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최상의 요소에 대한 다른 기준들
앞에서는 선-실현-지혜-행복을 가지고 최상을 판단하였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최상을 판단하는 입장들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런 다양한 입장들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가. 선과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적 요소들
건강, 시간, 즐거움, 지혜, 지식, 아름다움, 인격, 직업, 물질적 부, 명예, 인간관계, 사랑, 결혼, 권력, 자유 ...등등의 요소는 앞에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들로 제시하였다. 다만 이렇게 제시한 수단들을 선과 행복보다 최상의 요소로 보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선과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적 요소들은 선과 행복보다 더 상위개념이 될 수 없다. 이들이 아무리 많이 실현되어도 최종적으로 선과 행복을 주지 못하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이런 수단들의 가치는 그것이 선한 행복에 얼마나 이바지 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아 평가해야 한다. 결국 이런 수단 요소들은 선과 행복의 측면에서 하위의 수단적 요소들이다. 따라서 여러 형태의 선과 행복 사이에서 우열을 측정하는데에도 다시 이들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음도 이미 보았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살폈다. 따라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나. 다른 기준들
앞에서는 최상의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선한 뜻-그 뜻의 실현-진리-행복만을 들었다. 그런데 가치를 판단하는 데는 다른 기준들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완전성, 자아실현, 신의 뜻, 신의 구원, 시간적 영원성, 열반, 해탈, 등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는 최상의 상태를 정할 수는 없는가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선 이들 가운데 몇몇은 앞의 개념에 일부 포함되는 내용이다. 또 이들은 어느 정도 그 뜻이 모호하다. 또 이들을 최상의 상태의 요소에 넣는 데 곤란한 사정이 있다. 이런 사정을 다음에서 살피기로 한다.
1) 완전성
보통 어떤 기준을 놓고 이를 전부 충족시키면 완전하다고 말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지식과 능력을 많이 갖추어야 함을 기준으로 놓고 완전을 요구하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해야 완전한 것이 된다. 또 어떤 곳이던지 존재해야만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면 편재성(遍在性)을 완전성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밖에도 무엇을 완전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그 기준은 다양하게 정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완전 불완전을 서로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게 된다. 예를 들어 100 미터에 딱 맞는 것을 요구하면, 그렇게 일치하는 것이 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는 10 미터보다 작은 것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불완전한 것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한편 어떤 조건이든지 다 응할 수 있는 상태가 돼야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야만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완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완전 불완전을 판단할 기준 자체를 미리 정하지 않고 논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는 그 기준 개념 자체가 모호한 경우도 있다. 또 기준이 어떤 절대값을 정할 수 없는 무한개념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최대로 큰 수를 완전한 수라고 정하는 경우와 같다. 산수에서 어떤 큰 수를 생각하더라도 다시 이에 더하기 1이나 곱하기 2 등은 늘 가능하다. 또 최소로 작은 수를 원해도 같다. 음수를 생각하면 빼기 1은 항상 가능하며, 양수에서는 나누기 2 등은 무한히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랜 수명, 가장 많은 돈, 가장 많은 권력, 가장 많은 영토 등과 같은 것을 완전함의 조건으로 세울 때에 이런 현상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완전함을 찾으려면 무한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일단 어떤 기준을 놓고서 이를 충족시키는 것을 완전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완전이 최상의 상태라는 것이 된다. 만일 완전의 조건이 선한 행복의 실현일 때는 완전과 선한 행복은 같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의 기준이 다른 조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장 건강하게 오래사는 것, 또는 가장 많은 부를 쌓는 것을 완전함의 조건이라고 내세울 수도 있다. 이처럼 각기 다른 기준에서 완전함을 정할 때, 그런 완전함과 선한 행복과는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인가?
우선 어떤 완전함의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렇지만, 그런 상태가 선하지도 않고 또 행복하지도 않다고 하자. 또 다른 경우로, 어떤 조건을 다 충족하지 못하여 불완전하다고 하자. 그렇지만, 그런 상태가 선하고 행복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두 경우에서 어떤 것이 나은가. 이를 생각해보면 행복과 선한 입장이 더 상위에 있다고 할 것이다. 개별주체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고 나아가 가능한 많은 주체에게 가능한 오랜 기간 행복을 가져다 주는 선이 아닐 때는 어떤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자아실현
자아실현을 삶의 목표나 교욱이나 도덕의 궁극목적, 윤리의 핵심요소로 제시하는 입장들이 있다. 여기서 자아실현[自我實現, self-realization]이란, 하나의 가능성으로 잠재된 자아(自我)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이 자아실현을 위한 자아의 잠재적 가능성의 실현과정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합리성으로 보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발휘함으로써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교 관념주의자들 가운데는 자아실현을 신의 의지가 구현(具現)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개체의 목적과 본질을 중시하는 교육사상가들은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참고: 두산백과사전]
여기서 자아(自我)란 곧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아의 실현이란, 자신의 본질,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실현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런 자아의 본질과 가능성 잠재력의 구체적 내용을 각 개인마다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모호하다. 물론 무엇이든 결과가 나타나면 그것은 자아의 잠재적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상 어떤 결과가 나타날 때 어떤 것은 자아가 실현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은 그 실현이 방해되어 나타나지 못한 상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각기 그런 것인지를 판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본질의 내용이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미리 무엇을 자아의 본질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키가 100 센티미터이고 운동을 잘하는 한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가 현재 키가 그러한 것은 자아의 본질이 실현된 결과인가? 아니면 더 클 수 있는데 영양부족 등으로 방해된 결과인가? 그 외에 또 어떤 내용들이 자아의 본질적 내용이며 또 어떤 것은 아닌가? 이런 내용을 미리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한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의 미래에 실현되야 할 자아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실 애매하다. 100억을 벌어 부자가 될 가능성이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또는 현재 가난한 상태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자아의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자아의 본질이란 개념은 모호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내용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가 어려운 것이다.
자아의 잠재력, 가능성, 본질 이런 것 등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뭐라고 제시하든 명확히 입증할 근거도 없고 또 반박할 근거도 없다. 무엇이든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보면 없는 그런 애매함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이는 모든 내용을 다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일정한 명칭이나 슬로건(slogan)으로서는 그럴 듯하다. 그러나 실제 그 구체적인 내용은 극히 모호하게 된다.
자아의 본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는 애매하기 때문에, 단순히 자신이 희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려 하기 쉽다. 왜냐 하면 자신이 자신에 대해 갖는 희망이 곧 자신의 본질이라고 믿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갖는 희망은 자아실현과는 조금 다르다. 왜냐 하면 반드시 자신의 본질내용만을 희망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질은 여러 면에서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이런 제한을 넘어 무한히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희망은 자신에 국한되지 않고 외부나 자연현상에 대해 가질 수도 있다. 여하튼 그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희망은 그것이 본질에 대한 것이든 아니든 모두 희망의 한 형태에 넣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이미 앞에서 ‘희망의 실현’이라는 항목에 넣었다. 따라서 굳이 이를 최상의 기준에 별도로 넣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편 자아실현이 되었더라도 여전히 행복한가, 선한가 등의 판단은 별도로 행할 수 있다. 물론 자아의 본질은 오직 선한 행복이어야 한다고 제한하면, 자아실현과 선한 행복은 동의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한 개인의 자아의 본질이 오로지 선한 행복으로만 구성된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자아의 본질에는 어떤 악도 포함될 수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자아의 실현을 통한 궁극의 목적을 행복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악한 행복도 포함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떤 악한 행복이 실현된 경우, 이 역시 자아실현이 된 것이기 때문에 허용해야 할 것인가도 문제된다.
다음에는 자아의 실현과 선한 행복 가운데 무엇이 더 가치있고 우선돼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앞에서도 자신의 본질의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내용이 무엇이든 어떤 내용을 자아의 본질이라고 정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제 그것이 실현된 상태에서 행복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은 상태가 있다고 하자. 반대로 그런 자신의 본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행복하고 선하기도 하다고 하자. 이 두 경우를 비교하여 보면, 여전히 뒤의 경우가 낫다. 어떤 본질이 본질로서 실현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일시적 성질이나 거짓된 성질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의미 밖에는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개별주체들에게 행복을, 더 나아가 가능한 많은 주체에게 가능한 많은 기간 행복을 가져다 주는 선한 상태가 아니면 어떤 것이 본질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과 행복을 우선시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3) 신의 뜻 구원
한편 신(神)을 믿는 입장에서는 신을 믿고 사랑하고 찬양하며 신의 명령[戒律]을 따르고 복종하고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은혜로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과 행복을 얻는 것 등을 최상의 목표로 하게 된다.
신을 전제로 한 종교에서는 구체적인 신의 형태, 수(數), 중간의 구제자나 예언자, 구제원리, 세계관, 신의 계율 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시하는가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종교가 성립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영향력이 큰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이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종교 안에는 세세한 교리의 차이로 매우 많은 분파가 있다. 또 현실에서는 이외에도 어떤 초월자를 내세우는 매우 다양한 종교 형태가 생겨날 수 있다.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 종교에서는 다음의 여러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 그런 신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생활하는가? 또 그런 신의 존재여부는 인간이 어떻게 증명하고 확인할 수 있는가. 신의 뜻은 어떻게 인간이 정확히 알 수 있는가. 신의 명령 계율 등은 과연 정말 신의 뜻이며 또 과연 선(善)과 일치하는가? 신의 계율은 인간이 만든 것은 혹 아닌가? 각 종교가 제시하는 세계관은 정말 진리인가. 예를 들어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그런 능력들을 갖는가. 세계의 창조이전에 신은 홀로 존재했는가, 신은 다른 창조자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었는가. 신은 또 다른 존재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었다면 인간은 왜 반드시 창조주가 있어야 존재하게 되었는가? 신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면 인간이 악하게 되는 것을 미리 알 수도 있고 또 미리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신은 인간을 악하게 방임하거나, 또는 창조해 놓고, 그 책임이나 과오를 신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 인간에게 묻는가. 그리고 왜 인간을 처벌하거나 구원하는가, 신이 전지전능하지는 않다면, 위 질문은 피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신은 정말 단지 인간보다 조금 우월할 뿐 전지전능하지는 못한 것인가? 그러나 단지 우월할 뿐이라면, 더 우월한 신은 없는가? 또 그가 단지 우월한 뿐이라면 그의 신적 능력도 함께 의심받아야 하지 않는가? ... 등등으로 신을 전제로 한 종교관에는 많은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여기에는 많은 종교마다 각각의 해석과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서 그 옳고 그름의 문제는 경험적인 검증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많은 주장이나 명제가 현실에서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참으로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경험되지 않는다고 하여 반드시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종교적 주장[命題]들은 대부분 이런 성격을 갖는다. 때문에, 종교는 참거짓이 검증되는 과학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믿음[信仰]의 영역에 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각 개인에게는 그런 명제들을 믿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로 될 뿐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신을 전제로 한 종교는 대부분 신을 인간보다 능력이 우월한 존재로 제시한다. 또 인간은 이런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 복종 찬양 등을 통하여 그 신으로부터 구원이나 보답을 받는 구조라는 점에서는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신은 앞에서 보듯 그 존재를 보통의 인간이 직접 경험하여 검증할 수는 없다. 이러한 신의 존재를 개인이 믿고 받아들이는 계기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을 어떤 인과관계에 의한 현상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초월적 존재인 신(神)에 의한 것이라 믿기도 한다. 또 개인에 따라서는 신의 예지(叡智)나 계시(啓示)를 직접 들었다거나, 개인적인 초월적 경험을 통해 신의 존재를 확인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박한 위험이나 질병 등에 당면할 때 이를 해결해줄 초월적인 존재를 찾고 의지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위험 등을 여하튼 극복하게 되었을 때 신에 의존했던 이들은 그것을 신의 도움이라고 믿기도 한다. 불치의 질병이 신에 기도한 후 나았다던지 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그 개인은 이를 확신해도 객관적으로 다른 이들이 이를 검증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일들에 관련된 것으로 믿는 어떤 존재를 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契機)는 그 존재가 자신보다 매우 우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다. 자신보다 뒤떨어진 능력을 갖는 존재를 자신이 믿고 복종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신이 갖춰야 할 1차적 특성은 일단 매우 뛰어난 힘 또는 지혜, 능력 등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자신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진 어떤 존재를 모두 믿고 따르기는 어렵다. 우월한 능력을 갖지만 사악한 존재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도 우월하기에 신이라고 한다면 신을 다시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선신만을 신(神)이라고 하고 우월한 악한 존재는 악마(惡魔)라고 구분해야 할 것이다. 신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든 일단 선한 우월적 존재와 악한 우월적 존재를 구분할 필요는 있다. 마치 어린이가 볼 때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은 많지만 이들 가운데는 경찰도 있고 깡패도 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는 선신과 악신으로 개념을 구분하기로 하자.
그래서 만일 우월한 존재에 선신과 악신의 구분이 있다면 자신이 어떤 우월한 존재의 도움을 받거나 만나게 되었더라도, 무조건 이를 따르려하기 전에 그 존재가 선한가 악한가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살핀 선악의 구분원리는 여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떤 힘과 지혜를 통해 가능한 다수의 생명이 가능한 오랜 기간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한다면 그는 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선하지 않은 것이다. 각 생명은 행복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런 선악판단에 다 함께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어떤 존재가 초월적 힘과 지혜를 갖지만, 그 힘과 지혜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그로 인해 다른 생명들이 모두 고통과 괴로움을 받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힘이 우월할 뿐 악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악신이 비록 능력이 우월해도 이에 복종하거나, 추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월한 존재를 의식할 때 이런 선악 판단을 하지 않거나 자신이 우월자에 비해 열등하므로 우월자의 선악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다고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저 자신보다 우월하기만 하면 그가 범죄인이거나, 경찰이거나 그저 믿고 따르려 하는 어린이와 같은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게 된다.
한편 일반적으로 신은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를 추종하면, 그에 따라 보답을 하고 구원을 준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관계에 대해서도 선악의 원리에 따라 생각을 해봐야 한다. 각 주체는 어떤 우월자가 자신에게 불행을 주면 그를 선한 구원자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반대로 각 주체는 어떤 우월자가 자신에게 특별한 이익을 주기만 하면 선한 존재라고 믿게 되기 쉽다. 자신과 신만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좋은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자신과 다른 존재들의 이익이 충돌할 때 자신의 이익만 보장되면 그것이 곧 선이라고 믿는 것과 같이 잘못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모든 생명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가를 생각하여 선악의 구분을 행해야 한다. 어떤 상태가 자신에게 오랜 기간 행복을 주기만 하면 자신의 입장에서는 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악에 쉽게 동의하고 빠지기 쉽다. 따라서 어떤 구원이 최종적으로 가능한 많은 생명에게 또 가능한 오랜 기간 행복을 주는 선하고 정의로운 구원이 아니라면 이를 거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선과 자신의 개인의 행복이 충돌할 때, 선을 선택하고 자신의 행복을 거부해야 하는 원리와 같다.
또 한편 악신의 지혜와 능력이 자신보다 월등할 때, 그런 악신이 일시적으로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악신은 자신을 계략에 이용만하고 버리는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 또 잠시간 이익을 받지만, 그 결과 다시 오랫동안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은 이익을 받더라도 그것이 전체 생명의 입장에서는 악의 실현이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조직의 두목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면, 악한 두목은 그에 따라 보답을 하게 된다. 그것은 그 두목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악하다면, 그런 도움은 결국 그 악한 두목이 악을 펼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 이런 경우 악에 협조한 자신도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 우월한 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비록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우월적 존재가 있더라도 그 존재가 과연 선한가 악한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잘못하면, 어떤 어린이가 어떤 힘센 사람의 도움을 받고 따르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악행에 이용당하고 악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경우처럼 어리석은 것이 된다.
따라서 자신이 무조건 신에 충성하고 추종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선악과 관계없이 구원을 받는 관계라면, 일단 그 신의 선악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자신의 선악과 관계없이 보답을 받는 관계는 정의와 선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가능한 다수의 생명에게 가능한 오랜 기간 행복을 주는 선과 관련되지 않는데도, 오직 자신에 대한 추종 찬양 등의 이유만으로 보답을 하는 것은 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상의 논의에서, 어떤 우월적인 존재를 정말 확인하였는가. 또 그 존재가 선한가 악한가를 구별할 수 있는가, 또 선신이 자신을 구원해 주는 데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선에 합당한가 등을 검토해야 함을 보았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신의 존재 문제와 함께 개인이 경험으로는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믿음 여부에 돌아가는 것이다.
만일 이처럼 그 참 거짓이 불분명하여, 단지 믿음과 불신(不信)의 선택문제로 돌아갈 때 우리는 어떤 방식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인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 일단 그 명제들의 참거짓은 불분명하다. 따라서 그런 선신과 악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중간 영역에서부터 검토하자. 그래서 선신이 없다면 없을 때에도 후회하지 않을 가치로운 삶을 살아가고, 선신이 있다면 있을 때도 가치로운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신의 구원까지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이 비교적 현명한 방책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다음을 생각해보자.
일단 선신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선신에 의한 구원도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 자신은 자신의 행복이 중요하고 또 여러 형태의 행복 중에서는 선한 행복이 가장 최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만을 자신이 독자적으로 추구하였다고 하자. 이럴 때 자신은 이를 통해 최상을 추구했으므로 후회할 일은 없다고 해야 한다.
한편 선신이 존재하고, 선신에 의한 구원이 있으며, 또 자신이 믿는 대상이 바로 그 선신이라고 가정하자. 이 때 단순히 오직 그런 신의 은혜로운 구원만을 기다리며 신의 명령을 따르는 행위만을 할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에 덧붙여 자신의 능력 범위에서 직접 선한 행복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어떤 쪽이 더 나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연히 신의 구원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선신이 실현할 선한 행복을 자신도 직접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따라서 어느 경우나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이와 달리 신의 구원을 찾지 않고 오직 선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경우는 어떨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만일 우월적 존재가 선신이라면, 선신은 비록 자신을 찬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더라도 어떤 주체가 선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의 선한 행복을 방해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를 키워주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우월한 존재가 인간이 선한 행복을 추구하지만, 단지 자기를 믿고 따르지 않고 찬양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거나 박해를 가한다면, 그런 존재는 바로 그런 이유로 선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단순히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도, 그 우월적 존재가 선신인 이상 또한 함께 허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어떤 가정에서도 자신이 선한 행복을 추구하여 실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신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중간영역에서 판단한 경우다.
반면 신을 믿는 입장에서는 신을 믿고 따를 때 신이 존재하면 당연히 좋고,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큰 손해는 없기 때문에 어느 경우나 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좋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단순히 마음에서 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면 이 말이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떤 신을 믿는가에 따라 매일 참배나 일정한 의식을 한다거나, 또는 선하게 쓰이는지 악하게 쓰이는지 모르면서 일정 재산을 종교 단체에 내어야 한다든지, 또는 신에 제사나 희생(犧牲)을 바쳐야 한다는 경우 등이 있게 된다. 따라서 신을 믿고 안 믿고가 단순히 아무런 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실제 이런 식의 생각은 많은 미신이나 징크스(jinx)에 마음을 얽매이게 하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검은 신발은 신으면 사고가 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는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그 믿음이 정말이면 큰 손해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신발하나 검은색으로 신지 않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가 있다. 실제로 번거로운 편지를 똑같이 기재하여 다른 사람에게 7통씩 보내지 않으면, 불운이 따른다는 식의 편지를 받을 때도 사람들은 위와 같은 근거로 그것을 따르기 쉽다. 그러나 이미 삶의 과정에서 그런 잘못된 믿음을 고려하게 되고 이에 자신을 얽매이게 하며 그 결과 정작 중요한 것을 지나치게 되는 것이 이미 큰 손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참거짓이 불분명한데도 누군가에 의해 주장되면 그것을 존중하고 다 받아들여야 한다면 온갖 미신과 모든 종교의 신들을 다 존중해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선한 행복에 이바지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면, 이를 존중하고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며 무시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 자신에게 확고한 신념이 이미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때는 그 신념을 기초로 하되 다시 선의 원리가 그런 신념과 일치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우선 그 우월적 존재가 선신인 이상 그 계율이나 명령은 일반적인 선의 원리와도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선신이 요구하는 계율이나 명령이 악의 원리이면서 그 신이 선한 신일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신이 선신인 이상 신을 찬양 기도하고 계율을 따르며 신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은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도 조화되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신을 믿고 따르는 신념과 행위가 일반적인 선의 원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일단 다음을 주의해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자신이 믿는 신이 존재하는가 또 그 존재가 선한가 악한가는 헤아리기 힘들다. 그런데 자신은 자신이 믿는 신이 존재하며 그 신이 선신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선신을 믿고 따르는 방식이 많은 다른 생명의 행복을 오랜 기간 방해하고 해치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최소한 그 범위에서는 결국 그 신과 자신이 함께 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악이 허용되는 경우는 결과적으로 보다 더 큰 선이 오직 그런 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 경우 더 큰 선이 반드시 그런 악을 통해서만 가능한가에 대한 검토를 해야 한다. 즉 다른 선한 방식으로는 그 선이 실현될 수는 없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신의 모든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그 신이 선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존재가 선신인 근거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한다. 만일 이런 검토를 충분히 하지 않고 막연히 신의 뜻이라며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악신의 계략에 이용되는 경우이거나, 자신과 자신이 믿는 신이 모두 악한 경우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자기 생각만으로 악행을 하며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한편 더 나아가 자신이 어떤 악한 행위를 하던 그 우월적 존재만 믿고 충성하고 따르고 사랑하고 찬양하면, 그 신이 그런 조건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믿음이라면, 그런 믿음은 사실 선보다는 악에 가깝다. 악신이나 악마나 현실 속의 범죄조직의 두목이나 다 그와 같은 원리로 자신의 조직을 운영할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이런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국 악한 믿음을 갖고 행위하는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는 신의 존재와 신의 구원이 선한 행복 보다 최상의 가치기준이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미 보았듯 선한 행복은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최상의 원리가 된다. 또 어떤 우월적 존재가 있더라도 그를 믿고 따르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우월한 존재라서라기 보다는 그 존재가 선한 행복을 실현해주는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능력의 우월성보다는 선한 행복의 실천여부가 더 최상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우월적 존재가 선신인 이상, 선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를 마땅히 존중하고 보답을 해줄 것이다. 따라서 선한 행복은 어느 경우나 추구해야 할 최상의 기준이 된다. 더 나아가 선한 행복을 실현하는 것과 선신의 구원은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신을 믿게 된 경우 선한 신의 구원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선한 행복을 실현하는 길에 도움되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자신에게 일시 도움이 되더라도 결과적으로 선한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우월자의 구원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한다. 자신의 악한 뜻의 실현은 자신에게 잠시는 이롭겠지만 오래 이롭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악한 뜻에 대한 우월자의 도움 또한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어떤 우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 추종 찬양 등은 그것이 선한 행복의 실현과 관련되는 범위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최상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선한 행복의 실현이라고 해야 한다.
4) 영원성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쉽게 허물어지고, 변화한다는 데에서 허무감, 무상함, 아쉬움을 느낀다. 앞에서 본 선한 상태의 실현, 행복 등과 같은 것들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무언가 좋은 것이 영원하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대할 때 어떤 것이 영원히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영원(永遠)함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게 된다.
그런데 우선 영원한 것을 찾을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현실적으로 영원히 불변하고 고정된 존재는 찾기 힘들다. 그러나 일단 영원한 것이 있다고 전제하자. 그럴 때 그것이 단지 영원한 것이기에 이를 최상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한편 영원함을 최상의 상태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최상의 상태는 현실에서 찾기 힘들고 실현하기 힘든 목표가 된다. 물론 대신 가능한 오랜 기간 지속하는 것을 차선으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영원함을 추구하면, 현실의 모든 것에 대해 그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주의 비관주의에 쉽게 빠지게 된다. 즉,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사라진다. 따라서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또 이런 전제에서는 앞에서 본 선(善), 뜻의 실현, 지혜, 행복 등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처럼 영원함을 가치있다고 보고 대신 선-뜻의 실현-지혜-행복 등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무가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이런 문제들을 여기에서 검토해보기로 한다.
가) 영원성의 개념정의와 영원성의 존재여부
영원성을 논의할 때 가장 먼저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 영원한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를 밝히려면 먼저 ‘영원함’의 개념을 정의해야 한다. 영원함의 논의에서 논자별로 영원함의 개념정의를 달리하기 때문에 혼동이 일어나기 쉽다. 따라서 영원함의 개념정의를 먼저 살피기로 한다.
우선 가장 단순히 생각하면 영원함이란 어떤 것이 전 시간대에 걸쳐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일정기간 동안에는 없더라도 나머지 시간대에 무한하게 존재하는 경우 이를 영원하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없었지만 미래로는 무한하게 존재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또 반대로 과거 방향으로는 무한하게 존재했지만 현재와 미래로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무한 개념을 영원개념에 넣을 수 있는지가 문제된다. 무한은 그것이 지속되지 않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는 점에서 전 시간대에 걸쳐 지속되는 영원과는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무한도 그 끝을 설정할 수 없이 무한히 지속되는 점에서 영원과 유사할 수 있다.
한편 영원함은 어떤 것의 ‘성질’이 전 시간대에 걸쳐 지속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대상은 여러 성질을 갖는다. 이 때 그것이 영원하려면 그것이 갖는 모든 성질이 전혀 변하지 않아야 하는가 아니면 본질적인 성질 외에는 변화해도 되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을 갑이라고 파악하게 하는 성질은 C 라고 하자. 그런데 갑이 갖는 다른 성질이 a에서 b로 변할 수 있다. 이 경우 아주 엄밀히 보면 약간의 성질이라도 변했으므로 일단 ‘a갑’이 사라지고 새로운 ‘b갑’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성질이 변하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조금 완화된 입장에서는 변화 전후에 갑을 갑으로 파악하게 하는 본질 C는 그대로이고 일부 성질만 a에서 b로 변했으므로 갑은 계속 유지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차가 노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차는 그 기간 동안 형체를 계속 유지했으므로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런 형태로 영원성을 인정할 여지도 있다.
한편 더 완화된 입장에서는 갑을 갑이라고 파악할 때 사용하는 성질을 C, D, E ..등으로 여럿 놓고 그 가운데 하나의 성질이라도 있는 채 변화하면 그것은 갑이라고 완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형체가 있을 때는 형체 때문에 계속된 것이고 형체가 바뀌어도 엔진이 계속되면 그것 때문에 여전히 그 자동차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한편 이를 더 완화시키면 어떤 것은 C가 있기 때문에 갑이고, 또 어떤 것은 그 C가 변화하거나 C와 동일하다고 볼 F가 있기에 갑이 계속된 것이라는 식으로 갑의 본질적 성질의 범위를 더 완화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처음 산 부품과 형체를 모두 바꿨지만 하나씩 바꾸는 과정동안 계속 형체와 부품이 인과관계나 동일성을 갖고 이어져 왔으므로 그 차는 계속된 것이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영원을 말할 때는 이렇게 다양하게 완화해서 이해할 수도 있다.
또 한편 어떤 성질의 계속성을 영원의 개념으로 요구할 때 그 성질 자체에 변화가 포함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쉽게 생각하면, 변화와 영원의 개념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이를 인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입장에서는 어떤 고정된 성질이 영원히 지속돼야 하는 것으로 엄격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할 때는 의외로 그 안에 이미 변화의 개념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영원히 살고 싶다’고 희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산다는 개념 자체에는 식사나 활동 등 일종의 변화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악기(樂器)가 영원히 어떤 소리를 계속 낼 수 있다면 하고 바랄 수도 있다. 이때에도 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변화다. 그래서 영원하기를 바라는 성질의 개념 자체에 이미 변화가 포함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는 어떤 변화를 하기는 하지만, 그 변화를 기초로 파악되는 특성이 기간적으로 영원히 유지되는 것을 영원성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사실 이처럼 영원의 개념을 제시하는 방안이 여럿이므로, 각 개념에 따라 영원을 파악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특히 이런 개념정의가 문제되는 것은 생명의 영원성을 논의할 때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인간은 본래 어린아이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계속하여 모습이나 내용이 달라진다. 사람을 구성하는 신체나 감각, 생각, 행위, 의식 등의 정신적 요소가 모두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실 한 사람의 일생동안 전혀 변하지 않고 지속해 온 요소를 찾으면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이를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그 기간 동안 한 주체가 계속해 존재했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서 변화 전후의 주체를 모두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는 근거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이 경우 변화전후를 하나의 자신으로 파악하는 근거를 하나의 특정한 성품이라고 제시할 수는 없다. 이 경우 사람이 변화하면서도 스스로 일정한 ‘나’라는 관념을 세우는 근거는 전후 요소들의 인과관련성, 특징의 유사 공통성, 기억에 의한 과거의 포섭관계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엄밀히는 전후로 다른 요소를 모두 모아 하나의 통일된 주체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에서 자동차의 부품이 계속 바뀌면서도 하나의 자동차로 보는 관계와 유사하다.
한편 인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할 때는 나를 파악하게 하는 요소가 단지 전 시간대에 걸쳐 고정된 상태로 계속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와 같은 삶, 즉 생활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희망을 이해해보면 삶의 변화를 인정하면서 다시 그런 변화하는 생활 자체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은 그 안에 당연히 변화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이런 변화 가운데 일정하게 유지되기를 희망하는 요소는 분명 있다. 그것은 자신을 자신의 속성으로 파악하게 하는 요소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만, 만일 이런 연속적인 변화도 하나의 주체로 이어 계속된다고 이해하면 영원에 넣을 범위는 매우 넓어진다. 대부분의 변화는 인과관계를 설정할 수 있으므로, 아무리 변화해도 영원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더욱이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죽음 이전만을 자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다른 형태로 이어져 윤회한다는 불교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동일성의 근거를 좀 더 완화하면 모든 생명은 윤회를 통해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물론 이는 불교의 주장이 진리임을 받아들이는 전제에서다. 그러나 일단 인간이 영원히 살고 싶다는 희망과 관련된 영원의 개념은 매우 완화된 영원의 개념이다.
이런 예에서처럼 무언가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성질에서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또 변화하지 않는 요소나 성질을 얼마만큼 요구하는가에 따라 영원성의 개념이 조금씩 다르게 된다.
나) 영원에 대한 증명방법
한편 위와 같이 영원함에 각기 다른 개념정의를 한다면 다시 그에 해당되는 것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각기 영원한 것이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주장이 나뉠 수 있다. 이 때 이들은 각기 주장에 대해 어떤 증명을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내용을 살펴보자.
영원함에 대해 가장 완화된 개념정의는 모든 변화에 인과관계를 인정하여 계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심지어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의 변화마저도 변화의 한 형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영원을 이해하면 변화하던 변화하지 않던 간에 또 나타나던 사라지던 간에 모든 것이 다 영원하다고 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영원과 변화함 사이의 의미 구분 자체가 없게 된다. 또 이런 의미에서는 별도로 영원을 찾는 것도 의미가 없게 된다. 거의 모든 것이 이런 의미에서는 영원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영원의 개념은 개념 자체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또 달리 완화된 영원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윤회와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윤회관념은 한 생명형태가 죽음 이후 다른 생명 형태로 바뀌며 이들간에 연속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는 변화는 변화지만 한 생명이 죽은 후 다른 생명으로 변화한다는 특수한 형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런 윤회관념은 불교나 힌두교에서 특히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윤회관념을 받아들이면, 이를 통해 생명의 영원한 지속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 물론 실제로 윤회함을 입증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우선 죽음 전후의 각기 다른 생명형태가 무엇을 근거로 하나의 주체가 연속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된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양쪽 존재가 죽고 생겨나는 과정에 있는 인과관계관련성, 또는 뒤 존재에는 어떤 형태로든 앞 존재와 공통성이나 앞 존재의 의식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등을 그 근거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 양 존재를 관찰하고 또 이들이 인과관계나 공통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등을 입증하는 것은 보통사람에게는 어렵다. 불교경전에서는 지옥이나 하늘에서의 수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다고 제시된다. 예를 들어 타화자재천과 같은 하늘에서의 수명은 9,216,000,000 년 이라고 제시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죽으면 또 다른 세계의 생명으로 윤회를 한다고 제시된다.[신수대장경 : 2-219b] 그런데 이를 관찰하려면 92억년 이상을 살면서 이들이 죽어 어디에서 태어나는가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보통 사람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다. 한편 불교에서는 이런 윤회를 끊음도 제시한다. 따라서 영원한 윤회가 항상 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다. 여하튼 이런 내용들은 초월적 존재인 붓다에 의해 관찰되고 가르쳐진 내용으로서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어떤 과학적 입증을 통해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한편 어린아이부터 노인이 돼서 죽기이전까지의 일생을 한 주체의 계속된 삶으로 보기도 한다. 일반 사람이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고 할 때는 이런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사실상 대부분 없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를 입증하는 것 자체는 쉽지 않다. 죽음은 태어남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역(演繹)되어지는 결론은 아니다.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려면 많은 기능이 원할히 작용해야 한다. 각 기관과 기능은 정상이어야 하고 매끼 식사와 배설을 하고, 죽음에 이를 사고를 당하지 않아야 하는 등 많은 조건들이 갖춰져야 한다. 이처럼 많은 조건 중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면 사람은 삶을 지속할 수 없다. 따라서 확률상 이런 조건들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갖춰질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는 적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조건으로부터 사람은 몇 년 후에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필연적으로 끌어내기는 힘들다. 따라서 사람이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연역적 논리에 의한 필연적(必然的) 추론보다는 일종의 귀납적(歸納的) 개연적(蓋然的) 추리에 근거한다. 즉, 지금까지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을 귀납해서 개연적으로 세운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 보면 지금 살고 있는 사람, 또 앞으로 태어날 사람에 대해 관찰은 아직 완전히 행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누군가 앞으로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런 주장을 완전히 깨뜨릴 입증방법을 발견하기는 곤란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주장보다는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라는 귀납적 개연성을 보다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희망은 이런 전제에서는 실현불가능에 가깝다고 이해해야 한다.
영원한 것이 있다거나 없다는 증명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개념에 따라 일부 살펴봤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하여 일반적인 경우, 영원성의 존부에 대해서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 대상이 영원한지 안 한지를 밝히려면 관찰자가 최소한 그에 버금가거나, 그를 초월한 기간동안 그 대상을 꾸준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어떤 시기에는 몇십년에서 때로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시기에 따라 변화해 간다고 제시한다. 물론 불교에서 수명이 길어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거나, 아니라거나 어느 쪽으로 증명하려면 최소한 만년은 생존하면서 관찰할 수 있어야 참거짓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단순히 이런 주장이 아니라, 영원한가 아닌가의 주장의 참거짓을 밝히려면 관찰자는 영원에 상당한 기간동안 생존해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이것이 실현 곤란함은 명백하다. 어떤 대상이 현재의 관찰에서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이 관찰된다면 최소한 그것이 전시간대에 걸쳐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로써 다른 시간 방향으로 무한하지 않다고 할 수 있거나, 또는 다른 곳에 영원한 것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어떤 것이 최소한 우리의 삶의 기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밝히기는 힘들다. 관찰 이후에 그것이 언젠가 파괴되어 사라진다는 증명도 또는 계속 유지된다는 증명도 모두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한편 여기에는 공간적인 한계도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의 짧은 관찰에서는 영원한 것을 찾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전 우주에 걸쳐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증명한 것은 아니다. 한편 자신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실험 관찰할 수는 없다. 만일 이처럼 관찰이 가능하지 않다면, 어딘가에 영원한 것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참이나 거짓 어느 쪽으로도 입증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따라서 정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주장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관찰자 자신이 짧은 시간 동안 살다가고, 또한 제한된 공간에 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있는가 없는가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로 남기 쉽다.
그러나 영원성을 어떤 고정된 현상적(現象的) 성질이 모든 시간대에 걸친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 정의하면, 어떤 직접적인 관찰을 모두 걸치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연역적(演繹的)방법으로 그런 영원성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성질(性質)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정신기관이 상대적으로 개입하여 변화과정을 통해 파악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물은 우리가 눈을 떠서 봄으로써 그 모습을 보게 된다. 소리는 귀를 대하여 듣는다. 관념은 또 이들을 기초로 인식기관으로 얻게 된다. 이처럼 모든 성질과 존재성은 우리의 감관과 인식기관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성질이 되었든 그것은 우리의 감각, 인식기관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고 또 그 관계를 떠나면 모두 사라지고 만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으로 대한 모습은 눈을 감으면 모두 사라지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만일 영원해야 할 성질을 이렇게 우리의 정신이 관계하여 파악한 내용들로 제한해 정의한다면 그런 전제에서 모든 성질들은 다 이런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비록 전 우주에 걸쳐 그리고 전 시간대에 걸쳐 일일이 관찰을 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그런 성질은 모두 감각, 인식기관이 관계할 때 나타나고 그 관계가 사라지면 역시 사라지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이든 정신이 파악할 성질은 영원할 수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감각, 인식기관과 관계하여 파악되는 성질을 근거로 정신에 그런 모습을 맺히게 한 실재대상[#]을 다시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실재대상[#]이 그 자체로 갖는 성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정신과 관계하여 우리가 감각, 인식하는 것과 같은 성질을 맺히게 해주는 실재적 성질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을 뜨면 눈앞에 꽃모습[!]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가 눈을 뜨고 감음에 관계없이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는 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또 그 실재의 꽃[#]이 갖는 실재적 성질[#]이 있지 않을 것인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추리되는 실재대상[#]의 있고 없음과 그 모습 등에 대해 생각하면 그 결론을 얻기 힘들게 된다. 왜냐 하면 우리는 실재대상[#]을 직접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감각기관과 인식기관을 통해서만 감각내용[!]과 관념내용[@]을 얻는다. 그래서 이런 정신기관을 떠나서는 어떤 내용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것이 감각, 인식기관을 떠나서 어떤 형태로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내용이나 증거도 얻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그렇게 추리되는 실재대상[#]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등등의 어떠한 판단도 단정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실재대상[#]은 이렇게 끝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된다. 이렇게 실재대상이 그에 대해 어떤 내용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공(空)하다라고 표현한다. 즉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그 내용을 어떤 언어로 나타낼 수도 없고,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또는 각 실재대상은 단일하다, 여럿이며 서로 다르다, 고정되어 있다, 변한다 등등의 어떠한 판단도 할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나타내 공(空)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없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다라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결국 실재대상에 대해 깊이 궁구하다보면 그것은 공(空)하여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만 이르게 된다. 그런 실재대상은 그 자체로서는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각 감관과 관계해서는 현상에서 우리가 얻는 색깔[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관념내용[法] 등과 같은 다양한 내용[!]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재대상[#]이 이렇게 공하여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하다 또는 영원하지 않다는 등의 어떠한 결론도 얻을 수 없는 상태가 됨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얻는 현상적 성질을 기초로 그 대상에는 그런 성질을 나타내게 하는 영원불변하고 절대적으로 고정된 실체적 존재[$]나 성질[$]이 있는가도 문제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추리를 근거로 한다. 꽃[!]을 보면 그것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또 꽃의 모습[!]은 밝은 곳에서 보거나 또는 어두운 곳에서 보면 그 모습이 각기 달라진다. 색안경을 쓰거나 벗어도 그렇다. 또 눈 이외에 코로 맡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할 때도 각기 다른 내용을 준다. 그렇게 꽃은 매번 일시적이며 각기 다른 모습을 준다. 그렇지만 또 한편 그 꽃은 조금씩은 다르지만, 오늘 보아도 또 내일 보아도 일정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추리를 하게 된다. 즉, 우리가 대하는 현상(現象)은 매번 변하고 다른 거짓된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그 현상의 뒷면이나 그 안에 꽃의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본체(本體)[$]가 있기 때문이라고 추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본체[$]라는 개념을 정하고 그에 일치되는 내용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이 때의 본체[實體]는 영원 불변 고정된 내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 하면 그것이 만일 또 다시 일시적이고 변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감각기관이나 인식기관으로 얻은 성질과 질(質)적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은 굳이 찾아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본체[$]를 영원 불변 고정된 내용으로 정하고 그런 본체에 해당한 것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본체는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연역을 통해서 밝힐 수 있다. 우선 그런 본체가 있다면, 그 개념정의에 따라 그런 본체는 감관과 상대하여 변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그렇게 본체를 정의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본체가 우리의 감관이나 인식기관과 상대하여 변화한다면 본체의 개념정의와 위배되는 것이다. 한편 만일 이 우주 어딘가에 어떤 조그마한 본체라도 있다면, 그 개념에 요구한 절대적 영원성, 불변 고정성 때문에, 나머지 다른 모든 영역도 이와 관계하여 절대적으로 영원하고 불변 고정되어야 한다. 만일 다른 영역의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변하게 되면, 그에 따라 앞에 정의한 본체 부분도 상대적으로 변화한 것으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잠시간이나마 또 아주 조그마한 영역에서나마 현상의 성질을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반대로 아주 조그마한 부분에서도 본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앞의 사실이 이런 연역적 추론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이런 본체적 성질을 자성(自性)이라고 표현하고 그런 자성은 없다고 제시한다.[無自性] 또 자기 자신에 있어서 이런 불변하는 본체[實體]를 아(我)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그런 아(我)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교는 제시한다.[無我] 결국 불교는 일체에 무아, 무자성이라는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실재(實在)의 모습이 공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감관을 떠나서 있다고 추리되는 실재의 모습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등을 단정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영원불변 고정된 실체적 존재는 없다[無]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결국 불교에서는 현상적 모습[!]에는 영원함이 없음[無常], 실재내용[#]은 공함[空], 영원불변한 실체[$]는 없음[無自性, 無我]를 모든 일체의 존재에 공통적으로 관련된 진리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실재대상[#]의 공함과 실체[$]의 존부 등에 대해서는 현상의 진리론에서 자세히 논하게 된다. 따라서 그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상 영원이란 개념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각기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시간대에 걸쳐 고정된 현상적(現象的) 성질로서의 영원함은 부정(否定)될 수 있다. 그러나 성질의 의미를 실재적 성질 또는 변화에 기초한 성질 등으로 정하거나 영원성의 개념을 한 시간 방향으로의 무한성 등을 의미한다고 달리 설정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각 개념에 따라 다르지만, 영원성의 존부는 일일이 입증하여 단정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영원한 것이 있는가 없는가와 관계없이 우리는 영원함에 대한 희망을 계속 가질 수 있다. 자신의 관념적인 희망과 일치하는 현실을 끝내 실현할 수 있든 없든 희망은 계속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희망은 그것을 갖는 한 우리 삶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 된다. 이하에서는 일단 관념적으로 영원함을 정하고 추구할 때 과연 그런 영원함이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또 한편 영원하지 않다고 하면 반대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무시해야 하는가의 문제도 함께 살펴본다.
다) 영원함의 가치문제
영원함의 존재 가능성 여부를 떠나, 어떤 것이 단지 영원하기만 하면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는가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질병이나, 불구와 같은 것이 영원하게 ‘나쁨’을 준다면, 어떨 것인가. 영원함 여부를 최상의 가치의 기준으로 두면, 이 경우에도 영원하기 때문에 가치를 둬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영원함을 단지 그것이 영원하다고 하여 좋다고 할 수는 없게 된다.
영원에 가치를 두는 것은 우리가 좋다고 느낀 것이, 계속되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에 그것이 오래오래 머무르게 되기를 바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즉, 영원함이 가치를 갖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우선 어떤 좋은 것이 짧게 지속되고 사라진다. 그래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쉬움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어떤 좋은 것이 많이 또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또 더 나아가 그것이 영원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런 영원함은 얻어지지 않는다. 단지 오래 지속되는 것도 매우 드물게 얻을 수 있다. 그것이 드문 만큼 그 가치는 올라간다. 따라서 얻어지지 않는 영원함에 대해서는 매우 높은 가치를 설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영원함을 바라는 희망대로 어떤 좋은 것이 무한하거나, 더 나아가 전 시간대에 걸쳐 완전하게 영원하게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실제 그렇게 된다고 가정할 때 그것에 대해 계속해서 좋게 느낄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물론 우리 자신은 현실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또 어떤 영원한 대상도 쉽게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실제 실험을 통해서 결론을 얻을 수는 없다.
특히 영원성의 개념을 고정된 성질의 시간적 지속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현실에서 이런 상태에 계속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가까운 상태로 우리가 잠시간이라도 어떤 상태로 고정된 자세로 있게 되면 우리는 시간이 감에 따라 많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어떤 삶의 형태에 한해 그것이 계속 유지되어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완화하여 보더라도 어떤 상태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오래 지속될 때 그것이 계속 좋음을 줄지는 의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는 있다. 일단 가정하여 어떤 상태가 영원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그에 대한 가치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본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것이 일시적일 경우보다 더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상태가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함, 일시적임, 많음, 적음 등과 가치의 관계는 이렇게 단순하게 제시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의 좋고 나쁨은 반드시 이런 시간적 지속성, 수량의 많고 적음하고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갖는 특성, 그리고 그를 대하는 주체의 상황 등이 함께 화합하여 좋고 나쁨을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독(毒)이나 고통과 같은 것은 아무리 적고 일시적이더라도 그 적다는 사실만으로 좋게 평가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또 한편 이들도 이를 갈구할 만한 특수한 상황의 사람에게는 좋음을 주기도 한다. 한편 꽃이나 즐거움이 많고 오래 지속된다고 하여 일반적으로 싫음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그것이 싫음을 주는 경우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한편 어떤 상태가 계속될 때 그것이 주는 느낌은 계속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시간적 지속성에 따라 좋고 나쁨을 느끼는 관계도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어떤 것은 오래 지속됨으로써 계속 더 좋아지는 것도 있다. 또는 반대로 처음에는 좋았던 것이 싫어지는 경우도 있다.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지만 사람마다 살아가며 이런 변화를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향기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이 계속됨에 따라 더 좋아질 수도 있다. 반면 어떤 음식은 처음에는 좋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계속 이를 대하다보면 이들이 다시 싫어지게 변하기도 한다. 또는 어떤 음악은 처음에는 좋다가 또 그 후에는 싫어지다가 또 계속 들으면 다시 좋아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 관계는 쉽게 유형화할 수 없다. 단지 구체적인 상황에서 각 주체와 대상과 각 시기 각 상황에서 이들이 화합함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을 주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일반적으로만 평가하면, 어떤 것이나 그것이 흔하게 대할 수 있게 되면 그 가치가 그만큼 낮게 평가되기 쉽다고는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양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가치를 발휘하는 반대 예도 예상할 수 있다. 또 어떤 것이 영원하게 되어도 상대적으로 여전히 다른 것에 비해 드물게 얻어진다면 상대적인 가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흔하게 대할 수 있게 되면 일반적으로 그에 대한 가치감은 적어진다고 볼 수 있다. 물이나 음식이 금보다 낮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선한 행복과 같은 좋음을 주는 상태가 계속될 때도 마찬가지다. 선한 행복을 주는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좋은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다. 일단 어떤 상태가 인과관계상 최종적으로 좋음을 많이 줄 때 그것을 곧 선과 행복을 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 자체가 오래 지속하거나 영원하게 되면 과연 다시 좋음을 최종적으로 많이 주게 될 것인가는 앞에서 본 사유로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어떤 상태가 계속 유지됨에 따라 좋고 나쁨이 일률적이지 않음만을 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어떤 좋음의 느낌이 다시 영원하게 되면 어떠할까를 살펴보자. 실제 좋음만 계속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는 일단 문제 삼지 않기로 하자. 그래서 단순히 이론상 각 순간에 걸쳐 좋음만 계속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에는 이론상 가장 좋은 상태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좋음은 나쁨과의 교차 변화나 비교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실제로 마음에서 좋음만 계속해서 느끼는 것은 힘들다. 따라서 이런 가정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일단 어떤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기 쉽다. 마치 하얀 벽면을 오래 보고 있으면 나중에는 멍해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것과 같다. 그 결과 그것에 대해 느끼던 가치감도 잃어버리게 되기 쉽다. 마치 손과 발은 사실 좋은 것임에도 그것은 보통 늘 있다. 때문에 평소에는 이들에 대해 그다지 좋음을 느끼지 못한 채 생활한다. 그러나 손과 발에 부상을 입은 뒤 낫게 되면 매우 기뻐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실 우리가 어떤 것에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변화를 통해 일시적으로 주어지고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예들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원함이 실현된다고 가정하면, 좋은 것이 영원하기를 바랬던 우리의 원래 희망과는 관계없이 곧 좋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 이러함에도 어떤 좋은 것이 영원함에 대한 희망과 가치감은 통상 꾸준히 유지되기 쉽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 영원함이 앞과 같은 가정과는 달리 사실상 얻어지지 않는 상태로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영원함의 희망이 실현된다면 앞의 가정처럼 가치가 떨어지거나 오히려 불쾌함을 주고, 더 나아가 이제는 반대로 영원함을 바라지 않고 빨리 사라지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원함은 얻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계속 바라게 되고 그 희망은 실현되지 않는 채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역으로 영원함이라는 관념은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 상태로 이념상 머무른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영원함도 그것이 얻어지고 흔하게 되면, 반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나쁨만 영원히 얻게 되는 경우를 영원하기 때문에 좋다고 할 수 없음은 이미 보았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무조건 영원이 최고의 가치라고는 할 수 없다. 영원함이 가치를 갖는 것은 어떤 것이 영원하여 최종적으로 좋음을 가장 많이 주는 경우로 제한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영원함보다는 좋음이 더 상위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결국 영원성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다. 또 같은 근거로 잠깐 동안만 있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도 그것이 전체적으로 좋음을 가장 많이 줄 때는 그것이 오히려 가치를 더 갖는다고 해야 한다.
영원함보다는 좋음이 더 상위에 있는 가치임을 보았지만, 이제 결론적으로 선(善), 행복 등과 영원함 가운데 어떤 것이 더 가치를 갖는가를 비교해보자. 좋음이 양적 질적 기간적으로 조화있게 주어지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가능한 다수 주체에게 가능한 장기간 좋음을 가져다 주는 상태를 선(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과 행복이 결과적으로 영원함보다 가치 있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상태들을 비교하여 살펴보자.
선한 행복이 가능한 영원에 가깝게 유지된다면 물론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들이 서로 모순될 때 어느 것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좋지 않은 불행한 상태가 영원한 것과, 좋은 행복한 상태가 일시적인 상태를 비교해보자. 이 경우에 그것이 비록 일시적이라도 좋은 행복한 상태가 더 낫다고 본다.
또 악한 상태가 영원한 것과, 선한 상태가 잠시간 지속되는 것을 비교해보자. 이 경우에도 뒤의 것이 더 낫다. 따라서 영원함보다는 좋음, 행복, 선 등이 더 상위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좋음이 모여 쌓인 선이 가장 상위의 가치를 갖는다. 결국 선, 선한 뜻의 실현, 지혜, 행복이 영원성보다는 우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열반, 해탈
가) 불교의 궁극적 목적상태
불교가 제시하는 목적상태에는 다양한 내용이 있다. 불교도가 갖는 네 가지 큰 서원[四弘誓願]에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는 것 등이 있다. 한편 불교의 최종목적 상태로는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 열반(涅槃, nirvana), 해탈(解脫)을 들기도 한다. 여기서 열반이란 본래 불어 끈다는 뜻을 갖는다. 곧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아주 없애서,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 bodhi)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또 해탈이란 번뇌에 묶인 미혹(迷惑)의 고통에서 풀려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탐욕 성냄 등의 번뇌를 없애는 것을 심해탈(心解脫), 지혜에 의하여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혜해탈(慧解脫)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열반과 해탈은 불교의 수행 실천의 궁극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나) 사홍서원과의 관계
그런데 이들과 선-뜻의 실현-진리-행복 등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먼저 사홍서원 가운데 중생을 제도(濟度)하여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게 함은 가능한 많은 생명을 오랜기간 행복하게 만들고 그리고 각 생명이 선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드는 선(善)의 개념에 넣어 이해할 수 있다. 또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것과 같게 볼 수 있다. 또 법문을 배움은 진리를 파악함과 같게 볼 수 있다.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는 것은 앞의 세 덕목이 완성에 이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앞에서 제시한 모든 뜻이 실현 완성됨과 동일시할 수 있다.
한편 해탈이나 열반이 번뇌에서의 벗어남, 진리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도 결국 앞의 내용에 포함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범위에서 이들은 본서에서 제시하는 최상의 상태 선-뜻의 실현-진리-행복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열반 해탈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입장도 있다. 그리고 윤회를 끊는다는 목적상태는 선한 행복의 실현과는 일단 동떨어진 측면이 있다. 이들이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 윤회를 끊음과의 관계
우선 불교에서는 특별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 즉, 모든 생명[衆生]은 하늘,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6 가지 세계에서 끝없는 윤회(輪廻)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 수행의 최종상태에서는 이러한 윤회를 끊음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먼저 중생은 생전, 사후에 윤회의 과정을 정말 거치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윤회한다면, 왜 다시 태어나 살아가는 것 자체를 끊으려 하는가? 그냥 계속 그렇게 살아가면서 가장 좋은 상태로 계속 바꿔 태어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할 수 없는가? 또 윤회를 끊으면, 그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또 본래 윤회를 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라면, 어떻게 그 윤회를 끊는 것이 가능한가? 또 그 방법은 무엇인가? ...등이다.
사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경험을 통해 실증해 제시할 길은 막연하다. 왜냐 하면 보통의 사람이 하늘, 아수라, 아귀, 지옥이란 세계에 걸쳐 어떤 생명의 생전과 사후 양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또 그 관계를 반복 실험해보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회를 하는지 또 어떻게 윤회를 끊을 수 있는지 여부는 종교적 믿음의 문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모든 생명이 윤회를 한다는 것은 어떤 생명체가 한 번의 생애를 마친 이후에 또 다른 생명 형태로 삶을 계속해서 이어감을 의미한다. 물론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한다. 그런데 윤회의 주장은 이런 변화 가운데에서도 생사에 걸친 특수한 변화를 의미한다. 즉, 생명 형태는 죽어서 또 다른 생명 형태로만 변화함을 주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물질의 단순한 변화와는 차이가 난다. 또 일반 물질에서 생명이 만들어지고 생명이 죽으면 단순히 다시 일반 물질로 돌아간다는 생각과도 다른 주장이 된다.
생명의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는 또 다른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후 영혼이 신으로부터 심판받아 영생의 천국 생활 아니면 지옥생활을 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또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한 번 태어나 죽으면 그것으로 전부이며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 있다. 또 다른 여러 주장들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에서 어떤 것이 참일까?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이 끝없이 바뀌어 감을 알 수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새 물질을 흡수하고 기존 물질을 배설하면서 끝없이 물질이 변화한다. 그러다 생명이 죽으면 이런 작용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분해되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이가 죽은 후 그로부터 이어진 또 다른 세계의 또 다른 생명체를 우리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보통 경험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변화의 내용은 이 정도다.
그런데 일단 이와는 별도로 또 다른 세계의 생명으로 윤회한다면, 이전의 생명체에서의 무엇이 어떻게 이어진다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앞에서 관찰된 물질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 과거의 감각이나, 생각, 작용, 분별과 같은 정신내용 자체가 이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엄밀히 보면 육체나 정신요소는 한 생에 있어서도 고정되지 않는다.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과 정신적 요소로서 감각, 생각, 작용, 분별 등은 예를 들어 유아기 청,장,노년기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느 한 요소도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생에 있어서는 우선 육체나 정신은 앞 시기와 뒤 시기에 걸쳐 인과관계상 연결되어 있다. 또 전후기에 걸쳐 유사하고 공통적인 면도 찾을 수 있다. 또 한편 후기의 육체와 정신은 전기의 일부 특징이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년기나 청년기 때의 과정은 노년기의 모습을 만드는 원인들로 이해된다. 또 이들 각 시기의 모습은 어느 정도 유사하다. 또 노년기에는 그 이전 시점의 일들에 대한 기억들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유아기 청,장,노년기의 일생을 하나의 개체의 변화로 이어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생명이 윤회를 한다면, 앞 생과 뒷 생에 걸쳐 어떤 관계로 이를 이어줄 수 있을 것인가? 인과관계, 유사 공통성, 일부요소의 포함 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윤회 전후의 각 생명체 사이에서 어떤 연결 관계가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된다. 그런데 불교의 유식학파에서는 전생의 삶과 후생의 삶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상속(相續)으로 해석한다. 아뢰야식의 개념은 현실세계의 모습을 일으키는 원인요소[種子]를 안에 포함하여 현실의 모습을 변화해 일으키며, 나타난 현실의 모습에 애착을 갖고, 또 현실에서 일어난 결과를 담아 놓는 일종의 미분화된 잠재적 정신체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학파에 따라 아뢰야식 대신에 유분식(有分識), 보특가라(補特伽羅) 등을 이런 요소로 내세우기도 한다. 다만 이런 요소가 실제로 존재하며 작용하는가 또 이런 요소에 의해 전 후생이 계속 이어지는가, 또 전생의 요소와 후생의 요소의 소멸 발생이 서로 인과관계에 있는가, 등등은 일반적인 관찰로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생명이 모두 윤회를 한다면, 현재의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그것을 이미 오랜 기간 경험해왔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의 생애에서의 모습이나 감각이나 생각, 작용, 분별의식내용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 물론 3 년 전에 한 식사의 내용이 오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여 3 년 전에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사람이 전생의 어떤 과거도 떠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과거의 삶을 연결해 찾을 근거를 발견하기 힘든 것이다.
다만 불교수행의 한 방법인 선정(禪靜)을 깊이 들면 이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거나, 또는 오늘날 최면(催眠)을 통하여 이런 전생을 의식할 수 있다거나, 또는 어떤 초월자나 부처 등은 타 주체의 전 후생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런 당사자의 주관적 경험으로 될 수는 있지만 널리 일반인의 객관적 검증 대상이 되기는 힘들다. 따라서 불교가 제시한 많은 내용이 과학적 철학적 기초를 갖지만, 경험을 통하여 확인할 수 없는 육도윤회등의 내용은 일반인에게는 결국 종교적 믿음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다만, 윤회를 한다고 받아들일 때, 왜 윤회를 끊은 상태가 최종목적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도 의문이 된다. 일반인은 보통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여타의 종교에서도 신의 구원은 행복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윤회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비록 죽음으로 끝나지만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일 모든 생명이 윤회를 한다면, 비록 죽음과 새로운 출생이 반복되지만,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은 어느 정도 성취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렇게 계속해 이어지는 삶을 이미 모든 생명의 현실에 주어져 있는 것으로 놓는다. 그리고 이제 반대로 생(生)의 연속이라 할 수 있는 그 윤회를 끊는 것을 목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선뜻 불교의 목적이 이해가 가지 않게 된다.
우선 불교가 제시하는 6도 윤회관은 다음과 같다. 아귀나 지옥 축생에 태어나는 원인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집착, 악행 등이다. 또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은 선한 뜻과 말과 행위다. 그리고 하늘에 태어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 행복을 누리며 산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불교는 선업(善業)을 쌓아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삶에도 죽음이 있으며, 죽은 후에는 다시 업에 따라 윤회를 한다고 제시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진정한 최종목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 많은 하늘 가운데 하나인 화락천(化樂天)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인간의 8백 년은 화락천의 하루낮 하룻밤이다. 이와 같이 30일을 한 달, 열 두 달을 1년으로 하여, 화락천의 수명은 8천 년이다. [800*30*12*8000=2,304,000,000년] 그런데,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거기서 목숨을 마치면 지옥·축생·아귀 속에 난다. 그러나 많이 들은 성인의 제자는 거기서 목숨을 마치더라도 지옥·축생·아귀 속에는 나지 않느니라." [신수장경 : 2-219b] 이런 설명을 통해 보면 마치 인간의 수명이 세균과 같다면 하늘의 수명은 인간의 수명과 같이 길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비록 죽어서 다시 윤회를 거듭하더라도 무려 23억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하늘에서 한 번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궁극적 목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왜 불교에서는 이를 목적으로 제시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가능한 해석으로는 다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무리 하늘에서의 행복의 시간이 길더라도 윤회를 끝내 끊지 못하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윤회과정에 필연적으로 생노병사의 괴로움이 따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윤회를 하는 이상 지옥 아귀 축생의 상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윤회를 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예 윤회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윤회를 끊으면 나쁜 고통을 겪지 않지만 좋은 즐거움도 함께 끊어야 한다. 그래서 고통이 없는 점에서는 긍정적 가치를 갖지만, 반대로 즐거움이 없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 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오직 좋은 것만 계속 누리며 윤회를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계속 좋은 상태로만 윤회를 할 수는 없지만,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괴로움을 끊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에 윤회를 끊으려 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윤회를 끊으면 어떤 상태로 되는가가 의문이 될 수 있다. 윤회를 끊었다고 제시되는 아라한(阿羅漢)이나 여래(如來)는 윤회를 끊은 이후 특히 죽은 이후 어떤 상태로 되는가. 윤회는 이번 생을 마치고 다른 생으로 이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단 표현으로만 추리해 본다면, 윤회를 끊음은 생을 마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경우로는 우선 어떤 생명이 계속해 살고 죽지 않아 다른 생명체로 변해 태어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삶이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석존이 스스로 윤회를 끊었다고 하지만, 그나 다른 아라한이나 모두 죽었다. 따라서 최소한 불교에서 이런 형태로 윤회를 끊음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죽어 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경우는 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생명체가 죽은 후 단순히 물질상태만 남을 뿐 다시 생명체로 태어나는 그 무엇을 남기지 않는 경우다. 이런 상태는 우선 현실에서 바위나 물[水]과 같은 무생물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생명체가 아니므로 처음부터 윤회를 하는 주체에서는 제외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만일 이전에는 생명체였고 윤회를 했던 존재의 자취라고 가정하면, 지금 이런 무생물체 상태만 남고 다시 다른 생명체로 되는 무엇[영혼 등]이 없음은 윤회를 끊은 상태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실 일반 물질은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일단 무생명체의 상태는 그런 목적이 성취된 것과 같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윤회를 끊은 상태는 번뇌도 없고 ‘깨달음도 갖춰진’ 어떤 궁극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단순히 바위나 물처럼 무생물체의 상태를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무생물체처럼 생명활동은 이어지지 않지만, 여타의 무생물체와는 구분되는 깨달음을 갖춘 제 3의 상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래나 아라한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다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옳은 답이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불교경전에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옳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음 내용이 나온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5가지 요소<물질, 감각, 생각, 작용, 분별의식[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5 온(蘊)>는 항상되지 않다.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거기서 나와 다른 나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색,수,상,행,식은 각기 여래가 아니다. 색,수,상,행,식을 떠나서 여래가 없다. 색,수,상,행,식 안에 여래가 없다. 여래 안에 색,수,상,행,식이 없다. 그와 같이....여래가 본 법은 진실하다.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데에 머무르는 것처럼, 무엇이 있어 주장하는 것도 없다.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열반을 깨닫는다....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 염마경 1-123 신수장경 2-30C / 잡아함경 1-130, 신수대장경 2-32C /]
그러나 앞에서 설한 항상되지 않음, 괴로움, 실체적 내가 없음, 그리고 색수상행식과 어떤 주체와의 관계 등은 모든 생명 주체에게 공통된 사항으로 붓다에 의해 제시된 내용이다. 즉, 그것은 윤회를 끊은 여래나 아라한에게만 특수한 사항이 아니다. 만일 윤회를 끊음이 단지 이런 의미라면 그것은 모든 생명체도 이미 다 같다. 따라서 윤회를 끊음이 이런 의미라면 모든 생명체가 다 그러한 것이 된다. 그래서 윤회를 끊음은 결국 일반 생명체가 윤회를 끊지 못한 상태와 근본적인 질적 차이는 없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단지 그 공통된 사항에 대해 범부는 이를 알지 못하고 여래는 이를 깨달았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한편 이외에도 석존 당시에 여래[=붓다]가 사후에 존속하는가, 존속하지 않는가 등의 질문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석존은 직접 대답을 하지 않은 것[無記]으로 전해진다. 대답을 안함은 사후 존속한다거나 존속하지 않는다는 어느 쪽으로도 해석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과연 사후에 여래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석존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단지 이렇게 답을 하지 않은 이유로는 그것은 이치와 맞지 않고 법과 맞지 않으며, 또 깨끗한 행[梵行]이 아니어서 지혜로 나아가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아함경 3-408 신수장경 1-804a 전유경(箭喩經)]
또 마하가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여래가 후세에 나고 죽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형상이 되는 것이요, 만일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형상이 되는 것이다. 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든가. 혹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형상이 되는 것이다. 여래는 형상이 이미 다하고 마음이 잘 해탈하였다. 그러므로 후세의 나고 죽음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옳지 않고, 후세의 나고 죽음이 없다거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거나, 또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옳지 않다. 여래는 형상이 이미 다하고 마음이 잘 해탈하여, 매우 깊고 넓고 크며 한량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적멸이요 열반이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 2-404 신수장경 : 2-226a 등]
여하튼 석존이 윤회를 끊은 상태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더 이상 명확한 내용을 찾을 길은 없다. 결국 이 상태는 직접 윤회를 끊어보지 않는 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의문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윤회를 끊음의 상태는 약간은 신비한 수수께끼처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로 불교의 최종목적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단순한 상상적 해석만이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여지도 있다. 사실상 부처나 아라한이 되어도 일반 생명처럼 윤회는 한다. 그러나 윤회과정에 실체적인 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이런 깨달음을 갖추면 사실상 윤회를 계속 해도 윤회의 고통은 끊어진 것이라고 이해할 여지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자신의 실체 없음[無我] 등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모든 생명체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사항이다. 또 한편 어린이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윤회를 한다거나 자신에게 영원한 실체가 있다는 의식 자체가 원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끊어야 할 실체나 윤회의 관념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윤회를 알려주고 다시 윤회를 계속하는 실체적인 나의 관념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을 불어 넣는 것은 오히려 번거로운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편 윤회를 끊음이 목적상태가 된다고 하자. 그런데 한편 윤회는 생명의 자연적인 법칙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자연스런 법칙을 거슬러 윤회를 끊을 수 있는 것인가도 의문이다. 윤회가 자연적인 법칙이라면 생-노-병-사_ 그리고 또 다른 생명체로의 생-노-병-사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계속된 과정에서 이 자연스런 과정을 거슬러서 어느 한 부분을 끊어야 윤회가 끊어질 것이다. 다만 윤회를 끊어야 함을 제시한 석존도 현생에서의 죽음이전에 죽음의 단계를 끊어[즉 죽지 않아서] 윤회를 끊지는 않는다. 따라서 일단 현생에서 생-노-병-사의 과정은 받아들이고, 단지 다음 단계에서 새로운 생-노-병-사로 이어짐을 끊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한편 윤회를 끊는 방안으로 불교에서 제시하는 방안은 결국 불교의 여러 수행방법이 된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 윤회를 끊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는 윤회가 있는가의 문제와 함께 역시 종교적 믿음의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한편 불교 경전에서는 석존 이후 다음에 부처가 되는 이로 미륵을 들고 있다. 그런데 미륵이 붓다가 되는 데는 단 1번의 생애와 함께 약 56억7천만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시간은 정말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붓다가 되리라고 석존으로부터 예언되는 이들이 붓다가 되는 시간으로 보통 몇 겁(劫)의 세월과 수없는 윤회의 반복을 요한다고 제시되어 있다. 사실 겁(劫)의 세월은 산수로서는 그 숫자를 제시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림을 의미한다. 이런 것을 받아들이면 보통사람의 기준에서 100 년의 삶 안에 달성할 목표로 윤회를 끊는 것을 제시하기는 사실상 힘들게 된다. 물론 긍정적으로 보면 불교의 입장이 윤회를 끊는 것이 불가능함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내용들은 보통사람에게는 한 생애 또는 1, 2회의 윤회를 통해서는 윤회를 끊는다는 것이 ‘거의’ 실현불가능함을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사실 불교가 윤회와 관련하여 제시한 설명과 목적 그리고 그 실천방안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윤회를 정말 하는 건지 또 윤회를 끊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확실히 알기 힘들다. 따라서 윤회를 끊음을 목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일단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먼저 윤회를 한다, 안 한다, 윤회를 끊지 않으면 -게 된다. 끊으면 -하게 된다. 윤회를 끊을 수 있다, 없다, 윤회를 끊는다, 끊지 않고 계속 윤회를 한다 등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무엇이 더 나은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 때 그 답은 결국 선과 행복을 기준으로 하여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윤회를 끊는 것이 좋다면 그것이 좋은 이유는 바로 선한 행복의 실현 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윤회를 끊는 것이 선과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단지 생사의 반복의 고통만을 피해 윤회를 끊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선-뜻의 실현-진리-행복에 이들을 모두 포함시켜 이해하여도 무방하다고 볼 것이다. 즉, 선 행복을 기준으로 그것이 선, 행복에 도움 된다면, 윤회를 끊고 안 끊고의 희망을 세워 실현을 하면 되리라 본다.
실제로 대승불교에서는 수행이 깊어 이미 부처가 될 수 있으나, 생명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보살의 상태로 계속해 남는 존재가 나타난다. 이들은 모든 생명이 부처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먼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결국 이들의 이념은 선한 행복을 모든 중생이 이루기 전까지는 윤회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계속하겠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보살은 윤회를 끊어 개인적인 안락을 얻는 것보다는 선의 실현에 우선을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선한 행복의 실현은 윤회를 끊음보다 우선해야 할 가치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라) 불교의 무상(無常) 무아 공 등의 일반 진리개념과 선한 행복
한편 불교에서는 일체에 적용되는 진리사항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한다. 먼저 감각[!]과 관념[@] 언어[%]의 현상(現象)적인 차원에서 일체 모든 것은 그 영원성이 얻어지지 않는다고 한다.[諸行無常]. 그런데 이런 현상에는 그 현상을 일으키는 영원불변 고정된 실체[$]가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렇게 실체의 존부를 문제삼는 차원에서는 모든 것에는 영원불변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한다.[無自性] 그리고 생명에도 자아의 실체는 없다고 한다.[諸法無我] 또 어떤 대상이 우리의 감각과 관념을 통해 파악되는 것과 별개로 그 자체의 실재적인 면[#]은 어떤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렇게 실재의 내용을 찾는 차원에서는 다시 그런 실재내용은 얻을 수 없으며 공(空)하다라고 한다. 즉, 그 실재(實在)는 실체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실재내용은 있다-없다, 이다-아니다, 같다- 다르다 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다[一切皆空]고 한다.
여기서 다양한 차원들이 논의되고 있다. 이를 잠깐 살피기로 한다. 우선 꽃을 생각해보자. 이 꽃에 대해 다양한 차원의 논의가 가능하다. 우리는 꽃을 보고[감각차원!] 눈을 감은 뒤 꽃의 모습을 관념으로 떠올릴 수 있다[관념차원@] 한편 이들을 꽃이라 부른다[언어차원%] 그리고 눈을 뜨거나 감거나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꽃의 모습을 보이게 한 실재하는 꽃[실재내용#]을 추리할 수 있다. 또 이와는 별개로 꽃을 일정하게 꽃으로 나타나게 하는 영원불변고정된 실체로서의 꽃[실체$]도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꽃이라는 언어[%]로 함께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차원의 내용이므로, 각기 다른 기호[!.@.#.$.%]로 표시한 것이다.
여기서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앞의 영원성 문제에서도 일부 살폈다. 여기서는 이런 주장들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는다. 여기서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경우, 이런 판단들이 우리의 삶의 목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살피기로 한다.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이며 공(空)하다는 이 말은 옳을 수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이런 진리의 내용을 깨닫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며, 부처가 되거나 아라한이 되기 위해 깨달아야할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런 진리는 선하거나 행복하거나, 또는 악하거나 불행하거나 모든 현상에 평등하게 적용된다. 그런데 이런 진리를 깨닫는 것을 강조하다보면, 때로 선 악 행복 불행 등을 차별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비약(飛躍)되기 쉽다. 실제로 불교 몇몇 종파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본 평등성이 근거가 된다. 즉, 악한 것이거나 선한 것이거나, 그것은 모두 함께 무상하고, 무아이고, 또 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자칫 모든 것이 평등하게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므로 아무렇게나 행위하고 선택해도 된다는 주장으로 흐르기 쉽다.
사실 이런 잘못된 판단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뤄질 수 있다. 우선 부처와 같은 상태를 목적으로 추구한다. 처음부터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을 실현 목표로 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이미 현실에 있는 진리내용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를 목표로 한다면, 현실의 어떤 것이든 그런 조건을 다 충족하므로 무엇이든 거림낌없이 다 선택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무런 선택기준이 없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 보다는 다음과 같은 논리 과정을 거친다. 먼저 부처나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부처나 깨달음이나 일반 악인이나 어리석은 상태나 모두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인 점은 같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부처나 일반 악인이나 이점에서는 평등하다. 따라서 굳이 특별히 부처가 되는 것은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런 잘못된 결론을 얻기 쉽게 된다.
그러나 일단 부처나 어떤 수행 목표는 그것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기 때문에 부처나 수행 목표로 제시된 것이 아니란 점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그런 특성 때문에 어떤 존재가 부처나 목표로 제시되었다면, 거기에 해당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물론 부처나 어떤 수행목표가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의 특성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처나 수행목표는 그 외에도 다른 특성을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라는 진리와 선악에 대한 깨달음, 번뇌를 벗어남, 중생을 제도함과 같은 특성이 그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음, 탐욕, 성냄에 집착함, 악행에 빠짐 등과 같은 특성과 차별된 것이다. 또 이런 차별적 특성 때문에, 부처나 목표가 제시된 것이며, 공통적 특성인 무상, 무자성, 무아, 공 등의 특성 때문에 이들이 제시된 것이 아닌 것이다.
한편 불교의 이런 진리에 대한 주장은 모든 대상이 공통적으로 갖는 진리를 제시할 때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공통된 성질을 제시할 때 그것들은 물론 모두 평등해진다. 예를 들어 ‘경찰관이나 도둑은 각기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인간’이다’는 말처럼 공통성을 제시하면 같은 측면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살인하거나, 폭행하거나, 훔치거나, 또는 반대로 사람을 살리거나, 돕거나, 남에게 물건을 베풀어 주거나 이들 모두는 영원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며 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라는 것과 그 중 어떤 것이 가치있고 선하며 어떤 것을 추구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만일 공통성과 평등성에 기초해 판단하면 어떤 선택이나, 의사결정을 하기 어렵게 된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라는 사실을 같지만, 그 중 어떤 것은 좋음을 주고 어떤 것은 나쁨을 주며 더 나아가 어떤 것은 가능한 많은 주체에게 오랜 기간 좋음을 주고 어떤 것은 반대로 가능한 많은 주체에게 오랜 기간 나쁨을 준다. 그리고 이런 차별성에 기초하여 행복, 불행, 선, 악의 구분이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치판단, 의사결정을 할 때는 각 행위나 대상이 갖는 차별성에 기초해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노란 색이나 푸른 색이나 흰색이나 모두 색이라는 점에서는 평등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에서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싫다는 차별적인 판단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방의 색을 칠할 때는 같은 색이지만 어떤 색으로 칠해햐 가장 좋은 느낌을 받게 되는가를 판단하여 선택하는 것이다. 또 사람을 살리고 베풀어주거나 또는 살인 도둑질 등이 다 같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살인 도둑질하는 것이 무방하고 괜찮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모두 진리의 측면에서는 같이 무상, 무자성, 무아, 공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선악을 차별적으로 판단하여 선한 것을 선택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택과정에서 가치판단을 하는 문제와 모든 현상에 대해 공통된 진리를 파악하는 문제를 혼동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든 현상이 다 무상하고, 무자성, 무아이며, 공하지만,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 선한 행복을 실천하는 것인가를 고려하여 선택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최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역시 선-뜻의 실현-진리-행복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6) 결론
이상, 보통 최고의 가치로 거론될 수 있는 요소들로 완전성, 자아실현, 신의 구원, 시간적 영원성, 열반, 해탈, 윤회의 끊음, 무상, 무아, 공의 깨달음 등을 나열해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사회적 정의 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의는 선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를 선(善)에 넣어 이해하고 별도로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이들 내용들은 어떤 경우에는 선한 행복과 같은 내용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이 선한 행복을 의미하지 않을 때는 최종적으로 선한 행복이 더 상위에 놓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이들 각 목표는 잘못된 내용으로 흐르기 쉽다. 선한 행복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 이들 목표가 초래하는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완전성은 무의미한 기준 충족에 불과하게 된다. 또 자아실현은 무의미하거나 악한 본질의 실현이 될 수 있다. 또 신의 구원은 악한 우월자인 악신에 의한 악한 구원이 될 수 있다. 또 영원성은 무의미하거나 악한 불행상태의 시간적 지속에 불과할 수 있다. 또 윤회를 끊음도 단순히 무의미한 생의 단절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이들이 목적으로 제시될 때에도 다시 그 내용들이 그 보다 상위개념인 선한 행복으로 보충되고 통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무의미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