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상의 가치

- 아름다운 선의 실현 




●행복한 생존보다 

더 가치 있는 상태는 없는가? 

- 아름답고 선한 행복



행복한 생존을 

보통 중요시한다. 


이는 각 개인 입장에서는 

생존과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한 생존만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절대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를 생각해보자. 


우선 한 사람이 얻는 행복은 

형태가 다양하다. 


극단적인 두 경우만 비교하자. 


우선 자기 행복을 얻는 과정에서 

많은 다른 생명에게 

악과 고통 두려움을 주는 

악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역사상 

어떤 침략자가 

침략과 약탈을 통해 뜻을 이루고 

행복을 얻었다면, 

이런 행복을 

이런 경우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자기 행복을 얻는 과정에서 

다른 많은 생명에게 

아름다운 선과 

만족, 희망, 행복 등을 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나 붓다의 행복과 같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경우가 더 나은 행복인가. 


당연히 뒤의 경우가 더 낫다. 


만일 이 두 경우에서 

각기 

동일한 만족과 행복을 얻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행복의 점에서만은 

이들은 서로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가치는 서로 다르다. 


그 각각의 삶으로 인해 

다른 생명들이 

얼마나 선해지고 행복을 얻었는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개인적으로 

행복을 

모두 동일하게 얻었다면, 


그 가운데 가장 최상의 상태는 

가능한 가장 많은 생명에게 

가장 높은 질로  

가장 많은 양의 

아름답고 선한 행복을 


가장 오랜 기간 

가져다 준 이의 행복이 

가장 최상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가치는 

바로 

이런 행복의 상태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예수나 붓다가 얻는 

이런 행복을 

막강한 침략자들이 얻는 행복과 

구별해 표현한다고 하자. 


그러면, 예수나 붓다의 행복은 

아름답고 선한 행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침략자가 

살상과 노략질, 

강간, 노예의 획득, 승리 등을 통해 

얻은 행복은 


악한 행복이라 구별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선한 행복은 

다른 행복보다 낫다. 







그런데 이런 

아름답고 선한 행복의 

뜻을 갖는 경우에도 


다시, 

이를 잘 실현하는 경우와 

끝내 잘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 경우에서, 


선을 실현해내는 것이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보다 

더 나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아름다운 선을 

잘 실현하기 위해서는 

깊고 많은 지혜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아름다운 선을 실현하더라도 

그것을 지혜롭게 

잘 실현하는 경우와 


지혜롭지 못하게 

실현하는 경우를 

나눠 볼 수 있다. 


선을 실현하지만, 

지혜롭지 못하게 

실현하는 경우는 


비록 어떤 노력으로 

선한 결과는 나타나지만, 

들어간 시간과 노력 

또 그로 인해 

누군가 받게 되는 고통이 

다른 방법보다 

더 많은 형태로 

실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선을 

지혜롭게 잘 실현했다함은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보다 큰 선한 결과를 

얻어내는 방안을 알아내 

지혜롭게 잘 

실현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한 뜻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행해나가는 것을 

가장 나은 삶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들 가운데 

다시 조금 더 우열을 나눈다면, 


이제 지혜롭고 행복하게 

실현시킨 선의 결과가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경우를 

보다 더 나은 상태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어떤 목적을 정해 

살아가야 한다면, 


비록 그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여도 


낮고 천한 목표가 아닌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따라서 아래서는 

이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아름다움








● 최상의 가치 

- 아름답고 선한 행복



단순히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은 것을 

쫒아 가지 말고 


무엇이 가장 좋고 좋은 것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해 따라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음을 많이 주는 것이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모두 좋고 


지금 좋고, 

나중 좋고 

오래 오래 좋고 


이리 보아 좋고, 

저리 보아 좋고 

두루두루 좋고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은 것을 쫒아 나가면, 


잠깐의 좋음을 얻더라도 

그 잠깐의 좋음을 징검다리 삼아 


그 외 모든 다른 부분에서 

길고 길게 나쁨을 

얻게 되는 길을 

걸어가기 쉽다. 


그리고 

가장 좋고 좋은 것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좋고 좋은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게 실현해나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는 

좋고 좋고 좋은 것을 

단순히 좋은 것과 구별하여 

아름답고 선한 행복이라고 

표현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름답고 선한 행복을 

이루려면 


먼저 무엇이 

단순한 좋음이고 


무엇이 

아름답고 선한 좋음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선에 대해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좋음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생명이 각기 

제각각 다양한 형태로 

생명을 유지해 살아가면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세상과 사물을 대하게 된다. 


그런데 그 각 생명이 

일정 대상을 대하여 

최종적으로 얻어 

느껴 갖게 되는 감정은 


결국 좋거나 

또는 나쁘거나, 

또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느낌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각 생명이 

무엇을 좋다고 하고 

싫다고 하는가는 

각 생명 각 상황별로 다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한 때 무언가를 좋아해도 

상황이 달라지면 

그 느낌은 달라진다. 


또 하나의 같은 사물도 

누가 대하는가에 따라 

각기 좋고 나뻐함이 달라지게 된다. 


마치 하나의 음식을 놓고 

방금 식사를 마친 이가 대할 때와 

3 일을 굶은 이가 대하는 경우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좋음은 

어떤 외부사물에 

절대적으로 고정돼 결정되어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주체의 상황에 따라 

그 값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편 주체의 상황이 일정해도 

외부 대상에 따라 

좋고 나쁨은 또 달라진다. 


따라서 오직 주체만이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결국 좋음은 

주체와 외부 대상이 서로 화합해 

그 때 그 때 그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게 된다. 


마치 종이와 불이 화합해 

새로 연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또 이쪽 손바닥과 

저쪽 손바닥에 

모두 소리가 들어 있지만, 

두 손바닥을 부딪히면 

소리가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각 생명이 느끼는 좋음과 나쁨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외부대상과 주체의 마음상태가 

그 때 그 때 화합해 

그 주체의 마음 안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화합해 

각 생명의 마음 안에 나타나는 

이런 좋음 또는 나쁨의 느낌이 

바로 행복과 선악을 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 


그리고 선악 및 

행복 불행의 가장 기초가 되는 

좋음과 나쁨이 변하고 유동적이므로 


선과 행복의 구체적인 내용도 

그 때 그 때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선의 판단의 어려움의 이유 


좋음과 선의 판단이 어려운 것은 

바로 다음의 어려움 때문이다. 


즉, 각 주체가 얻는 

좋음과 나쁨이 

획일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주체별로, 대상별로, 시기별로 

매우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는 

사정 때문이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를 들어 

내게 지금 좋은 것은 

내게 나중에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경우와 같다. 


또 내게 나중에 좋음을 주는 것은 

내게 지금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병 치료를 위해 

먹게 되는 쓴 약과 같다. 


또 나에게 좋은 것은 

다른 이에게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자신이 기분 좋다고 

노래 부르는 것과 

같은 경우다. 


또 다른 이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친구와 신나게 떠들고 싶은데 

이를 참고 

조용히 있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모두’에게 ‘어느 경우나’ 

좋음을 주는 경우를 

생각하기 힘들다. 



만일 ‘모두에게’ ‘언제나’ 

오로지 ‘좋음’만을 주는 것이 있다면 

이를 선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만일 무언가가 정말 이와 같다면 

이를 나쁘다거나 악하다고 할 

근거자체를 찾기 힘들게 된다. 


또 반대로 모두에게 

언제나 나쁨만을 주는 것이 있다면 

이를 악이라고 하는 것도 쉽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이를 완전한 선, 

완전한 악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찾기 힘들다. 


현실에는 좋고 나쁨이 

주체와 사정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뒤섞인다. 


따라서 

무엇이 선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런 사정 때문에 

주체, 시기, 입장 상황 따라 

서로 달리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그 결과 선악에 

많은 혼돈과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결국 주체와 시기 입장 따라 

좋고 나쁨이 

서로 엇갈려 달리 느낀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선악판단이 엇갈리는 사례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과거 역사를 보면 

자신을 반대하는 

반대파를 학살하고 

주변 약소국가를 침략 정복한 

이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정의라고 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상대가 

극악하다고 주장 한다. 


한편 그렇게 힘이 약한 상태에서 

강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지내던 이들이 


상황이 바뀌어 

자신이 강대해지면, 


그들 역시 

또 다른 반대파나 

다른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다시 그런 그들이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입장 따라 다른 

이런 주장들 가운데 

누가 옳은가? 


이런 엇갈린 선악판단을 

모든 생명과 관련해 살피면 

훨씬 복잡해진다. 


좋고 나쁨을 느끼는 주체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비록 지능이 떨어져도 


모두 각기 

좋은 것을 추구하고 

싫은 것을 피하며 살아간다. 


개미와 같은 아주 작은 벌레 

한 마리만을 자세히 관찰해도 

이들은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해 움직이고 

싫은 것을 피해 움직인다. 



그것은 지혜가 많다고 

스스로 여기는 

인간의 행동 원리와 

하등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단지 그 뜻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이들 생명체보다 

조금 더 교묘하고 복잡한 

지혜를 이용한다. 


그래서 

스스로 이들보다는 

좀 더 나은 존재라고 

자부하는 데 지나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보다 못한 생명은 

마치 자신을 위해서 

오직 희생되어야만 하는 

하등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쉽게 여긴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은 

매년 수천만 마리의 

소나 돼지 양을 

살해하여 음식으로 먹는다. 


인간은 이런 살생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희생된 

소나 돼지의 생명은 

그 가치를 고려해볼 

필요성조차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생명만을 

우주보다 소중한 

가치 있는 것으로 집착한다. 


그러나 

만일 소나 돼지 양들에게 

이를 묻는다면 

그들도 자신의 생명은 

똑같이 우주보다 

가치 있다고 할 것이고 

이런 인간의 살생을 

악으로 여길 것이다. 





강자가 

자신의 반대파나 

힘 약한 타국국민의 생명을 

고려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으로 여기듯, 


그들 약자는 약자대로 또한 

자신보다 힘이 약한 

다른 약자들에 대해 

그와 같이 생각하고, 


인간은 또한 

다른 동식물을 

그와 같이 쉽게 여긴다. 


이들 모두 

자신들의 

생명과 행복을 절대시하면서 

그를 얻기 위해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래서 

결국 따지고 보면 

이들의 악함은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다지 큰 차이는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들 각자는 

또한 자신의 선함과 정의로움 

정당성과 

자신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래서 

바로 이런 점이 

선악판단에 혼동을 주게 된다. 



예를 들어 

강자는 

자신의 반대파들이 

사회에서 저지르는 악을 비난하고, 

이들을 제거해야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며, 


그런 반대파의 학살이나 

제거 탄압 등이 

정의롭고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많은 잘못된 편견과 


지배자 자신만이 

정의라는 독선(獨善) 


또는 자신만이 

신의 뜻을 대신하여 

정의를 펼친다는 식의 

잘못된 종교적 믿음 등도 

때로는 작용한다. 



또 한편 인간은 

동식물은 지혜가 적어 

좋고 나쁨도 

일체 느끼지 못하는 

일반 물질과 다름없는 

하등하고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또는 이들 동식물은 

신이 단지 인간의 삶을 위해 

제공해 준 감사한 물건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근거든 

강자의 입장에서 펴는 주장은 

모두 다시 그들의 행위가 

선하고 정당한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단지 그 피해자들이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선악은 

입장 따라 엇갈릴 수 있다. 


이는 가장 근본적으로는 

어떤 하나의 상황이 

모두에게 똑같이 좋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좋음과 나쁨이 엇갈리면 

입장과 시기 상황 따라 

선악을 서로 달리 판단하게 된다. 






동일한 하나의 상황에서 

좋음을 얻는 쪽은 

그것을 선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반대로 나쁨을 얻는 쪽은 

악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래서 견해가 대립하여 

투쟁이 계속된다. 









● 선의 기준으로 

힘의 우위를 주장하는 입장



그러면 선악은 

결코 정할 수 없는가. 


만일 단지 힘이 센 쪽 입장이 

선이라고 하자. 


그러면, 

사람은 동물보다 강하고 

과거 역사상 침략자들은 

늘 침략과 학살을 당한 

당시의 약자들보다 강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선하고 정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오늘날 

어떤 강도나 폭력배처럼 

힘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 모두도 

그가 힘이 강하여 뜻을 실현시킨다면, 

단지 그것만으로 

그들을 다 선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힘의 강함만으로 

선의 근거를 삼을 때는 

최고선의 존재로 

가장 힘이 강한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힘과 지혜가 

아주 초월적으로 우월한 

절대적 존재를 추리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종교가 

자신들이 믿는 신을 

그런 절대적 존재로 제시해왔다. 


그리고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길은 없어도 


그 절대적 존재의 뜻을 

선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각 종교의 

신앙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신이 

바로 그런 존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의 우위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대한 검토





그런데 이런 전지전능한 

절대적 존재를 전제로 

선을 판단하려 할 때는 

이론상 많은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우선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하고 

그의 뜻이 곧 선이라면, 

앞의 사례에서 힘이 강하지만 

악한 사례로 든 것들 

모두 악이라고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이미 실현된 내용들은 

모두 그 절대적 존재에 의한 

실현이거나 


아니면 

그가 적극적으로 허용하거나 

또는 그가 방임하여 

실현된 내용들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 존재가 

그런 사실을 몰라서 막지 못했다면, 

그의 지혜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또 한편 알았지만, 

막을 지혜와 힘이 부족하여 

그 일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면, 

또 다시 그의 힘의 절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결국 절대적 존재를 

전제로 할 때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취해야만 한다. 


우선 일어난 일에 대해 

절대자의 숨겨진 뜻과 계획이 

어떤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일체를 알고 

또 그 실현을 막으려면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는데도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절대자에 의해 

허용되거나 

아니면 그 절대자의 뜻이 

적극적으로 실현된 내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절대자의 뜻이 

선하다고 이해하는 이상 

나타난 모든 일들은 

다 선하다고 이해해야 된다. 


그래서 이런 전제에서 

선을 판단할 때는 

일단 실현된 내용은 

일체 그것을 악이라고 

비난할 근거가 없게 된다. 

 


그 절대적 존재를 

부르는 명칭이 다르지만, 

이런 절대적 존재를 

주장하는 종교는 

세계에 매우 다양하게 있다. 


그런데 

그 종교의 창시자나 

신봉자가 

다른 종교의 

신봉자나 권력가에 의해 

박해박거나 살해당한 일도 

역사 안에 많이 있다. 


이 뿐 아니라,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선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나 학살 폭행은 

수없이 세상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앞의 전제에서는 

이 모두를 

그 절대자가 허용하거나 


아니면 

절대자가 

자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결과로 

이해하고 

그 모두를 선하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스스로 

선에 대해 많은 논리적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완벽한 전지전능을 

전제로 하면 

이런 결론은 피할 수 없다. 





만일 그 존재가 

인간보다는 조금 우월하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고 

단순히 강한 존재에 불과하다면 

이런 결론만은 피할 수 있다. 


즉 이런 경우라면 

일어난 일들 가운데 

그 초월적 존재의 뜻과 맞지 않아 

악한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존재가 많이 알고 강하지만, 

사실 그 부분은 잘 몰랐거나, 

그 일을 막으려고는 했지만 

그 때는 조금 악마보다 

지혜와 힘이 부족하여 

막지 못했다고 이해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이해하면 

그 초월적 존재의 절대성은 

부정된다. 


그리고 그 존재의 뜻이 

절대적 최고선이라는 

사실도 부정되고 만다. 


왜냐 하면 그 보다 

더 지혜 있고 힘센 존재를 추리해 

그 존재가 갖는 뜻을 

최고선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따르는 이가 

절대적 존재가 아니면, 

그의 뜻을 맹종해 따르는 것을 

무조건 선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보다 

힘세다는 이유로 

악을 거부하지 않고 

그 악을 좇아 악을 행한 일로 

다른 존재들로부터는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과 자신이 따랐던 그 존재는 

모두 함께 보다 

더 강한 존재로부터 

그것을 이유로 

함께 처벌받을 운명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힘을 기준으로 한 

선의 문제에서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존재가 


가장 강력하여 

전지전능하고 

두루 존재하는 편재의 존재가 

되지 않으면 


이런 위험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전지전능하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편재(遍在)한 존재가 있다고 

전제하면, 


앞에서 본 것처럼 

일어난 모든 일은 

다 선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문제점이 나타나게 된다. 



더 나아가 

만일 이처럼 

지혜와 힘만이 선의 기준이라면 

또 다음 문제가 있다. 


만일 그 힘이 

모든 생명들의 힘을 능가한다면, 

그 뜻이 실현되어 

좋음을 얻는 주체가 

단 하나에 불과하고 

나머지 모든 생명은 

그로 인해 고통 받아도 

그의 뜻을 곧 선이라 해야 한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힘이 강한 존재의 뜻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좋고 나쁨과 관계없이 

그의 뜻을 곧 선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다. 


사실 이렇게 

힘의 우월함에서 

선의 기준을 찾을 때는, 


어떤 존재가 

너무나 위대하고 강력하므로 

그의 뜻은 곧 선이고 

따라서 감히 그의 뜻을 거역하여 

고통을 당하지 말고 

따라야만 한다고 강요받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결국 선은 

자신이 원하지는 않지만, 

강자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통을 당하므로, 

억지로 참고 

그 뜻을 실현해야만 한다는 

노예의 의무의 원리로 

선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경우는 

힘이 강한 쪽에 서서 바라볼 때만 

좋음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다. 


단순히 그 강자의 뜻이 실현될 때 

강자의 좋음을 위해 

고통과 피해를 받는 생명들은 

모두 이를 나쁘게 느끼고 

이를 악이라 하고 

그를 악마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의 우위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대한 검토 2



한편 여기에는 

다음 문제가 또 제기된다.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인정하면, 

우선 일어난 결과는 

그것이 절대자의 뜻이며 

선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의 옹호자가 

가장 곤혹스럽게 되는 것은 

현실에서 자신과 반대의 뜻들이 

실현되는 경우다. 


이런 상황에서는 

현실과 반대의 뜻을 갖는 자신이 

마치 악마 추종자처럼 

취급받기 쉽다. 


그러나 대부분 

이런 믿음을 가진 이는 

일어난 결과는 

모두 절대자의 뜻이며 

섭리에 의한 내용이며 

자신의 뜻도 언젠가는 

끝내 실현되리라는 믿음도 

함께 잃지 않는다. 


또 그 모두가 절대자의 뜻이며 

선이라고 쉽게 

받아들이는 심리를 만든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다음이다. 


우선 인간은 

절대적 존재가 정말 존재하는지부터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다. 


또 비록 존재해도 

그의 뜻이 구체적인 경우에 

정확히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각 개인은 절대자가 아니다. 

또한 절대자의 뜻을 알아낼 힘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뜻을 세우는 과정에서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미리 자신의 뜻이 

절대자의 뜻에 맞고 허용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물론 이미 실현된 결과에 대해서는 

그것이 절대자의 뜻이라고 믿고 

그렇게 

절대자의 뜻을 확인해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각 개인은 

우선 자기 개인의 뜻과 

욕심을 갖는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욕심을 마음껏 추구하고 

그것이 실현되면 

이를 곧 절대자의 뜻으로 

믿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실현되는 내용은 

곧 절대자의 뜻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만일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막으려면 언제나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어떤 뜻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곧 절대자의 뜻이라고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자신의 생각 자체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전지전능한 존재가 

막지 않는 

자신의 생각과 희망들은 

곧 절대자의 뜻에 맞고 

허용된다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뜻과 욕심이 

곧 절대자의 뜻과 같다는 

광신적인 믿음까지 

갖는 이들도 있다. 





한편 자신의 정신이 

다른 초월적인 영적 존재와 

교류하고 

그 뜻을 이해해 받아들인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계시나 꿈 암시 등이 

그런 교류방법으로 제시된다. 



사실 이런 주장들의 문제는 

그들이 교류하는 존재가 

과연 절대적 존재이고 

선한 존재인가, 


또 그가 이해해 받아들인 내용이 

과연 절대자의 뜻과 일치하는가? 


그 명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개인적으로 갖는 

상상적 내용과 

절대자의 뜻은 어떻게 다른가, 

등등의 의문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제 3자가 명확히 

알아낼 도리는 전혀 없다. 


단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이를 믿거나 말거나의 문제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절대자를 믿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식에 머무르는 

여러 내용 가운데 

무엇이 절대자의 뜻이나 명령이며 

계시고 

어떤 부분이 자신만의 생각이며 

상상인지를 

명확히 구분할 도리가 없다. 





○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의 우위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대한 검토 3



사실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할 때는, 

각 개인에게 고유한 의사 결정능력과 

자유 영역이 있다는 주장자체가 

처음부터 이론상 모순을 일으킨다. 



그것은 자유의사 영역만큼 

절대자의 힘이 미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영역에서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하면서 

또 한편 

개인의 자유 영역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모든 개인의 의사, 행위, 결과를 

다 절대자의 뜻의 실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 있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는 

부득이 일정 부분을 

절대자의 뜻이 개입되지 않은 

개인의 자유 영역으로 

설정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명백히 악인이 꾀한 

악한 일과 같은 경우다. 


그래서 그것은 

절대자의 뜻이 아니며 

개인의 자유의사의 실현결과며 

또한 개인의 책임영역이라고 

제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절대자의 힘이 미치지 않는 

악인의 자유 영역과 힘도 

함께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그 자유의사자체를 

절대자가 부여했으므로 

절대성은 훼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영역을 

절대자가 부여했다면 

그 범위안의 결과 또한 

최종적으로는 절대자의 뜻이며 

책임인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 


최초의 그런 자유의 부여자체가 

절대자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할 때는 

이런 어려운 이론적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여하튼 절대자를 받아들이는 한편 

자유의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다음의 어려움에 처한다. 


즉 자신의 마음 안에 

머무르는 여러 생각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절대자의 뜻이며 

어떤 것은 자신의 뜻이며 

어떤 것은 악마의 뜻인가 하는 

내심의 분열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나름대로 자신은 

잘 그것을 구분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기준이 

모호하고 불투명하다. 


따라서 구체적인 경우에 

혼돈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런 믿음을 갖는 

이들 사이에서도 

여러 유형과 경로를 통해 

절대자의 뜻으로 생각하는 내용을 

서로 다르게 주장하게 된다. 


만일 이들의 믿음이 다 옳다고 하면, 

이들 여러 다른 내용들은 

절대자의 뜻이 분열되었거나, 

절대자의 다른 뜻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이들 서로가 견해가 

대립될 때는 

이들 각자는 

모두 자신이 절대자의 선한 뜻을 

추종하고 있으며 

상대는 악마의 추종자라고 

믿고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 3자의 입장에서는 

깊은 혼돈에 빠져들게 된다. 


왜냐 하면 이들 모두가 

다 그와 같이 믿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정말 옳은가 

그리고 무엇이 

절대자의 확고한 뜻이고 

선의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나름대로 

이런 확신을 갖는 이들이 

대립된 주장을 기초로 

서로 싸움을 일으키는 경우다. 


역사상에는 

이런 절대적 존재를 믿는 

많은 종교집단 사이에서 

서로 다른 믿음을 이유로 

전쟁과 살생을 한 경우가 

많이 있어왔다. 


이 때 쌍방은 

서로 제각기 신의 뜻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도 누구의 주장이 

옳고 선한가는 

역시 많은 혼돈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렇게 

절대적 존재에 대한 판단이 

서로 달라 충돌할 때는 

마땅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들의 서로 상반된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옳고 절대자의 뜻인가는 

그들 간의 대립에서 

누가 승리하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 승패가 

그 때 그 때 엇갈린다. 


그래서 만일 절대자의 뜻이 개입해 

승패가 오락가락하는 것이라면, 

절대자의 뜻도 

그처럼 여러 갈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그러나 설령  

어떤 일방이 완전히 승리해도 

패배자는 결코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의 승리는 

악마의 일시적 승리에 불과하거나 

자신에 대한 

절대자의 믿음의 시험이며 

또한 최후의 승리는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믿음을 계속 갖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관찰해보면 

수많은 종교들 사이에서 

서로간의 대립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고 

승패도 일정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예로, 

예루살렘 성지를 놓고 다퉜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자군전쟁과 같은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몇 번 기독교도가 

성지를 차지했지만 

이후 이슬람교가 승리하여 

오랜 기간 이슬람교의 영역에 

성지가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이후 기독교 진영에서 

이슬람교의 믿음이 

진정 절대자의 뜻이며 

자신들의 믿음은 

악마의 믿음이라고 승인한 경우는 

거의 없다. 



또 오늘날 기독교가 

이슬람교보다 

물질적 세력이 우세하다하여 

반대로 이슬람교 신봉자가 

기독교가 

진정 절대자의 뜻에 부합하며 

자신들의 믿음은 

악마의 믿음이라고 승인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외에도 오늘날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과 같은 

세계의 대표적 종교의 

각 종파들뿐만 아니라 

기타 절대자를 전제로 하여 

믿음을 일으키는 


많은 소수 종교 종파 및 

이를 기초로 한 

정치 사회 세력 간에서 

이런 대립 양상은 

끝없이 나타난다. 


그들 집단은 

때로는 서로 박해도 당하고 

교주마저 상대 세력에 의해 

처형당하는 사태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신념체계는 

각 집단 간에 계속 쉬지 않고 

이어지며 

대립을 계속하게 된다. 


그 결과 최종적인 문제는 

이들 서로 상반된 주장 가운데 

무엇이 진정 절대자의 뜻이며 

선인가의 궁극적인 의문에 대해 

확고한 해결을 못보고 

의문은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로 

단순히 힘이 강하다거나, 

뜻이 실현되어졌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곧 선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 선악의 기준으로 다수 주체의 행복의 양을 문제 삼는 입장




사실 힘의 강약은 

서로 뜻이 대립해 다툴 때 

어느 쪽의 뜻이 실현되는가를 

정해준다. 


그러나 뜻이 실현된다고 

그것을 곧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선은 무엇인가. 


이는 단순하게 

다음처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모든 주체에게’ 

‘언제나’ 

좋음만을 주는 경우를 

완전한 선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에서 본 사정 때문이다. 


즉 주체에 따라, 

상황 따라, 

좋음을 

달리 느낀다는 사정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이는 싫어하고, 

지금 좋은 어떤 것은 

나중에 나쁜 내용을 주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정이 

완전한 좋음과 선을 

세우기 힘들게 만드는 근본 이유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일단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 가운데 

완전한 선에 가까운 쪽을 

찾을 수는 있다. 


또 그 반대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가능한 것들 가운데, 

완전한 선에 가까운 것을 

선한 쪽이라 하고, 


반대로 완전한 악에 가까운 것을 

악한 쪽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 가운데 

완전한 선에 가까운 내용을 

선택해가는 것을 

현실적 선이라 할 수 있다. 


즉 과정과 결과에서 

각 생명이 가장 많은 좋음을 

얻는 쪽이 

현실적 선이다. 



그리고 이들 가능성 가운데 

누군가 어느 하나를 선택했다고 

반드시 

뜻한 대로 

그 결과를 이뤄낸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결과 

어느 경우는 

선한 쪽의 뜻이 실현되지 못하고 

대신 악한 뜻이 

실현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실현되지 못한 뜻이 

더 선하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 의도하는 내용이 

완전한 선에 보다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예수가 반대자들에 잡혀 

죽음을 당한 경우 


그를 죽여 

당장 뜻을 실현시킨 이들보다 

죽음을 당한 예수가 

더 선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고자 한 

뜻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여러 주체가 

가진 뜻 가운데 

무엇이 선한가는 

누가 힘이 더 세고 

누구의 뜻이 당장 실현되어지는가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누구의 뜻이 

모든 생명에게 

좋음을 가장 많이 

가장 오래 주게 만드는 길인가가 

선악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선의 기준으로 

다수 주체의 행복의 양을 

문제 삼는 입장의 문제점



그러나 사실 어떤 것이 

그런 것인가를 

이론상 엄밀하게 판단하는 것은 

역시 어렵다. 

 

우선 한 주체가 

선택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 일을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현실은 

실현되어 나타나는 일만 보여주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실현되어 나타나지 않는 일들이 

과연 시도할 수 있었던 일이고 

또 시도했으면 

이룰 수 있었던 일인가는 

모두 이론상 의문으로 남게 된다. 


또 선택가능한 일로 

생각되는 것들에서 

장차 나타날 결과를 

모두 예측하고 비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 앞으로 나타날 결과에서 

각 생명이 얼마만큼 

좋고 나쁨을 얻는가를 

일일이 계산하는 것도 어렵다. 


따라서 엄밀하게 

무엇이 현실적 선인지를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위 원칙을 기준으로 삼으면,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로 

생각되는 것들 가운데 

비교적 선한 방향으로 

선택해갈 수는 있다. 


그것은 

엄밀하게 정확하지 않아도 

비교적 선에 가까운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음을 뜻한다.  







● 삶에서 의존하는 선의 기준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먼저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로 

생각되는 것 가운데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각 생명의 

현재와 미래에서의 

좋고 나쁨을 고려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가장 많은 좋음을 얻을 방향을 

선택한다. 


그래서 이렇게 

매 순간 선택해나가는 자세를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 선은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많은 이에게 

가장 높고 많은 좋음을 

가장 오랫동안 줄 

가능성이 있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선택하는 것은 

선이고 

그 반대를 선택하는 것은 

악이라 할 수 있다. 







● 삶에서 의존하는 

선의 기준의 재검토  



현실적 선을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많은 이에게 

가장 높고 많은 좋음을 

가장 오랫동안 줄 

가능성이 있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다시 다음 문제가 있다. 


우선 각 주체가 

자신 및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 친구, 사회, 

동류집단(인종, 민족, 인간)과 

그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주체를 

모두 평등하게 고려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양 1000 마리를 죽이면 

자신 가족 10 명이 살고, 

양 1000 마리를 살리면 

자신 가족 10 명이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 과연 이를 

행복과 고통을 느끼는 주체의 수와 

그 행복의 양과 질 기간만을 

단순히 비교하여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가이다.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미생물, 세균, 벌레 등으로 확대하여 

생각해보자. 


그러면 각 주체는 

이런 단순한 평등한 

비교의 입장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한 주체는 

늘 우주 전체보다 

자신과 가족의 생명, 이익만을 

우선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우주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는 보통의 경우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행복을 

전 생명의 그것보다 우선함은 

모든 생명들이 거의 다 같다. 


그래서 

입장 따라 선과 악의 판단이 

혼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서로 대립 경쟁 투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힘이 강한 쪽의 뜻이 

실현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가장 좋은가는 

현실에서 누가 힘이 강하며 

누구의 뜻이 실현되는가와 

별개의 문제이다. 


그보다는 어느 쪽의 뜻이 실현돼야 

가장 많은 주체에게 

좋음이 더 많이 오래 주어지는가의 

판단문제인 것이다. 


또 그래서 누구의 뜻이 

실현되어야 

마땅한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선의 판단에서는 

그 힘의 강약을 떠나, 

좋음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주체를 

평등하게 고려하게 된다. 


또 그들이 어느 상태에서 

가장 많은 좋음을 

가장 오래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 삼게 된다. 


따라서 무엇이 선인가의 판단에는 

판단하는 이가 

이들 대립관계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모두를 공평하게 

고려하는 상태에서만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선을 추구함은 

자신이 힘이 있더라도 

힘이 없는 생명들이 느끼는 

좋음까지도 

모두 공평하게 고려하고 존중하며 

뜻을 결정하고 

선택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결국 세균, 미물, 동식물 같은 

생명들과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모두 차별하지 않고 

되도록 동등하게 고려하여 

뜻을 결정함을 의미한다. 


또 반대로 선을 추구할 때는 

단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음도 의미한다. 


  



  



● 선의 실현 


물론 이런 선의 모습이 

현실에서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힘이 강해 실현된 내용은 

모두 선이라고 보는 입장과는 

다른 입장이다. 



당장 어느 쪽이 실현돼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묻지 않고 

어느 쪽이 

모든 생명의 많은 좋음을 

보다 오래 가져다 주는 방향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각기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복만을 우선하여 

투쟁하는 경우 

비록 행복을 누리는 수와 

양과 기간이 적더라도 

힘이 강한 한 쪽의 뜻이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강하지만 

선하지 않은 자의 뜻이 

실현될 때는 

상대적으로 많은 생명이 

오랜 동안 고통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사실 

선악 판단과정과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가? 


즉 각 생명이 

가능한 악 보다는 

선에 가까운 방향을 

선택해나갈 수는 없는 것인가? 



사실 선의 실현이 어려운 것은 

각 생명들이 느끼는 좋음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좋음이 서로 대립될 때 

모든 주체의 뜻을 같게 만들거나 

모든 이의 뜻에 맞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모두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대립이 해결돼 

어떤 주체가 받는 

나쁨이 줄어든다면, 

그만큼 선이 실현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일단 그 상태에서 

그 만큼 나쁨이 없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좋고 나쁨의 대립 자체를 해결하여 

선을 실현할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다음에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OUTPUT]-FROMㅡ o:/G/G/book/SeonHyeonJiBog_v19_unicode.txt


● 아름다운 선의 실현방안 


좋고 나쁨의 대립을 해결하며 

선을 실현할 방안은 무엇인가. 


우선 가능한 대립관계가 없고 

모두가 만족할 상태를 찾아 

실현하는 것이다. 


만일 대립관계를 없애기 힘들다면, 

각 주체가 각기 원하는 상태를 

별도로 실현하게 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또 가능한 

가장 많은 주체가 

가장 많고 오랜 행복을 얻을 상태를 

우선 실현하고, 

나머지 주체는 마음을 바꿔 

그 상태를 좋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꽃병을 탁자 위에 

놓기를 원하는 이와 

이를 싫어하는 이가 있다고 하자. 


이 때 이들 모두의 희망을 

만족시키는 상태를 

만들기는 힘들다.  


그래도 가능한 방안을 

굳이 생각한다면, 


탁자위에서 꽃병을 보길 원하는 

이에게는 

꽃병이 보이고, 

싫어하는 이에게는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이만 

꽃병이 보이게 가름막을 

만드는 따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되도록 

모든 주체가 

만족을 얻는 상태를 실현하는 것을 

첫 번째 방안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이런 상태를 만드는 것이 

어렵다면 

각기 원하는 상태를 

별도로 실현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의 예에서 

이들을 각기 다른 방에서 

살게 만든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주체가 만족하도록 

외부상태를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외부 물질적 조건이 

한계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간을 무한히 늘리거나 

필요한 물질을 무한히 

만들어 내는 것이 곤란하다는 한계가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 선의 실현방안 



현실에서 

모두에게 좋음을 주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이것이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주체가 

어떤 상태에서 반드시 

어떤 좋음 또는 나쁨만을 얻도록 

고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각 주체가 좋음을 얻는 과정은 

둘이 있다. 


우선 뜻에 맞게 외부 상태를 바꾸면 

좋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외부상태에 맞게 

자신 내부 뜻을 바꿔도 

좋음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나쁨을 얻는다면, 

그가 이를 참고 받아들여 

좋음을 느끼도록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있다면, 

앞의 대립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 


물론 어느 방향이든 쉽지는 않다. 


즉 물질적 해결이나 

정신적 해결 

둘 다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결방안을 

외부 상태에 한정해 찾을 때보다 

그 해결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모든 주체가 

좋음을 함께 얻을 가능성은 

사실 이 안에 들어 있다. 




선의 실현방안


  


● 선의 구체적 실현방안 1  


현실에서 선의 실현방안은 

그래서 다음처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전 우주에 

오직 자신만 산다고 가정해보자. 


또는 어떤 문제가 

오직 자기 자신만 관계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주체는 자신에게 

가장 많고 오랜 좋음을 

무엇이 줄 것인가만을 고려하면 된다. 


그래서 이 경우는 

자신이 살아갈 전 기간에 

자신에게 가장 큰 행복을 줄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좋음을 

자연히 모든 기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좋음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 

나쁨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이럴 때는 좋음이 크고 

나쁨이 적은 경우를 

선택하면 될 것이다. 


그 다음 나쁨을 얻는 기간에 

마음을 바꿔 좋음을 

얻도록 노력하는 방안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다시 모든 기간에 걸쳐 

좋음을 얻을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겁게 거닐면 

결과적으로 건강도 얻는다고 하자. 


이는 결국 모든 기간 

좋음을 얻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일은 

그냥 하면 될 것이다.  


한편 편안한 집을 만들려면 

오늘 힘들게 일해야 한다고 하자. 


또 오늘 즐겁게 보내면 

그로 인해 병을 얻게 된다고 하자. 


이렇게 좋음과 나쁨이 

엇갈려 들어가는 경우, 

나쁨을 얻는 순간에 

마음을 바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이론상 모든 기간에 걸쳐 

좋음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만일 순수하게 

개인의 행복만을 문제 삼는다면, 

이런 노력이 가장 낫다. 


  


● 선의 구체적 실현방안 2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좋음을 가장 많이 얻는 방안만으로는  

선(善)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선은 개인의 행복과는 

또 다른 차원의 좋음이다. 


즉, 좋음이 

여러 주체와 함께 관련될 때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좋음을 주는 경우가 

무엇인가를 문제 삼을 때 

선악이 문제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주에서 좋음을 느끼는 생명은 

자신만 있지 않다. 

또 대부분의 생활은 

많은 주체와 관련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실 앞과 같이 

자신만이 고립되어 문제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어떤 선택이 

관련되는 모든 주체에게 

가장 많은 좋음을 

오래 주는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가장 많은 좋음을 

오래 주는가도 여전히 문제된다. 


사실 이 문제가 각 개인에게는 

본능적으로 제일 관심거리다. 


이런 기준에서 

관련된 모든 주체의 입장에서 

가장 많고 높고 

오랜 기간의 좋음을 주는 것을 

선이라 표현하고, 

이 선을 실현하는 길을 찾는 것이 

문제다. 


물론 주체가 많을 때 

이들 모두를 고려해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나와 다른 이 몇몇만 

고려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선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이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 선의 구체적 실현방안 3  


우선 자신을 기초로 

각 생명이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생각하자. 


먼저 누구나 

자신의 생명 건강을 

우주전체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자신의 재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자신이 사랑하는 

배우자, 자녀, 부모, 친족 등도 

중요하게 여긴다. 


또 남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 

거짓을 기초로 

자신이 행동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또 다른 이가 

자신과 남의 사이를 이간질해 

싸움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또 남이 자신에게 

욕하거나 무례하고 거칠게 말해 

감정이 상하는 것을 싫어한다. 


또 남이 공연히 

허망하고 허황된 내용을 말해 

이를 기초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잘못 행동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한 

보통 대부분 이런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만일 자신이 

이들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를 기초로 

다른 생명도 자신과 비슷하게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김을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만 특별하게 

손발이 끊어지는 것을 싫어하고 

다른 생명은 손발이 끊어지는 것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또 자신만 소중하고 

다른 생명은 하찮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이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다른 생명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좋아함을 

해치는 것은 악이고 

반대로 행하는 것은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이 선한 일이라면 

그 일을 자신이 

불행하게 고통스럽게 행하면서 

잘 이루지 못하는 것보다는 

행복하고 즐겁게 하면서 

그 일도 잘 이루어 내는 것을 

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은 

마음 안에서 

악의 방향에 이끌려 가는 감정들로 

방해받는다. 


따라서 이런 감정적 태도가 

다시 문제된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을 대하면 

단순히 좋다고 하면 된다. 


그래서 좋은 것을 키우고 

이를 남에게 베풀고자 하면 된다. 



또 나쁜 것은 

나쁘다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나쁜 것은 없애고 

남에게서도 

이를 없애주고자 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것을 대하면 

지나치게 탐착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것을 취해 

맛보아야만 한다고 집착한다. 


(*탐착(貪着): 

무언가를 욕심내 

꼭 그것을 얻거나 이뤄야 한다고 

고집하고 달라붙어 집착함)


또 나쁜 것에 대해서는 

그에 대해 화를 낸다. 


더 나아가 나쁨의 느낌을 준 대상을 

해치고 파괴시키려 한다. 


또 그 밖에 모든 대상에 대해 

그 의미와 내용을 

정확히 모르고 살아간다. 



그런데 악행의 근본원인은 

바로 이런 탐욕, 성냄, 무지함 등이다. 



예를 들어 

타인을 살해하거나 

재물을 훔치거나, 

원치 않는 사고와 

재난에 빠지게 만들고 

더 나아가 자신도 이로 인해 

불행한 고통의 상태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탐욕, 성냄, 무지함 등이 

그 근본원인이 된다. 


즉 당장 좋은 것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탐착하는 것, 

당장 싫음을 참고 

용서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 


또 사물의 내용과 

사물간의 관계를 잘 모르고 

어리석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 맹종하는 것 등이 

앞과 같은 악행을 하는 근본 원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자신의 탐욕의 충족을 위해 

다른 생명이 

우주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을 

해친다. 


또 다른 생명의 재물을 도둑질하고 

타인이 애착을 갖는 

부녀와 간음한다. 


또 한 순간의 분노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치고, 

타인의 재물을 파괴한다. 


또 자신의 행위가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모르고 쉽게 행한다. 


그래서 

사실 앞에 절벽이 있어도 

차를 몰아 

자신과 타인을 

떨어지게 만드는 사고도 

사실 깊이 생각하면 

어리석음이 그 원인이라고 해야 한다. 


결국 자신을 

선에 나가지 못하게 막고 

악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은 

마음속의 탐욕, 성냄, 무지함이다. 


그리고 비록 선한 뜻이 있어도 

탐욕, 성냄, 무지함에 눈이 가려지면 

수많은 재난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 선의 구체적 실현방안 4  


따라서 이를 기초로 

다음과 같은 선의 원리가 

다시 나온다.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악이다. 



그리고 생명을 죽이지 않음과 


반대로 죽을 생명을 거두어 

생명을 베풀어 살리는 것은 

선이다. 


[그리고 다시 남도 

이와 같이 행하도록 이끄는 것은 

선이다. 


남이 이를 따르지 않고, 

남이 자신에 대해 침해하더라도 


참고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함은 선이다. 


남들도 서로 간에 

다시 앞과 같이 서로 행하도록 

이끎은 선이다] 


앞의 [ ] 안의 내용은 

아래에도 공통적으로 반복된다. 

다만 이 반복내용은 [ ] 표시를 통해 

반복을 생략하며 

이 내용은 뒤에 

다시 자세히 설명한다. 



○ 남이 재물을 주지 않는데 

그것을 취해 가짐은 악이다.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은 

취하지 않으며, 


반대로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선하게 쓸 이에게 

재물이나 진리를 베푸는 것은 

선이다. 


[그리고…은 선이다.] 



○ 남의 배우자나 

다른 이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와 

떳떳하지 못한 음행을 하는 것은 

악이다. 



사음(邪淫)하지 않고 


반대로 정당한 관계에서 

맑고 밝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선이다. 


[그리고…은 선이다.]

 


○ 거짓말을 함은 악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은 선이다. 

[그리고…은 선이다.]



○ 싸움붙이고 이간시키는 

말을 하는 것은 악이다. 


싸움붙이는 말을 하지 않으며, 


반대로 

서로를 화해시키는 말을 함은 

선이다. 

[그리고…은 선이다.]




○ 거친 말 욕을 함은 악이다. 


거친 욕을 하지 않으며, 

부드럽고 사랑스런 말을 함은 

선이다. 

[그리고…은 선이다.]



○ 허황되고 내용 없는 

이야기를 함은 

악이다. 


허황된 말을 하지 않으며, 


질박하고 소박한 말을 함은 

선이다. 

[그리고…은 선이다.]



○ 탐욕을 갖고 집착함은 악이다. 


탐욕을 갖지 않고 

탐욕의 단점과 더러움을 보고 

끊는다. 


그리고 반대로 

탐욕이 사라진 자리에 

집착 없는 맑고 깨끗하며 

밝고 선한 희망을 채워 가짐은 

선이다. 


[그리고…은 선이다.]



○ 불쾌한 일에 화를 냄은 악이다. 


화가 날 때 

상대의 장점을 보고 

사랑스럽게 여겨 

성냄을 평안히 참는다. 

그리고 

미움과 원망을 버린다. 


그렇게 

미움과 원망과 성냄이 

사라진 자리에 

평안하게 참는 마음과 

용서, 사랑의 마음을 채움은 

선이다. 


[그리고…은 선이다.]


 


○ 어리석음은 악이다.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진리를 알지 못할 때 

인과를 반복 관찰하여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어리석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지혜를 개발하여 채워 넣음은 

선이다. 


[그리고…은 선이다.]



이들 각각에 대해서 

[그리고…은 선이다.]라고 표시된 

다음 내용이 

공통적으로 들어간다. 


내용 반복을 피해서 

위와 같이 표시하였다. 

이제 이를 이어서 살펴보자.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1  


우선 앞에 제시한 

각각에 해당하는 

자신의 행위 말 생각은 

선하고 좋다. 



즉 

다른 이들이 

가장 사랑하고 집착하는 

생명, 재산, 가족, 명예, 진리...등을 

침해하지 않는 것, 

[마이너스를 가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렇게 상대가 

사랑하고 집착하는 

좋음의 내용을 

자신이 베풀어 주는 것,  

[ 플러스를 주는 것 ]



그리고 

비록 나쁨을 받더라도 

이를 가능한 좋은 측면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 

평안하게 참고, 


그에 대해 화를 내지 말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 참`미`원`용`사` ]



이런 상태가 

자신이 행할 수 있는 

1차적 선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런 행위가 

선이면, 

남도 이처럼 행하도록 

이끄는 것 

역시 선이다. 


따라서 다른 이들도 

이처럼 행하도록 

좋은 방편으로 이끈다. 


그리고 남이 그와 같이 행하면 

따라 기뻐하고 칭찬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이 악을 행할 때가 있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고 집착을 갖는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진리...

등을 함부로 침해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은 이에 대해 

상대가 주는 나쁨을 

나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록 나쁨을 받더라도 

이를 가능한 좋은 측면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 

평안하게 참고, 


다시 그 상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참`미`원`용`사`]


그리고 이런 태도 

역시 또한 선하다. 


따라서 다시 

다른 남들도 

남들 사이에서 

서로 이와 같이 행하도록 만든다. 

    




즉 다른 타인과 타인이 

서로 상대가 집착하는 것을 

침해하면서 악을 주고받는다면, 


이들이 서로 각기 

악을 행하지 않게 

다른 이들을 이끈다. 


또 한편 상대가 악을 행해도 

이를 참고,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도록 

다른 이를 이끈다. 


이와 같이 하여 

자신과 상대가 모두 널리 

악을 끊고 

선을 실현하도록 이끈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들은 

앞부분에 나열한 

선한 항목 모두에서 

다 같이 적용된다.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2  


이제 앞에서 제시한 

선의 원리를 다시 보자.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침해받으면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이유로 

자신도 상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생명, 신체, 건강, 재물, 가족, 

진리, 즐거움 등]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반대로 상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베풀어 

상대가 선하게 되도록 이끌며 

선, 행복, 이익을 주고 

악, 불행, 손해를 덜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반대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생명, 신체, 건강, 재물, 가족, 

진리, 즐거움 등]을 

상대가 침해하더라도, 


좋게 받아들이고, 

평안히 참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런 악을 행하게 만들고 

선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근본원인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끊어야 한다. 


대신 집착 없는 

맑고 선한 희망, 

참음, 자비, 용서, 사랑의 마음,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 다음 

자신만 선에 머물지 말고 

남도 선한 상태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남이 이를 따르지 않고 

자신에게 악을 행하면, 

역시 자신은 

이를 평안히 참고,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한다.  


즉 어떤 이가 

자신에 대해 


생명을 해치고 빼앗거나, 

재물을 도둑질하거나, 

자신의 배우자나 자식과 

사음하더라도, 


그리고 거짓말하며 

싸움붙이며 욕하고, 

허황된 말로 꾸미더라도 


또 상대가 탐착심이 깊거나 

화를 참지 못하거나, 

어리석더라도


자신은 이를 참으며 

상대의 악행에 대해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용서하고, 

사랑한다. 





또 다른 이들도 

서로간에 

모두 악을 일으키지 말고 

또 한편 다른 상대의 악에 대해 

이렇게 행하도록 이끈다. 


상대와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선의 원리는 

이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3  


한편 여러 주체가 

다 함께 복잡하게 어울려 사는 

사회를 

선하게 만드는 것을 

다시 선의 목표로 세울 수 있다. 



사회에서 이뤄야 할 

선의 상태는 

간단히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가장 많은 주체에게 

가장 높은 질의 

가장 많은 양 

그리고 가장 많은 행복을 주는 

사회의 상태와 

현상의 상태를 만들고 


더 나아가 

선한 뜻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실현하도록 

다른 각 개인을 

만드는 것이다. 




만일 이 목표가 달성되면 

이로 인해 

다른 각 개인은 

선하게 되어, 


다시 앞에 나열한 

선의 원리와 

사회에서 선한 상태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한 개인이 

또 다시 

이 선한 상태를 이루는 일을 

계속해서 행해나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선은 

사회적으로 완성을 향해 

점차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많은 깊은 지혜와 지식을 갖추고 

어려운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당연하다. 


특히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이해하고 

지혜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렵고 

또 그 내용을 행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앞의 선의 원리 가운데 

특히 상대방과의 관계에서는 

다음을 행하기가 가장 어렵다. 


즉 

타인이 

자신에게 악하게 행하여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을 

침해할 때 


이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4  


우선 앞에 본 것처럼 

예를 들어 남이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일을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가 

자신을 죽이거나 해치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때 자신은 

그에 악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평안하게 참으며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그 상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다른 이가 

자신의 재물을 훔치거나, 

자신의 가족을 강간 간음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악한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바로 이 원리를 의미한다. 


붓다도 이 원리를 

인욕과 자비의 원칙으로 

반복해 가르친다. 


예를 들어 붓다는 

과거 세상에 참는 수행을 하다가 

아무 허물도 없이 

왕에게 잡혀 귀와 코와 손발을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 붓다는 상대에 대해 

전혀 성내거나 원망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은 간단하지만 

그러나 사실 구체적인 경우에 

이처럼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리고 

선한 사람 대부분이 

선의 다른 내용들은 

비교적 잘 지킨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을 

잘 지키지 못해 

결국 악에 빠져들어 가게 된다. 



결국 

선한 많은 사람들이 

악마와 함께 

지옥에 끌려 들어가게 되는 함정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만일 자신이 이를 지키지 못하면, 

악한 상대와 함께 

언제든지 지옥에 함께 

끌려 들어갈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를 피하려면 

성인의 가르침이 

잘 이해되지 않아도 

일단 무조건 

이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일단 이를 그대로 지킨 후 

천천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5  


이제 실제 행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대부분 선하게 살아오던 이가 

순간 악의 함정에 걸려 

빠져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대부분 평소에 선하게 사는 이는 

상대에게 선하게 행한다. 


또 자신이 선하게 행하면 

상대 역시 선하게 반응함을 

경험한다. 



또 반대로 상대가 

먼저 자신에게 선하게 대할 때 

자신도 선하게 대한다. 


이런 경우 대부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상대가 자신에게 

먼저 악하게 행한다.   


또는 자신도 선하게 행하고 

상대를 선하게 행하도록 

이끌려 노력도 했는데 

상대가 이에 따르지 않고 

악하게 대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은 곧 불쾌해지고 

많은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 경우 

선을 중요시 하는 이는 

다음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악한 상대에 대해서는 

악하게 대응해야 한다. 


비록 자신이 이 경우 

약간 악을 행하지만, 

상대의 악을 악으로 응징하고 

파괴하는 것은 오히려 선이다. 

또 이런 상대가 

앞으로 다시 

악을 행하지 않게 하려면 

그에 상응한 악으로 대할 

도리밖에 없다. 

만일 이런 이에게도 

선하게 대한다면 

그 상대의 악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는 

자신도 부득이 

악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 끝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도 악하게 대응하기 시작한다.  



실례를 든다면, 

평소에는 선하게 살지만, 

만일 누군가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폭행하거나, 

물건을 훔치거나, 

욕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평소에 선하던 그는 

갑자기 자신도 상대를 때리거나 

물건을 빼앗거나 

심하게 욕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갑자기 변한 이유는 

상대가 악하게 행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를 응징하기 위해서 

즉 선한 목적 때문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결국 이런 핑계로 

선한 이마저 

상대와 똑같이 

악하게 되고 만 것이다. 


또 그것은 결국 

악한 이가 선한 이마저 

악하게 만드는데 

성공하고 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선한 이가 악하게 변한 태도는 

한마디로 상대가 악해 

지옥에 가게 되면, 

자신도 그 상대처럼 

똑같이 악을 행해 

지옥에 따라가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우선 자신이 상대의 악에 

불쾌해지고 화내고 

상대에 맞대응하면 

사실은 자신도 상대처럼 

또 하나의 악을 행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은 

상대의 악을 비난하며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자신이 악을 행하면 

사실 자신도 상대와 똑같이 

악함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처음 

상대가 악을 행하게 된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는 처음 

어떤 탐욕, 화, 어리석음 때문에 

악하게 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상대에 화를 내어 악을 행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상대나 자신이나 

모두 똑같이 

어떤 이유에서든 

악한 행위를 행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신이 선을 지키려면 

어떤 불쾌에도 화내지 말고 

참고 용서하라는 선한 원리를 

먼저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 원리는 

상대가 이유 없이 

자신에게 악하게 행하는 경우도 

똑같이 지켜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악을 

미리 예방하려면 

그 이전 단계에서 좋은 방편으로 

상대를 선하게 이끄는 노력을 

잘 했어야 한다. 


그러나 타인을 

선하게 만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계속 악하게 행하면 

그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경우에도 방법은 같다. 



또 다시 이후에 

다시 좋은 방편으로 

상대를 선하게 이끄는 노력을 

더 잘하도록 하는 것만이 

가장 나은 방안이다. 


그리고 이처럼 

상대를 선하게 이끌려는 노력은 

당연히 선한 방편을 통해 

해야 한다. 



상대를 선하게 만들려는 

어떤 노력이 악하면, 

비록 이를 통해 

일부 좋은 결과가 얻어져도 

다른 좋은 방안보다는 

나쁨이 많은 방법이기에 좋지 않다. 


사실 상대가 악을 행하면, 

이후 어떤 방안도 

이미 발생한 악행 자체를 

되돌려 없앨 수는 없다. 



그 상태에서는 

이미 있는 악을 더 키우지 않고 

앞으로 생겨날 또 다른 악을 

막는 것만이 최선이다. 


따라서 상대의 악을 평안히 참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장 최상인 것이다. 


우선 이런 노력을 통해 

최소한 자신은 추가로 

악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후 

상대가 선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더욱 커진다. 


따라서 손해나 악은 

이미 발생했지만, 

이미 생긴 악이 더 자라나지 않고 

그 최소의 상태에서 멈추게 된다. 


좋음을 가장 많게 함도 좋지만, 

나쁨을 가장 적게 함도 똑같이 좋다. 


이런 점에서 

이 방안이 좋은 대책이다.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6  


하지만 상대의 악행 때문에 

당장 분노와 미움이 생길 때 

이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는 

참 힘들다. 


그래서 차라리 

악한 이에게 

불쾌와 고통을 줘 

악을 응징하고 보복하여 

통쾌함도 느끼고 

자신의 불쾌감도 없애버리려는 

유혹을 대부분 받는다. 


그러나 악에 악으로 응징할 때는 

다음 문제가 있다. 


우선 악한 상대를 미워하는 이는 

자신부터 불쾌의 감옥에 

갇혀 지내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불쾌와 고통은 

자신이 미움을 버리고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까지 

계속된다. 



그 자세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악에 대해 미워하고 

보복 응징하려는 이는 

그 희망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불쾌에 빠져 계속 지내게 된다. 


그러다 보복이 성공하면 

잠시 통쾌감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고 

곧 허무함만 남게 된다. 


왜냐 하면 보복하였다고 하여 

처음 악한 이가 줬던 상처가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대가 자신의 물건을 부수었기에, 

자신도 상대의 물건을 부숴 

보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처음 부서진 자신의 물건이 

원상태로 되지는 않는다. 


보복 응징은 

단지, 상대의 악으로 

불쾌를 받은 후, 

그 불쾌를 가져다 준 상대에게 

자신도 상응한 불쾌를 주고 

그것으로 잠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처음의 악을 이유로 

또 다른 악을 상대에게 

얹혀 준 일이 될 뿐이다. 


전체로 보면 1개의 악이 

원인이 되어 

전체의 악이 2개가 되고 

점점 3개 4개로 늘어가게 

되었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 받은 상처는 

그대로 남는다.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고 

상대에게 덧붙여준 악은 

사실 그 상처의 치유에 

도움 되지 않는다. 


단지 자신도 

또 하나의 악인으로 변해 

처음의 악인과 

악의 길에 동행하게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 보복이 성공해도 

그로써 받는 위안은 잠시뿐 

끝내 쓸모없고 씁쓸하고 

허무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 자신이 상대에 

보복 응징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보통은 상대도 이를 미리 알고 

역시 이에 대비하게 된다. 


또 자신이 실제 응징하면 

상대도 다시 이에 맞대응하거나 

나중에 보복하려는 마음을 

보통 갖는다. 


따라서 복수와 복수, 

원한과 원한은 

서로가 원인이 되어 

쉬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응징을 한 번 성공해도 

상대가 나중에 

또 다시 맞대응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는 아주 편하게 쉬지도 못한다. 


앞의 이유로 

상대의 또 다른 공격에 

끝없이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내는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무력하게 만들고 

아주 없애버리려는 희망을 

갖게 되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 희망의 성취는 쉽지 않다. 


또한 그것은 

사실 가장 악한 이가 

갖는 희망에 다르지 않다. 


사실 어떤 다른 이를 

완전히 없애버리겠다는 희망은 

악마나 가질 법한 희망으로 

처음 선한 이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이 그런 뜻을 가진 악마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희망이 끝내 성취돼도 

그 과정에서 서로가 받는 상처를 

끝내 없애주지는 못한다. 


사실 이는 

처음 받은 자신의 상처에 

또 다른 상처를 불러 일으켜 

끝없이 나쁜 결과를 

키우는 원인이 될 뿐이다.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7  


이해의 편의를 위해 

다음 이야기를 해보자. 


어떤 어리석은 이가 

손가락이 너무 아팠다. 


이 때 손목을 망치로 때리면 

손목이 아프고 

대신 손가락의 고통은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손목을 망치로 때린다. 

그러나 이제는 손목이 너무 아프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발을 망치로 때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하여 

온 몸이 다 부러진다. 


사실 이는 지어낸 이야기다. 


이렇게 끝없이 

자신에게 해를 가해 

고통을 잊으려 할 이는 없다. 


그리고 이런 행위가 어리석음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앞과 같이 

악에 악으로 보복해 

위안 받고 상처를 치유하려 함은 

위 행위와 똑같은 결과를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은 

상대가 악행을 

앞으로 못하게 만들고 

위안도 받기 위해 

악으로 응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악으로 응징해서 

상대의 악은 멈추지 않는다. 


상대가 악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상대를 응징한 이유와 

거의 같다. 


그 상대도 

그가 행하는 악의 원인을 

자신의 잘못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응징행위는 

상대의 또 다른 악을 

정확히 일으키는 

자동 스위치와 같다. 


그 결과 

악을 악으로 응징함은 

자신에게는 

앞의 이야기와 똑같은 결과를 

결국 만든다. 


따라서 이는 어리석은 것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악을 악으로 갚으면, 

원한과 악은 서로 쉬지 않고 

무한히 계속된다. 


단지 사람들은 

자신의 응징으로 

상대가 잠시 무력해진 

잠시간 여유 시간을 

그 악이 해소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기간 상대는 

새로운 악을 준비한다. 


그래서 새로운 악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 결과 

악을 통한 악의 응징은 

서로 불쾌를 

더 오래 더 많게 키우는 원인이 된다.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8 

악순환의 방지  


이런 악의 순환은 

어떻게 멈출 수 있는가. 


사실 어떤 일방이 

악을 악으로 응징함이 성공하여 

자신의 불만을 충분히 씻게 되면, 

그는 그 희망이 성취되었기에 

이제 그 상태에서 

그만 멈추기를 희망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상대는 

새로운 불쾌를 받게 되었으므로 

그런 마음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복수의 마음으로 

새로운 악을 준비하고 

나중에 

새로운 악의 순환을 일으킨다. 


그래서 서로 번갈아 

이와 같이 행해 

결국 악순환이 끝없이 계속된다. 


이런 악순환이 멈추려면 

쌍방이 멈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악행으로 

불쾌를 느끼는 이가 

그 상태 그 순간에 

평안히 참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여 멈출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상대도 이제 자신이 행한 악행을 

더 키우지 않고 멈춘다면 

악순환은 멈출 수 있다. 


사실 이 상대는 

이미 응징을 통해 

어느 정도 불만을 씻었으므로 


자신이 

그 상태에서 참고 멈춰준다면, 

보다 쉽게 악행을 

키우지 않고 그칠 수 있다. 


한편 자신이 참지만 

다른 상대는 악행을 

끝없이 반복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시 

다른 일방이 끝까지 

그 악행들을 모두 계속 

평안히 참고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용서하고 사랑하여 

악으로 맞대응하지 않는다면 

또한 이 악순환은 

중지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용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그런 악행을 

더 이상 문제로 

생각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그 악은 계속되어도 

그것뿐이며 

더 이상 악을 확대시키는 힘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서로간의 원한과 악의 순환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만일 자신이 응징을 하여 

만족을 얻은 다음에 

이 악의 순환을 

멈추고 벗어나고자 하면, 

그 악의 순환은 

쉽게 멈추어지지 않는다. 


물론 상대가 

앞의 태도로 응해준다면 

역시 악순환이 멈춰질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사실 상대도 

자신처럼 응징하여 

만족을 얻으려는 마음을 

똑같이 갖는다. 


따라서 

이 악순환이 

멈춰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남이 

자신이 못하는 일을 행해 

악순환이 멈춰지기를 

바라지는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응징을 받고 

불쾌를 느끼는 그 상태에서 

곧 바로 참고 그칠 때에만 

악순환이 멈춰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한편 

자신의 악의 응징은 

또 다른 악을 끝없이 일으키는 

새로운 원인이 될 뿐이다. 


따라서 

이는 장래에 대한 

악의 예방대책이 되지도 못한다. 


따라서 

악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은 

사실은 비록 누군가 

억울함을 느끼더라도 

또 상대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결심과 행동에 의해 

비로소 그 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상대에 미움을 갖고 

보복하고자 하게 되면, 

그 미움을 버릴 때까지 

가장 먼저 자신부터 

끝없이 불쾌와 불안의 감옥에 

늘 갇혀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과 상대의 악을 멈추게 하는 

예방대책이나 원인이 

끝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직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에만 

앞의 악순환의 고통이 반복되는 

지옥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

9-악순환의 방지  


그리고 한편 

악을 악으로 응징함은 

다른 이들의 악행을 

예방할 수 있는 방안도 못된다. 


악을 악으로 응징하면 

악행은 과연 예방되고 

완전히 쉴 것인가. 


사람들은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는 

효과를 말한다. 


사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다. 


남들이 악행을 한 다음 

악한 응징을 받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을 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두려움을 주어 

악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눌러 막은 것뿐이며, 

결코 선하게 인격을 

만든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효과는 

그런 통제가 사라질 때 

곧바로 악이 창궐(猖獗)하고 

번성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따라서 그보다는 

선과 행복의 원리를 교육시켜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한 뜻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행하고자 하는 뜻을 

갖게 만드는 것이 

차라리 더 효과적이다. 


국가에서 형벌을 관장하는 기관도 

결국 어떤 보복을 

대행해주는 역할을 함에 

목적을 두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쌍방이 

서로 악을 행하거나 

악을 계속 확대해나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데 목적을 둬야 한다. 


그리고 쌍방이 

서로 이미 행한 악이 있다면 

그 피해를 서로 회복시켜 주고 

화해하게 하는 데 

목적을 둬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서로에게 선하게 뜻을 갖고 

행하도록 만들어주는 데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한편 만일 

어떤 이가 악을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용서하고,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가. 


우선 그는 

처음 어느 정도 

상대의 악으로 

불쾌하고 고통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악을 응징하는 통쾌감은 

맛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를 평안히 참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상대로부터 받는 불쾌감은 

잠시 후 곧 사라지게 된다. 


왜냐 하면 사랑의 마음은 

불쾌와는 반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불쾌의 감옥에서 풀려 

해방될 수 있게 된다. 


한편 자신의 용서 사랑은 

이후의 악을 예방할 수 있는가. 


물론 이것만으로 

상대가 곧 반성하고 

악을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용서와 사랑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반성하지 않는다면 

악은 앞으로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이것만으로는 

상대의 다른 악을 

완전히 예방하는 방안이 되지 못한다. 


단지 자신의 용서와 사랑은 

우선 자신을 불쾌에서 해방시키고 

악한 상대가 스스로 

반성할 가능성을 

좀 더 많이 만들어 준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만일 상대의 악을 방지하려면, 

이와 병행해 

상대를 선하게 만들려는 

앞 단계의 노력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사실 처음부터 

타인을 선하게 이끄는 노력이 

잘 되었다면 

이런 문제는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늦었더라도 

다시 상대를 좋은 방편으로 

선하게 이끌려는 노력을 

반복해야 한다. 


그 노력의 내용은 

곧 상대가 어떤 이유에서이든 갖는 

불쾌를 없애고 

좋음을 서로 함께 얻는 

보다 현명하고 선한 방법을 

상대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악을 상당히 예방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자신과 상대가 

악한 방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 대해 

반성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로를 용서 사랑하고 

함께 행복을 키워 가지려는 자세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러 방안 가운데 

이 방안이 악을 

가장 적게 만드는 길인 것이다. 



  


● 선의 구체적 실현 원리-

10-악순환의 방지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하게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사실 이 경우 

자신이 

상대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 상대는 

스스로 악한 상태에 남고 만다. 


그 결과 그는 

늘 불쾌, 미움, 불안, 두려움의 

지옥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감옥에 가든 않든 

같다. 



그러나 반대로 

미움을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 쪽은 

그 악에서 벗어나 

불쾌의 감옥에 갇히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얽혀 순환돼 돌아가던 악도 

최소한 그 상태에서 멈추게 된다. 


그래서 그만큼 

전체의 악의 양은 줄어든다. 


그리고 악은 

악에 남아 머무르는 자만의 

악으로 멈추게 된다. 


그런데 만일 상대가 

자신에게 악행을 할 때 

자신도 악행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악한 상대의 미끼에 걸려 

결국 자신도 상대와 동행하여 

지옥의 불쾌한 형벌을 

함께 받게 된다. 



만일 굳이 상대와 동행을 하려면 

자신과 상대가 

모두 하늘 세계로 가야 한다. 


따라서 자신이 

먼저 용서하고 사랑하여 

하늘세계에 남아야 한다. 


그 다음 그 상태에서 

상대를 

선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여 

상대를 하늘세계에 함께 

올라오게 만드는 것이 가장 낫다. 


이처럼 

참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알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명백히 

자신에게 악을 저지르는 상대를 

그 순간 곧바로 사랑하기는 

매우 힘들다. 


따라서 모든 불쾌가 발생할 때 

일단 하기 힘들더라도 

성인의 가르침을 

우선 무조건 따라야 한다. 


따라서 악에 

악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평안히 참고,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자세로 무조건 대응한다. 


그 다음 그 이유는 

이성적으로 

천천히 생각하면 된다. 


그러다보면 

점점 처음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행하면 

처음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자신의 잘못을 실감하며 

후회 속에 지내야 할 것이다. 


또 악한 상대도 

사실은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자신도 

선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며 

행동하던 상태가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상대를 용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상대가 악하기 때문에 

나쁜 결과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여 

안타깝고 안됐다는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도 

도움이 된다. 



더 나아가 

이런 일을 통해 자신이 노력하면 

상대나 자신이 

더 좋게 될 수 있는 점을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는 이미 

상대가 갖고 있는 

다른 좋은 점을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상 

상대의 악한 행위에 대한 

자신의 선한 대응방안을 살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악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선을 행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1  


선한 원리 가운데 

자신의 상황에서 

행해야 할 내용이 많다. 


그런데 

이런 선의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그는 더 큰 불쾌, 

더 큰 고통과 두려움의 지옥으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별도의 재판관, 심판, 

감옥, 형벌이 필요 없다. 


세상에서의 감옥은 

인위적으로 죄를 응징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리고 감옥은 

불쾌와 고통을 주는 것이 

1차적이다. 


또 죄를 짓지 못하게 붙잡아두고 

또 다음 죄를 예방하기 위한 

교육이 뒤따르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우선 죄인을 붙잡아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모든 범인을 바로 바로 

잡지는 못한다. 


또 잡혀도 때로는 

범인이 도망갈 수도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죄를 짓고도 

감옥의 불쾌와 고통을 피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선한 방향을 따르지 않은 이는 

그가 어디에 있든 

모두 인과 법칙상 

예외 없이 

지옥의 불쾌와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가장 완벽한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명의 예외나 

탈옥수도 있을 수 없다. 


  


●선을 행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2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우선 

누군가 불쾌하여 

화를 내거나 

시비를 누군가에게 건다고 하자. 


그는 처음 이처럼 

악한 일을 한 것이다. 


이 경우 

그는 불쾌를 참고, 

화를 내지 않았어야 하고, 

주어진 것들에서 

기쁨을 얻으려 노력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어기면 

그는 이로 인해 

악한 결과를 예외 없이 받는다. 


우선 화를 낸다는 것은 

이미 그가 불쾌함의 지옥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쾌함으로 

다시 성을 내거나 시비를 걸면, 

그 후 나타나는 결과들은 

모두 그를 더 심하게 

불쾌하게 만든다. 


이것은 

그가 교도소나 병원에 가든 않든, 

그와 관계없이 

처음 선의 원리를 어긴 결과, 

인과 법칙상 예외 없이 받는 

나쁜 결과들이다. 


그가 화를 내 

잠시 시원하다고 느끼는 것은 

잠시이고, 

그로 인해 오랜 고통과 불쾌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어떤 이가 

불쾌를 스스로 참고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하자. 


이것이 더 좋음을 안다면, 

그는 다른 이도 

자신과 같은 상태로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하지 않거나 

잘못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주변의 다른 이들이 

악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그로 인해 

자신이 악한 결과를 

돌려받게 된다. 


예를 들어 

다른 이가 화를 참도록 

이끌지 못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다른 이가 화를 낼 때 

피해를 받게 된다. 


그것이 자신이 받는 

나쁜 결과들이다. 





한편 

상대가 

앞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시비를 걸었다고 하자. 


이 때 다시 

자신은 이를 평안히 참고,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어겨 

그 상대에 자신도 악으로 

맞대응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만으로 

악한 결과를 받게 된다. 


상대를 

선하게 만드는 것도 실패했고 

다시 자신마저 

악하게 행했으므로 

자신은 악한 상대와 함께 

불쾌의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일반 세상에서는 

범죄자만 감옥에 가고, 

피해자는 감옥에 가지 않는다. 

그래서 피해자는 동정을 받기 쉽다. 


그러나 

앞에 제시한 선의 원리에 의하면, 

어떤 악인의 악행을 

평안히 참지 않고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악인이다. 



그래서 

이렇게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 역시 지옥의 고통에 갇히게 된다. 


피해자란 명칭은 

물론 이미 

그런 고통과 피해를 

받은 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일 상대의 악에 

평안히 참지 않고, 

미워하고, 

원망하며,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 피해자의 입장에서 계속 남아 

그 고통을 계속 이어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대의 악을 

평안히 참지 않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에서 

때로는 

악을 직접 행한 상대방보다 

더 큰 고통을 

계속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누군가 

자기에게 심한 악행을 하여 

자신 역시 

폭행이나 폭언으로 

맞상대했다고 하자. 


이 중 

잘못이 크거나 

원인을 제공한 쪽은 

교도소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로 보이는 자신도 

역시 마찬가지가 된다. 


물론 

싸움에서 자신이 이겼다면 

자신이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교도소로 가기 쉽다. 


또 만일 싸움에서 졌다면 

병원에서 치료받는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어느 경우나 

자신은 상대와 함께 

모두 불쾌와 미움의 지옥에 

갇혀야만 한다.  


  



●선을 행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3  


사실 여기의 불쾌의 지옥은 

특별히 만들어진 감옥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불쾌감과 

미움과 원망, 증오, 

보복심을 갖는 한, 

그가 어디에 있든, 

그는 그런 감옥에 갇히게 된다. 


예를 들어 

그 피해자가 

어떤 호화스런 유흥에 

참석한다고 하자. 


그래도 그가 

과거의 미움을 잊지 못하는 한 ,

어떤 즐거운 맛도 

그곳에서 느끼지 못한다. 


즉 그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그는 언제나 

그가 있는 곳마다 

미움과 불쾌의 교도소에 

갇혀 지내야만 한다. 


이것이 

선의 원리를 어긴 이가 

인과 법칙상 

전혀 예외 없이 받게 되는 

불쾌한 결과다.  



그가 

지옥에서 벗어나오는 

유일한 순간은 


그가 평안히 참고,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용서하고, 

사랑하게 될 때뿐이다. 


만일 당장 이것이 어려우면, 

우선 당장은 이를 무시하고 

잊어야 한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지옥의 상태에서 

가석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다시 과거를 떠올려 

또 다시 불쾌하고 미워하게 되면, 

그는 다시 지옥에 끌려가게 된다. 


따라서 

잠깐 임시로 가석방된 상태라면, 

그는 앞으로 

악에 대해 평안히 참고, 

미움을 버리고, 

원망을 버리고, 

상대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서 지옥의 상태에서 

완전히 석방되어 나와야 한다.  







끝으로 

다른 이들도 

서로서로 악을 행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 


만일 이를 하지 않으면, 

상대가 서로 보복을 

주고받는 일이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자신은 그 분쟁 사이에 놓여, 

그 피해를 받게 된다. 


그것이 선을 행하지 않은 데 대한 

과보다.  


  





●선을 행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4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자신이 사는 사회를 

아름답고 선한 사회로 

만들지 않으면 


결국 그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자신은 

싸우지 않고 살려고 하더라도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부득이 싸움에 휘말려 들어가거나, 

피난을 다녀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또 전쟁에 져서, 

악한 상대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그 고통은 매우 오래 

지속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선한 이들이 

자신의 사회를 

아름답고 선한 사회로 

만들지 않는 결과다. 


또 자신이 사는 국가를 

아름답고 선하고 

건강한 

문화 부강 복지 국가로 

건설하지 못하거나 

건설하는데 노력하지 않고, 


그저 안일하게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지내면 

그런 결과를 받게 된다. 




한편 이 가운데 

어떤 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가 곧바로 

참회하고 반성하고,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면, 

그는 위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비록 

그가 교도소에 있더라도 

그곳이 천국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왜냐 하면 

아무리 극심한 고통을 줘도, 

그는 이제 그것을 

달게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처럼 

선의 원리에 따라,  

선을 선택하고 

악을 피하는 것이 

바로 최상의 길임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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