씨가 온화하여 과일과 식량이 풍부하게 만들어지는 경우와 지진이나 폭우가 내려 집과 사람이 다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객관적인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좋고 나쁨을 느낀다. 또 그에 따라 선한 자연현상, 악한 자연현상을 구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최상의 자연 상태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어떤 한 주체의 선택행위나 선악평가와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어떤 한 주체가 어떤 선택을 하던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들을 가장 좋게 만들기 위해 어떤 주체가 최상의 선택을 하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여기서 논의하는 최상은 일단 어떤 주체의 선택과 관련되어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영향 받는 내용들에 제한된다.

자칫 객관적 결과만을 강조하면, 어떤 한 주체의 선택과는 관계없는 많은 현상들을 그 주체의 최상이라고 판단할 우려가 짙게 된다. 그런 혼동은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들에서 더 많이 생겨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날씨가 좋고 풍작이 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좋음을 주는 선한 자연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 주체의 의사결정과 선택행위와 관련된 최상의 내용으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만을 강조하면 자칫 이런 내용들을 한 주체가 나아가야 할 최상으로 혼동해 섞어 넣는 경우가 발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객관적 내용들은 한 주체가 향할 최상의 내용에서 제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만 어떤 주체의 뜻과 행위가 있고 이어서 결과가 발생할 때, 그것들이 과연 그 주체와 인과관계로 관련된 것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한 주체가 어떤 뜻을 갖고 행위를 하고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면 굉장히 많은 요소가 함께 개입된다. 마치 어떤 사람이 배를 저어갈 때, 거기에는 강의 물흐름, 배 등이 함께 개입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론상 어떤 주체의 뜻과 행위 A가 결과 B와 인과관계로 관계되어 있는지를 알아내려면 다음의 판별식을 사용할 수 있다. 즉, A가 있을 때[有,無,生,滅] B가 있는[有,無,生,滅] 그 특정관계에서 다시 A가 없으면[無,有,滅,生] 그 경우들 전부에 B는 없다[無,有,滅,生]는 관계가 성립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그 A가 있기 ‘때문에’ B가 있다[此有故彼有..]라고 할 수 있다. [김철,「연기론과 자유의지에 의한 수행에 대한 연구」, (서울: 동국대학교, 2000), p.63] 따라서 일단 어떤 특정상황에서 A의 있고 없음 등[有,無,生,滅]에 관계없이 B가 있고 없음 등[有,無,生,滅]이 나타나면 A와는 직접적인 인과관련이 없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집에 난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부었으나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고 하자. 이 때 물을 부은 행위가 있거나 없거나, 불은 계속 타올랐을 것이다. 따라서 물을 부은 행위가 비록 불이 난 전후관계에 있었지만, 그것을 불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행한 어떤 A라는 행위가 인과관련이 없다고 하여 그 사람이 그 결과와 인과관련이 전혀 없다고 단순히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행위가 A, C, D 등이 있었다고 하자. 그 가운데 그는 A를 선택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C를 선택했다면 B라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는 C가 없다는 사실, 또는 그가 C를 선택하지 않은 태도[하지 않음, 不作爲]가 B의 발생과 인과관련이 있게 된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A는 B와 인과관계가 없어도 그 주체는 전체적으로 B의 발생과 인과관련이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앞의 예를 계속 이어서 보자. 앞의 예에서 만일 그 사람 옆에 강력한 소화기가 있었다고 하자. 그래서 버튼만 누르면 바로 불을 바로 끌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가 그 사용법을 잘 알고 있었다고도 가정하자. 그러나 그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물을 부어 끌려고 했다고 하자. 이 때 물론 물을 부은 행위는 불과 인과관련은 없다. 그런데 그가 소화기를 선택했다면 바로 불이 꺼질 수 있었는데,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불이 타올랐다면, 그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음은 불이 타오르게 된 원인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요소가 없음, 또는 하지 않음이 원인으로 평가받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다만 어떤 요소 없는 경우 모두를 어떤 주체와 관련시킬 수는 없다. 어떤 주체가 어떤 요소를 만들어 넣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그 주체에게 불가능한 일을 선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그 주체의 선택을 달리함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따라서 그 주체와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 결국 어떤 주체와 인과관계로 관련되는 경우는 그 당시 그가 선택 가능하고 할 수 있었던 행위를 하지 않은 경우로 제한된다.

이런 인과관계판단은 어떤 A와 무관한 많은 사실들을 제외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에 포함되는 범위도 매우 넓다. 앞에서 본 인과관계는 자연적인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비난과 책임을 묻게 되는 상식적인 범위보다도 더 넓다. 또 법률상 인정하는 인과관계의 범위와도 다르다. 법률에서는 책임을 묻고 형벌을 줄 때 기본적으로 인과관계 유무를 문제 삼는다. 그런데 여기서 다루는 인과관계는 이와 달리 한 주체가 가능한 최상의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경우에서 자신이 고려해야 할 범위로서 문제되는 것이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다. 즉 어떤 이가 법률상 인과관계가 없다고 인정받아 형벌을 받지 않거나, 책임을 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물건이 쌓아진 곳에서 문을 잠그지 않고 자는데 도둑이 들어와 훔칠 때, 거기에 물건을 둔 사람, 또는 물건 옆에서 잔 사람이 형벌을 받지는 않는다. 또 지나가다 이를 보고 소리쳐 깨우지 않은 사람도 형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앞의 방식으로 인과관계 판단을 하면 어떤 물건의 존재, 어떤 이가 잠을 잔 사실, 또는 어떤 이가 소리쳐 깨우지 않은 사실 등은 도둑이 물건을 훔치게 된 결과에 자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형벌을 받거나 안 받는 것과는 관계없이, 도둑질이라는 악한 사실은 이들 원인을 기초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악한 사실이 이들 원인으로 발생한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비난, 책임, 형벌과 관계없이 어떤 사람이 그 결과와 자신이 인과관계가 있는 한 가능한 악한 결과는 예방하도록 고려해야 할 사항이 된다. 즉, 인과관계의 내용에서 일어날 악이나 불쾌를 예방하고 반대로 선과 행복을 키울 수 있도록 한 주체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형벌이나 책임을 포함하여 모든 자연적인 사실에서 최상의 결과가 얻어지도록 관리 노력하려는 가운데 인과관계를 문제 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논의범위가 서로 다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떤 주체가 최상을 향할 때, 고려에 넣어야 할 범위는 자신과 자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범위의 내용들이다. 물론 이는 범위가 상당히 넓다. 자연적인 인과관계는 매우 광대하게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완전하게 이 모두를 다 고려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념적으로는 이와 같은 상태를 모두 고려하는 것을 최상의 상태라고 할 것이다. 한편 참고로 이런 인과관계가 인정되더라도 어떤 선택을 하던 결과가 동일하다던지, 또는 어떤 하나의 선택 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경우에는 그 선택은 그 주체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 이 문제는 위와 성격이 조금 다르므로 아래에서 별도로 살피기로 한다.

한편 위와 같이 자신과 인과관계가 관련되지 않는 내용들은 자신의 선택사항에는 넣을 수 없다. 그래서 비록 자신의 뜻과 행위가 있고 이와 선후관계로 어떤 현상이 있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다른 주체나 요소가 평가를 받아야 할 문제가 된다. 그래서 만일 이런 경우 선한 객관상태가 얻어져도 인과관계가 없는 그 주체가 얻은 최상은 아니라고 평가해야 한다. 아래에서는 이런 객관상태로 범위를 좁힐 때 그 객관상태가 선하게 되도록 하려고 하면, 다시 한 주체의 주관이 선해야 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관계를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2) 선한 뜻에 의한 인과관계의 조정

먼저 앞에서 자신과 인과관계가 있는 객관적인 행위나 결과가 선의 평가에 중요함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객관적인 범위에서 선한 최상의 결과가 나오게 하려면 한 주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입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한 주체는 뜻을 갖고 이 뜻을 실현할 인과관계를 알고자 하고, 또 그에 따라 말과 글, 태도와 행위를 갖춰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다시 또 다른 결과[영향]을 나타나게 한다.

그래서 만일 뜻을 실현할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안다면, 다음과 같은 경우가 가장 최상의 경우가 된다. 즉 이론상 가장 최상의 상태는 가능한 경우 가운데 가장 선한 상태를 지혜롭게 선택하고 그것을 뜻한 대로 지혜롭게 실현하는 것이다. 또 반대로 가장 최악의 상태는 가능한 가장 악한 상태를 지혜를 다해 뜻대로 실현하는 것일 것이다. 이 두 경우 가운데 무엇이 최상이고 최악인가는 매우 분명하다.

앞에서 제시한 이론적인 최상은 한 주체가 선택할 가장 이상적인 최상의 상태가 된다. 이런 이상적인 상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최상의 내용을 선택하기 위해, 또 선택한 뜻을 가장 원만하게 실현하기 위해 깊은 지혜를 필요로 한다.

그런 지혜로는 1차로 무엇이 가능하고 하지 않은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요구된다. 자칫 어떤 높은 지혜가 있으면 무엇이든 다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깊은 지혜가 있다고 하여 진리에 맞지 않는 내용 즉 가능하지 않은 내용을 무엇이든 실현해낼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물이 추우면 얼음이 된다. 그런 조건에서 물이 인과법칙상 금이 되거나, 금강석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조건에서 아무리 최상의 깊은 지혜가 있더라도 물을 금이나 금강석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지혜가 있더라도 인과나 조건의 구속을 벗어나 모든 것을 다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따라서 단지 최상의 높은 지혜는 이런 경우 불가능한 일을 불가능하다고 알고 가능한 일은 가능하다고 아는 힘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불가능한 것들을 그것이 불가능함을 모르고 무조건 추구하는 것은 지혜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무리 지혜가 깊더라도 얻을 수 있는 최상은 가능한 범위들 안에서 가장 최선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능한 범위에서 최상의 내용을 선택하기 위해 1차적으로 무엇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가를 정확히 아는 지혜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렇게 선택된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제대로 아는 것이 요구된다. 이는 어떤 원인을 갖추면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를 제대로 아는 것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혜를 갖춘다고 할 때 지혜는 선한 뜻에도 봉사하고, 악한 뜻에도 똑같이 봉사할 수 있다. 그래서 지혜 자체는 어느 뜻을 실현할 때에나 동일하게 봉사해주는 중립적인 도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지혜가 갖춰진 경우를 가정할 때 가능한 가장 선한 객관적 결과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는 선한 상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뜻자체에 있다고 해야 한다. 즉 지혜가 있는 상태에서 가장 선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선한 뜻인 것이다. 따라서 지혜가 있는 상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관적인 내용 뜻에 우선적인 비중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한 뜻을 이상의 지혜를 갖고 제대로 실천하여 가능한 가장 선한 결과를 뜻과 같이 실현하는 것이 이념적으로 최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에서는 대부분이 앞에서 나열한 깊은 지혜를 갖지는 못한다. 따라서 위에 나열한 내용은 단순히 이념적인 최상의 상태가 된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주체는 단지 발생 가능한 여러 가지 경우를 대체로 예측해 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바삐 선택하고 추구하는 현실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현실상황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최선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아래에서 살펴보자.


(3) 인과관계에 대한 부정확한 지식

한 주체가 객관상태가 선한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는 앞에서 본 것처럼 선한 뜻을 갖고 또 이 뜻을 실천할 인과관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인과 관계는 이론상 명확하게 앞에 제시한 방식으로 판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각 현상은 매우 복잡한 요소가 결합하여 나타나며, 우리는 사실 많은 경우 어떤 선택에 어떤 결과가 따를 지 인과관계를 정확히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는 결과가 실제 발생하고 나서야, 겨우 그 선택과 결과의 관계를 평가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사후적(事後的) 평가가 된다. 이런 사후적 평가도 물론 의미 있다. 그리고 이런 평가가 많이 쌓이면 그 이후 또 다른 선택을 할 때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후평가는 선택단계의 주체에게 다음 문제가 있다. 우선 이런 사후평가는 결과가 발생한 뒤에야 가능하다. 그래서 선택단계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사후평가의 내용을 미리 알기 어렵고, 따라서 선택에 미리 도움을 받기 힘들다.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았으면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를 결과가 발생한 후에 많이 한다. 그러나 미리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 한 이런 후회는 피할 수 없다.

더욱이 실제 어떤 결과가 일어난 이후에도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원인이 아닌지 사후적으로도 명확히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A가 정말 원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이론상 그 특정 상황에서 A란 요소를 빼거나 넣거나를 반복하여 그 결과의 발생 유무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에서 한번 일어난 사실에서 한 요소를 빼고 넣고 반복해 실험해볼 수는 없다. 따라서 현실의 요소들 가운데 정확히 무엇이 원인이고 아닌지를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한편 만일 어떤 주체와 결과가 인과관계가 있더라도 그 주체가 당시에 어떤 다른 선택가능성이 없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비록 그 주체와 결과가 인과관계가 있더라도 이론상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경우 그에게 있어서는 그 선택이 일종의 최상의 선택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선택가능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역시 경험을 통해서 명확히 확인할 도리가 없다. 어떤 시점에서 다른 선택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은 경우, 당시에 이것을 할 수 있었는데 ‘안’ 한건지 또는 할 수 없어서 ‘못’ 한건지는 명확히 판단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런 가능성유무는 주로 다른 비슷한 예를 근거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적인 특정상황에 대한 가능성유무의 확실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구체적인 특정상황이 갖는 차이가 가능성유무를 변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다른 선택의 가능성유무는 어느 쪽으로도 확실히 단정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또한 어떤 선택이 최상인가의 판단에는 다음의 어려움이 있다. 이런 평가에서는, 다른 선택 에 따르는 결과와 비교해보아야 상대적 선악을 평가할 수 있다. 만일 다른 선택을 해도 결과가 동일 유사하다거나, 또는 더 못하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 선택을 최상의 선택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어느 쪽이 좋음이 더 많은지 알려면 각 선택 가능한 경우들에서 나타날 결과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후평가 과정에서는 발생한 하나의 결과 모습만 보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 선택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다른 경우의 결과들은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는다. 선택한 내용이 뜻과 같이 나타나지 않듯, 다른 선택의 경우도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기 힘들다. 그것을 실제로 행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어떤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얼마나 나은가를 사후평가의 방법으로는 평가하기 곤란하게 된다. 그렇다고 실제 선택한 내용은 실제로 나타난 내용으로 평가하고, 선택되지 않은 내용들은 처음 단순히 예측한 내용으로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 때도 역시 유사한 다른 경우가 있으면 그 결과를 가지고 비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처음에 선택 가능하다고 생각한 다른 경우들의 결과와 직접 비교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어떤 선택이 최상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실행하기 전이나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같다. 또 그렇게 알 수 없음은 뜻이 선한 경우나 악한 경우나 다 같다.

이상과 같이 우리가 엄밀하게 살피고자 하면 많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는 뜻을 실천할 정확한 인과관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었는지, 각 선택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또 자신의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더 나은 건지를 정확히는 모르고 선택하는 것이 된다. 이런 현실 상황을 전제로 한다면 어떤 선택이 최상인 것인가.

현실에서는 앞에서 본 것처럼 이론상 제시한 엄밀한 인과관계를 파악해 판단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보통의 일반적인 경우들에서 관계를 파악하고, 또 자신의 경우와 유사한 경우들을 놓고서 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약간은 불완전한 대강의 예측 정도에 머무르게 된다. 만일 인과관계를 이처럼 약간은 부정확하게 그리고 조금밖에 모른다면, 그로 인해 때로는 어떤 결과가 자신의 본래 뜻과는 달리 이뤄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 주체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우연이나 실수에 의한 뜻하지 않았던 선 또는 악의 실현인 셈이다. 그래서 뜻은 선한데 결과는 악하게 나타나는 경우와, 그 반대로 뜻은 악한데 결과는 선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가치평가에서 어려운 부분은 바로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에 비중을 더 두는가하는 문제다. 객관적인 면을 강조하면 결과의 선함을 더 우위에 둘 수 있다. 그러나 주관적인 면을 강조하면 뜻의 선함에 더 우위를 둘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 문제를 더 자세히 본다.

뜻과 달리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들을 우선 나열해보자. 우선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뜻을 주체가 갖는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또는 뜻을 실현할 인과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일 수 있다. 또는 잘못된 지식을 갖거나 착오를 하여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경우일 수 있다. 또는 행위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거나 실천노력이 부족한 경우일 수 있다. 또는 외부요소가 개입하여 뜻과 행위와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선한 뜻을 가졌는데 악한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를 각 원인요소의 선악여부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보면 각 경우를 세분할 수 있겠지만 대강 의미 있는 경우로 다음 세 경우를 들 수 있다.
우선 주체의 뜻과 행위가 모두 선하다. 또 외부요소도 악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화합하여 악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택시를 잡아주었다. 택시운전사도 주의해 몰았다. 그런데 그 택시가 사고가 나서 그 사람이 다친 경우와 같다.
또 어떤 주체의 뜻과 행위는 선하다. 그러나 외부 요소가 악하여 악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택시를 잡아 주었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가 강도여서 그 사람이 다친 경우와 같다.
또 어떤 주체의 뜻은 선하지만, 무지나 잘못된 지식 실수 등으로 행위를 잘못 악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또 이에 외부요소도 개입하여 악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병든 사람을 위해 약을 주려 했는데, 그는 독을 약이라고 잘못 알고 주어, 그가 다친 경우와 같다.

앞의 두 경우는 주체의 뜻과 행위만 놓고 보면 선하다. 뒤의 경우는 뜻은 선하지만, 행위가 악하여, 그 주체 전체를 오로지 선하다고만 보기 힘들다. 그런데 여하튼 선한 뜻을 기초로 행위할 때 이처럼 나쁜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들 모든 경우 그 뜻에 기한 일정한 행위가 없었으면 특정한 나쁜 결과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경우다. 그래서 각 경우는 다르지만, 그 선한 뜻과 행위와 악한 결과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것은 같다. 물론 여기의 인과관계는 자연적인 인과관계를 의미함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결과는 많은 요소가 개입하여 발생한다. 그런데 만일 그 중 어떤 요소가 주로 나쁜 결과를 낳게 할 때는 그것을 나쁜 요소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명백히 이런 나쁜 요소가 개입하여 나쁜 결과가 나타나면 주로 그 요소만 원인으로 평가하기 쉽다. 그런데 손바닥 하나만 가지고는 소리를 내지 못하듯 하나의 결과가 발생하는 데에는 많은 요소가 화합하여야 한다. 또한 각 개별요소만 볼 때는 어떤 나쁜 요소도 없는데 이들이 화합하여 나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한편 악한 뜻과 행위로 선한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위와 같이 나열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뜻과 다른 결과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최상의 결과를 낳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선택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다음에서 살핀다.

앞에서 보듯 때로는 선한 뜻을 갖고도 악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가장 최상의 선한 결과를 얻고자 할 때, 반드시 선한 뜻만 갖는다고 그것을 반드시 뜻대로 이루지는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런 결과를 피하려면 가장 첫 번째로 인과관계가 어떻게 될 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인과관계를 정확히 안다면, 미리 이런 관계를 모두 파악하여 뜻과 행위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현실을 전제로 할 때는 우선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뜻과 다른 결과를 낳는 데는 잘못된 인과관계지식과 그에 따른 행위, 그리고 외부요소 등이 주로 개입한다. 이들의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어떤 외부요소가 개입할 때 뜻과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런데 그 결과는 정확히 어떤 형태가 될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것은 때로는 나쁜 결과를 만들기도 하고 좋은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한편 무지나 잘못된 지식도 같다. 이 역시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위를 선택하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는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하고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처럼 이들 요소는 뜻과 다른 결과를 낳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반대로 작용한다거나, 또는 오로지 선한 쪽으로만 또는 오로지 악한 쪽으로만 작용한다고 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 방향을 정확히 모르는 한 일단 그것은 중립적인 요소로 놓아야 할 것이다.

반면 뜻은 이미 본 것처럼 무지나 잘못된 지식, 또는 외부요소와 결합함에 따라 뜻과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지혜가 갖추어지면 선한 뜻은 그만큼 선한 결과를 많이 낳게 하는 요소가 된다. 또 악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지혜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전제에서는 뜻의 내용이 그 만큼 결과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결국 이를 종합하면, 다른 것들은 방향을 결정할 수 없는 반면 뜻은 지혜가 결합되는 범위에서 그 뜻과 같이 결과를 일으키는 힘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뜻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인과관계를 조금은 안다면, 그 범위에서 마땅히 선한 뜻을 갖고 선한 결과를 실현시키려 노력하는 쪽이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다른 외부요소가 결합하여 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것을 방지하려면 보다 완벽한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만일 완벽한 인과관계 지식을 갖춘 이후에만 행위할 수 있다고 한다면, 현실에서는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어떤 상황에서 선택과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다면 나머지 요소는 모두 어떤 방향으로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데 반해, 뜻은 지혜가 있는 만큼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으로 그 뜻을 선하게 하여 행위해 나가는 것이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미숙한 인과관계의 지식 때문에, 악한 뜻을 가져야 결과적으로 선한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자신만을 위해 부를 축적할 욕심으로 부를 추구해야 더 많이 부를 쌓고 결과적으로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각할 수는 있다. 이런 경우 어떤 이가 미리 이런 내용까지도 예측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선한 결과를 갖기 위해 미리 악한 뜻을 갖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런 악한 뜻은 결과적으로 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적인 뜻이다. 그래서 결국 선한 뜻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선한 뜻을 갖고 아는 범위에서 선을 추구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사후평가가 선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도 선택단계에서 선한 뜻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또 선택과정에서 선한 뜻을 선택함이 최상의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처럼 일단 명확한 부분이 있는 한 그 범위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을 최상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결과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명확한 범위에서 최악을 택해도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선택이 최상의 결과를 낳는지 모르기 때문에 악한 뜻을 가져도 되고 뜻과 일치하지 않는 행위나 실수나 자신이 모르는 인과관계나 우연에 의해 선한 최상의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라고 할 수는 없다. 한편 한 주체에게서 가장 명료한 부분은 자신의 뜻이다. 그래서 그 명료한 부분부터 선한 뜻을 갖는 쪽이 더 낫다고 해야 한다.

(4) 인과관계에 대한 무지의 경우

앞에서는 인과관계를 부분적으로 파악한 경우에 그 범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것은 비록 이념적으로 최상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현실적인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침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전혀 자신의 뜻을 실현할 인과관계나 방안을 모르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앞에서 본 것처럼 많은 요소가 함께 결합하여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이런 경우 어떤 선택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전혀 예측이 되지 않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떤 경우는 자신의 선한 뜻이 다행히 몇 번의 시행착오로 쉽게 성취되는 경우가 있다. 또 반면 오히려 뜻과 달리 매우 나쁜 결과가 쉽게 나타나는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비유해보자. 만일 어떤 이가 전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전자제품 회로 기판과 드라이버를 손에 쥔 상태에서 전자제품을 고치려 하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 모르는 상황에 비유될 수 있다. 이 때 잘못 부품하나를 만지면 그 전자제품은 모두 고장이 나고 말 것이다. 반면 똑같은 어둠 속이지만 단순히 사람이 누울 자리를 찾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비록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적당히 손으로 몇 번 만져서 누울 자리를 쉽게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상황별로 이처럼 매우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사실 처음 가 본 평야를 걸어갈 때 자신의 앞에 폭탄이 곳곳에 묻혀 있을지, 아니면 단순한 평야에 불과할지, 아니면 곳곳에 보물이 묻혀 있을지는 상황마다 다 다를 수 있다. 만일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실 자체를 인과관계를 모르는 한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무조건 뜻만 좋게 가진다고 좋은 결과가 얻어지지 않는 것은 앞에서 계속 강조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우선 선한 뜻을 갖되 자신이 뜻을 실현할 방안을 모른다면 그 상태에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 다음 그 상태에서 되도록 아는 내용을 늘리도록 그 방면에 지식을 갖춘 이를 찾거나, 또는 안전한 범위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 다음 어쩔 수 없이, 어떤 선택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는 경우에는, 자신의 무지에 따른 최악의 결과를 각오하고, 자신의 뜻을 향해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앞의 방책들은 주로 안전위주의 방식이 될 것이고 뒤의 방식은 주로 모험위주의 방식이 될 것이다. 실제 어떤 상황이 앞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때로는 모험위주 방식이 의외로 큰 성과를 올릴 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안전위주의 방식이 큰 피해를 예방하는 방책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정확히 어떤 것이 나을지는 경우마다 다르고, 미리 확률(確率)을 판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안전 위주의 방식을 우선 한다. 그것은 비록 선한 뜻을 갖고 행위하더라도, 무지나 과실이 있게 되면 - 물론 때로 선한 결과를 얻기도 하겠지만, - 자칫 악한 결과가 나타나면 그 폐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들 앞에서는 차라리 안전방식을 택해 잠시 중립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좀 더 지혜를 갖추어 뜻대로 선한 결과를 낳게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지(無知)나 무의식(無意識) 과실(過失)은 비록 사회적 형벌이나 비난을 감면(減免)받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과 관계없이, 일정한 현상(現象)은 냉정하게 인과관계로 나타난다. 뜨거운 물을 뜨거운 줄 모르고 손을 넣으면, 이를 알고 넣는 것보다 더 뜨겁게 화상을 입는다는 말이 있다. 즉 아무리 뜻이 좋더라도 인과관계에 무지한 상태에서 행위하면, 충분히 알고 나쁜 뜻을 갖고 행위하는 경우보다 때로는 더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객관상태는 냉정하게 인과관계에 따라 나타난다. 따라서 자신이 인과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이렇게 나타날 현상을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최상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각자에게 있는 것이다. 무지나 무의식 과실로 인한 악의 발생은 이런 측면에서는 선(善)의 실현을 방해하는 가장 큰 독(毒)이라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만일 자신이 어떤 분야에 대해 잘 모른다면 냉정한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과실로 인한 악을 예방하고, 최상의 상태가 만들어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앞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선한 뜻의 완성 > 선한 뜻의 불이행 > 악한 뜻의 불이행 > 선한 뜻으로 악한 결과 발생 > 악한 뜻으로 선한 결과 발생 > 악한 뜻으로 악한 결과 발생의 순서로 순서를 정해 볼 수 있다.

악한 뜻으로 선한 결과가 발생한 경우는 결과적으로 선한 결과가 발생하였으므로 선한 뜻의 불이행 보다 더 낫다고 평가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무지나 실수나 개입하여 뜻과 다른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는 그 방향이 어디로 향할지 매우 불확실하다. 그리고 그 악한 뜻은 지혜를 갖추면 악한 결과를 낳는데 더 많이 기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단순히 선한 뜻의 불이행 상태보다 낫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5) 뜻과 다른 결과의 평가

한편 한 주체가 선한 뜻을 갖는 것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도 중요하다고 본다.

앞에서 본 것처럼 경우에 따라 뜻과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한 주체는 뜻과 행위 결과 등이 서로 불일치할 때, 뜻에 자신 인격의 중심을 둔다. 그래서 만일 이들이 서로 불일치하면 뜻이 자신의 것이고 나머지는 이에 위배된 내용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뜻과 다른 결과가 나올 때 비록 자신의 뜻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지만, 자신 때문에 그 결과가 나왔다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이런 각 개인의 판단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즉 그것은 비록 앞에서 본 자연적인 인과관계는 있지만, 사회적인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하더라도 단순한 과실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체와 결과를 되도록 분리시키는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근거라면 같은 이치에서 비록 뜻과 달리 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영역에서 최상을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좋은 뜻을 갖고 뜻대로 이루는 것이 최상이지만, 그 다음으로는 뜻만이라도 최상으로 가진 뒤 노력하는 것을 다음의 최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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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다음의 전체적인 글의 일부입니다.
無名 著, <가칭><<최상의 행복 총론>>, 목차

이 글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교정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최종 완성되기 전에 미리 여러분의 거리낌 없는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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