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데이트 ++ 시작 2008년-2-15일 오후 10:32 + 업데이트 ++ 시작 2008년-2-20일+ 업데이트 ++ 시작 2008년-3-01일+ 5. 최상의 상태의 구성요소간의 우열 가. 가치의 전도(顚倒)현상 앞에서 가치의 우위의 순위로 선- 선한 상태의 실현 - 지혜 - 행복 - 일반적인 상태의 실현 등을 보았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으키기 쉬운 뒤바뀐 가치판단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사회적선보다 개인의 자신만의 행복을 절대시하기 쉽다. 각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가장 집착하는 일반적인 심리를 보통 벗어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만이 지상 최대의 목적이며 사회적 선은 아예 무시하거나 자신의 행복 다음의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각 생명이 가장 범하기 쉽고 일반적으로 행하는 가치전도가 된다. 더 나아가 마음의 행복을 절대시한 나머지, 사회적 선을 실현할 외부 상태를 마련하거나, 이에 필요한 지혜를 갖추는 것을 경시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가치를 뒤바꿔 판단한 것이 된다.
두 번째는 또 다른 이유로 내심의 행복 보다 바깥모습이나 물질적 상태를 절대시하는 가치전도 현상이 있다. 물론 외관이나 물질적 상태가 사회적 선과 관련되어 이를 중시하는 것은 가치의 전도로 볼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차원이 아니고 순수이 개인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심의 상태보다 외관(外觀)에 보다 비중을 두는 경향이 나타나기 쉽다. 물론 물질적 상태 등이 내심의 상태와 함께 행복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심의 상태나 외부 물질적 상태는 다 함께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앞에서 보듯 실제 어떤 객관상태가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각 개인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보다는 외부 객관상태 자체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객관상태를 서로 비교해 서열을 나누고 여기에 보다 많이 집착하게 된다. 이는 주종(主從)이 뒤바뀐 상태다. 그리고 이런 뒤바뀐 가치판단을 고집하는 한 현실에서는 그에 따른 왜곡(歪曲)현상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실제 이런 집착현상은 현실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집착을 통해 객관상태는 실현해 얻어도 여기로부터 최종적으로 얻어야 할 행복은 얻지 못한 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객관상태는 행복에 이바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마음상태에서 어떤 주체가 행복한가 여부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어떤 집에 살고 있다고 할 때 그가 그 곳에서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 여부는 사실상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는 쉽게 파악할 수 없다. 또 행복과 불행의 정도를 일정한 수치로 나타낸다거나 이를 서로 비교 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이에 반해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지위에 있는가와 같은 일정한 객관상태는 쉽게 겉으로 드러난다. 또 그런 객관상태는 물리적 양이나 수치나 서열로서 쉽게 비교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주체들이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할 때, 또는 자신 스스로 타 주체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려 할 때, 또는 자신이 그런 타인의 자신에 대한 평가내용을 의식해 추리해보려 할 때, 또는 어떤 상태를 그냥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 좋고 나쁨을 평가하려 할 때에 이런 객관적 상태를 비교하여 낫고 못하고를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객관상태에 대한 가치평가에는 다음 문제가 있다. 이 같은 평가는 보통 객관상태가 좋음에 얼마나 이바지할까를 추리 판단하여 행한다. 그런데 이는 그 상태에서 어떤 주체가 실제 느끼는 좋음과는 분리된 평가가 된다. 이는 각 상태에서 좋음의 느낌을 직접 경험한 뒤 비교 평가한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상태에서 ‘실제로 누군가가 좋음을 느끼는가’와 ‘그 상태가 보기에 좋다고 생각한다’는 추상적 가치평가가 서로 분리된다. 이는 미세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주체가 각 상태에서 어느 정도로 좋음을 얻을 것인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각 주체는 그와 관계없이 어떤 객관 상태를 띄어 놓고 희망을 갖거나, 비교하여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단지 외관을 놓고 볼 때 무엇이 무엇보다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판단과 희망을 서술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이런 평가는 각 상태의 모든 면이 아니라, 외부에 드러난 한 두가지 측면을 피상적(皮相的)으로 평가한 결과가 되기 쉽다. 외부 관찰과정에서는 드러난 사항만 평가되기 때문이다. 또 이는 그것을 행한 각 주체별로 또 각 주체가 놓인 구체적인 상태별로 달라진다. 그런데 각 상태의 가치는 최종적으로 그 상태가 구체적인 주체에게 실제로 좋음[행복]을 주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외관상 평가에서 ‘좋음을 준다고 보인다’는 평가는 많은 경우에 실제로는 좋음을 주는데 실패한다. 좋음을 얻는가 못얻는가는 어떤 주체가 그 상태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가에 따르게 된다. 또 그가 무엇과 그 상태를 비교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실제로 받는 내용’과 ‘외관상 보여진 내용’과는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0억을 갖고 있는 이는 외관상 다른 이에게 좋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가 200억을 갖고 있는 이와 자신을 비교하여 불만에 빠져 있다거나, 또는 건강이나 명예와 같이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그 상태를 평가하여 불만에 빠져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차이가 발생할 때, 수단인 바깥 외관(外觀)은 다른 주체에게 보이고 평가받는 반면, 목적인 내심의 행복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수단인 바깥 외관을 더 중시하는 왜곡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정말 내심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보다는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타인의 인정이나 부러움들을 받기 위해 일부로 그렇게 보이도록 외관을 중시하고 꾸밀 뿐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주체는 타인의 인정이나 평가가 주어질 때 주로 이를 통해 만족해하게 된다. 물론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경우도 비록 특수한 방식이지만 최종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얻는 것은 다른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주체는 행복을 얻는 주된 수단으로 특별히 타인의 평가에 크게 의존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런 경우, 무엇과 비교하는가에 따라 만족과 불만이 크게 달라지고, 주체적인 확고성을 잃고 사는 면이 나타난다. 또 이런 주체는 자신의 내심에서 스스로 평가하는 내용은 가볍게 대하기 쉽다. 그것이 어떠하든 다른 주체에게 잘 보이지 않고 평가받지 않기 때문에 경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자신은 옷이 불편하거나 예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 옷을 좋다고 한다. 이런 경우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불편한 옷을 골라 입고 만족해 하게 된다. 이른바 일종의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이 행세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평가나 인정이 행복을 얻는 과정에 전혀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타인의 평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내심의 요소를 포함하여 다른 외부 요소들과도 평등하게 자신의 행복에 봉사하는 한 요소로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만일 이들 사이에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일방에만 치우치게 되면 행복의 평가에 주체성을 잃고 가치비중이 뒤바뀌는 결과를 낳게 된다. 수단과 관련한 행복의 문제는 이외에도 많다. 행복의 실현에 각 수단은 실제 어느 정도 필요한가, 또 왜 행복 추구과정에서 수단에 집착하게 되는가 등이 그런 문제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론부분에서 별도로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
세 번째는 행복을 위해 어떤 수단을 추구하고 또 그 수단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수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우위가 뒤바뀌는 경우이다. 앞에서 본 내용도 이들 가운데 하나의 예가 된다. 그러나 수단과 그 하부 수단들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은 일어난다. 예를 들어 행복을 위해 부를 추구하고 부를 얻기 위해 직업을 구하고 또 그러기 위해 어떤 전문지식을 습득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수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하나에 집착하게 되면, 이제는 실제로 그 보다 최상의 가치를 갖는 요소들을 이로 인해 무시하고 경시하기 쉽다. 집착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면 쉽게 그것이 잘못된 집착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당면한 어떤 것에 집착하고 나면 그 이후 그 가치가 확대되어 인식되는 현상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면 조그만 물체가 전 우주처럼 확대되어 의식된다. 그래서 자칫 원래 현미경을 보게 했던 원래의 근본목적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실제 수단에 불과했던 것에 과도히 집착하여 본 목표나 보다 상위의 가치를 무시하고 희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를 주의해야 한다. 한편 최상의 상태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선_실현_진리_행복]은 물론 모두 갖춘다면 가장 좋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이들 요소 간에 우선 순위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현실에서 최상의 상태를 향해 가는 데는 이들 각 요소가 서로 충돌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들 요소가 서로 충돌될 때는 무엇을 희생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이 경우 잘못하여 하위의 가치를 위해 상위의 가치를 희생하면 이것도 가치의 전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먼저 밝히면 선한 뜻이 가장 우선이고 그 다음이 실현이며, 그 다음이 지혜이며 그 다음이 행복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를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한편 최상의 상태를 위와는 다른 내용으로 생각하는 입장도 있다. 그런데 앞의 입장에서는 다른 내용을 앞에 제시한 것보다 우선시하면 가치전도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다른 입장에서는 앞에서 밝힌 내용이 오히려 가치전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최상의 요소로 거론될 수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들 문제는 아래에서 차례대로 살피기로 한다. 나. 우열판단기준 삶에서 목표와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최상의 상태를 판단함이 필요함을 보았다. 그리고 앞에서 제시한 기준은 선함, 실현, 진리, 행복이라는 요소를 통해 선택해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삶을 살아가면서 악한 희망, 실패, 거짓, 불행을 피해야 함을 의미한다. 만일 이들 요소를 고루 갖출 수 있다면 가장 낫다. 그러나 선함-실현-진리-행복이라는 각 요소가 모두 충족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그래서 만일 이들이 서로 충돌되어 어느 일부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하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여기서 앞에 나열한 것은 뒤에 나열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앞에 나열한 요소를 뒤에 나열한 요소보다 우선시해야 한다. 여기서는 그 이유와 근거를 밝히기로 한다. 무엇이 더 낫고 더 중요한가를 판단하고자 할 때는 다음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즉, 비교되는 둘 가운데 각기 어느 하나를 갖추고 다른 하나는 갖추지 못한 두 상태를 놓고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나은가를 판단함으로써 가능하다. 또는 어느 하나를 갖추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의 것을 갖춘 상태를 놓고 서로 비교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선함-실현-지혜-행복이라는 각 요소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살필 때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경우를 나열할 수 있다. 먼저 선(善)과 다른 요소를 비교해보자. 여기서는 대조를 쉽게 하기 위해 정반대의 경우를 놓고 비교하기로 한다. ① 뜻은 선하지만 실현이 되지 않은 경우 - 뜻이 악하지만 실현이 된 경우 이제 뜻의 실현과 다른 요소와의 비교다. ④ 뜻이 실현되었지만 지혜롭지 못한 경우 - 뜻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지혜로운 경우 지혜와 행복의 경우와의 비교다. ⑥ 지혜롭지만 행복하지 못한 경우 - 어리석지만 행복한 경우 이들 여러 경우를 비교해보건대, 선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 뜻의 실현, 지혜, 행복의 순으로 중요하다. 참고로 주관적인 행복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뜻의 실현, 지혜보다는 행복이 우선한다는 결론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뜻의 실현과 지혜는 그것이 선한 뜻의 실현과 관련하여 중시되는 요소다. 그리고 선이 행복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하는 전제에서 이들이 선의 실현과 밀접하게 관련되므로 행복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처럼 간단하게 결론을 밝혔지만 이런 우열판단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각 경우를 나누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선과 뜻의 실현의 우열관계 뜻은 선하지만 실현이 되지 않은 경우 - 뜻이 악하지만 실현이 된 경우 선하지만 뜻의 실현을 못한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훔치려는 뜻을 갖고 그것을 잘 실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 뜻이 실현되지만 동기와 결과가 모두 악한 경우이다. 이런 예들을 통해 볼 때 악하지만 뜻을 실현하는 경우보다 실현을 못하지만 선한 경우가 낫다고 할 것이다. 정반대로 경우를 놓지 않고 살펴도 같다. 뜻은 선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경우 - 뜻은 악하지만 지혜로운 경우 선함과 지혜[진리]가 서로 충돌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선함과 지혜는 사실상 함께 갖춰야 할 요소다. 왜냐 하면 선의 판단, 선을 실현시킬 방안 등을 진리에 기초하여 찾지 않으면 선을 제대로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지혜로운 선과 지혜롭지 못한 선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지혜로운 선이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혜롭지 못하고 선한 경우에는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선을 추구한다거나, 또는 실현방안이 잘못 되어 결과적으로 악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진리는 선한 뜻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사실은 이 둘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진리를 제대로 아는 바탕에서 진리에 상응하여 선한 목적과 실현 방안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부득이 이 둘이 충돌되어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진리가 갖는 효용을 먼저 살펴보자. 우선 진리는 그 내용을 어떤 이가 잘못 알더라도 그 진리의 대상이 갖는 내용이 바꿔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술을 누군가가 물이라 잘못 안다고 하여 술이 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즉 이런 점에서는 진리를 아나 모르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진리의 내용을 모르거나 잘못 알게 될 때는 잘못된 앎을 토대로 잘못된 뜻을 설정하게 되고 또 잘못된 실현방안을 찾고 이에 기초해 행위 하여 외부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진리가 갖는 의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진리를 알고 또 목적을 설정하고 방법을 찾고 실현하는 등으로 무언가를 행할 때, 그런 모두가 최종적으로 어떤 가치를 갖는가는 결국 선악의 판단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선함이 진리보다 중요하다고 해야 한다. 두 가치가 충돌될 때의 판단을 쉽게 하기 위해 서로 대조되는 두 경우를 들어 비교해보자. 즉, ‘선’하지만 진리를 틀리게 아는 경우 - 악하지만 ‘진리’를 잘 아는 경우를 비교해보자. 진리는 앞에서 본 것처럼 사실에 대한 판단- 가치에 대한 판단 - 목적설정 - 실현방안의 도출 등에 매우 필요하다. 이제 진리를 잘못 알지만 선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구체적인 예를 들어 영희는 술을 물이라 잘못 알았다. 또 철수가 목이 말라 하지 않는데 목이 말라하는 것으로 잘못 안다. [사실판단의 잘못] 한편 철수는 사람들을 해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영희는 그것을 모르고, 상대가 누구이든 또 어떤 방법이든 남을 도와주기만 하면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가치판단의 잘못] 따라서 영희는 사람들을 해치려는 뜻을 갖고 있는 철수를 도울 생각으로 [목적의 잘못] 우선 물이라 생각하고, 그 술을 훔쳐서 술을 마시게 한다. 또 철수가 술을 많이 마신 후 어지러워하자 병이 난 것으로 잘못 알고 그 병을 고치려 점술이나 부적 등을 통해 낫게 하려 노력했다.[실현방안의 잘못]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철수가 술이 깨게 되고 마음을 돌려 남을 해치지 않게 되었다고 하자. 이상과 같이 영희의 매 판단은 진리의 내용과 어긋나 있다. 그러나 그 의도나 결과가 선한 모습을 띄는 부분이 있다. 반면 진리에 상응된 내용을 제대로 알지만 악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런 두 예에서, 진리를 잘못 알지만, 그래도 선한 의도를 갖거나 선한 결과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나음을 볼 수 있다. 간단하게 어리석어 잘 모르고 그 뜻도 잘 실현시키지 못하지만, 그 뜻은 널리 생명에게 행복을 주려는 경우가 낫다. 반대로 많은 것을 사실대로 잘 알고 지혜롭지만 그런 지식과 지혜를 자신이 이익만을 추구하여 다른 생명을 괴롭히는 목적에 사용하는 경우는 그 악의 해악이 보통의 악보다 더 커진다. 따라서 악한 경우에는 차라리 지혜롭지 못한 것이 낫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어리석더라도 선한 경우에는 지혜로운 악보다는 낫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뜻은 선하지만 행복하지 못한 경우 - 뜻은 악하지만 행복한 경우 만일 한 주체가 선한 상태를 추구하면서 행복을 얻는다면 이 경우가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선한 행복과 선하지 않은 행복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좋음이 더 많은 선한 행복 쪽이 낫다. 행복은 하나로도 가치가 있다. 그런데 행복이 여러 주체와 기간에 걸쳐 많이 쌓인다고 하여 그 가치가 나쁘게 바뀌지는 않는다. 이런 사실을 기초로, 선(善)한 행복의 경우가 단순한 하나의 행복보다는 낫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선한 상태가 어떤 한 주체에게는 불행을 주는 경우처럼 선과 행복이 엇갈리는 경우가 있다. 앞에서 보았듯 선악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선(善)을 만일 완전한 개념으로 하여 어떤 상태와 관련된 주체 ‘전부’와 기간 ‘전부’에 걸쳐 ‘좋음’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이런 개념정의에서는 ‘선’한데 어떤 주체가 ‘불행’한 경우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완전 선을 예상할 수 없다. 따라서 선의 개념을 완화하여 가능한 경우들에서 가장 상대적으로 많은 주체들이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좋음의 차이[좋음-나쁨]를 주는 상태를 선(善)으로 설정했다. 물론 가장 적은 경우는 악(惡)이 된다. 그 중간영역은 선과 악의 중간상태로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선을 정의하면 어떤 상태가 선하지만 어떤 한 주체에게는 나쁨을 주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 만일 어떤 한 상태가 모든 생명 주체에게 동일한 형태로 좋음과 나쁨을 준다면 원천적으로 이런 선과 행복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 주체가 행복을 느낄 때 다른 모든 주체도 같이 행복을 느끼므로 행복과 선의 방향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한 상태는 모든 주체에게 동일하게 좋음을 주지 않는다. 어떤 주체에게는 좋음을 주고 또 다른 주체에게는 나쁨을 주는 등으로 서로 엇갈리게 된다. 선과 행복의 충돌은 이런 사실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상태 A는 원인-결과-영향의 면에서 여러 주체를 놓고 볼 때 좋음의 차이[좋음-나쁨]을 가장 많이 가져다 줄 수 있다. 따라서 선한다고 평가하게 된다. 그런데 그 A의 상태가 원인-결과-영향의 면에서 어떤 한 주체에게는 전체적으로 좋음의 차이[좋음-나쁨]을 적게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래서 그 주체는 이 경우를 불행한 상태에 넣게 된다. 이렇게 두 가치가 충돌될 때는 어떤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 판단을 쉽게 하기 위해 서로 대조되는 두 경우를 들어 비교해보자. 즉, ‘선’하지만 불행한 경우와 악하지만 ‘행복’한 경우를 비교해보자. 우리는 이 두 경우의 비교에서 선하지만 불행한 경우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데 쉽게 동의할 지 모른다. 예를 들어 남들을 괴롭히고 재산을 모두 훔치면서 자신은 행복한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보다 자신은 고통받고 괴롭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주체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되는 경우가 낫다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경우에 만일 ‘공평한’ 제 3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이 판단할 것이다. ‘공평한’ 입장이라면 어떤 한 주체의 좋음을 특별히 다른 주체의 좋음보다 더 비중을 둬야 할 근거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이들 각 주체를 각기 평등하게 놓는다. 그리고 각 주체들이 받는 좋음과 나쁨도 평등하게 놓는다. 그 다음 이들 모두가 받는 [좋음-나쁨]의 총량을 비교하여 전체적으로 좋음의 차이[좋음-나쁨]가 많이 나타나게 될 상태를 더 낫다고 평가하게 된다. 이것이 앞에서 본 선악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물론 실제 이론처럼 엄밀하게 그 값을 계산하고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이런 이론이 하나의 추상적 평가기준이 되어줄 수 있다. 그리고 자신과 이해관계, 친밀, 원한관계 등이 전혀 없는 타 주체와 타 주체간에 충돌이 일어날 때는 사실 이런 식으로 평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반적인 판단과 달리, 자기 자신의 행복과 선이 충돌하게 되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쉽게 자신의 행복을 우선하기 쉽다. 예를 들어 자신의 콩팥을 떼 내면,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는 경우라고 가정해보자. 또는 매달 한 번씩 헌혈을 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막상 수술이나 헌혈의 고통을 택하려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한 주체는 자신의 좋고 나쁨의 느낌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직접적으로 느낀다. 그러나 먼 미래의 좋음이나 타 주체의 좋고 나쁨은 추리를 해야 비로소 생각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명확하지 않고 또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느낄 수 있는 좋고 나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혀 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이 때 그는 그 고통을 다른 사람의 다리가 잘려지는 고통보다 더 크게 생각하게 된다. 또 기쁨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자신이 느끼는 좋고 나쁨에 더 비중을 두기 쉽다. 어떻게 보면 이는 각 생명이 갖는 본능에 충실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생명체가 이성(理性)이 발달하면 자신의 선택으로 먼 시간 후에 받게 될 좋고 나쁨도 계산하여 행동하게 된다. 또 더 나아가 다른 주체가 받을 좋고 나쁨도 고려하게 된다. 그래서 만일 먼 미래의 좋음이나 타 주체의 좋음을 모두 현재 느끼는 느낌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이 경우에는 그 모두의 좋음을 현재 순간에 자신이 직접 느끼는 것과 같이 받아들임으로서 당연히 그 좋음의 차이[좋음-나쁨]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개인의 행복도 충돌할 여지가 없다. 왜냐 하면 타 주체들이 느낄 좋고 나쁨도 한 주체 안에서 모두 함께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리되는 좋고 나쁨은 인격적 수련이 되지 않은 경우 직접 느끼는 좋음에 우선하기 힘들다. 그래서 보통 이들이 충돌되면 직접 느끼는 좋고 나쁨에 더 이끌리게 된다. 물론 이는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성적 판단과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담배나 술이 장기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때 그 때 욕구가 밀려오면 이를 끊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타 주체의 좋음 등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의 주관적 행복의 내용에는 잘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선과 행복은 구체적으로 일치되지 않게 나타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다음의 경우를 살펴보자. 하지만 타 주체의 좋음은 이와 약간 다르다. 그것은 추리되는 타인의 좋음의 느낌을 미래의 순간에 자신이 직접 느끼게 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 주체의 좋음도 일정한 경우에는 자신의 좋음과 관련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위의 원리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즉, 현재 타 주체를 위해 희생하면 그것을 원인으로 자신이 미래에 좋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반대로 자신의 좋음을 위해 타 주체에게 해를 끼치면 그로 인해 미래에 나쁨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미래의 좋고 나쁨을 계산하여 앞에서 본 원리를 통해 비교하여 선택할 수 있다. 또 자신의 자녀, 부모, 형제 연인 등과 같이 자신이 친밀감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타 주체의 좋고 나쁨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선택한 장난감이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처음에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자녀의 입장에서 느끼는 기쁨을 다시 자신의 기쁨처럼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타 주체의 좋고 나쁨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여 이를 함께 비교하면, 선택할 길이 열린다. 한편 더 나아가, 타 주체들에게 친밀감, 동질감을 느끼도록 노력하여 앞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을 시도할 수도 있다. 즉 타 주체들이 느끼는 좋고 나쁨을 자신이 느끼는 것과 동일시하게 되면, 이들이 자신의 좋고 나쁨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이들 경우에서는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행복의 선택이 선의 방향과 같아질 수 있다. 그래서 선과 자신의 행복의 충돌이 해결될 수도 있다. 물론 다른 정반대의 예도 있다. 예를 들어 앞과 반대로 타 주체들과 미움, 원한관계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타 주체가 좋고 나쁨을 받을 때 자신은 이와 반대형태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경우는 정반대가 되어 오히려 더 해결하기 힘들게 된다. 이런 경우 외에도 쉽게 타 주체의 좋고 나쁨이 자신의 것으로 바뀌지 않는 경우는 많다. 이런 경우 타 주체와 자신의 입장을 동일시한다거나, 상대와 입장을 전환하여 상대의 입장이 되어 공감해보지 않는 한 그 좋고 나쁨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것은 추리되는 불명확한 내용으로 남게 된다. 이런 경우 다음과 같이 충돌을 해소하는 방법이 다시 남아 있다. 한 주체가 선을 선택하면 나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를 대하는 마음태도를 변경하면 좋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충돌현상을 조화롭게 해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선택한 내용에서 만족을 찾으려 노력하거나, 감사하려하거나, 다른 나쁜 상태와 비교하는 등으로 만족을 얻는 경우다. 그래서 처음 나쁨을 주는 상태에서 좋음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누구의 마음태도를 그렇게 바꿀 것인가에 따라 두 가지 방안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선과 한 주체의 좋음이 충돌된다고 하자. 이 때 그 주체가 선을 선택하고 나쁨을 주는 상태에 스스로 마음을 바꿔 좋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상태를 선택하고 타 주체들의 마음을 변경시킬 수도 있다. 또는 타 주체들이 스스로 마음태도를 변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들이 좋음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하나의 상태에 대해 함께 좋음을 느끼게 된다면 선과 개인의 행복의 충돌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방안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태도 변경도 현상상태의 변경처럼 한계를 갖고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뜨거운 불에 손을 넣은 상태에서 단지 마음태도를 변경해 좋게 느끼려 해도 잘 되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안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어느 한쪽을 반드시 희생해야 할 상황에서의 선택문제가 남는다. 우선 주관적인 입장, 또는 행복 지상주의의 입장에 선다면, 자신의 행복이 선보다 우선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는 왜 타 주체를 고려해 자신의 좋음을 희생해야 하는가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 이론상 설득은 되더라도 실제 선택과정에서는 실행하지 않기 쉽다. 즉 추상적인 선보다는 자신이 직접 느낄 행복을 우선시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런 행복 지상주의자의 입장을 관철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선을 파괴하는 것도 허용하게 된다. 그것은 곧 악한 행복을 허용하는 것이 된다. 반면 선(善) 우선주의는, 이런 경우 물론 선한 쪽의 행복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선 우선주의에서도 어떤 개인이 항상 유리한 입장에 놓일 수는 없다. 그러나 행복지상주의보다는 훨씬 합리적인 원칙으로 자신의 행복을 보호받게 된다. 즉 단순히 힘이 우위에 있을 때 자신의 행복을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이 전체의 입장에서 많은 좋음을 주는 선의 입장에 있을 때 보호받게 되는 것이다. 힘이 우세한 자는 행복지상주의가 선 우선주의보다 자신의 행복이 실현될 가능성을 많이 준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행복 지상주의자들도 타 주체간에 충돌이 있으면, 선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이 관련되지 않는 사항이기 때문에 쉽게 이성적인 공평한 판단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지상주의자가 선을 우선하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계기는 다음과 같다. 즉, 타 주체간의 충돌 사항에 자신이 공평한 제 3자의 입장에서 내렸던 판단 원칙을 자신이 타 주체와 충돌하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시켜야 한다는 이성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면 먼 시간 후의 좋음이나 또는 다른 주체가 받는 좋음도 자신이 현재 느끼는 좋음과 평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여기서는 물론 선이 행복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결론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천적으로 어떻게 이런 이성적인 결론에 따라 늘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가 문제된다. 그것은 선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해야할 상황에서 특히 요구된다. 이런 경우 앞에서 충돌이 해결되는 예들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타 주체의 좋음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좋음으로 연결됨을 생각해보는 노력, 타 주체와 동일감, 친밀감을 가져보려는 노력, 입장을 바꿔 생각해 타 주체와 공감해보려는 노력 등을 통해 자신의 행복과 선의 입장이 같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는 선한 상태를 선택한 뒤 그 상태에 맞춰 자신의 마음태도를 바꾸도록 노력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행복한 상태에 상대도 좋음을 느낄 수 있도록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종적으로는 공평한 제 3자의 이성적인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선과 자신의 행복의 상태를 일치시키려는 노력 등이 필요하다. 앞에서는 정반대의 경우를 비교하였다. 그러나 뜻은 선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경우 - 뜻은 선하지 않지만, 행복한 경우도 이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다. 뜻이 실현되었지만 지혜롭지 못한 경우 - 뜻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지혜로운 경우 이를 위해 ‘뜻을 실현’하였지만 그에 관계된 진리를 모르는 경우와 뜻을 실현 못했지만 그에 관계된 ‘진리’를 잘 아는 경우를 비교해보자. 그리고 이것을 비교함에 있어 모두 그 뜻이 선한 경우로 제한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만일 뜻이 악한 경우라면 반대의 결론을 취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물을 석유로 잘못 알고 있다. 또 불을 끌 때는 석유를 부어도 꺼질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다고 하자. 그는 불을 끄기 위하여 석유를 붓는다고 부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속에 물이 들어 있어서 불을 끌 수 있었다고 하자. 생각해보면 위험천만한 경우다. 그러나 다행히 목적을 이룬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서 무엇을 중요시하는가에 따라서 판단이 엇갈릴 수 있다. 그 1회의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어리석지만 어찌되었든 의도한 뜻을 실현시킨 경우가 당연히 낫다. 그러나 한편 진리를 잘 안다는 것은 비록 그 경우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많은 경우에 뜻을 성취시킬 가능성이 보다 높다. 따라서 진리를 잘 아는 경우를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뜻의 실현에 중점을 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잘 아는 것이 요구된다. 선한 뜻을 갖더라도 실현방안이나 진리를 모른 채 행위하면 엉뚱하게 오히려 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진리를 잘 모르면, 뜻의 실현을 일단 미루고 우선 다른 경험자로부터 진리를 배우려는 자세가 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노력으로 모든 경우에 필요한 진리를 다 알 수 없다. 처음 새로 만나게 되는 현실은 대부분 그런 경우다. 그런데 정확히 진리를 모르는 한 뜻을 절대 실천하지 않아야 한다면, 새로운 상황에 처하면 거의 모든 경우에 아무런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진리를 알 수 없고 뜻의 실현도 마냥 미룰 수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정확히 진리를 모른다 해도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선한 뜻의 실현을 위해 돌진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결국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그러나 사실 진리는 이런 실패와 시행착오의 반복을 통해서 얻게 된다. 즉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지 않고서, 그냥 머릿속만의 생각으로 진리를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행착오나 실패를 두려워하고 먼저 진리만을 얻으려 하면 오히려 끝내 그 진리를 얻어내지 못한 채 머무르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상황에서는 선한 뜻을 갖는 이가 실패를 각오하고 선한 뜻을 향해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큰 가치를 갖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실패의 결과가 얻어져도, 그것은 그렇게 하면 실패한다는 하나의 경험과 진리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한 뜻을 실현하려는 이런 자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런 노력 끝에 뜻이 성취되었다고 하자. 비록 이 경우 진리를 모르고 했지만 그러나 이런 성취도 사실은 하나의 진리의 측면이다. 많은 실패와 성공은 그것 자체로 진리의 한 내용물이 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선한 뜻이 성취되는 결과는 선을 단지 관념 속에서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실제로 현실에 나타나게 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한편 진리가 본래 중요시되는 것은 그것이 최종적으로 ‘선한’ 뜻의 ‘실현’에 크게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결국 진리가 갖는 가치의 근거는 선한 뜻의 ‘실현’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뜻의 실현이 결국 진리의 파악보다는 우선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뜻의 실현과 진리 이 두 요소는 선한 뜻과 관련해 함께 요구된다. 그런데 둘 가운데에서 뜻의 실현이 좀 더 우선한다는 점은 다음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비록 어리석더라도 뜻의 실현을 위해 성실한 노력을 먼저 반복해서 어떻게 하든 선한 상태를 실현해내는 것이 단순히 지혜가 많은 것보다 더 우선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간접경험이나 교육을 통해 지식을 미리 습득한 후에 실행에 착수해 뜻을 실현하는 것은 훌륭하다. 그러나 뜻을 이루기 위해 실제 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고 어떤 지식을 미리 다 갖춘 다음에 시도하겠다는 자세는 대부분의 경우 뜻을 이루기 어렵게 만든다. 왜냐 하면 현실에서는 매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일보다는 새롭게 나타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매번 반복되는 일들은 미리 경험한 이들의 경험을 기초로 지식을 갖추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는 일이 더 많다. 또 매번 반복되는 일에 대한 지식도 사실 그 기초는 최초에 무모하게 그에 도전해 뛰어들어 노력했던 사람들의 시행착오와 실패의 경험이 쌓여 얻어지는 것이다. 물론 실행을 앞세우는 이는 처음 이에 필요한 지혜가 없어서 잦은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실패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지혜 또한 최종적으로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뜻의 실현을 지혜나 진리보다 앞세우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뜻이 실현되었지만 불행한 경우 - 뜻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행복한 경우 뜻의 실현과 행복 사이에서는 어떤 것이 보다 우선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앞에서도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되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뜻의 실현과 행복이 엇갈릴 수 있다는 데에 의문을 가지기 쉽다. 즉, 어떤 뜻이 성취되면 곧바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뜻을 ㉠ 외부객관 상태를 변경시키려는 뜻과 ㉡ 자신의 마음태도를 변경시키는 뜻 두 가지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행복은 사실 이 두 방향의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원만하게 성취된다. 그래서 어느 한 방향의 뜻만 성취될 때는 행복이 얻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반대로 희망을 성취 못해도 행복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희망이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진 상태를 받아들이고 만족을 얻는 자세에서 행복을 얻기도 한다. 또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또 다른 희망의 실현을 그려가고 또 그 실현을 굳게 믿을 때도 행복이 얻어진다. 한편 ㉡ 자신의 마음태도를 변경시키는 뜻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언제나 만족을 하고 감사를 느끼고 희망을 그려가고, 또 그 실현을 굳게 믿는 마음태도를 얻으려 하고 이것을 성취시켰다고 하자. 이제는 ‘행복’하지만 뜻의 실현을 못한 경우와 - 불행하지만 ‘뜻을 실현’하는 경우를 비교해보기로 하자. 생각해보면 어떤 뜻의 실현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일단 그 주체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을 주지 못하는 뜻의 실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경우 실패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그 실패가 희망의 실현보다 낫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다시 어떤 상태는 전체에 어떤 좋음을 가져다 주는가에 따라 선악의 평가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선은 이런 행복보다 우선하게 됨을 앞에서 보았다.
행복을 진리에 기초하여 함께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만일 행복과 진리가 서로 충돌될 때는 어떤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지혜롭지만[진리를 잘 알지만] ‘행복’하지 못한 경우와 - 어리석지만[진리를 잘 모르지만] ‘행복’한 경우를 비교해보자. 이를 다음의 예를 통해 살펴보자. 예를 들어 자신이 병인지 모르고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다. 또 수술을 받으러 가는데 자신은 잠깐 잠자러 가는 줄 알고 즐거워한다고 하자. 또 수술 후 흉터가 남았는데 그것에 신경쓰지 않고 또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이 문제는 개인적인 입장을 떠나면 달리 생각할 문제가 된다. 선한 뜻의 실현과 행복과의 관계는 앞에서도 보았다. 지혜 및 진리의 파악은 사실상 행복과 함께 선한 뜻의 실현에 필요하다. 그런데 선은 행복보다 우선한다. 따라서 지혜가 선의 실현에 이바지하는 경우에는 지혜가 개인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봐야 한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은 비교를 해야 한다. 지혜를 갖추면 선을 실현할 수 있는 데 불행한 경우와 - 지혜가 없어 선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지만 행복한 경우의 비교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교에서는 선이 행복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지혜가 또한 행복보다 우선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한 돼지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은 이치에 닿게 된다. 그러나 만일 지혜가 악에 이바지한다든지, 또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경우 등에서는 그 판단은 또 달리 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 지혜는 그것이 선의 실현에 필요한 요소라는 전제에서 앞에 나열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런 범위에서 지혜가 행복보다 우선한다는 결론을 취한다.
############################################ 이상은 다음의 전체적인 글의 일부입니다.無名 著, <가칭><<최상의 행복 총론>>, 목차 이 글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교정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최종 완성되기 전에 미리 여러분의 거리낌 없는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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