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상의 가치

- 아름다운 선의 실현 




●행복한 생존보다 

더 가치 있는 상태는 없는가? 

- 아름답고 선한 행복



행복한 생존을 

보통 중요시한다. 


이는 각 개인 입장에서는 

생존과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한 생존만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절대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를 생각해보자. 


우선 한 사람이 얻는 행복은 

형태가 다양하다. 


극단적인 두 경우만 비교하자. 


우선 자기 행복을 얻는 과정에서 

많은 다른 생명에게 

악과 고통 두려움을 주는 

악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역사상 

어떤 침략자가 

침략과 약탈을 통해 뜻을 이루고 

행복을 얻었다면, 

이런 행복을 

이런 경우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자기 행복을 얻는 과정에서 

다른 많은 생명에게 

아름다운 선과 

만족, 희망, 행복 등을 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나 붓다의 행복과 같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경우가 더 나은 행복인가. 


당연히 뒤의 경우가 더 낫다. 


만일 이 두 경우에서 

각기 

동일한 만족과 행복을 얻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행복의 점에서만은 

이들은 서로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가치는 서로 다르다. 


그 각각의 삶으로 인해 

다른 생명들이 

얼마나 선해지고 행복을 얻었는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개인적으로 

행복을 

모두 동일하게 얻었다면, 


그 가운데 가장 최상의 상태는 

가능한 가장 많은 생명에게 

가장 높은 질로  

가장 많은 양의 

아름답고 선한 행복을 


가장 오랜 기간 

가져다 준 이의 행복이 

가장 최상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가치는 

바로 

이런 행복의 상태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예수나 붓다가 얻는 

이런 행복을 

막강한 침략자들이 얻는 행복과 

구별해 표현한다고 하자. 


그러면, 예수나 붓다의 행복은 

아름답고 선한 행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침략자가 

살상과 노략질, 

강간, 노예의 획득, 승리 등을 통해 

얻은 행복은 


악한 행복이라 구별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선한 행복은 

다른 행복보다 낫다. 







그런데 이런 

아름답고 선한 행복의 

뜻을 갖는 경우에도 


다시, 

이를 잘 실현하는 경우와 

끝내 잘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 경우에서, 


선을 실현해내는 것이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보다 

더 나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아름다운 선을 

잘 실현하기 위해서는 

깊고 많은 지혜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아름다운 선을 실현하더라도 

그것을 지혜롭게 

잘 실현하는 경우와 


지혜롭지 못하게 

실현하는 경우를 

나눠 볼 수 있다. 


선을 실현하지만, 

지혜롭지 못하게 

실현하는 경우는 


비록 어떤 노력으로 

선한 결과는 나타나지만, 

들어간 시간과 노력 

또 그로 인해 

누군가 받게 되는 고통이 

다른 방법보다 

더 많은 형태로 

실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선을 

지혜롭게 잘 실현했다함은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보다 큰 선한 결과를 

얻어내는 방안을 알아내 

지혜롭게 잘 

실현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한 뜻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행해나가는 것을 

가장 나은 삶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들 가운데 

다시 조금 더 우열을 나눈다면, 


이제 지혜롭고 행복하게 

실현시킨 선의 결과가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경우를 

보다 더 나은 상태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어떤 목적을 정해 

살아가야 한다면, 


비록 그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여도 


낮고 천한 목표가 아닌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따라서 아래서는 

이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아름다움








● 최상의 가치 

- 아름답고 선한 행복



단순히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은 것을 

쫒아 가지 말고 


무엇이 가장 좋고 좋은 것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해 따라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음을 많이 주는 것이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모두 좋고 


지금 좋고, 

나중 좋고 

오래 오래 좋고 


이리 보아 좋고, 

저리 보아 좋고 

두루두루 좋고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은 것을 쫒아 나가면, 


잠깐의 좋음을 얻더라도 

그 잠깐의 좋음을 징검다리 삼아 


그 외 모든 다른 부분에서 

길고 길게 나쁨을 

얻게 되는 길을 

걸어가기 쉽다. 


그리고 

가장 좋고 좋은 것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좋고 좋은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게 실현해나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는 

좋고 좋고 좋은 것을 

단순히 좋은 것과 구별하여 

아름답고 선한 행복이라고 

표현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름답고 선한 행복을 

이루려면 


먼저 무엇이 

단순한 좋음이고 


무엇이 

아름답고 선한 좋음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선에 대해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좋음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생명이 각기 

제각각 다양한 형태로 

생명을 유지해 살아가면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세상과 사물을 대하게 된다. 


그런데 그 각 생명이 

일정 대상을 대하여 

최종적으로 얻어 

느껴 갖게 되는 감정은 


결국 좋거나 

또는 나쁘거나, 

또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느낌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각 생명이 

무엇을 좋다고 하고 

싫다고 하는가는 

각 생명 각 상황별로 다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한 때 무언가를 좋아해도 

상황이 달라지면 

그 느낌은 달라진다. 


또 하나의 같은 사물도 

누가 대하는가에 따라 

각기 좋고 나뻐함이 달라지게 된다. 


마치 하나의 음식을 놓고 

방금 식사를 마친 이가 대할 때와 

3 일을 굶은 이가 대하는 경우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좋음은 

어떤 외부사물에 

절대적으로 고정돼 결정되어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주체의 상황에 따라 

그 값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편 주체의 상황이 일정해도 

외부 대상에 따라 

좋고 나쁨은 또 달라진다. 


따라서 오직 주체만이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결국 좋음은 

주체와 외부 대상이 서로 화합해 

그 때 그 때 그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게 된다. 


마치 종이와 불이 화합해 

새로 연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또 이쪽 손바닥과 

저쪽 손바닥에 

모두 소리가 들어 있지만, 

두 손바닥을 부딪히면 

소리가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각 생명이 느끼는 좋음과 나쁨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외부대상과 주체의 마음상태가 

그 때 그 때 화합해 

그 주체의 마음 안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화합해 

각 생명의 마음 안에 나타나는 

이런 좋음 또는 나쁨의 느낌이 

바로 행복과 선악을 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 


그리고 선악 및 

행복 불행의 가장 기초가 되는 

좋음과 나쁨이 변하고 유동적이므로 


선과 행복의 구체적인 내용도 

그 때 그 때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선의 판단의 어려움의 이유 


좋음과 선의 판단이 어려운 것은 

바로 다음의 어려움 때문이다. 


즉, 각 주체가 얻는 

좋음과 나쁨이 

획일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주체별로, 대상별로, 시기별로 

매우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는 

사정 때문이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를 들어 

내게 지금 좋은 것은 

내게 나중에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경우와 같다. 


또 내게 나중에 좋음을 주는 것은 

내게 지금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병 치료를 위해 

먹게 되는 쓴 약과 같다. 


또 나에게 좋은 것은 

다른 이에게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자신이 기분 좋다고 

노래 부르는 것과 

같은 경우다. 


또 다른 이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 나쁨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친구와 신나게 떠들고 싶은데 

이를 참고 

조용히 있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모두’에게 ‘어느 경우나’ 

좋음을 주는 경우를 

생각하기 힘들다. 



만일 ‘모두에게’ ‘언제나’ 

오로지 ‘좋음’만을 주는 것이 있다면 

이를 선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만일 무언가가 정말 이와 같다면 

이를 나쁘다거나 악하다고 할 

근거자체를 찾기 힘들게 된다. 


또 반대로 모두에게 

언제나 나쁨만을 주는 것이 있다면 

이를 악이라고 하는 것도 쉽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이를 완전한 선, 

완전한 악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찾기 힘들다. 


현실에는 좋고 나쁨이 

주체와 사정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뒤섞인다. 


따라서 

무엇이 선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런 사정 때문에 

주체, 시기, 입장 상황 따라 

서로 달리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그 결과 선악에 

많은 혼돈과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결국 주체와 시기 입장 따라 

좋고 나쁨이 

서로 엇갈려 달리 느낀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선악판단이 엇갈리는 사례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과거 역사를 보면 

자신을 반대하는 

반대파를 학살하고 

주변 약소국가를 침략 정복한 

이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정의라고 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상대가 

극악하다고 주장 한다. 


한편 그렇게 힘이 약한 상태에서 

강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지내던 이들이 


상황이 바뀌어 

자신이 강대해지면, 


그들 역시 

또 다른 반대파나 

다른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다시 그런 그들이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입장 따라 다른 

이런 주장들 가운데 

누가 옳은가? 


이런 엇갈린 선악판단을 

모든 생명과 관련해 살피면 

훨씬 복잡해진다. 


좋고 나쁨을 느끼는 주체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비록 지능이 떨어져도 


모두 각기 

좋은 것을 추구하고 

싫은 것을 피하며 살아간다. 


개미와 같은 아주 작은 벌레 

한 마리만을 자세히 관찰해도 

이들은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해 움직이고 

싫은 것을 피해 움직인다. 



그것은 지혜가 많다고 

스스로 여기는 

인간의 행동 원리와 

하등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단지 그 뜻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이들 생명체보다 

조금 더 교묘하고 복잡한 

지혜를 이용한다. 


그래서 

스스로 이들보다는 

좀 더 나은 존재라고 

자부하는 데 지나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보다 못한 생명은 

마치 자신을 위해서 

오직 희생되어야만 하는 

하등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쉽게 여긴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은 

매년 수천만 마리의 

소나 돼지 양을 

살해하여 음식으로 먹는다. 


인간은 이런 살생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희생된 

소나 돼지의 생명은 

그 가치를 고려해볼 

필요성조차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생명만을 

우주보다 소중한 

가치 있는 것으로 집착한다. 


그러나 

만일 소나 돼지 양들에게 

이를 묻는다면 

그들도 자신의 생명은 

똑같이 우주보다 

가치 있다고 할 것이고 

이런 인간의 살생을 

악으로 여길 것이다. 





강자가 

자신의 반대파나 

힘 약한 타국국민의 생명을 

고려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으로 여기듯, 


그들 약자는 약자대로 또한 

자신보다 힘이 약한 

다른 약자들에 대해 

그와 같이 생각하고, 


인간은 또한 

다른 동식물을 

그와 같이 쉽게 여긴다. 


이들 모두 

자신들의 

생명과 행복을 절대시하면서 

그를 얻기 위해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래서 

결국 따지고 보면 

이들의 악함은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다지 큰 차이는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들 각자는 

또한 자신의 선함과 정의로움 

정당성과 

자신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래서 

바로 이런 점이 

선악판단에 혼동을 주게 된다. 



예를 들어 

강자는 

자신의 반대파들이 

사회에서 저지르는 악을 비난하고, 

이들을 제거해야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며, 


그런 반대파의 학살이나 

제거 탄압 등이 

정의롭고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많은 잘못된 편견과 


지배자 자신만이 

정의라는 독선(獨善) 


또는 자신만이 

신의 뜻을 대신하여 

정의를 펼친다는 식의 

잘못된 종교적 믿음 등도 

때로는 작용한다. 



또 한편 인간은 

동식물은 지혜가 적어 

좋고 나쁨도 

일체 느끼지 못하는 

일반 물질과 다름없는 

하등하고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또는 이들 동식물은 

신이 단지 인간의 삶을 위해 

제공해 준 감사한 물건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근거든 

강자의 입장에서 펴는 주장은 

모두 다시 그들의 행위가 

선하고 정당한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단지 그 피해자들이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선악은 

입장 따라 엇갈릴 수 있다. 


이는 가장 근본적으로는 

어떤 하나의 상황이 

모두에게 똑같이 좋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좋음과 나쁨이 엇갈리면 

입장과 시기 상황 따라 

선악을 서로 달리 판단하게 된다. 






동일한 하나의 상황에서 

좋음을 얻는 쪽은 

그것을 선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반대로 나쁨을 얻는 쪽은 

악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래서 견해가 대립하여 

투쟁이 계속된다. 









● 선의 기준으로 

힘의 우위를 주장하는 입장



그러면 선악은 

결코 정할 수 없는가. 


만일 단지 힘이 센 쪽 입장이 

선이라고 하자. 


그러면, 

사람은 동물보다 강하고 

과거 역사상 침략자들은 

늘 침략과 학살을 당한 

당시의 약자들보다 강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선하고 정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오늘날 

어떤 강도나 폭력배처럼 

힘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 모두도 

그가 힘이 강하여 뜻을 실현시킨다면, 

단지 그것만으로 

그들을 다 선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힘의 강함만으로 

선의 근거를 삼을 때는 

최고선의 존재로 

가장 힘이 강한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힘과 지혜가 

아주 초월적으로 우월한 

절대적 존재를 추리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종교가 

자신들이 믿는 신을 

그런 절대적 존재로 제시해왔다. 


그리고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길은 없어도 


그 절대적 존재의 뜻을 

선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각 종교의 

신앙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신이 

바로 그런 존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의 우위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대한 검토





그런데 이런 전지전능한 

절대적 존재를 전제로 

선을 판단하려 할 때는 

이론상 많은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우선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하고 

그의 뜻이 곧 선이라면, 

앞의 사례에서 힘이 강하지만 

악한 사례로 든 것들 

모두 악이라고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이미 실현된 내용들은 

모두 그 절대적 존재에 의한 

실현이거나 


아니면 

그가 적극적으로 허용하거나 

또는 그가 방임하여 

실현된 내용들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 존재가 

그런 사실을 몰라서 막지 못했다면, 

그의 지혜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또 한편 알았지만, 

막을 지혜와 힘이 부족하여 

그 일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면, 

또 다시 그의 힘의 절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결국 절대적 존재를 

전제로 할 때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취해야만 한다. 


우선 일어난 일에 대해 

절대자의 숨겨진 뜻과 계획이 

어떤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일체를 알고 

또 그 실현을 막으려면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는데도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절대자에 의해 

허용되거나 

아니면 그 절대자의 뜻이 

적극적으로 실현된 내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절대자의 뜻이 

선하다고 이해하는 이상 

나타난 모든 일들은 

다 선하다고 이해해야 된다. 


그래서 이런 전제에서 

선을 판단할 때는 

일단 실현된 내용은 

일체 그것을 악이라고 

비난할 근거가 없게 된다. 

 


그 절대적 존재를 

부르는 명칭이 다르지만, 

이런 절대적 존재를 

주장하는 종교는 

세계에 매우 다양하게 있다. 


그런데 

그 종교의 창시자나 

신봉자가 

다른 종교의 

신봉자나 권력가에 의해 

박해박거나 살해당한 일도 

역사 안에 많이 있다. 


이 뿐 아니라,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선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나 학살 폭행은 

수없이 세상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앞의 전제에서는 

이 모두를 

그 절대자가 허용하거나 


아니면 

절대자가 

자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결과로 

이해하고 

그 모두를 선하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스스로 

선에 대해 많은 논리적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완벽한 전지전능을 

전제로 하면 

이런 결론은 피할 수 없다. 





만일 그 존재가 

인간보다는 조금 우월하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고 

단순히 강한 존재에 불과하다면 

이런 결론만은 피할 수 있다. 


즉 이런 경우라면 

일어난 일들 가운데 

그 초월적 존재의 뜻과 맞지 않아 

악한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존재가 많이 알고 강하지만, 

사실 그 부분은 잘 몰랐거나, 

그 일을 막으려고는 했지만 

그 때는 조금 악마보다 

지혜와 힘이 부족하여 

막지 못했다고 이해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이해하면 

그 초월적 존재의 절대성은 

부정된다. 


그리고 그 존재의 뜻이 

절대적 최고선이라는 

사실도 부정되고 만다. 


왜냐 하면 그 보다 

더 지혜 있고 힘센 존재를 추리해 

그 존재가 갖는 뜻을 

최고선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따르는 이가 

절대적 존재가 아니면, 

그의 뜻을 맹종해 따르는 것을 

무조건 선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보다 

힘세다는 이유로 

악을 거부하지 않고 

그 악을 좇아 악을 행한 일로 

다른 존재들로부터는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과 자신이 따랐던 그 존재는 

모두 함께 보다 

더 강한 존재로부터 

그것을 이유로 

함께 처벌받을 운명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힘을 기준으로 한 

선의 문제에서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존재가 


가장 강력하여 

전지전능하고 

두루 존재하는 편재의 존재가 

되지 않으면 


이런 위험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전지전능하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편재(遍在)한 존재가 있다고 

전제하면, 


앞에서 본 것처럼 

일어난 모든 일은 

다 선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문제점이 나타나게 된다. 



더 나아가 

만일 이처럼 

지혜와 힘만이 선의 기준이라면 

또 다음 문제가 있다. 


만일 그 힘이 

모든 생명들의 힘을 능가한다면, 

그 뜻이 실현되어 

좋음을 얻는 주체가 

단 하나에 불과하고 

나머지 모든 생명은 

그로 인해 고통 받아도 

그의 뜻을 곧 선이라 해야 한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힘이 강한 존재의 뜻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좋고 나쁨과 관계없이 

그의 뜻을 곧 선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다. 


사실 이렇게 

힘의 우월함에서 

선의 기준을 찾을 때는, 


어떤 존재가 

너무나 위대하고 강력하므로 

그의 뜻은 곧 선이고 

따라서 감히 그의 뜻을 거역하여 

고통을 당하지 말고 

따라야만 한다고 강요받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결국 선은 

자신이 원하지는 않지만, 

강자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통을 당하므로, 

억지로 참고 

그 뜻을 실현해야만 한다는 

노예의 의무의 원리로 

선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경우는 

힘이 강한 쪽에 서서 바라볼 때만 

좋음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다. 


단순히 그 강자의 뜻이 실현될 때 

강자의 좋음을 위해 

고통과 피해를 받는 생명들은 

모두 이를 나쁘게 느끼고 

이를 악이라 하고 

그를 악마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의 우위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대한 검토 2



한편 여기에는 

다음 문제가 또 제기된다.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인정하면, 

우선 일어난 결과는 

그것이 절대자의 뜻이며 

선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의 옹호자가 

가장 곤혹스럽게 되는 것은 

현실에서 자신과 반대의 뜻들이 

실현되는 경우다. 


이런 상황에서는 

현실과 반대의 뜻을 갖는 자신이 

마치 악마 추종자처럼 

취급받기 쉽다. 


그러나 대부분 

이런 믿음을 가진 이는 

일어난 결과는 

모두 절대자의 뜻이며 

섭리에 의한 내용이며 

자신의 뜻도 언젠가는 

끝내 실현되리라는 믿음도 

함께 잃지 않는다. 


또 그 모두가 절대자의 뜻이며 

선이라고 쉽게 

받아들이는 심리를 만든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다음이다. 


우선 인간은 

절대적 존재가 정말 존재하는지부터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다. 


또 비록 존재해도 

그의 뜻이 구체적인 경우에 

정확히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각 개인은 절대자가 아니다. 

또한 절대자의 뜻을 알아낼 힘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뜻을 세우는 과정에서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미리 자신의 뜻이 

절대자의 뜻에 맞고 허용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물론 이미 실현된 결과에 대해서는 

그것이 절대자의 뜻이라고 믿고 

그렇게 

절대자의 뜻을 확인해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각 개인은 

우선 자기 개인의 뜻과 

욕심을 갖는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욕심을 마음껏 추구하고 

그것이 실현되면 

이를 곧 절대자의 뜻으로 

믿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실현되는 내용은 

곧 절대자의 뜻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만일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막으려면 언제나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어떤 뜻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곧 절대자의 뜻이라고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자신의 생각 자체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전지전능한 존재가 

막지 않는 

자신의 생각과 희망들은 

곧 절대자의 뜻에 맞고 

허용된다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뜻과 욕심이 

곧 절대자의 뜻과 같다는 

광신적인 믿음까지 

갖는 이들도 있다. 





한편 자신의 정신이 

다른 초월적인 영적 존재와 

교류하고 

그 뜻을 이해해 받아들인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계시나 꿈 암시 등이 

그런 교류방법으로 제시된다. 



사실 이런 주장들의 문제는 

그들이 교류하는 존재가 

과연 절대적 존재이고 

선한 존재인가, 


또 그가 이해해 받아들인 내용이 

과연 절대자의 뜻과 일치하는가? 


그 명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개인적으로 갖는 

상상적 내용과 

절대자의 뜻은 어떻게 다른가, 

등등의 의문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제 3자가 명확히 

알아낼 도리는 전혀 없다. 


단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이를 믿거나 말거나의 문제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절대자를 믿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식에 머무르는 

여러 내용 가운데 

무엇이 절대자의 뜻이나 명령이며 

계시고 

어떤 부분이 자신만의 생각이며 

상상인지를 

명확히 구분할 도리가 없다. 





○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의 우위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대한 검토 3



사실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할 때는, 

각 개인에게 고유한 의사 결정능력과 

자유 영역이 있다는 주장자체가 

처음부터 이론상 모순을 일으킨다. 



그것은 자유의사 영역만큼 

절대자의 힘이 미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영역에서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하면서 

또 한편 

개인의 자유 영역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모든 개인의 의사, 행위, 결과를 

다 절대자의 뜻의 실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 있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는 

부득이 일정 부분을 

절대자의 뜻이 개입되지 않은 

개인의 자유 영역으로 

설정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명백히 악인이 꾀한 

악한 일과 같은 경우다. 


그래서 그것은 

절대자의 뜻이 아니며 

개인의 자유의사의 실현결과며 

또한 개인의 책임영역이라고 

제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절대자의 힘이 미치지 않는 

악인의 자유 영역과 힘도 

함께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그 자유의사자체를 

절대자가 부여했으므로 

절대성은 훼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영역을 

절대자가 부여했다면 

그 범위안의 결과 또한 

최종적으로는 절대자의 뜻이며 

책임인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 


최초의 그런 자유의 부여자체가 

절대자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전제로 할 때는 

이런 어려운 이론적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여하튼 절대자를 받아들이는 한편 

자유의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다음의 어려움에 처한다. 


즉 자신의 마음 안에 

머무르는 여러 생각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절대자의 뜻이며 

어떤 것은 자신의 뜻이며 

어떤 것은 악마의 뜻인가 하는 

내심의 분열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나름대로 자신은 

잘 그것을 구분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기준이 

모호하고 불투명하다. 


따라서 구체적인 경우에 

혼돈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런 믿음을 갖는 

이들 사이에서도 

여러 유형과 경로를 통해 

절대자의 뜻으로 생각하는 내용을 

서로 다르게 주장하게 된다. 


만일 이들의 믿음이 다 옳다고 하면, 

이들 여러 다른 내용들은 

절대자의 뜻이 분열되었거나, 

절대자의 다른 뜻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이들 서로가 견해가 

대립될 때는 

이들 각자는 

모두 자신이 절대자의 선한 뜻을 

추종하고 있으며 

상대는 악마의 추종자라고 

믿고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 3자의 입장에서는 

깊은 혼돈에 빠져들게 된다. 


왜냐 하면 이들 모두가 

다 그와 같이 믿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정말 옳은가 

그리고 무엇이 

절대자의 확고한 뜻이고 

선의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나름대로 

이런 확신을 갖는 이들이 

대립된 주장을 기초로 

서로 싸움을 일으키는 경우다. 


역사상에는 

이런 절대적 존재를 믿는 

많은 종교집단 사이에서 

서로 다른 믿음을 이유로 

전쟁과 살생을 한 경우가 

많이 있어왔다. 


이 때 쌍방은 

서로 제각기 신의 뜻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도 누구의 주장이 

옳고 선한가는 

역시 많은 혼돈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렇게 

절대적 존재에 대한 판단이 

서로 달라 충돌할 때는 

마땅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들의 서로 상반된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옳고 절대자의 뜻인가는 

그들 간의 대립에서 

누가 승리하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 승패가 

그 때 그 때 엇갈린다. 


그래서 만일 절대자의 뜻이 개입해 

승패가 오락가락하는 것이라면, 

절대자의 뜻도 

그처럼 여러 갈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그러나 설령  

어떤 일방이 완전히 승리해도 

패배자는 결코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의 승리는 

악마의 일시적 승리에 불과하거나 

자신에 대한 

절대자의 믿음의 시험이며 

또한 최후의 승리는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믿음을 계속 갖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관찰해보면 

수많은 종교들 사이에서 

서로간의 대립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고 

승패도 일정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예로, 

예루살렘 성지를 놓고 다퉜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자군전쟁과 같은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몇 번 기독교도가 

성지를 차지했지만 

이후 이슬람교가 승리하여 

오랜 기간 이슬람교의 영역에 

성지가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이후 기독교 진영에서 

이슬람교의 믿음이 

진정 절대자의 뜻이며 

자신들의 믿음은 

악마의 믿음이라고 승인한 경우는 

거의 없다. 



또 오늘날 기독교가 

이슬람교보다 

물질적 세력이 우세하다하여 

반대로 이슬람교 신봉자가 

기독교가 

진정 절대자의 뜻에 부합하며 

자신들의 믿음은 

악마의 믿음이라고 승인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외에도 오늘날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과 같은 

세계의 대표적 종교의 

각 종파들뿐만 아니라 

기타 절대자를 전제로 하여 

믿음을 일으키는 


많은 소수 종교 종파 및 

이를 기초로 한 

정치 사회 세력 간에서 

이런 대립 양상은 

끝없이 나타난다. 


그들 집단은 

때로는 서로 박해도 당하고 

교주마저 상대 세력에 의해 

처형당하는 사태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신념체계는 

각 집단 간에 계속 쉬지 않고 

이어지며 

대립을 계속하게 된다. 


그 결과 최종적인 문제는 

이들 서로 상반된 주장 가운데 

무엇이 진정 절대자의 뜻이며 

선인가의 궁극적인 의문에 대해 

확고한 해결을 못보고 

의문은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로 

단순히 힘이 강하다거나, 

뜻이 실현되어졌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곧 선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 선악의 기준으로 다수 주체의 행복의 양을 문제 삼는 입장




사실 힘의 강약은 

서로 뜻이 대립해 다툴 때 

어느 쪽의 뜻이 실현되는가를 

정해준다. 


그러나 뜻이 실현된다고 

그것을 곧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선은 무엇인가. 


이는 단순하게 

다음처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모든 주체에게’ 

‘언제나’ 

좋음만을 주는 경우를 

완전한 선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에서 본 사정 때문이다. 


즉 주체에 따라, 

상황 따라, 

좋음을 

달리 느낀다는 사정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이는 싫어하고, 

지금 좋은 어떤 것은 

나중에 나쁜 내용을 주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정이 

완전한 좋음과 선을 

세우기 힘들게 만드는 근본 이유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일단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 가운데 

완전한 선에 가까운 쪽을 

찾을 수는 있다. 


또 그 반대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가능한 것들 가운데, 

완전한 선에 가까운 것을 

선한 쪽이라 하고, 


반대로 완전한 악에 가까운 것을 

악한 쪽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 가운데 

완전한 선에 가까운 내용을 

선택해가는 것을 

현실적 선이라 할 수 있다. 


즉 과정과 결과에서 

각 생명이 가장 많은 좋음을 

얻는 쪽이 

현실적 선이다. 



그리고 이들 가능성 가운데 

누군가 어느 하나를 선택했다고 

반드시 

뜻한 대로 

그 결과를 이뤄낸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결과 

어느 경우는 

선한 쪽의 뜻이 실현되지 못하고 

대신 악한 뜻이 

실현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실현되지 못한 뜻이 

더 선하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 의도하는 내용이 

완전한 선에 보다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예수가 반대자들에 잡혀 

죽음을 당한 경우 


그를 죽여 

당장 뜻을 실현시킨 이들보다 

죽음을 당한 예수가 

더 선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고자 한 

뜻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여러 주체가 

가진 뜻 가운데 

무엇이 선한가는 

누가 힘이 더 세고 

누구의 뜻이 당장 실현되어지는가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누구의 뜻이 

모든 생명에게 

좋음을 가장 많이 

가장 오래 주게 만드는 길인가가 

선악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선의 기준으로 

다수 주체의 행복의 양을 

문제 삼는 입장의 문제점



그러나 사실 어떤 것이 

그런 것인가를 

이론상 엄밀하게 판단하는 것은 

역시 어렵다. 

 

우선 한 주체가 

선택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 일을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현실은 

실현되어 나타나는 일만 보여주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실현되어 나타나지 않는 일들이 

과연 시도할 수 있었던 일이고 

또 시도했으면 

이룰 수 있었던 일인가는 

모두 이론상 의문으로 남게 된다. 


또 선택가능한 일로 

생각되는 것들에서 

장차 나타날 결과를 

모두 예측하고 비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 앞으로 나타날 결과에서 

각 생명이 얼마만큼 

좋고 나쁨을 얻는가를 

일일이 계산하는 것도 어렵다. 


따라서 엄밀하게 

무엇이 현실적 선인지를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위 원칙을 기준으로 삼으면,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로 

생각되는 것들 가운데 

비교적 선한 방향으로 

선택해갈 수는 있다. 


그것은 

엄밀하게 정확하지 않아도 

비교적 선에 가까운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음을 뜻한다.  







● 삶에서 의존하는 선의 기준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먼저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로 

생각되는 것 가운데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각 생명의 

현재와 미래에서의 

좋고 나쁨을 고려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가장 많은 좋음을 얻을 방향을 

선택한다. 


그래서 이렇게 

매 순간 선택해나가는 자세를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 선은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많은 이에게 

가장 높고 많은 좋음을 

가장 오랫동안 줄 

가능성이 있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선택하는 것은 

선이고 

그 반대를 선택하는 것은 

악이라 할 수 있다. 







● 삶에서 의존하는 

선의 기준의 재검토  



현실적 선을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많은 이에게 

가장 높고 많은 좋음을 

가장 오랫동안 줄 

가능성이 있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다시 다음 문제가 있다. 


우선 각 주체가 

자신 및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 친구, 사회, 

동류집단(인종, 민족, 인간)과 

그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주체를 

모두 평등하게 고려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양 1000 마리를 죽이면 

자신 가족 10 명이 살고, 

양 1000 마리를 살리면 

자신 가족 10 명이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 과연 이를 

행복과 고통을 느끼는 주체의 수와 

그 행복의 양과 질 기간만을 

단순히 비교하여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가이다.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미생물, 세균, 벌레 등으로 확대하여 

생각해보자. 


그러면 각 주체는 

이런 단순한 평등한 

비교의 입장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한 주체는 

늘 우주 전체보다 

자신과 가족의 생명, 이익만을 

우선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우주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는 보통의 경우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행복을 

전 생명의 그것보다 우선함은 

모든 생명들이 거의 다 같다. 


그래서 

입장 따라 선과 악의 판단이 

혼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서로 대립 경쟁 투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힘이 강한 쪽의 뜻이 

실현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가장 좋은가는 

현실에서 누가 힘이 강하며 

누구의 뜻이 실현되는가와 

별개의 문제이다. 


그보다는 어느 쪽의 뜻이 실현돼야 

가장 많은 주체에게 

좋음이 더 많이 오래 주어지는가의 

판단문제인 것이다. 


또 그래서 누구의 뜻이 

실현되어야 

마땅한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선의 판단에서는 

그 힘의 강약을 떠나, 

좋음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주체를 

평등하게 고려하게 된다. 


또 그들이 어느 상태에서 

가장 많은 좋음을 

가장 오래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 삼게 된다. 


따라서 무엇이 선인가의 판단에는 

판단하는 이가 

이들 대립관계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모두를 공평하게 

고려하는 상태에서만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선을 추구함은 

자신이 힘이 있더라도 

힘이 없는 생명들이 느끼는 

좋음까지도 

모두 공평하게 고려하고 존중하며 

뜻을 결정하고 

선택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결국 세균, 미물, 동식물 같은 

생명들과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모두 차별하지 않고 

되도록 동등하게 고려하여 

뜻을 결정함을 의미한다. 


또 반대로 선을 추구할 때는 

단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음도 의미한다. 


  



  



● 선의 실현 


물론 이런 선의 모습이 

현실에서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힘이 강해 실현된 내용은 

모두 선이라고 보는 입장과는 

다른 입장이다. 



당장 어느 쪽이 실현돼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묻지 않고 

어느 쪽이 

모든 생명의 많은 좋음을 

보다 오래 가져다 주는 방향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각기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복만을 우선하여 

투쟁하는 경우 

비록 행복을 누리는 수와 

양과 기간이 적더라도 

힘이 강한 한 쪽의 뜻이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강하지만 

선하지 않은 자의 뜻이 

실현될 때는 

상대적으로 많은 생명이 

오랜 동안 고통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사실 

선악 판단과정과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가? 


즉 각 생명이 

가능한 악 보다는 

선에 가까운 방향을 

선택해나갈 수는 없는 것인가? 



사실 선의 실현이 어려운 것은 

각 생명들이 느끼는 좋음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좋음이 서로 대립될 때 

모든 주체의 뜻을 같게 만들거나 

모든 이의 뜻에 맞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모두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대립이 해결돼 

어떤 주체가 받는 

나쁨이 줄어든다면, 

그만큼 선이 실현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일단 그 상태에서 

그 만큼 나쁨이 없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좋고 나쁨의 대립 자체를 해결하여 

선을 실현할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다음에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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