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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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octr Gong
◑[작성일]◐ 2015/03/10/화/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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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qt6329

◈Doctr Gong 2015/03/10/화/13:43


● 삶의 목적에서 행복은 과연 바람직한 목표인가

- 논의 이유 

누구나 좋은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고통의 삶의 원인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있다.

행복론에서 일반적으로
삶에서 추구하는 좋음을 살핀다. 
그런데 앞과 같은 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이를 얻는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결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길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행복론은 지옥으로 사람을 안내하는 안내서란 말인가. 

또 만일 그렇다면 
이제 삶에서 행복 대신 무엇을 목표로 추구하며 
현실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도 문제된다. 

그래서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서정보 ori http://happiness007.tistory.com/entry/삶의-목적과의-관계#6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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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bma0506 
◈Lab value 불기2559/03/13/금/20:54
Doctr 님의 입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 위하여 글을 작성하다 보니, 
글 내용을 반복 수정하게 된다. 

그래서 수정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일단 여기에 복사본을 위치해 놓고 
원문을 옮기기로 한다. 
수정된 원문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링크를 통해 원문을 참조해주기 바란다. 

해당 내용은 중복을 피해 접기 처리한다. 

○ [pt op tr] fr http://story007.tistory.com/1039#0506 

10gfl--2015-03월_댓글보전.txt ☞◆vbma0506

'I 서-논의이유와 대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의이유와 대강에 관한-댓글모음  (0) 2013.03.19


◈Doctr Gong 2014/02/11/화/08:27


● 행복과 관련된 단어들

언어마다 차이가 있어서 복잡한 말들을 번여할 때 서로 다른 언어에서 쓰이는 말들이 일대일로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영어의 happiness 
그리스어의 eutuchia
독일어의 Gluecklichkeit
프랑스어의 bonheur
등 인도유럽에서 행복이란 말은 흔히 행복을 가져다 주는 행운이라는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쾌락 기쁨 환희 즐거움 행복 등으로 표현되는 유쾌한 감정들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한다.


Sissela Bok,  ##Exploring happiness : from Aristotle to brain science##  (London: Yale Univ press, 2010)  노상미 역, 행복학개론 (서울: 이매진,  2012)  p.28

같은 일을 경험해도 남들보다 훨씬 더 깊고 더 넓고 강렬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정상인이 색맹이나 약시인 사람보다 보이는 것에 훨씬 더 강렬하게 반응하는 일과 비슷하다. 

시력이 나쁠 때처럼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행복과 결핍을 알아채는 능력도 여러 가지 방법과 보조 수단을 써서 키울 수 있다. 
Sissela Bok,  ##Exploring happiness : from Aristotle to brain science##  (London: Yale Univ press, 2010)  노상미 역, 행복학개론 (서울: 이매진,  2012)  p.29

댓글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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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테이블 


◈Doctr Gong 2014/02/10/월/18:23


● 행복의 정의와 외관상 표현과의 관계

우리는 행복이나 기쁨 같은 말의 정의를 알기 오래 전부터 경험으로 그런 심리 상태들의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할 줄 안다...슬픔, 비탄, 우수, 절망, 고통, 비참, 비통, 고뇌 같은 심리상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감정들 사이의 복잡한 음영과 차이를 구별하기 시작한다
...여러가지 행복과 불행을 구별하는 일은 어디에 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위로와 애정, 기쁨을 느낀다.  
Sissela Bok,  ##Exploring happiness : from Aristotle to brain science##  (London: Yale Univ press, 2010)  노상미 역, 행복학개론 (서울: 이매진,  2012)  p.26



찰스 다윈은 기쁨, 화, 혐오, 슬픔 같은 기본 감정들의 표현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어디를 가나 기쁘면 펄쩍펄쩍 뛰고 박수를 치면서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다.3

심리학자인 폴 에크만Paul Ekman은 한 발 더 나아가 행복, 혐오, 놀람, 공포, 슬픔, 분노를 드러내는 얼굴 사진들을 
전세계 여러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실험을 해 다윈의 주장을 확실히 증명했다. 유쾌하게 활짝 웃는 사진을 보면 
다들 행복한 표정이라고 했고, 슬픔이나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진 역시 바로 알아봤다고 한다.4  
Sissela Bok,  ##Exploring happiness : from Aristotle to brain science##  (London: Yale Univ press, 2010)  노상미 역, 행복학개론 (서울: 이매진,  2012)  p.27


사람들이 기쁨과 고통을 느낀다고 말할 때 뇌 영상으로 뇌의 혈류와 뉴런의 활동을 추적한 신경학자들은 
다윈의 또 다른 주장도 확인해 주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이나 불행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들에 감정 이입하는 반응을 보인다는 주장 말이다. 
... 
영장류와 몇몇 조류들의 '거울신경 시스템'에 관한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이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의 행동을 보고 
마치 자기가 그 행동을 한 듯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인간의 뇌에도 비슷한 거울 신경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Sissela Bok,  ##Exploring happiness : from Aristotle to brain science##  (London: Yale Univ press, 2010)  노상미 역, 행복학개론 (서울: 이매진,  2012)  p.27

///

연구 자료를 위해서 인터넷 검색을 한참 해야 했다. 

하나의 표정으로 여러 감정을 표현하는 사진
또는 하나의 감정을 매번 다른 표정으로 표현하는 사진들을 
어디선가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약간은 위 내용에 반증이 될 만한 내용이 된다. 


- 다른 표정 다른 감정  - 










- 같은 표정 다른 감정 - 







- 영화배우 스티븐 시걸 




- 임요환 





- 이대호 


- 영화배우 제라드 버틀러 





- 송이경


- 같은 감정 다른 표정 - 


- 정형돈의 같은 감정 다른 표정들






Sting - Shape of my heart  


시셀라 복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정으로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각 사람마다 일정한 상황에서 갖는 감정의 내용이 추정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지, 
또는 

일정한 표정을 나타내게 하는 감정이 
그 표정으로 추정되는 내용과 정말 구체적으로 같은 지 다른 지는 

사실은 엄밀히 확인하거나 비교할 수단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감정은 각 사람의 마음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다른 이의 감정을 직접 얻어 올 수 없다는 한계가 
본래 있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자신마저도 자신의 복잡한 감정의 내용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언어로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함께 겪는다. 

마치 이상한 커피 맛을 느끼고 그것을 
평소의 커피 맛과 어떻게 다른 지 
이 두 커피 맛을 각기 
언어로 정확히 기술해내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행복의 정의를 어렵게 느끼게 되는 상황도 사실은 
이런 사정들에서 연유한다. 

분명 여러 감정과 관련되지만, 
그 가운데 정확히 어떤 감정이 
행복과 관련된 것인지 
또 각 감정은 정확히 어떤 상태의 느낌이라고 기술해야 하는지, 

또 종합적으로 어떤 감정 어떤 감정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상태인지 

더 나아가 규범적으로 
올바른 마음 상태로 요구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본다면, 
그런 바람직한 마음상태는 어떤 상태여야 한다고  
명확히 기술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게 기술에 어려움이 본래 있다고, 
행복의 감정을 그것을 느낄 만한 상황이나 
그런 행복을 느낄 때 보이는 표정을 뽑아내 나열한다고 
그것을 제대로 설명한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한 주체는 다른 주체의 마음 속 감정이나 느낌을 
정확히 얻지는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사람들은 
서로 엇비슷한 기관과 육체를 갖고 생활을 하는 것이기에 

서로 비슷한 상황에서 엇비슷한 감정을 느끼리라고 
전혀 추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추리 내용은 

언어를 통한 교류와 외부 표정들을 통해서도 지지될 수 있다. 


네덜란드 실험심리학지 '행동과정(Behavioural Processes)' 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이 짓는 표정과 감정상태까지도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출처: 영국 데일리메일)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31810515968787

 

영국 데일리메일은 2013년 3월 17일(현지시간) 미국 월든대학교 연구진의 최신 연구결과를 인용해

사람이 개의 얼굴 표정에서 드러나는 사소한 표정 변화를 바탕으로 

개의 감정 상태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실험은 50명의 참가자들에게 다양한 이미지로 촬영된 경찰견(벨지안 셰퍼드독, 5)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참가자들은 개가 행복하거나 슬픈지, 혹은 겁에 질리거나 놀란 상태인지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고 한다. 




행복한 감정은 가장 구별하기가 쉬웠다. 

참가자의 88%가 행복한 상태의 개 사진을 정확히 짚어냈고, 

70%는 화가 난 개의 표정을 읽어냈다. 

또 참가자의 45%는 놀란 감정을, 

37%는 슬픈 상태를 포착해냈다.


참가자들은 개의 귀와 눈매, 눈동자의 움직임을 토대로 감정 상태를 추측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간은 지난 10만년 동안 

개와 공감하는 능력을 본능적으로 발달시켜 왔다고 분석했다.


연구를 주도한 티나 블룸 심리학 박사는 

"인간은 최소 한 가지 이상의 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며 

"이를 토대로 인간이 다른 인간의 표정을 읽고 

감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 기사 인용 끝 ] ///



여하튼 이런 표정을 통한 감정의 이해는 
결국 자신의 마음으로써 
다른 주체의 마음 내용을 직접 얻어 내는 과정이라기 보다는 
감정의 추리 과정에 의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한 추리의 결과라고 본다. 

먼저 한 주체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일정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유사한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상대 역시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리라 추리해 생각하게 된다. 

또 그런 상황에서 다른 주체가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여 
이것을 서로 관련시켜 이해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즉 자신이 그 상황에서 느낀 감정 = 상대의 표정 
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나 다른 주체나 대부분 
추운 곳에서 같이 추위를 느끼고 
그 추위를 표정으로 나타내게 된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덥고 짜증나는 상황에서 짜증을 느끼고 
그 짜증을 표정으로 나타내게 된다.

또 대부분은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절망을 느끼고 
그 절망을 표정으로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일정한 상황에서 일정한 감정을 느끼고 
또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주체가 
지어보이는 표정을 통해 
다른 주체의 감정을 읽는 능력을 
갖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이해가 상당히 
다른 주체의 감정 상태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볼 것이다.

물론 앞에서 밝힌 한계 즉, 
한 주체는 다른 주체의 마음 안 내부 상태를 직접 얻을 수 없다는 한계를 
전제로 하면, 
역시 이 추리의 내용이 정말 다른 주체의 마음 안 내용과 
일치하는지를 단정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다른 여러 간접적인 추리 단서들 
즉 이후 이어지는 언어의 표현이나 이후의 태도 동작 등을 
통해 앞과 같은 추리가 상당히 사실과 
일치함을 추리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사정으로 
늘 그렇게 일치관계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의할 점이 있다고 본다.  


우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불리함을 초래하게 된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또 일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나 규범적으로 요구되는 내용이 있고 
또 그것을 적절히 표현해야 함을 배우고 요구받게 된다. 

간단히 말해 화가 난다고 해서 
화를 그대로 표출하면 그로 인해 더 큰 손해를 받게 됨을 경험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또 일정한 상황에서는 화가 나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받게도 된다. 

이런 경우 
원래 요구되는 내용은 
마음 안 감정도 그렇게 요구되는 내용으로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언어표현이나 동작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안 감정까지는 그렇게 변화시키지 못해도 
사회적으로 언어표현이나 동작 태도만은 
요구되는 형태로 취해야 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 각 주체는 
자신의 마음 속 감정과 달리,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속이면서 
자신의 감정과 다른 표정이나 언어 표현을 하는 것을 익히게 된다. 


한편, 더 나아가 
자신의 표정이나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읽고 
더 나아가 그것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상대가 이후 마음을 갖고 
표현하고 행동하고 태도를 취하는 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는 지에 대해 
자신이 좋고 나쁨을 느끼게도 된다.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해 상대가 어떤 평가를 해주길 바라는 
희망도 갖게 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감정 표현이나 언어 표현을 
만들어 내는 노력을 하게도 된다. 


또 더 나아가 상대의 이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이후에 이어지는 언어표현, 행동 태도(표정)의 변화에 대해서도 
자신이 좋아하고 바라는 내용이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이 취해야 할 언어표현과 행동 태도(표정)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를 
추리하고 다시 이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과정이 각 주체가 상당히 의도된 방식으로 
언어표현이나 동작, 태도(표정)등의 관리를 하게 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으로부터 호감을 받기 위해서는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자신도 좋아한다고 표현해야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 
그는 자신이 좋음을 느끼지 않아도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마치 자신도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고 
좋아하는 표정을 연출해내려 노력함을 의미한다. 

마치 연극이나 영화배우가 주어진 극본과 시나리오에 충실하여 
감정에 몰입하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그래서 감정과 외부 표현(언어, 동작, 태도, 표정)들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된다. 

예를 들어 자신은 속으로 슬픔과 비통함을 느끼지만, 

다른 이가 자신의 슬픔을 알아채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또는 다른 이가 자신의 슬픔을 알아채고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또는 다른 이가 자신의 슬픔을 알아채고 같이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또는 단지 그런 상황에서 슬픔을 느끼지 않고 의연하고 초연한 것처럼 평가받는 것이 좋고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다른 이가 좋아하는 상태로부터 슬픔을 느끼는 것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
등등의 여러 이유를 통해 
그런 감정을 숨기고 표현하지 않고 표정을 숨기고 
다른 표정으로 위장하고 표정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또 자신도 다른 주체의 감정을 직접 얻어낼 도리는 없고 
결국 다른 이들의 언어표현이나 표정 태도 동작 등으로 
타인의 감정을 추리해 이해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이런 여러 노력으로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읽는데 실패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이의 언어표현, 동작, 태도, 
그리고 그로부터 추리하게 되는 타 주체의 마음 속 감정 내용에 대해 
자신이 공감하기도 하고 
공감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것은 각각의 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기에서 우승을 다투는 상황에서 
상대가 이기는 것은 그를 응원한 쪽에서는 기쁨이지만, 
다른 이를 응원한 쪽에서는 슬픔의 원인이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단순하게 일정한 표정은 곧바로 그 사람의 감정이고 
또 그 감정을 그렇게 이해할 때 자신이 이 감정 상태에 자신을 
이입시킨다는 주장은 너무 단순한 가정이 된다. 


○ 그러나 일단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일단 고려할 만한다. 

예를 들어 감정이 표정이나 언어표현, 동작 태도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표정이나 언어표현, 동작 태도가 자신의 감정을 변화시켜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즉 좋은 감정을 갖게 될 때 좋은 표정이나 언어표현 동작 태도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러나 이와 반대 방향으로 
즉, 좋은 감정의 표정이나 언어표현 동작 태도를 
먼저 자신이 취하면 
그에 따라 자신의 감정이 이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음내용이 신체의 변화를 일으킨 것처럼 
신체의 변화가 마음의 내용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편, 자신이 나타내 보이는 감정 표현에 따라 
상대방도 영향 받는 경우가 많고 
자신도 다른 상대방이 보이는 감정 표현에 따라
영향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것을 응용하면, 
처음 자신이 기분 좋게 표정을 지으면 
상대도 기분 좋은 감정을 갖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짓게 되고 
다시 자신도 이에 영향받아 
기분이 좋아지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같다. 
자신이 화난 표정을 지으면 
상대도 역시 화나고 퉁명한 감정과 태도로 대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도 정말 그렇게 감정을 갖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바람직한 마음 감정을 갖는 것이 요구될 때 
우선 외부 표현(언어표현, 동작, 태도, 표정)을 그와 일치된 내용으로 만들고 

또 그런 내용으로 다른 이를 대하면, 

그 외부 표현은 우선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또 자신을 상대하는 다른 이의 마음과 상대의 외부 표현을 변화시키고 
다시 그로 인해 자신도 변화하는 과정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 궁극적으로 올바른 내용이 요구될 때는 
겉 표현만 그렇게 올바르게 보일 듯한 외관을 만드는 것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런 내용을 마음에서부터 변화시켜 만들어 내고 
그리고 다시 그런 마음 상태에 일치되는 외부 표현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어떤 잘못을 지적받을 때 화를 내지 말라는 요구는 
단지 화가 나더라도 화를 표현하지 말고 참으라는 요구라기 보다는 

그 지적을 좋게 받아들이고 
화를 일으키지 말고 그에 따라 표정이나 언어 표현, 동작 태도 역시 
그렇게 좋은 상태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즉 사회생활을 위해서 억지로 하기는 싫지만, 
속 마음 겉 표현 따로 따로 유지하면서 
속 마음 상태와 다른 표현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행복의 정의와 외관상 표현과의 관계
○ 행복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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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2/10/월/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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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r Gong 2014/02/02/일/20:48


● 행복의 정의와 설명 문제 

환희, 기쁨, 뿌듯함, 만족, 즐거움, 쾌감, 도취, 행복, 황홀 이런 심리는 정의나 설명보다 묘사를 해야 훨씬 더 생생하다. 

Sissela Bok,  ##Exploring happiness : from Aristotle to brain science##  (London: Yale Univ press, 2010)  노상미 역, 행복학개론 (서울: 이매진,  2012)  p.25


오직, 맛보고 느끼기만 한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느낌 말고 내 행복을 가리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가 떠 일어나니 행복했다. 산책을 하니 행복했다. 
엄마를 보니 행복했다. 엄마 곁을 떠나니 행복했다. 숲은 지나고 언덕을 오르고 
골짜기를 헤매고 책을 읽고 빈둥거렸다. 정원을 돌보고 과일을 따고 집안 일을 거들었다. 
그러는 동안 행복은 어디든 날 따라다닌다. 
- 장 자크 루소, ≪고백록≫1- 
Sissela Bok,  ##Exploring happiness : from Aristotle to brain science##  (London: Yale Univ press, 2010)  노상미 역, 행복학개론 (서울: 이매진,  2012)  p.24

큰 짐을 벗거나,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든 때, 
아니면 갑자기 심오한 깨달음을 얻거나 위대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때 
...
추위속에서 몇 시간 동안 벌벌 떠다 구조됐을 때 말로 표현할 길 없는 행복과 고마움이 밀려들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다른 친구는 출산을 하고 옆에 누워 있는 아기를 처음 봤을 때 애정이 솟구치던 순간을 즉시 떠올렸다. 
Sissela Bok,  ##Exploring happiness : from Aristotle to brain science##  (London: Yale Univ press, 2010)  노상미 역, 행복학개론 (서울: 이매진,  2012)  p.25


우리는 행복이나 기쁨같은 말의 정의를 알기 오래 전부터 경험으로 그런 심리 상태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할 줄 알고 
어떤 감정이 얼마나 강렬하게 오래 이어지고 
어떤 감정은 그렇지 않은 지 알 수 있다. 

슬픔, 비판, 우수, 절망, 고통, 비참, 비통, 고뇌 같은 심리 상태도 마찬가지다. 
Sissela Bok,  ##Exploring happiness : from Aristotle to brain science##  (London: Yale Univ press, 2010)  노상미 역, 행복학개론 (서울: 이매진,  2012)  p.26


///
행복을 묘사한다고 하여 
행복을 느끼는 상황을 나열하면 행복이 무엇인지 얻을 수 있을까. 
앞에서 시셀라 복은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행복을 느낄만한 상황을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앞의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에서 인용된 부분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보자. 


오직, 맛보고 느끼기만 한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느낌 말고 내 불행을 가리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가 떠 일어나니 슬펐다. 산책을 하니 우울했다. 
엄마를 보니 고통을 느꼈다. 엄마 곁을 떠나니 허탈했다. 
숲은 지나고 언덕을 오르고 
골짜기를 헤매고 책을 읽고 빈둥거렸다. 정원을 돌보고 과일을 따고 집안 일을 거들었다. 
그러는 동안 고뇌와 슬픔은 어디든 날 따라다닌다. 
- 장 자크 루소, ≪고백록≫1-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에서 상황은 그다지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한쪽은 행복을 느낀다고 서술했고 
뒤 부분에서는 불행과 관련된 감정을 느낀다고 서술했다. 

우리는 이 두 내용이 정반대의 내용이지만, 그러나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만일 앞의 내용을 뒤와 같이 바꿀 때 이것이 부적절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장이라고 생각 된다면, 
앞과 같은 제시가 행복을 설명하는 데 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래서 위와 같이 설명하여 행복을 나타내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을 생각하게 된다. 
위 상황이 행복과 관련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문장에서 
그 상황에서 우울하다거나 슬프다고 표현하지 않고 
행복하다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행복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가 문제될 때, 
그 상황과는 별개로 그 행복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것이 행복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 어떤 이는 불행을 느낄 수도 있고 
루소처럼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하면, 
그 상황이 곧 행복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행복을 얻는데는 무언가 다른 요소가 더 필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 그 상황이 곧 행복이 아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얻게 된 행복에 대한 설명도 이런 제시만으로 부족하다고 해야 한다. 

나머지 예들도 이와 유사하다. 

큰 짐을 벗었는데 허무함을 느꼈다거나, 
예기치 못한 행운이 다가왔는데 당혹스러웠다거나, 
갑자기 심오한 깨달음을 얻고 과거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다거나, 
위대한 아름다움에 초라함을 느꼈다거나,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또 물론 
그런 경우에 일정한 좋음을 얻는 것은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 경우에도 무언가 다른 특수한 사정 때문에 
이처럼 불행과 관련된 감정을 느꼈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누워 있는 아기를 처음 봤을 때
아이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다거나, 결혼할 수 없는 상황이라거나, 
장래에 대한 걱정 등등의 사유로 
그녀가 놓인 상황을 생각하며 애정보다는 
절망감과 비통함이 솟구쳤다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커피와 홍차의 맛을 보고 구별할 때 
그것을 다시 문장으로 기술하려고 하면 
시셀라 복이 제기하는 문제와 동일한 문제점을 느끼게 된다. 

말로써 어떻게 커피의 맛을 기술하고 홍차의 맛을 어떻게 기술하고 
이 차이를 어떻게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특히 커피와 홍차를 전혀 마셔보지 못한 어떤 이에게 
이 설명과 표현만으로 
과연 커피와 홍차의 맛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커피와 홍차를 마시는 주변 상황과 분위기를 기술한다고 
하여 그 맛을 전달할 수는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경우 커피와 홍자를 마셔본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커피와 홍차의 맛으로 
이 커피와 홍차의 내용을 이해할 것이다. 
아무리 문장을 쓴 이가 평소와는 아주 다른 
커피와 홍차를 맛보고 그것에 대해 기술했다고 하더라도 
그 맛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왜냐하면 글을 읽는 이는 커피와 홍차란 단어로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커피와 홍차의 맛으로 
대체시키기 때문이다. 

커피와 홍차를 한 번도 맛보지 않은 이는 
또 그 단어로 아무런 내용을 얻어 갖지 못할 수도 있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위와 같은 기술을 대할 때 
독자는 모두 자신이 그런 상황에서 느낄 
어떤 감정으로 대체시켜 그것을 이해할 것이다. 
물론 일부는 비슷하지만, 
그러나 전혀 엉뚱한 내용일 수도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번도 좋음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경우는 없겠지만, 
그러나 행복이란 단순한 좋음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이런 단순한 좋음의 느낌 외에 
무언가를 추가로 덧붙여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행복은 물론 감각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글로 전달할 때는 
마치 감각을 글로 표현해 전달하려고 할 경우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어떤 심리상태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표현하지만, 
그 역시 말과 정의로써 그 상태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이것만으로, 그 상태를 정확하게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아마 커피와 홍차의 맛을 다른 이에게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할 때 
그래서 모든 정의나 기술을 포기하고 
단지 커피나 홍차의 샘플을 붙여 보내 직접 맛보게 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른다. 

커피나 홍자의 경우에는 그것이 효과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행복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행복이 아니라 단순한 좋음의 느낌만을 놓고 보아도 
또 다르다. 

예를 들어 장자크 루소가 햇빛으로 인해 행복을 느꼈다고 하여 
그 햇빛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때 
다른 이들은 모두 루소가 느낀 그 순간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다고 보게 된다. 

 


[행복 관련 이미지-구글]

어떤 단어를 나타내는 이미지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다. 

위 그림들은 행복이란 단어를 통해 관련된 이미지로 검색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이미지를 보고 
행복이란 단어나 행복의 생각을 꺼내올 수 있을까. 
미리 행복과 관련한 이미지라고 알려 주지 않으면 
이 이미지로부터 행복을 반드시 생각해낸다고 볼 수는 없다. 

이 그림은 사실 행복 이외에도 수 많은 내용과 관련된다. 

어떤 이는 색깔을 설명하기 위해서 또는 동작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이미지를 사용할 수도 있다. 
색깔이나 동작과 행복은 전혀 엉뚱하다. 

그런데 위 재료는 두 경우가 다 해당된다. 

따라서 이 재료를 제시하고 그로써 
행복을 설명했다고 하기는 곤란해진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이런 재료에 다시 무언가 설명을 덧붙여야 할 필요를 느낀다. 

물론 행복이란 단어는 분명 
누군가 어떤 순간에 느끼는 정신 안의 내용을 가리킬 것이다. 

자신도 어느 순간 느꼇을 것이고 
다른 이도 어느 순간 느꼈던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아무리 언어로 정의하고 설명하려고 해도 
그 정의와 설명만으로 그 감정 자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의와 설명의 노력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본다. 



문서정보

2014-02-02-일-20-48
● 행복의 정의와 설명 문제 
○ 실현과정과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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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r Gong 2014/02/12/수/23:46


전념은 곧 명상 또는 자기 최면과 관련된다. 

원래 관념에 따라 곧바로 행동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는 

가장 집중하여 전념할 때와 반대로 이완할 때라고 한다. 


전념을 통해 명상 상태에 쉽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신체 부분은 모두 이완시키고 

동시에 자신의 관념에 따라 

행동을 일치시켜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가장 좋은 것이 숨쉬기이다. 


본래 숨을 쉴 때 숨은 자신의 의식에 따라 

쉰다기 보다는 

그런 의식을 특별히 기울지 않고도 

자율적으로 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숨을 자신의 관념에 의해서 

자신이 내쉰다고 하고 들이쉰다고 의식을 

기울이면서 숨을 내쉬거나 들이쉬면, 

숨을 쉼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의식이 집중되고 

또한 관념과 행동의 일치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숨을 한 10 번 쉴 때까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의식만 가질 수 있게 되면 

자신은 이 숨과 함께 자기 최면에 들어갈 수도 있고 

또한 다음 단계의 명상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그렇게 집중한 상태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주제에 의식을 옮기면 

집중된 상태에서 그 주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나갈 수 있다고 본다. 




문서정보



댓글 테이블 





◈Doctr Gong 2014/01/20/월/20:42


♥ 잡담 ♥행복론 연구의 시작과 전념 

행복론을 연구하려면, 

어느 부분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할까 

막막하고 망연한 생각이 들게 된다. 


과거에 생각날때마다 글을 쓰고 

체계를 맞추어 놓았지만, 

과거 글을 다시 살펴서 정리하는 것은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리는 하기는 해야 되는데 

분야가 많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읽고 정리를 해야 할 지 

매번 망설여진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잦다.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 되는지, 

마음이 복잡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념과 불교의 8정도의 관계


행복론 총론에서 제시하는 

행복의 실현방안은 

처음 전념(집중,명상,선정)등의 방안을 통해 

마음을 정돈하고 

그런 가운데 진리와 가치 등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고 

그 다음 가치에 관한 반성을 통해 

해야 마땅한 일을 선택해 

실현해 나가면서 

행복을 얻어 나가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전념이란 간단히 말하면, 

마음을 들뜨거나 

가라앉은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내용을 연구하자면 

불교의 선정 방안에 관한 내용을 연구한다던지 

최면 방안을 연구해본다던지 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실생활에서 간단히 이용한다면, 

심호흡을 하면서 숫자를 세고 

마음에서 그 숫자만 생각나는 정도로도 

마음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간단히 거둘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상태에서 조용히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가를 

천천히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본 행복론에서는 선한 행복을 얻는 방안을 연구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방안을 검토하는데 

그 안에는 불교의 수행방안도 포함된다. 


그런데 불교의 기초 수행방안에는 

8 가지 올바른 수행방안[8정도]가 제시되고 있고, 

거기에는 올바른 선정이 8번째로 들어 있다.  

그리고 첫번째 항목에는 올바른 견해[정견]가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정견의 항목은 주로 4념처와 관련되어 

부정, 고, 무상, 무아 등의 내용을 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행복의 실천방안에서 

불교에서 제시하는 8정도의 순서와 달리 

전념(명상,선정)을 가장 앞에 배치한 것은 


행복의 실천방안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상황은 

사실 여러가지 문제로 마음이 복잡하면서 

그 복잡한 문제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황을 예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정견의 내용처럼 

곧바로 진리나 가치에 대해 

일일히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고 

또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면, 

마음이 뒤 얽힌 상태에서 

마음이 더 복잡하게 되기 쉽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복잡한 문제들로 마음이 

뒤 얽히고 

마음이 공연히 들뜨거나 가라앉아서 

처음 행복을 실천할 방안으로는 


전념(명상, 선정)을 가장 먼저 실행하여 

마음을 정돈한 상태에서 

그 이후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8 정도를 검토해볼 때 

이것은 계속 순환하는 차례로 보았기에, 

가장 뒤의 항목을 가장 앞으로 돌려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생활을 하는 가운데 

무엇부터 일을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할 경우에도 

역시 이 방안부터 실천해야 하리라 본다. 




문서정보

●전념과 불교의 8정도의 관계

○ 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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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의 댓글 


◈Doctr Gong 2014/01/20/월/21:03



[tr] to 행복의 단상 

● 조각글 페이지와 글의 정리문제 


글을 쓰고 정리한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써 놓은 글을 정리하기 위해 

어느 순간 자신의 글만 

반복해서 또 보고 또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써놓은 글의 표현을 정리하고 

내용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 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되면 

자신의 글을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게 된다. 

너무 반복해 보았기 때문에 

지겹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글들은 

그 상태로 공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시간을 내 정리하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 

그 상태로  

마냥 방치되게 된다. 



행복론의 구상은 

1980년도에 시작된 것이다. 

그 때 목차를 구성하고 

관련된 글들을 조금씩 쓰고 모아 왔는데, 

당시는 카드에 생각이 날 때마다 

조금씩 글을써 분류해 놓았었다. 


그 뒤에 컴퓨터로 작업을 했는데 

아직도 과거의 카드에 써 놓은 글들은 

옮겨 놓지 못하고 있다. 


몇 개를 들춰보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 그렇게 큰 도움이 된다고 보기도 어렵고 

무엇보다도 시간적 여유가 없어 

그 내용들을 다시 컴퓨터로 옮겨 놓기가 힘들다. 


원래 행복론 목차는 

처음 작성해 놓은 이후 

큰 변동이 없었는데, 


2004년도 즈음에 큰 수정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행복에만 집착하면 

행복론이 자칫 악마의 행복론이 되기 쉽다는 

반성과 검토 때문이었다. 


행복론은 처음 

행복의 개념과 그 구조에 대해 

만족-즐거움,기쁨-보람,가치-평온,안정-희망, 의욕-(실현과정- 결과)의 상태를  

순환하거나 

이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행복한 가운데 좀 더 나은 행복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바람직한 행복의 순환과정으로 보고 

좀 더 나은 행복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좀 더 나은 행복은 어떤 상태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 

어차피 행복하다면, 

행복을 얻는 수단이 많고 큰 것을 

더 나은 상태의 행복이라고 처음에는 잘못 판단하였었다. 


그래서 행복론 각론을 통하여 

행복을 얻는 수단을 가장 많이 얻는 방안이 

곧 더 나은 행복을 얻는 방안으로 보고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각론에서 다루는 내용은 

항목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그러나 그런 연구과정에서 

위 판단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원래 행복을 얻는 수단은 

행복에 비해 하위 가치를 갖는 항목인 것이다. 


그런데 상위가치인 행복의 우열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 수단이 될 뿐인 하위 가치 항목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인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똑같이 행복하다면, 

돈이 많은 상태에서 행복한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돈이 없는 상태에서 행복한가가 

문제될 때 

처음에는 어차피 같다면 

돈이 많은 상태에서 행복한 것이 더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판단은 앞과 같은 이유로 잘못된 판단이고, 

또 그런 판단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게 되면 

그 행복론은  

곧 악마의 행복론으로 

행복론의 성격을 바꾸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2004 년 이후에 작업은 

기존의 행복론의 내용을 


보다 가치있는 행복의 내용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행복의 우열을 판단할 때 

어차피 같이 행복하다면 

어떤 것이 더 나은 행복인가의 문제는 

행복보다 더 상위가치인 다른 가치로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차피 행복하다면, 

아름답고 '선한 뜻'의 -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행하는 상태가 

그렇지 않는 행복의 상태보다 낫다는 방향으로 

체계를 변경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하다보니 

행복론은 

선에 대해서 논의하는 윤리학적인 내용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논의는 더 지루해지고 

읽기도 쓰기도 정리하기도 더 복잡해진 느낌이다. 


체계가 자꾸 바뀌니, 

글을 쓰고 쓴 글을 정리하는 문제도 

한없이 복잡하다. 


그래서 정리작업이 지지 부진한 가운데, 

2008 년도 즈음에는 

일단 내용을 아주 간단히 요약해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요약본을 정리하여 

일단 인터넷에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자세한 논의부분의 정리는 

계속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마냥 방치해두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정리를 해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과거의 글을 정리하더라도 

과거글을 참고는 하지만, 

과거글들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새로 연구를 시작하는 입장에서 

글을 써 나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작업을 좀 즐겁게 진행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 좀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일단 되도록 사례 중심으로 

또는 구체적 이야기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는 필요하지만, 

이는 글을 쓰는 입장에서도 

작업이 지루하고 

또 읽는 입장에서도 그러하리라 보기 때문이다. 



문서정보














































































































































































































[i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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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학 개론 - 요약본 


행복에도 우열이 있다.  


행복 가운데 

최상의 상태의 행복이란,  

아름답고 선하며 가치있는 뜻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추구하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  


단순히 무엇을 통해서든 

행복만 얻어내면 된다고 

행복에 집착하면 

행복을 얻을 수 없다. 


모든 이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에서 멀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행복론





[목차]




● 최상의 행복으로 가는 길 

[ 부제: - 행복의 가치와 실현방법론 ]

○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가치판단의 잘못 

○ 가치가 적은 것이 

가치가 커 보이는 이유 


○ 행복을 얻는 많은 수단들 

○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 행복한 생존과 

이의 실현을 위한 수단들

○ 수단들의 기여도 

○ 행복한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 않은 수단들

○ 행복한 생존을 

현명하게 얻지 못하는 경우 

○ 행복한 생존을 

현명하게 얻는 경우 



● 행복한 생존보다 

더 가치 있는 상태는 없는가? 

- 아름답고 가치있는 행복



● 최상의 가치 - 

아름답고 가치있는 선한 뜻의 실현 


○ 선의 구체적인 의미 

○ 선의 기본요소 - 좋은 느낌 

        ○ 선악의 원리

○ 선의 판단의 

어려움의 이유 

○ 선악판단이 

엇갈리는 사례들 

○ 선의 기준으로 

힘의 우위를 주장하는 입장

○ 선의 기준으로 

다수의 행복의 양을 

문제삼는 입장

○ 삶에서 의존하는 

선의 기준 

○ 선의 실현 

○ 선의 구체적 실현방안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  

○ 선을 행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  




● 행복의 실현방안 


○ 행복의 실현단계 1

-명상, 집중

○ 행복의 실현단계 2

-검토, 반성

○ 행복의 실현단계 3

-뜻의 결정

○ 행복의 실현단계 4

-뜻을 그림

○ 행복의 실현단계 5

-뜻의 실현

○ 행복의 실현단계 6

-장점에서 행복 얻기

        ▼ 중심 희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행복 

        ▼ 선을 멀리하며, 

불행하게 사는 이유 

○ 행복의 실현방안 7 

-악한 단점을 끊기

○ 행복의 실현방안 8 

-가치 없는 것에 대한 무시



[OUTPUT]-FROMㅡ o:/G/G/book/SeonHyeonJiBog_v19_unicode.txt


●제목: 최상의 행복으로 가는 길 


●부제:  

선한 행복의 가치와 

실현방법론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자신이 

전보다 좋은 상태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좋은 상태를 

이룰 때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좋은 상태가 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성공의 의미, 

그리고 가장 좋은 상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은 보통 

쾌락, 돈, 권력, 

지위, 명예, 

인기를 얻거나 

시합 및 경쟁 등에서의 승리 등을 

성공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를 얻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고 

이를 잃으면 

세상을 다 잃은 듯 

패배감에 젖는다. 





이것들은 

물론 좋은 것일 것이다. 


또 이외에도 

우리는 주변에 

많은 좋은 것들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다 차지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는 어렵다. 


어느 것을 얻기 위해서는 

늘 무언가 다른 것을 

희생시키고 포기해야만 

그 가운데 몇몇을 

간신히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삶의 제한된 조건에서 

원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얻기 곤란함을 안다. 


그런데 

만일 보잘 것 없는 것을 

하나 차지하기 위해 

가치가 높은 것들을 

모두 희생시킨다면, 

현명하지 않다. 


또 이를 성공으로 보기도 힘들다. 


예를 들어 

막대한 부를 얻기 위해  

대신 두 눈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부를 얻더라도 

성공이라고 보기 힘든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무엇보다 더 소중한가를 

알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또 

그 다음 그렇게 소중한 것들을 

어떻게 하면 이뤄낼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남은 과제는 

이런 내용을 실천하여 

우리의 상태를 보다 가치 있는 상태로 

점점 만들어나가야 한다. 


아래에서 이들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무엇이 

다른 것보다 더 낫고 

또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여러 가지 가운데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먼저 

다음 방법을 사용하면, 

일단 자신이 

무엇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가를 알아낼 수 있다. 


일단 

문제되는 대상들 가운데 

자신은 

오직 어느 하나만을 

가져야만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자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상상해본다. 


그러면 자신이 

이들 가운데 

무엇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상상을 통한 

자신의 생각과 선택이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고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이런 비교에서 생각해야만 할 

많은 문제점을 지나치면서 

잘못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어느 쪽이 

더 좋은 선택인지는 

여러 각도에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선 간단히 앞에 나열한 

쾌락, 돈, 권력, 지위, 명예, 인기와 

생명, 건강 사이에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그 대답은 

앞에서 생각한 것처럼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가질 수 있다고 

가정해 봄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만일 가정하여 

이 모든 것을 얻는 대신 

생명이나 건강을 잃는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또 예를 들어 

누군가 우주 전부를 

자기에게 준다면 

그 대신 

자신의 심장 또는 두 눈 모두를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주 전부를 

자신이 갖게 되더라도 

이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나 건강을 

희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 건강은 

자신에게는 우주 전체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최상의 행복



● 가치판단의 잘못 


현실에서는 

가치가 적은 것들이 

가치가 높은 것들보다 

더 중요시되고 강조되는 

가치전도(價値顚倒)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것들에 

보다 많이 집착하며 

살아가기 쉽다. 


앞에서 생명, 건강이 

돈 권력 명예 등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간단히 먼저 살펴보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돈, 권력, 명예를 

서로 얻으려 애쓰다 

우주보다 소중한 

생명과 건강을 잃어버리고 

서로 해치고 죽기도 한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가치가 적은 것을 

가치가 많은 것보다 중요하다고 

잘못 여기며 살아간다. 


이처럼 

뒤바뀐 가치판단을 하고 

살아가게 되는 이유를 

먼저 살펴보자. 





● 가치가 적은 것이 

가치가 커 보이는 이유 



가치가 적더라도 

그것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만 바라보고 

그것에만 열중해 집착하면 

그것이 크게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이 

마치 모든 가치인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현미경을 가지고 

물건을 보면 

작고 하찮은 물건을 

마치 우주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생명은 

제한된 상황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 모든 내용을 

다 잘 알지는 못한다. 


이렇게 경험과 지식이 적으면 

더 가치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해 

잘못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또 마음은 

당장 느끼는 감정에 지배받기 쉽다. 




이런 이유로 

당장의 느낌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좋음, 

자신이 먼 미래에 가질 좋음, 

다른 생명이 느끼는 좋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쉽게 된다. 



또 무언가를 비교할 때 

겉에 드러난 것만으로 

비교함으로써 

잘못된 평가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각자가 

마음속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일시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그를 얻기 위한 물질적 수단은 

눈에 보이고 

남에게 보여줄 수도 있고 

또 어느 정도 지속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외부 물질을 

마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다고 잘못 여기기도 한다. 



또 대부분 사람이 

좋아하고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구입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시장의 물건에는 

대부분 상대적 가격이 붙게 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시장에서의 가격을 

곧 가치의 기준으로 생각하기 쉽다. 





또 화폐는 

다른 재화를 

구입할 가능성을 나타내며 

그 자체가 가치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는 

시장가격이 높은 것과 

많은 화폐에 가치를 두게 된다. 



또 시장에서는 

물건을 사거나 파는 과정에서 

그 차액을 이익으로 거둘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장래 가격과 

그 물건을 다시 팔을 때 얻을 이익률이 

많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는 차익을 얻는 데 

주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가치를 높이 갖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경우에 

이렇게 시장가격으로 

가치를 평가하게 되면 

잘못된 평가를 하기 쉽다.  



우선 이 경우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고 

가격이 없으면 

곧 가치 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떤 것은 

가치가 아주 높아도 

남에게 주거나 

다른 물건과 교환할 수 없어 

시장에서 가격이 

아예 매겨지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눈, 심장과 같은 것이다. 



또 비록 

최종적으로 이를 얻어 사용할 때 

얻는 좋음은 많아도 

그것을 대부분 갖고 있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흔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가격이 낮은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물이나 공기와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또 

최종적으로 지니고 사용하는 데 

목적이 있고 

다른 것과 결코 바꾸지 않으려는 경우, 

이런 시장가격은 

처음부터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중한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기념품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자신의 눈, 물, 기념품, 보석 등에서 

가치를 비교할 때 

자칫 시장가격만으로 

그 가치의 우열을 평가하려하면, 

잘못된 가치평가를 하게 된다. 


또 이런 식의 평가는 

다른 경우에서도 

역시 잘못된 평가를 하게 만든다. 


즉 대부분 갖고 있는 것은 흔하고 

시장가격이 낫다는 경험에서 

대부분 갖고 있는 것은 

곧 가치가 적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부모나 가족들보다 

희귀한 재화를 

더 소중하게 여기기도 한다. 


또 생명 건강을 

돈 권력보다 가볍게 여기는 것은 

생명 건강은 

누구나 이미 갖고 있다고 여겨 

하찮게 여기는 것도 

한 원인이 된다. 


또 돈 권력 등은 

상대적으로 소수만 갖고 있어 

부러움을 갖게 만들고, 

자신은 이들과 비교해 

아직 충분히 이를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가치평가를 하는 데 

어려움을 갖게 하는 많은 원인이 있다. 


현실내용은 

끝없이 변화하며 

복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한 요소는 

다양한 요소와 결합하여 

다양한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각 결과는 

각기 많은 좋음과 나쁨과 관련된다. 





그래서 

만일 어떤 것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이런 내용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많은 현상의 

원인과 결과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어떤 결과를 각기 가져오는지 잘 모른다. 


또한 각각에서 

자신과 다른 생명들이 

어떤 좋음과 나쁨을 

받게 될지도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많은 것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좋고 가치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게 된다. 



또 비록 

가장 좋고 가치 있는 것이 무언가를 

안다 해도 

이를 실현할 방법을 잘 모른다. 


또는 자신은 

그런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실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실현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포기하거나 고려대상에서 

지워버리게 된다. 


또 방법을 알아도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당장 자신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지 않고 


또한 행하기에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여 

쉽게 포기한다. 


이런 여러 이유로 

중요한 것은 포기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더 집착하며 

살아가기 쉽게 된다. 



이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행복을 얻는 많은 수단들 


사람들이 

갖기를 원하는 좋은 내용은 많다. 

그러나 그 대강을 요약해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건강 -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한다. 



시간 - 주어진 시간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늘려 살고자 한다. 


쾌 - 살면서 

가지가지 즐거움을 

많이 맛보려고 한다. 


지혜 - 지혜를 많이 가지려고 한다.  


지식 - 지식을 많이 쌓으려 한다.  


미 - 아름다움을 가지려 한다.  


인격 - 

자신을 구성하는 특성과 

인격을 좋은 내용으로 

많이 갖추려고 한다.  



직업 - 생계를 위해 

안정된 직업을 가지려고 한다.  


부 - 많은 부(좋은 물질)을 가져 

풍요롭게 살려고 한다.  


명예 - 다른 이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의 명예를 얻으려고 한다.  


인간관계 - 다른 이들과 관계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려 한다.  


사랑 -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며 

또 그로부터 사랑받으려 한다.  


결혼, 가정, 자손 -  

사랑하는 이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려 자손을 얻고자 한다.  


권력 - 

자신의 뜻을 실현할 힘을 가지려 한다.  


자유 - 

자신을 구속하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가지려 한다. 


타주체 - 

자신의 가족 

또는 다른 주체에 대해 

가지가지 다양한 희망을 이루려 한다. 


사회- 

가족 전체나 

일정한 사회집단, 

국가, 세계의 모습에 대해서 

희망을 갖고 

이루려 한다. 


자연 - 

자연현상에 대해서 

그 내용을 알고자 하고 

그에 대해 뜻을 실현시키려 한다. 







행복을 얻기 위한 

많은 수단 가운데, 

누구나 

건강과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숨을 쉬고 건강하고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건강과 생명은 

살아 있는 이가 

대부분 누리는 

평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건강과 생명은 

자신이 얻으려하는 

그 어떤 재물 권력 등등의 상태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생명과 건강을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우주 전부를 소유한 것 이상의 가치를 

충분히 가진 것임을 깨닫고 

환희를 느껴야 한다.  






●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생명 건강은 이처럼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건강이 

중요하다지만, 

단지 이것만이 

가치의 전부는 아니다. 


아무리 생명 건강이 중요하더라도,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생명의 기간은 

누구에게나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은 

누가 보다 건강하게 

더 오래 사는가하는 

시합을 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생명을 

오래 계속 보전해 가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나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 건강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제 다음을 생각해보자. 


만일 어떤 이가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삶의 기간 전체가 

고통과 괴로움뿐이라고 하자. 


만일 그렇다면 

그런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할 이는 없다. 


사람들이 

생명 건강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실은 이를 기초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실은 

만족, 재미, 웃음, 

기쁨, 환희, 즐거움, 

보람, 가치감, 

평온, 안정, 의욕, 희망 등을 원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골고루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얻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행복은 

생명과 건강이 있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생명과 건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면서 

어느 정도 고통을 받아도 

삶을 곧 포기하지 않고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은 

장차 언젠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생명과 건강이 

계속된 

불만, 불쾌, 고통, 울음, 

비탄, 우울, 분노, 

미움, 짜증, 

죄의식, 무의미함, 

불안, 초조, 걱정, 

공포, 두려움 등만을 

끊임없이 줄 뿐이라면, 

그런 생명의 지속을 원할 이는 없다. 


그래서 결국 각 개인에게는 

'행복한' '생존'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 행복한 생존과 

이의 실현을 위한 수단들 


물론 행복과 생존이 

최상의 유일한 가치는 아니다. 


그러나 자신만을 생각하면 

행복과 생존 이상의 가치는 없다. 

따라서 우선 이 문제에만 

집중하기로 하자. 



우리는 행복한 생존을 원하고 

이를 위해 다시 돈 권력 명예 등의 여러 수단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런 수단을 찾아 나서고, 

이에 열중하게 된다. 


경쟁에서의 승리, 

생계수단의 확보, 

직업, 직위, 

돈, 명예, 권력 등이 

모두 그런 것이다. 


결국 행복을 위해 

이들 수단이 필요함을 알고 

또 원하고 

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 필요한 수단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얻지 못한 경우, 

오직 당면한 그 수단의 확보에만 

열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열중하게 되면, 

마치 현미경을 

사물에 들이댄 것처럼, 

그것이 

마치 모든 가치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정작 그 수단을 

잘 얻지도 못하게 된다. 


또 비록 그 수단을 얻더라도, 

원래 그를 통해 얻고자 한 행복은 

얻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집은 자기 소유로 얻지만 

정작 그 안에서 편하게 

잠자거나, 쉬지 못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자기 이름으로 집과 재산 등을 

매우 많이 가진 부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그것을 직접 보고 만지면서, 

그를 통해 

행복을 마음껏 얻는 사람은 

매우 적다. 



대신 그 많은 재물들로 인해 

행복 대신에 평생 

불만, 불쾌, 짜증, 두려움만 

잔뜩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이가 

오히려 많은 것이다. 


이처럼 이상하게 뒤바뀐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수단과 목적의 가치를 

서로 뒤바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치 평가를 잘못하는 

한 예다. 

가치평가를 잘못하는 원인들은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다. 


따라서 수단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본 목적인 

행복한 생존을 얻는 한도에서만 

중요한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 원래 본 목적인 

행복한 생존을 얻는 

다른 쉬운 수단이 있다면 

처음 선택한 수단을 고집하지 말고 

이를 언제라도 버려도 

괜찮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처음 선택한 수단을 절대시하고 

이를 고집하고 집착하면 

앞에서 본 병적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서울은 꼭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고집해 집착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경우 

서울에 갈 수 있는 더 쉬운 방법 

예를 들어 버스나 비행기가 있어도 

이를 타지 않아 

정작 본 목적지인 서울은 

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 수단들의 기여도 


자칫 행복을 얻는 '수단'에 

열중해 집착하면 

수단 자체가 전부인 것처럼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각 수단은 

행복 그리고 생존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그 한도에서 그 만큼만 중요하다. 


그래서 각 수단이 

행복과 생존에 

어느 정도 얼마만큼 중요하고 

또 중요하지 않은가를 

먼저 생각해보자.   


우선 많은 수단은 

행복과 생존에 

이바지하는 정도가 다르다. 


대표로 돈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한 나라의 

전 재산만큼 

많이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그렇게 돈이 많아도 

다른 이보다 2배 더 오래, 

예를 들어 200년을 살 수는 없다. 


또 아무리 좋은 음식이 많아도 

남보다 매일 10 배 더 많이 

먹을 수도 없다. 


또 아무리 옷이 많아도 

10배나 옷을 많이 입어 

특별하게 

건강을 잘 지킬 수도 없다. 


또 아무리 집이 크고 많아도 

남보다 10배나 더 넓은 곳에 

누워 잘 수도 없다. 


이처럼 돈 권력 등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실제로 이 가운데 

자신의 생명유지를 위해 

쓸 수 있는 양은 한정이 있다. 


생존을 위해서는 

수많은 재화들 가운데 


오직 

약간의 음식, 의복, 

잘 수 있는 공간과 

매우 적은 양의 재물만이 

필요한 것이다.  


우주보다 중요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늘날 말하는 

최저 생활비 정도로 

충분한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생계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누구나 노력하면, 

그 정도의 최소 생필품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물론 생활필수품이라고 

거저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최소한의 생존은 

대부분 노력하면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일찍이 예수는 

“공중의 새를 보라…

염려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이런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주보다 귀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노력을 통해 

극소수만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사실은 

생존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이 

더 위협받는다. 


그리고 오히려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으로 

다툼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 서로의 생명과 건강이 

위협받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들이 원하는 

수많은 재화 가운데, 

생존에 직접 이바지하는 것은 

극히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임을 보았다. 


그렇다면 

수많은 재화와 부 가운데 

나머지는 

어떤 목적에 사용되는가. 


그것은 생명의 유지보다는 

좀 더 즐거운 맛을 얻기 위해 

추구하는 것이다. 


즉 이것들은 

다른 이보다 

더 풍요롭고 편하게 살고 

더 많은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추구된다. 


또 다른 이로부터 

부러움과 인정을 받기 위해 

추구된다. 


그리고 그것은 

한마디로 최종적으로 

모두 즐거운 맛들을 얻기 위해 

추구되는 것이다. 





○ 행복을 

높은 가치와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유



행복을 

좋음이라고 단순히 말할 때 

그 좋음을 

그냥 얻어내는 방안은 많다. 


행복론에서도 

그에 관한 여러 방안을 제시하게 된다. 


세상에는 

좋음과 나쁨이 뒤섞여 있는데, 

이 가운데 좋음만 보고 

좋음만 골라 얻어내는 방안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방안을 

곧바로 사용하면 안 되는가에 

행복론의 논의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좋음이 

다른 좋음 또는 나쁨과 갖는 

관계때문이다. 


세상의 어떤 현상도 

좋고 나쁜 수많은 측면을 

함께 갖고 있다. 


또 하나의 현상은 

다른 수많은 현상과 관련이 된다. 


그래서 

어느 하나를 변경시키면 

이로 인해 수많은 현상이 

함께 변화된다. 


그래서 

하나의 현상의 다양한 측면과 

그 현상이 원인과 결과로 갖는 

다른 현상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이들이 사실은 

모두 한 묶음으로 

다가 오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즉 하나의 좋음을 얻으면, 

반대로 수많은 나쁨을 갖는 

관계가 있을 때, 


이를 피하기 위한 방안을 

찾지 못하면 


하나의 좋음을 얻는 방안은 

곧 수많은 나쁨을 모두 다 갖게 하는 

지름길이 된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이런 경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또 수많은 좋음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나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결과 현실에서 

나쁨을 받는 상황에 대한 

좋은 대처방안도 

함께 필요하게 된다. 


수많은 좋음을 다 받아 갖기 위해 

받아야 하는 나쁨을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죽음, 늙음, 질병, 출생 이런 것이 

모두 그런 

피할 수 없는 항목이다. 



그리고 

이런 나쁨을 극복하고 

모든 에너지를 

가장 좋음이 많은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또 다음의 사정도 있다. 


가장 많은 좋음의 상태를 향할 때 

이를 놓고 생각하면 

단순히 이를 실현하는 방안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것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의 방안도 

함께 필요하다. 


현실에서는 그런 상태가 

이루어진 상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향해가는 과정, 

그리고 그 외의 상태들이 

모두 섞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이 두 방안을 

다 갖추는 것이 요구된다. 


결국 좋음을 성취해 얻는 방안과 


좋음이 실현되지 않고 

오히려 극단적인 

나쁨이 있는 상태에서부터 

나쁨을 받지 않는 방안을 

모두 갖추고 


그런 상태에서 

가장 많은 좋음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결국 

좋음이나 나쁨으로부터 갖게 되는 

집착을 버리고 


가장 극단적으로 

나쁜 상태에서부터 

나쁨을 받지 않는 가운데, 


그런 바탕에서 

가장 좋고 좋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생각해보면, 

가장 간단한 행복론은 

그것이 선한 것이던 악한 것이던 

가리지 않고 

당장 자신에게 

좋음을 주는 것을 취해 

그 좋음의 맛을 보는 것이라고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위와 같은 사정으로 

사실은 

독극물의 섭취과정과 같게 된다. 


그래서 

좋음을 찾고 얻어내는 방안은 

가장 아름답고 

선한 부분에 한해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주의문을 

주의깊게 새겨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상태에서 

좋음을 얻어 내는 방안은


마치 병에 좋은 

어떤 약의 사용법을 

주의 깊게 읽지 않고 

그 약을 잘못 사용하여 

때로는 죽음과 같은 고통을 

불러 일으키듯, 

심각한 악과 고통을 가져오게 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자세한 

부작용 관련 설명서가 

사실은 행복론을 

약간 번잡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행복의 상태, 

아름답고 선한 행복의 

의미나 내용을 밝히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갖기에 

좀 더 깊은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 행복한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 않은 수단들이 

행복의 실현을 방해하는 과정   




행복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나 

필요하지 않은 수단들이 

행복한 생존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움을 더 많이 줄 것 같은 

부나 명예 권력과 같은 

여러 수단들이 

사실은 

즐거움과 행복을 원하는 만큼 

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런 욕심은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우선 누구나 

쉽게 실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처음부터 문제 삼지 않는다. 


다른 이들 대부분이 

쉽게 얻는 것을 

얻었다고 기뻐하지는 않는다. 


그 결과 대부분 

쉽게 얻지 못하는 것만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대부분은 

그것을 쉽게 얻지 못한다. 


때문에 

대부분은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한편 

누군가 소수가 

이런 욕망을 실현해도 

오래오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다. 


어떤 희망도 그것이 막상 실현되면 

그 만족감이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곧 사라지고 잊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 번 얻은 것이 

부서지고 사라져 가면 

그에 집착했던 만큼 

그는 다시 번뇌에 빠진다.  


또 아무리 많이 성취해도, 

자신의 무한한 욕심에 비교하여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신보다 많이 

쉽게 성취한 이와 비교하여 

항상 적다고 느끼게 된다.   


또 새로 이루고 싶은 것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들은 

늘 즉시즉시 채워지지 않아 

불만을 주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그 결과 

항상 채워지지 않는 욕심으로 

갈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욕심이 있으면 

그 욕심만큼 불만을 느끼고 

그만큼 마음은 쫒기고 궁핍해진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은 욕심을 

계속 추구하며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욕심에 쫒기면서 

채우지 못한 욕심의 성취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이미 자신이 충분히 유지하고 있는 

생명과 건강의 가치마저 잃어버린다. 


사실 생명은 

자신이 탐내는 재물 모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값있다. 


그러나 

얻지 못한 것에 

집착하는 사이 

이런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 결과 

불에 다가가 

몸을 태워 버리는 불나방처럼 

생명과 건강을 해치면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는 

뜻을 이루든 못 이루든 

끝내 갈증을 없애지 못한다. 


그래서 

시원한 행복감에 

오래 머무르려는 시도는 

늘 실패하게 된다. 


그 결과 

우주보다 가치 있는 생명을 갖고서 

그 주인인 마음은 

늘 빈곤에 빠져 

불만과 갈증, 불쾌에 빠진다. 


또 잠깐 이를 갖게 된 이는 

언제 그것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내게 된다. 


이는 

다음 상황에 비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십 층의 건물을 

가진 이가 있다고 하자. 


처음 이를 갖기 원한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행복을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건물을 갖고 보니, 

관리하고 유지하느라, 

온갖 시끄러운 분쟁에 

휘말려 평생을 보내야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수십 층의 건물을 갖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주보다 가치 있는 몸과 생명을 

갖고 있다. 


다시 거기에 외부의 재화들을 

욕심내어 이들 일부도 차지한다. 


그런데 

이를 갖기 원한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많은 행복을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들을 갖고 

정작 마음은 평화롭지 못하다. 

그리고 

온갖 불만 불쾌 걱정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달린다. 


만일 이렇다면 

수십 층 건물을 갖고 

온갖 분쟁에 휘말려 

고통 받는 건물소유자와 같다. 


이처럼 

우주 전체보다 소중한 생명을 갖고 

그 주인인 마음이 

정작 끝없이 불만을 느끼고 

스스로 가난과 불행에 시달린다면 

참 비참한 일이다. 


그는 이런 갈증에 쫓겨 

즐거움의 맛에 집착하다 

결국 생명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예를 들어 

생계자체보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과도한 빚을 얻어 

사업을 하는 이가 많다. 


그러다가 결국 실패하여 

빌려준 이들에게 쫓기어 

끝내 자살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가 

중요하지 않는 것을 위해 

중요한 것을 희생시키는 예이다.  






● 행복한 생존을 

현명하게 얻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사실 행복을 얻기 위해 

이런 모든 수단을 원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생각하고 살아야 

가장 현명하게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물건이라면 

이를 가장 쉽고 싸게 구입하고 

그 후 그것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는 이가 가장 현명하다.  


그런데 행복도 

이런 물건과 같다.  


어떤 이는 

행복을 아주 힘들게 추구한다. 

그리고 원하는 행복을 

잘 얻지도 못한다. 

그리고 

가끔 힘들게 행복을 얻더라도 

그 얻은 행복을 가장 가치 없게 

사용해버린다. 


어떤 이들이 그러한가. 

우선 어떤 이는 

자신의 소유물을 통해서만 

행복을 구한다. 


그런 이는 

자기 자신 또는 자신만이 갖는 

소유물이 아니면 

만족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한 물건에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 


또 그는 타인이 

자신보다 나은 것을 가지면 

곧 질투와 불만에 빠진다. 


그래서 경쟁을 통해 

소수만 차지할 수 있는 대상에 

가치를 두고 몰두한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노력과 시련 경쟁을 거쳐 

승리하고 

다시 막대한 재화나 

권력을 차지한 후에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쉽게 실현해 얻지 못하는 것들에 

욕심을 갖고 집착하므로 

만족을 쉽게 얻지 못하고 

늘 갈증에 시달린다.  


또 가끔 희망을 성취해도 

정작 자신이 얻고자한 행복은 

끝내 얻지 못한다. 

자신이 이룬 상태를 

다시 남과 비교하고 불만을 갖고 

또 그것이 언젠가 무너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쉽게 충족되지 않는 희망 때문에 

갈증을 느끼고, 


또 충족돼도 

평온함을 얻지 못하기에 

다른 생명의 선한 행복을 위해 

노력할 여유와 마음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가끔 행복을 얻어도 

그 행복한 시간과 

생명과 능력을 가지고 

자신이나 가족의 

즐거움과 교만과 허영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끝낸다. 


심지어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는 데에 사용한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에게 고통을 준만큼 

다른 이의 위협과 보복을 

두려워하며 

살게 된다.   


이처럼 

행복을 힘들게 구하며 

잘 얻지도 못하고 

또 얻더라도 가치 없게 

사용해버린다. 



이는 

마치 동일한 물건을 비싸고 

힘들게 사려하고, 

잘 사지도 못하고, 

또 사더라도 곧 그 물건을 

가장 가치 없게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사용자와 같다. 









●행복한 생존을 

현명하게 얻는 경우 



어떤 이는 행복을 

아주 손쉽게 구하고 

또 쉽게 얻는다. 

또 얻은 행복을 

가장 가치 있게 바꾼다. 


어떤 이가 그러한가? 


어떤 이는 

최소한의 생존만 해결되면, 

나머지 행복은 

숨 쉴 수 있다는 사실,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단지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 등을 통해 

그 각각에서 

최대의 만족과 

감사와 행복을 느끼려 한다. 


심지어 

자신의 병과 늙음 죽음으로부터도 

행복을 얻으려 한다. 


그는 또 저절로 주어진 

자연 모두에서 

감사와 행복감을 느끼려 한다. 


누구의 소유인가를 가리지 않고 

주어진 모든 것에서 

행복을 얻으려 한다. 



자연의 모든 것 

예를 들어 밤하늘의 별, 

들에 핀 꽃에서 

모두 가치를 찾고 

감사를 느끼려 한다. 


더 나아가 

타인이 선한 일을 이뤄 

기쁨을 얻으면 

이를 따라 기뻐해 

그 최종적인 행복감을 

함께 느낀다. 


이처럼 그는 주어지는 

모든 것에 

감사를 느낀다. 


이렇게 모든 것에 

감사를 느끼고 

행복을 찾는 마음상태에서는 

단지 그런 마음을 가진 것만으로 

그는 얻고자 하는 행복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욕심은 쉽게 차고 

만족하여 넘치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얻은 

행복의 상태에서는 

다른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질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만일 다른 생명이 

악과 불행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면 

이를 자신의 일처럼 

슬픈 일이라고 여기게 된다. 


또 다른 이가 얻는 아름답고 

선한 행복은 

자신의 일처럼 

똑같이 기쁜 일로 느끼게 된다. 


이런 마음을 바탕으로  

다른 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마음도 

함께 열리게 된다. 


그리고 

남에게 

아름답고 선한 행복을 

실현해주기 위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런 자신은 

이미 작은 것들로도 

충분히 만족하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 대부분에 대해 

과분하고 

넘쳐흐르며 남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것을 

자신보다 더 갈증을 느끼거나, 

더 필요하고 

더 선하게 쓸 다른 이에게 

베풀어 줄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를 남에게 베풀게 된다. 


남에게 베풂으로서 

남이 얻게 되는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다시 갖는다. 


한편 

버리고 베풂으로써 

그것을 소유하여 갖게 될 

불쾌와 두려움도 갖지 않게 된다. 


즉, 무언가를 아껴 집착해 

이들이 부서지고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갖지 않게 된다. 


또 무언가를 힘들여 

관리하고 유지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부터도 

벗어난다. 


이처럼 집착하지 않고 

버림으로써 

그런 번뇌가 사라지고 

행복을 얻는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얻은 

행복한 시간과 생명과 능력을 

다시 다른 이의 선한 행복을 위해 

지혜롭게 사용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남을 위해 배려하고 베풀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고 

여기며 

겸손해한다. 


또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족도 자신처럼 행한다면 

행복을 느낄 것이므로 

걱정하지 않는다. 


또 자신이 선을 행한 만큼 

자신과 가족은 

다른 이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존중받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 


이처럼 어떤 이는 

행복을 쉽게 구하고 쉽게 얻고 

이를 다시 남에게 베푸는 

선한 생활을 통해 

가장 가치 있는 상태를 실현한다. 


이는 마치 

어떤 동일한 물건을 

가장 싸고 쉽게 구하고, 

또 이를 잘 구해 얻으며, 

또 그것을 얻은 다음에는 

그것을 가장 가치 있는 물건으로 

다시 바꿔 만들어 갖는 

현명한 소비자와 같다. 


여러 형태 가운데, 

어느 형태가 현명한가는 

분명하다. 










●행복한 생존을 

현명하게 얻는 구체적인 방안 



행복이란 

모든 이가 

최종적으로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행복도 

이를 가장 쉽게 얻고 

그 얻은 행복을 

다시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근본적으로 

현명한 이와 어리석은 이를 

서로 다르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현명한 자가 

이미 주어진 것으로부터 

최대의 가치를 찾고 

만족과 기쁨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음 방법으로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 


이제 

다음을 생각해보자. 


만일 

모든 것을 다 차지한다 해도 

정작 그것을 얻은 다음 

병석에 누워 

제대로 숨 쉴 수 없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비참하다. 


또 모든 것을 얻지만 

그로 인해 눈을 잃어 

무언가를 볼 수 없어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고 가정해보자. 


또 모든 것을 다 차지하지만 

그로 인해 

일에 구속받고 살아야 한다거나 

또 호화스러운 왕궁에 살더라도 

그 왕궁 속에 

자신이 갇히어 속박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우리가 단지 

건강하게 숨 쉴 수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최대의 환희를 느껴야 함을 

알게 된다. 


또 눈을 떠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사실, 


또는 단지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여기저기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들 

하나하나가 


모두 최대의 환희를 

느껴야 할 일임을 알게 된다.  


이런 일은 무한히 나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소변을 하루 내내 참아낸다면, 

대신 온 우주의 모든 보물을 

가질 수 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우주의 모든 보물을 갖기 위해 

소변을 하루 내내 참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우주의 전 보물을 소유해 

얻을 수 있는 기쁨보다는 

이런 간단한 일이 주는 고통과 

기쁨의 양이 더 큼을 의미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일상생활 하나하나가 

모두 환희를 느껴야 하고 

느낄 수 있는 내용들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주어진 생명과 자연 그 자체에서 

최대의 기쁨을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만일 동일한 조건과 환경에서 

누구는 행복을 느끼고 

누구는 불행을 느낀다면, 

누가 더 현명하고 

누가 더 나은가? 


아마 행복을 얻는 이가 

더 현명하고 더 나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외부조건과 환경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개인적인 최종상태는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는 훨씬 좋은 상황에서 

마음의 고통을 받는데, 


누구는 훨씬 나쁜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낀다면, 

행복한 이가 훨씬 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에서 잘못된 판단을 많이 한다. 


즉 그가 마음속에서 

행복한지 안한지는 

잘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리고 

단순히 

외부 조건이 나은 상태가 

무조건 더 낫다고 

쉽게 판단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날 과거 예수나 부처보다 

몇 천 배 풍요하게 사는 이는 많다. 


그러나 

정작 많은 이가 

예수나 부처가 얻은 행복은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는 사실 심각한 문제다. 


행복을 얻는 방안은 

이 정도로 일단 그치고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 장점을 보기 

- 단점을 보기 

- 무시하기 항목 ]


그보다 먼저 행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 있는가. 


그래서 

행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을 

어떻게 행복한 가운데 

얻어나갈 수 있는가를 

이어 살펴 나가기로 한다. 



[OUTPUT]-FROMㅡ o:/G/G/book/SeonHyeonJiBog_v19_unicode.txt

● 최상의 가치

- 아름다운 선의 실현 




●행복한 생존보다 

더 가치 있는 상태는 없는가? 

- 아름답고 선한 행복



행복한 생존을 

보통 중요시한다. 


이는 각 개인 입장에서는 

생존과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한 생존만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절대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를 생각해보자. 


우선 한 사람이 얻는 행복은 

형태가 다양하다. 


극단적인 두 경우만 비교하자. 


우선 자기 행복을 얻는 과정에서 

많은 다른 생명에게 

악과 고통 두려움을 주는 

악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역사상 

어떤 침략자가 

침략과 약탈을 통해 뜻을 이루고 

행복을 얻었다면, 

이런 행복을 

이런 경우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자기 행복을 얻는 과정에서 

다른 많은 생명에게 

아름다운 선과 

만족, 희망, 행복 등을 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나 붓다의 행복과 같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경우가 더 나은 행복인가. 


당연히 뒤의 경우가 더 낫다. 


만일 이 두 경우에서 

각기 

동일한 만족과 행복을 얻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행복의 점에서만은 

이들은 서로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가치는 서로 다르다. 


그 각각의 삶으로 인해 

다른 생명들이 

얼마나 선해지고 행복을 얻었는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개인적으로 

행복을 

모두 동일하게 얻었다면, 


그 가운데 가장 최상의 상태는 

가능한 가장 많은 생명에게 

가장 높은 질로  

가장 많은 양의 

아름답고 선한 행복을 


가장 오랜 기간 

가져다 준 이의 행복이 

가장 최상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가치는 

바로 

이런 행복의 상태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예수나 붓다가 얻는 

이런 행복을 

막강한 침략자들이 얻는 행복과 

구별해 표현한다고 하자. 


그러면, 예수나 붓다의 행복은 

아름답고 선한 행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침략자가 

살상과 노략질, 

강간, 노예의 획득, 승리 등을 통해 

얻은 행복은 


악한 행복이라 구별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선한 행복은 

다른 행복보다 낫다. 







그런데 이런 

아름답고 선한 행복의 

뜻을 갖는 경우에도 


다시, 

이를 잘 실현하는 경우와 

끝내 잘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 경우에서, 


선을 실현해내는 것이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보다 

더 나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아름다운 선을 

잘 실현하기 위해서는 

깊고 많은 지혜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아름다운 선을 실현하더라도 

그것을 지혜롭게 

잘 실현하는 경우와 


지혜롭지 못하게 

실현하는 경우를 

나눠 볼 수 있다. 


선을 실현하지만, 

지혜롭지 못하게 

실현하는 경우는 


비록 어떤 노력으로 

선한 결과는 나타나지만, 

들어간 시간과 노력 

또 그로 인해 

누군가 받게 되는 고통이 

다른 방법보다 

더 많은 형태로 

실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선을 

지혜롭게 잘 실현했다함은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보다 큰 선한 결과를 

얻어내는 방안을 알아내 

지혜롭게 잘 

실현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한 뜻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행해나가는 것을 

가장 나은 삶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들 가운데 

다시 조금 더 우열을 나눈다면, 


이제 지혜롭고 행복하게 

실현시킨 선의 결과가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경우를 

보다 더 나은 상태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어떤 목적을 정해 

살아가야 한다면, 


비록 그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여도 


낮고 천한 목표가 아닌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따라서 아래서는 

이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아름다움








● 최상의 가치 

- 아름답고 선한 행복



단순히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은 것을 

쫒아 가지 말고 


무엇이 가장 좋고 좋은 것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해 따라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음을 많이 주는 것이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모두 좋고 


지금 좋고, 

나중 좋고 

오래 오래 좋고 


이리 보아 좋고, 

저리 보아 좋고 

두루두루 좋고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은 것을 쫒아 나가면, 


잠깐의 좋음을 얻더라도 

그 잠깐의 좋음을 징검다리 삼아 


그 외 모든 다른 부분에서 

길고 길게 나쁨을 

얻게 되는 길을 

걸어가기 쉽다. 


그리고 

가장 좋고 좋은 것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좋고 좋은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게 실현해나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는 

좋고 좋고 좋은 것을 

단순히 좋은 것과 구별하여 

아름답고 선한 행복이라고 

표현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름답고 선한 행복을 

이루려면 


먼저 무엇이 

단순한 좋음이고 


무엇이 

아름답고 선한 좋음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선에 대해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좋음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생명이 각기 

제각각 다양한 형태로 

생명을 유지해 살아가면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세상과 사물을 대하게 된다. 


그런데 그 각 생명이 

일정 대상을 대하여 

최종적으로 얻어 

느껴 갖게 되는 감정은 


결국 좋거나 

또는 나쁘거나, 

또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느낌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각 생명이 

무엇을 좋다고 하고 

싫다고 하는가는 

각 생명 각 상황별로 다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한 때 무언가를 좋아해도 

상황이 달라지면 

그 느낌은 달라진다. 


또 하나의 같은 사물도 

누가 대하는가에 따라 

각기 좋고 나뻐함이 달라지게 된다. 


마치 하나의 음식을 놓고 

방금 식사를 마친 이가 대할 때와 

3 일을 굶은 이가 대하는 경우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좋음은 

어떤 외부사물에 

절대적으로 고정돼 결정되어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주체의 상황에 따라 

그 값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편 주체의 상황이 일정해도 

외부 대상에 따라 

좋고 나쁨은 또 달라진다. 


따라서 오직 주체만이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결국 좋음은 

주체와 외부 대상이 서로 화합해 

그 때 그 때 그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게 된다. 


마치 종이와 불이 화합해 

새로 연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또 이쪽 손바닥과 

저쪽 손바닥에 

모두 소리가 들어 있지만, 

두 손바닥을 부딪히면 

소리가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각 생명이 느끼는 좋음과 나쁨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외부대상과 주체의 마음상태가 

그 때 그 때 화합해 

그 주체의 마음 안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화합해 

각 생명의 마음 안에 나타나는 

이런 좋음 또는 나쁨의 느낌이 

바로 행복과 선악을 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 


그리고 선악 및 

행복 불행의 가장 기초가 되는 

좋음과 나쁨이 변하고 유동적이므로 


선과 행복의 구체적인 내용도 

그 때 그 때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선의 판단의 어려움의 이유 


좋음과 선의 판단이 어려운 것은 

바로 다음의 어려움 때문이다. 


즉, 각 주체가 얻는 

좋음과 나쁨이 

획일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주체별로, 대상별로, 시기별로 

매우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는 

사정 때문이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를 들어 

내게 지금 좋은 것은 

내게 나중에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경우와 같다. 


또 내게 나중에 좋음을 주는 것은 

내게 지금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병 치료를 위해 

먹게 되는 쓴 약과 같다. 


또 나에게 좋은 것은 

다른 이에게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자신이 기분 좋다고 

노래 부르는 것과 

같은 경우다. 


또 다른 이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친구와 신나게 떠들고 싶은데 

이를 참고 

조용히 있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모두’에게 ‘어느 경우나’ 

좋음을 주는 경우를 

생각하기 힘들다. 



만일 ‘모두에게’ ‘언제나’ 

오로지 ‘좋음’만을 주는 것이 있다면 

이를 선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만일 무언가가 정말 이와 같다면 

이를 나쁘다거나 악하다고 할 

근거자체를 찾기 힘들게 된다. 


또 반대로 모두에게 

언제나 나쁨만을 주는 것이 있다면 

이를 악이라고 하는 것도 쉽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이를 완전한 선, 

완전한 악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찾기 힘들다. 


현실에는 좋고 나쁨이 

주체와 사정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뒤섞인다. 


따라서 

무엇이 선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런 사정 때문에 

주체, 시기, 입장 상황 따라 

서로 달리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그 결과 선악에 

많은 혼돈과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결국 주체와 시기 입장 따라 

좋고 나쁨이 

서로 엇갈려 달리 느낀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선악판단이 엇갈리는 사례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과거 역사를 보면 

자신을 반대하는 

반대파를 학살하고 

주변 약소국가를 침략 정복한 

이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정의라고 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상대가 

극악하다고 주장 한다. 


한편 그렇게 힘이 약한 상태에서 

강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지내던 이들이 


상황이 바뀌어 

자신이 강대해지면, 


그들 역시 

또 다른 반대파나 

다른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다시 그런 그들이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입장 따라 다른 

이런 주장들 가운데 

누가 옳은가? 


이런 엇갈린 선악판단을 

모든 생명과 관련해 살피면 

훨씬 복잡해진다. 


좋고 나쁨을 느끼는 주체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비록 지능이 떨어져도 


모두 각기 

좋은 것을 추구하고 

싫은 것을 피하며 살아간다. 


개미와 같은 아주 작은 벌레 

한 마리만을 자세히 관찰해도 

이들은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해 움직이고 

싫은 것을 피해 움직인다. 



그것은 지혜가 많다고 

스스로 여기는 

인간의 행동 원리와 

하등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단지 그 뜻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이들 생명체보다 

조금 더 교묘하고 복잡한 

지혜를 이용한다. 


그래서 

스스로 이들보다는 

좀 더 나은 존재라고 

자부하는 데 지나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보다 못한 생명은 

마치 자신을 위해서 

오직 희생되어야만 하는 

하등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쉽게 여긴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은 

매년 수천만 마리의 

소나 돼지 양을 

살해하여 음식으로 먹는다. 


인간은 이런 살생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희생된 

소나 돼지의 생명은 

그 가치를 고려해볼 

필요성조차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생명만을 

우주보다 소중한 

가치 있는 것으로 집착한다. 


그러나 

만일 소나 돼지 양들에게 

이를 묻는다면 

그들도 자신의 생명은 

똑같이 우주보다 

가치 있다고 할 것이고 

이런 인간의 살생을 

악으로 여길 것이다. 





강자가 

자신의 반대파나 

힘 약한 타국국민의 생명을 

고려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으로 여기듯, 


그들 약자는 약자대로 또한 

자신보다 힘이 약한 

다른 약자들에 대해 

그와 같이 생각하고, 


인간은 또한 

다른 동식물을 

그와 같이 쉽게 여긴다. 


이들 모두 

자신들의 

생명과 행복을 절대시하면서 

그를 얻기 위해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래서 

결국 따지고 보면 

이들의 악함은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다지 큰 차이는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들 각자는 

또한 자신의 선함과 정의로움 

정당성과 

자신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래서 

바로 이런 점이 

선악판단에 혼동을 주게 된다. 



예를 들어 

강자는 

자신의 반대파들이 

사회에서 저지르는 악을 비난하고, 

이들을 제거해야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며, 


그런 반대파의 학살이나 

제거 탄압 등이 

정의롭고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많은 잘못된 편견과 


지배자 자신만이 

정의라는 독선(獨善) 


또는 자신만이 

신의 뜻을 대신하여 

정의를 펼친다는 식의 

잘못된 종교적 믿음 등도 

때로는 작용한다. 



또 한편 인간은 

동식물은 지혜가 적어 

좋고 나쁨도 

일체 느끼지 못하는 

일반 물질과 다름없는 

하등하고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또는 이들 동식물은 

신이 단지 인간의 삶을 위해 

제공해 준 감사한 물건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근거든 

강자의 입장에서 펴는 주장은 

모두 다시 그들의 행위가 

선하고 정당한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단지 그 피해자들이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선악은 

입장 따라 엇갈릴 수 있다. 


이는 가장 근본적으로는 

어떤 하나의 상황이 

모두에게 똑같이 좋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좋음과 나쁨이 엇갈리면 

입장과 시기 상황 따라 

선악을 서로 달리 판단하게 된다. 






동일한 하나의 상황에서 

좋음을 얻는 쪽은 

그것을 선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반대로 나쁨을 얻는 쪽은 

악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래서 견해가 대립하여 

투쟁이 계속된다. 









● 선의 기준으로 

힘의 우위를 주장하는 입장



그러면 선악은 

결코 정할 수 없는가. 


만일 단지 힘이 센 쪽 입장이 

선이라고 하자. 


그러면, 

사람은 동물보다 강하고 

과거 역사상 침략자들은 

늘 침략과 학살을 당한 

당시의 약자들보다 강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선하고 정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오늘날 

어떤 강도나 폭력배처럼 

힘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 모두도 

그가 힘이 강하여 뜻을 실현시킨다면, 

단지 그것만으로 

그들을 다 선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힘의 강함만으로 

선의 근거를 삼을 때는 

최고선의 존재로 

가장 힘이 강한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힘과 지혜가 

아주 초월적으로 우월한 

절대적 존재를 추리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종교가 

자신들이 믿는 신을 

그런 절대적 존재로 제시해왔다. 


그리고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길은 없어도 


그 절대적 존재의 뜻을 

선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각 종교의 

신앙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신이 

바로 그런 존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의 우위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대한 검토





그런데 이런 전지전능한 

절대적 존재를 전제로 

선을 판단하려 할 때는 

이론상 많은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우선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하고 

그의 뜻이 곧 선이라면, 

앞의 사례에서 힘이 강하지만 

악한 사례로 든 것들 

모두 악이라고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이미 실현된 내용들은 

모두 그 절대적 존재에 의한 

실현이거나 


아니면 

그가 적극적으로 허용하거나 

또는 그가 방임하여 

실현된 내용들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 존재가 

그런 사실을 몰라서 막지 못했다면, 

그의 지혜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또 한편 알았지만, 

막을 지혜와 힘이 부족하여 

그 일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면, 

또 다시 그의 힘의 절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결국 절대적 존재를 

전제로 할 때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취해야만 한다. 


우선 일어난 일에 대해 

절대자의 숨겨진 뜻과 계획이 

어떤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일체를 알고 

또 그 실현을 막으려면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는데도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절대자에 의해 

허용되거나 

아니면 그 절대자의 뜻이 

적극적으로 실현된 내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절대자의 뜻이 

선하다고 이해하는 이상 

나타난 모든 일들은 

다 선하다고 이해해야 된다. 


그래서 이런 전제에서 

선을 판단할 때는 

일단 실현된 내용은 

일체 그것을 악이라고 

비난할 근거가 없게 된다. 

 


그 절대적 존재를 

부르는 명칭이 다르지만, 

이런 절대적 존재를 

주장하는 종교는 

세계에 매우 다양하게 있다. 


그런데 

그 종교의 창시자나 

신봉자가 

다른 종교의 

신봉자나 권력가에 의해 

박해박거나 살해당한 일도 

역사 안에 많이 있다. 


이 뿐 아니라,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선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나 학살 폭행은 

수없이 세상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앞의 전제에서는 

이 모두를 

그 절대자가 허용하거나 


아니면 

절대자가 

자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결과로 

이해하고 

그 모두를 선하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스스로 

선에 대해 많은 논리적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완벽한 전지전능을 

전제로 하면 

이런 결론은 피할 수 없다. 





만일 그 존재가 

인간보다는 조금 우월하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고 

단순히 강한 존재에 불과하다면 

이런 결론만은 피할 수 있다. 


즉 이런 경우라면 

일어난 일들 가운데 

그 초월적 존재의 뜻과 맞지 않아 

악한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존재가 많이 알고 강하지만, 

사실 그 부분은 잘 몰랐거나, 

그 일을 막으려고는 했지만 

그 때는 조금 악마보다 

지혜와 힘이 부족하여 

막지 못했다고 이해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이해하면 

그 초월적 존재의 절대성은 

부정된다. 


그리고 그 존재의 뜻이 

절대적 최고선이라는 

사실도 부정되고 만다. 


왜냐 하면 그 보다 

더 지혜 있고 힘센 존재를 추리해 

그 존재가 갖는 뜻을 

최고선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따르는 이가 

절대적 존재가 아니면, 

그의 뜻을 맹종해 따르는 것을 

무조건 선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보다 

힘세다는 이유로 

악을 거부하지 않고 

그 악을 좇아 악을 행한 일로 

다른 존재들로부터는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과 자신이 따랐던 그 존재는 

모두 함께 보다 

더 강한 존재로부터 

그것을 이유로 

함께 처벌받을 운명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힘을 기준으로 한 

선의 문제에서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존재가 


가장 강력하여 

전지전능하고 

두루 존재하는 편재의 존재가 

되지 않으면 


이런 위험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전지전능하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편재(遍在)한 존재가 있다고 

전제하면, 


앞에서 본 것처럼 

일어난 모든 일은 

다 선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문제점이 나타나게 된다. 



더 나아가 

만일 이처럼 

지혜와 힘만이 선의 기준이라면 

또 다음 문제가 있다. 


만일 그 힘이 

모든 생명들의 힘을 능가한다면, 

그 뜻이 실현되어 

좋음을 얻는 주체가 

단 하나에 불과하고 

나머지 모든 생명은 

그로 인해 고통 받아도 

그의 뜻을 곧 선이라 해야 한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힘이 강한 존재의 뜻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좋고 나쁨과 관계없이 

그의 뜻을 곧 선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다. 


사실 이렇게 

힘의 우월함에서 

선의 기준을 찾을 때는, 


어떤 존재가 

너무나 위대하고 강력하므로 

그의 뜻은 곧 선이고 

따라서 감히 그의 뜻을 거역하여 

고통을 당하지 말고 

따라야만 한다고 강요받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결국 선은 

자신이 원하지는 않지만, 

강자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통을 당하므로, 

억지로 참고 

그 뜻을 실현해야만 한다는 

노예의 의무의 원리로 

선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경우는 

힘이 강한 쪽에 서서 바라볼 때만 

좋음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다. 


단순히 그 강자의 뜻이 실현될 때 

강자의 좋음을 위해 

고통과 피해를 받는 생명들은 

모두 이를 나쁘게 느끼고 

이를 악이라 하고 

그를 악마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의 우위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대한 검토 2



한편 여기에는 

다음 문제가 또 제기된다.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인정하면, 

우선 일어난 결과는 

그것이 절대자의 뜻이며 

선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의 옹호자가 

가장 곤혹스럽게 되는 것은 

현실에서 자신과 반대의 뜻들이 

실현되는 경우다. 


이런 상황에서는 

현실과 반대의 뜻을 갖는 자신이 

마치 악마 추종자처럼 

취급받기 쉽다. 


그러나 대부분 

이런 믿음을 가진 이는 

일어난 결과는 

모두 절대자의 뜻이며 

섭리에 의한 내용이며 

자신의 뜻도 언젠가는 

끝내 실현되리라는 믿음도 

함께 잃지 않는다. 


또 그 모두가 절대자의 뜻이며 

선이라고 쉽게 

받아들이는 심리를 만든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다음이다. 


우선 인간은 

절대적 존재가 정말 존재하는지부터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다. 


또 비록 존재해도 

그의 뜻이 구체적인 경우에 

정확히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각 개인은 절대자가 아니다. 

또한 절대자의 뜻을 알아낼 힘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뜻을 세우는 과정에서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미리 자신의 뜻이 

절대자의 뜻에 맞고 허용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물론 이미 실현된 결과에 대해서는 

그것이 절대자의 뜻이라고 믿고 

그렇게 

절대자의 뜻을 확인해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각 개인은 

우선 자기 개인의 뜻과 

욕심을 갖는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욕심을 마음껏 추구하고 

그것이 실현되면 

이를 곧 절대자의 뜻으로 

믿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실현되는 내용은 

곧 절대자의 뜻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만일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막으려면 언제나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어떤 뜻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곧 절대자의 뜻이라고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자신의 생각 자체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전지전능한 존재가 

막지 않는 

자신의 생각과 희망들은 

곧 절대자의 뜻에 맞고 

허용된다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뜻과 욕심이 

곧 절대자의 뜻과 같다는 

광신적인 믿음까지 

갖는 이들도 있다. 





한편 자신의 정신이 

다른 초월적인 영적 존재와 

교류하고 

그 뜻을 이해해 받아들인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계시나 꿈 암시 등이 

그런 교류방법으로 제시된다. 



사실 이런 주장들의 문제는 

그들이 교류하는 존재가 

과연 절대적 존재이고 

선한 존재인가, 


또 그가 이해해 받아들인 내용이 

과연 절대자의 뜻과 일치하는가? 


그 명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개인적으로 갖는 

상상적 내용과 

절대자의 뜻은 어떻게 다른가, 

등등의 의문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제 3자가 명확히 

알아낼 도리는 전혀 없다. 


단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이를 믿거나 말거나의 문제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절대자를 믿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식에 머무르는 

여러 내용 가운데 

무엇이 절대자의 뜻이나 명령이며 

계시고 

어떤 부분이 자신만의 생각이며 

상상인지를 

명확히 구분할 도리가 없다. 





○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의 우위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대한 검토 3



사실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할 때는, 

각 개인에게 고유한 의사 결정능력과 

자유 영역이 있다는 주장자체가 

처음부터 이론상 모순을 일으킨다. 



그것은 자유의사 영역만큼 

절대자의 힘이 미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영역에서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하면서 

또 한편 

개인의 자유 영역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모든 개인의 의사, 행위, 결과를 

다 절대자의 뜻의 실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 있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는 

부득이 일정 부분을 

절대자의 뜻이 개입되지 않은 

개인의 자유 영역으로 

설정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명백히 악인이 꾀한 

악한 일과 같은 경우다. 


그래서 그것은 

절대자의 뜻이 아니며 

개인의 자유의사의 실현결과며 

또한 개인의 책임영역이라고 

제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절대자의 힘이 미치지 않는 

악인의 자유 영역과 힘도 

함께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그 자유의사자체를 

절대자가 부여했으므로 

절대성은 훼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영역을 

절대자가 부여했다면 

그 범위안의 결과 또한 

최종적으로는 절대자의 뜻이며 

책임인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 


최초의 그런 자유의 부여자체가 

절대자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할 때는 

이런 어려운 이론적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여하튼 절대자를 받아들이는 한편 

자유의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다음의 어려움에 처한다. 


즉 자신의 마음 안에 

머무르는 여러 생각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절대자의 뜻이며 

어떤 것은 자신의 뜻이며 

어떤 것은 악마의 뜻인가 하는 

내심의 분열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나름대로 자신은 

잘 그것을 구분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기준이 

모호하고 불투명하다. 


따라서 구체적인 경우에 

혼돈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런 믿음을 갖는 

이들 사이에서도 

여러 유형과 경로를 통해 

절대자의 뜻으로 생각하는 내용을 

서로 다르게 주장하게 된다. 


만일 이들의 믿음이 다 옳다고 하면, 

이들 여러 다른 내용들은 

절대자의 뜻이 분열되었거나, 

절대자의 다른 뜻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이들 서로가 견해가 

대립될 때는 

이들 각자는 

모두 자신이 절대자의 선한 뜻을 

추종하고 있으며 

상대는 악마의 추종자라고 

믿고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 3자의 입장에서는 

깊은 혼돈에 빠져들게 된다. 


왜냐 하면 이들 모두가 

다 그와 같이 믿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정말 옳은가 

그리고 무엇이 

절대자의 확고한 뜻이고 

선의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나름대로 

이런 확신을 갖는 이들이 

대립된 주장을 기초로 

서로 싸움을 일으키는 경우다. 


역사상에는 

이런 절대적 존재를 믿는 

많은 종교집단 사이에서 

서로 다른 믿음을 이유로 

전쟁과 살생을 한 경우가 

많이 있어왔다. 


이 때 쌍방은 

서로 제각기 신의 뜻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도 누구의 주장이 

옳고 선한가는 

역시 많은 혼돈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렇게 

절대적 존재에 대한 판단이 

서로 달라 충돌할 때는 

마땅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들의 서로 상반된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옳고 절대자의 뜻인가는 

그들 간의 대립에서 

누가 승리하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 승패가 

그 때 그 때 엇갈린다. 


그래서 만일 절대자의 뜻이 개입해 

승패가 오락가락하는 것이라면, 

절대자의 뜻도 

그처럼 여러 갈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그러나 설령  

어떤 일방이 완전히 승리해도 

패배자는 결코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의 승리는 

악마의 일시적 승리에 불과하거나 

자신에 대한 

절대자의 믿음의 시험이며 

또한 최후의 승리는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믿음을 계속 갖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관찰해보면 

수많은 종교들 사이에서 

서로간의 대립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고 

승패도 일정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예로, 

예루살렘 성지를 놓고 다퉜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자군전쟁과 같은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몇 번 기독교도가 

성지를 차지했지만 

이후 이슬람교가 승리하여 

오랜 기간 이슬람교의 영역에 

성지가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이후 기독교 진영에서 

이슬람교의 믿음이 

진정 절대자의 뜻이며 

자신들의 믿음은 

악마의 믿음이라고 승인한 경우는 

거의 없다. 



또 오늘날 기독교가 

이슬람교보다 

물질적 세력이 우세하다하여 

반대로 이슬람교 신봉자가 

기독교가 

진정 절대자의 뜻에 부합하며 

자신들의 믿음은 

악마의 믿음이라고 승인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외에도 오늘날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과 같은 

세계의 대표적 종교의 

각 종파들뿐만 아니라 

기타 절대자를 전제로 하여 

믿음을 일으키는 


많은 소수 종교 종파 및 

이를 기초로 한 

정치 사회 세력 간에서 

이런 대립 양상은 

끝없이 나타난다. 


그들 집단은 

때로는 서로 박해도 당하고 

교주마저 상대 세력에 의해 

처형당하는 사태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신념체계는 

각 집단 간에 계속 쉬지 않고 

이어지며 

대립을 계속하게 된다. 


그 결과 최종적인 문제는 

이들 서로 상반된 주장 가운데 

무엇이 진정 절대자의 뜻이며 

선인가의 궁극적인 의문에 대해 

확고한 해결을 못보고 

의문은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로 

단순히 힘이 강하다거나, 

뜻이 실현되어졌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곧 선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 선악의 기준으로 다수 주체의 행복의 양을 문제 삼는 입장




사실 힘의 강약은 

서로 뜻이 대립해 다툴 때 

어느 쪽의 뜻이 실현되는가를 

정해준다. 


그러나 뜻이 실현된다고 

그것을 곧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선은 무엇인가. 


이는 단순하게 

다음처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모든 주체에게’ 

‘언제나’ 

좋음만을 주는 경우를 

완전한 선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에서 본 사정 때문이다. 


즉 주체에 따라, 

상황 따라, 

좋음을 

달리 느낀다는 사정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이는 싫어하고, 

지금 좋은 어떤 것은 

나중에 나쁜 내용을 주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정이 

완전한 좋음과 선을 

세우기 힘들게 만드는 근본 이유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일단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 가운데 

완전한 선에 가까운 쪽을 

찾을 수는 있다. 


또 그 반대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가능한 것들 가운데, 

완전한 선에 가까운 것을 

선한 쪽이라 하고, 


반대로 완전한 악에 가까운 것을 

악한 쪽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 가운데 

완전한 선에 가까운 내용을 

선택해가는 것을 

현실적 선이라 할 수 있다. 


즉 과정과 결과에서 

각 생명이 가장 많은 좋음을 

얻는 쪽이 

현실적 선이다. 



그리고 이들 가능성 가운데 

누군가 어느 하나를 선택했다고 

반드시 

뜻한 대로 

그 결과를 이뤄낸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결과 

어느 경우는 

선한 쪽의 뜻이 실현되지 못하고 

대신 악한 뜻이 

실현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실현되지 못한 뜻이 

더 선하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 의도하는 내용이 

완전한 선에 보다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예수가 반대자들에 잡혀 

죽음을 당한 경우 


그를 죽여 

당장 뜻을 실현시킨 이들보다 

죽음을 당한 예수가 

더 선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고자 한 

뜻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여러 주체가 

가진 뜻 가운데 

무엇이 선한가는 

누가 힘이 더 세고 

누구의 뜻이 당장 실현되어지는가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누구의 뜻이 

모든 생명에게 

좋음을 가장 많이 

가장 오래 주게 만드는 길인가가 

선악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선의 기준으로 

다수 주체의 행복의 양을 

문제 삼는 입장의 문제점



그러나 사실 어떤 것이 

그런 것인가를 

이론상 엄밀하게 판단하는 것은 

역시 어렵다. 

 

우선 한 주체가 

선택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 일을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현실은 

실현되어 나타나는 일만 보여주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실현되어 나타나지 않는 일들이 

과연 시도할 수 있었던 일이고 

또 시도했으면 

이룰 수 있었던 일인가는 

모두 이론상 의문으로 남게 된다. 


또 선택가능한 일로 

생각되는 것들에서 

장차 나타날 결과를 

모두 예측하고 비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 앞으로 나타날 결과에서 

각 생명이 얼마만큼 

좋고 나쁨을 얻는가를 

일일이 계산하는 것도 어렵다. 


따라서 엄밀하게 

무엇이 현실적 선인지를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위 원칙을 기준으로 삼으면,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로 

생각되는 것들 가운데 

비교적 선한 방향으로 

선택해갈 수는 있다. 


그것은 

엄밀하게 정확하지 않아도 

비교적 선에 가까운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음을 뜻한다.  







● 삶에서 의존하는 선의 기준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먼저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로 

생각되는 것 가운데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각 생명의 

현재와 미래에서의 

좋고 나쁨을 고려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가장 많은 좋음을 얻을 방향을 

선택한다. 


그래서 이렇게 

매 순간 선택해나가는 자세를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 선은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많은 이에게 

가장 높고 많은 좋음을 

가장 오랫동안 줄 

가능성이 있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선택하는 것은 

선이고 

그 반대를 선택하는 것은 

악이라 할 수 있다. 







● 삶에서 의존하는 

선의 기준의 재검토  



현실적 선을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많은 이에게 

가장 높고 많은 좋음을 

가장 오랫동안 줄 

가능성이 있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다시 다음 문제가 있다. 


우선 각 주체가 

자신 및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 친구, 사회, 

동류집단(인종, 민족, 인간)과 

그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주체를 

모두 평등하게 고려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양 1000 마리를 죽이면 

자신 가족 10 명이 살고, 

양 1000 마리를 살리면 

자신 가족 10 명이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 과연 이를 

행복과 고통을 느끼는 주체의 수와 

그 행복의 양과 질 기간만을 

단순히 비교하여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가이다.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미생물, 세균, 벌레 등으로 확대하여 

생각해보자. 


그러면 각 주체는 

이런 단순한 평등한 

비교의 입장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한 주체는 

늘 우주 전체보다 

자신과 가족의 생명, 이익만을 

우선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우주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는 보통의 경우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행복을 

전 생명의 그것보다 우선함은 

모든 생명들이 거의 다 같다. 


그래서 

입장 따라 선과 악의 판단이 

혼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서로 대립 경쟁 투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힘이 강한 쪽의 뜻이 

실현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가장 좋은가는 

현실에서 누가 힘이 강하며 

누구의 뜻이 실현되는가와 

별개의 문제이다. 


그보다는 어느 쪽의 뜻이 실현돼야 

가장 많은 주체에게 

좋음이 더 많이 오래 주어지는가의 

판단문제인 것이다. 


또 그래서 누구의 뜻이 

실현되어야 

마땅한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선의 판단에서는 

그 힘의 강약을 떠나, 

좋음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주체를 

평등하게 고려하게 된다. 


또 그들이 어느 상태에서 

가장 많은 좋음을 

가장 오래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 삼게 된다. 


따라서 무엇이 선인가의 판단에는 

판단하는 이가 

이들 대립관계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모두를 공평하게 

고려하는 상태에서만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선을 추구함은 

자신이 힘이 있더라도 

힘이 없는 생명들이 느끼는 

좋음까지도 

모두 공평하게 고려하고 존중하며 

뜻을 결정하고 

선택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결국 세균, 미물, 동식물 같은 

생명들과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모두 차별하지 않고 

되도록 동등하게 고려하여 

뜻을 결정함을 의미한다. 


또 반대로 선을 추구할 때는 

단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음도 의미한다. 


  



  



● 선의 실현 


물론 이런 선의 모습이 

현실에서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힘이 강해 실현된 내용은 

모두 선이라고 보는 입장과는 

다른 입장이다. 



당장 어느 쪽이 실현돼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묻지 않고 

어느 쪽이 

모든 생명의 많은 좋음을 

보다 오래 가져다 주는 방향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각기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복만을 우선하여 

투쟁하는 경우 

비록 행복을 누리는 수와 

양과 기간이 적더라도 

힘이 강한 한 쪽의 뜻이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강하지만 

선하지 않은 자의 뜻이 

실현될 때는 

상대적으로 많은 생명이 

오랜 동안 고통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사실 

선악 판단과정과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가? 


즉 각 생명이 

가능한 악 보다는 

선에 가까운 방향을 

선택해나갈 수는 없는 것인가? 



사실 선의 실현이 어려운 것은 

각 생명들이 느끼는 좋음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좋음이 서로 대립될 때 

모든 주체의 뜻을 같게 만들거나 

모든 이의 뜻에 맞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모두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대립이 해결돼 

어떤 주체가 받는 

나쁨이 줄어든다면, 

그만큼 선이 실현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일단 그 상태에서 

그 만큼 나쁨이 없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좋고 나쁨의 대립 자체를 해결하여 

선을 실현할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다음에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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