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

○ 행복의 발생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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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발생 구조


● 만족의 구조

만족의 양 질 시간적 평가 - 즐거움, 기쁨 보람 가치 평온 안정



● 희망의 구조

○ 구판 fr /270 /280 /290 /300

만족..등의 구조

---ht370의 내용과 체계 순서 조정필요성 ---

] ⃝> /270







]] ●> 만족, 불만, 희망, 두려움의 구조




행복의 기본요소의 구조

행복의 기본 요소는 만족과 희망을 그림에 있다.

그리고 기쁨, 즐거움, 보람, 가치감, 평온, 안정 등은
만족의 양적 질적 시간적 차원의 문제이다.

이들은 앞에서 함께 보았다.



여기서는 만족과 희망을
그에 반대되는 불만 두려움과 함께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논의이유



만족, 희망, 불만, 두려움 등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를 살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는 1차적으로 심리과정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뿐만 아니라
이런 지식을 기초로
행복을 얻는 방법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행복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만족 희망, 불만, 두려움 등에 대해
그 발생 원리와 구조를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좋음의 느낌을 얻는 과정


만족 불만 희망 두려움은
각기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정신과정과 관련된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좋음이란 느낌이
어떤 정신과정을 거쳐서 얻어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좋음을 얻는 정신과정은 다양한 정신 과정을 거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정신과정을 대강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어떤 정신내용을 얻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다음이다.

그것은 외부대상과
주체의 감각기관[눈,귀,코,혀,몸]과 인식기관[뇌]이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주체의 정신 내부에서 많은 내용물[감각내용, 감정, 개념내용, 판단, 의지, 희망...]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런 요소를 기초로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된다.














정신작용의 기초, 실재내용[#]과 감각내용[!]

정신작용의 설명의 어려움 


      TO o:/G/G/03/ghpt/r1030.htm  
참조 - 정신의 위치에 관한 논의 
http://essay007.tistory.com/883
///


댓글 테이블 





◈Doctr Gong 2014/01/22/수/19:45


● 좋음의 발생 과정에 대한 논의의 시작,  

아이가 그림책을 대하거나, 장난감, 게임기, 과자를 대하면 좋음을 느낀다. 
청년이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면 좋음을 느낀다. 
병이 걸린 이가 자신의 병을 잘 고쳐줄 의사를 만나 병을 낫게 되면, 좋아한다. 
배 고픈 이가 음식을 만나게 되면, 좋아한다. 

이처럼 각 경우마다 좋음의 느낌이 나타난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을 때는 
1차적으로는 이런 좋음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과 선도 마찬가지다. 

물론 행복은 단순한 좋음이 아니고 조금은 복잡한 좋음이다. 
즉 좋음을 그 양이나 질, 기간, 주체, 상황 등과 고려하여 
복합적으로 평가하여 좋고 좋음을 평가하여 
그것을 행복이라고 이름붙이게 된다. 

또 선악의 문제는 이 좋음과  관련된다. 
선 또한 단순한 좋음이 아니고  
행복보다도 좀 더 복잡한 좋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좋고 
지금 좋고 나중 좋고 오래오래 좋고 
이리 보아 좋고 저리 보아 좋고 두루두루 좋음을 
가져다 주는 내용을 
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좋음은
복합적인 좋음으로서 
행복과 선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삶의 문제는 
가장 좋고 좋고 좋은 상태를
어떻게 얻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선한 뜻의 실현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해나가는 것을 바람직한 좋음의 추구과정으로
보게 된다. 

그것은 곧 선과 행복을 결합한 상태를 뜻한다. 

문제는 이러한 선과 행복의 기본 요소에 
좋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위 예에서 
아이가 그림책을 대하거나, 장난감, 게임기, 과자를 대하면 좋음을 느낀다고
말했는데, 
그 상황에서 다른 것은 좋음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각 경우마다 좋음을 주는 내용이 달라짐을 볼 수 있다. 

아이에게 좋음을 주는 장난감이 
사랑에 빠진 청년에게 그다지 좋음을 주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또 반대로 사랑에 빠진 청년에게 좋음을 주는 
아름다운 여인이 
배 고파 음식을 찾는
다른 이에게는 별로 좋음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좋음의 대상과 좋음의 발생과정



그래서 이 각 경우마다 
무엇이 좋음을 주게 되는가를 
1차적으로 찾아 보아야 한다. 

원래 이 문제는 
왼 손바닥과 오른 손바닥을 부딪혀 소리가 날 때 
그 소리가 어느 손바닥에 들어 있었는가를 
알아내는 것과 유사한 문제다. 

우리가 무엇을 대하여 좋음을 느낄 때 
분명 자신의 마음 안에서 좋음의 느낌을 확인하고
그 좋음의 느낌이 있음을 알지만,

그 좋음을 얻게 된 상황에 존재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에 
그 좋음이 과연 들어 있었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위 문제와 비슷한 것이다.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물이 된다고 할 때 
물은 산소에 있었는가 수소에 있었는가. 
이런 화학 문제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각 경우에 
그러그러한 요소가 자신에게 주어지면 
자신이 좋음을 얻게 된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그래서 선과 행복의 기초요소가 되는 
좋음도 이와 같은 것들에서, 
그러한 과정으로 좋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좋음은 각기 이러한 내용을 
이러한 주체가 대할 때 
이들이 화합하여 
그 주체의 마음 안에 얻어지는 내용이라고 
설명할 수 밖엔 없다. 

그 이상의 
보다 자세한 논의은 현상의 진리론의 
인과 발생과정에 대한 논의로 넘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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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느낌의 발생과정

앞에서 본 것처럼 일정한 정신내용이 기초가 되어
좋거나 싫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데 좋은 느낌은 이 과정에서
어떤 요소를 기초로 어떤 과정을 거쳐 얻게 되는가가 문제된다. 


참고로 여기서는 좋은 느낌만을 대표로 살핀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느낌 등 다른 느낌에도 공통된 내용이다.

앞에서는 다음의 관계를 제시하였다.
즉 외부 대상[#] + (매개체,빛,파장..)[#] + 자신의 감관[#] +자신의 인식기관[#]

-> 감각내용[!] -> 관념내용[@] -> 언어내용% [@->@->#->!
->@->@]->  행위[@->#->!->@] -> 분별판단내용@의 연쇄과정이다.

그런데 위 과정에 먼저 좋거나 싫은 느낌의 발생과정을 집어 넣지 않았다.

그것은 좋은 느낌의 경우 아래에서 살피려 하기 때문이다.



느낌을 얻는 기초요소


우선 좋음의 느낌을 얻는 기초요소가 문제된다.

정신과정에서 좋은 느낌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여러 내용을 생각할 수 있다.

비교적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부터 나열해보기로 하자.


관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는 경우,
그 관념을 떠올린다면 좋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소에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과를 현재 감각하지 않고 있어도
사과@라는 관념을 기억에서 떠올리면
좋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우선 관념@이 좋음을 일으킬 수 있는 기초요소임을 인정할 수 있다.



판단[@+@]

앞에서 관념이 좋은 느낌의 기초요소가 됨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관념이 결합된 판단도 좋음을 일으킬 기초요소가 된다.

그것이 사실에 관한 판단이든 가치에 관한 판단이든 같다.

실례로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방안에 있는 사과는 100개다’[사실판단]
‘사과는 아름답다’[가치판단] 는 등의 판단을 할 때에도 역시 좋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 때 판단을 구성한 개별 관념이
좋은 느낌을 불러온 것인가
아니면 전체적인 판단이 불러오는가도 문제될 수 있다.

이는 판단이 좋은 느낌을 얻게 하는 한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굳이 문제된다면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각 관념들은 좋음을 얻지 못하지만 전체판단은 좋음을 얻는 경우가 있다.
[얄미운 사람이 맞는다]

또는 반대로 각 관념을 좋음을 얻지만
전체판단은 좋음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쁜 나비가 포도잼 속에 빠져 있다.]

이런 예에서 판단은 단순한 관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좋은 느낌을 일으키는 독립적인 요소가 된다고 할 것이다.



감각내용[!]
앞에서 관념, 판단 등은
그것이 감각내용을 전제로 하지 않고도
좋음을 얻는 경우를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념, 판단은
감각내용이 함께 병행할 때에도 역시 좋음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이
사과를 눈앞에서 보고 만지고 맛보면서
사과라는 관념을 갖는 경우에도 좋음을 얻을 수 있다.

감각내용은 많은 관념의 출발 기초가 된다.
또 감각내용이 관념과 병행할 때는
좋음의 느낌을 보다 강하게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관념만 있을 때 보다는 직접 사과를 보고 만지고 맛보면서 사과를 생각할 때 좋은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감각내용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과정 중에서 약간 논의가 필요한 것은 다음이다. 즉, 관념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감각내용만을 기초로 곧 좋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는 다음 문제와 관련된다. 감각내용은 이를 기초로 곧바로 관념을 일으키곤 한다. 이처럼 감각내용은 이를 기초로 곧바로 좋은 느낌도 곧바로 일으키는 것인가? 아니면 감각내용은 그를 기초로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이 관념이 기초가 되어서만 좋은 느낌을 일으키는가? 아니면 다시 관념을 일으키고 이와 비교할 어떤 다른 관념이 병행 비교되어야만 좋은 느낌이 얻어지는가? 즉, 좋은 느낌을 얻으려면 자극-반응의 체계로도 충분한가 아니면 비교과정이 반드시 필요한가가 문제된다. 이와 관련하여 좋음의 느낌은 감각내용만을 기초로 얻을 수 있는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의 실험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감각내용만을 얻고 관념이나 판단을 행하지 않는 정신상황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의 일반 상황에서는 감각내용을 얻으면 이에 상응한 관념을 바로 얻게 된다. 따라서 감각내용만을 얻고 관념을 얻지 않는 상태를 만들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런 경우는 깊은 수면이나 식물인간이 된 상태 등에서 가능할지 모른다. 또는 불교의 선정(禪靜)수행을 통해 관념작용 이상의 정신작용을 정지시키고 감각만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이르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에 이런 상태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감각내용만을 얻는 상황에서 실제 이를 기초로 좋은 느낌을 얻을 수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도 어렵다. 한편 이론상,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더라도 그 경우에 좋은 느낌이 얻어지는가를 관찰하려면 다시 이 상태에서 이를 관찰할 의식을 작동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는 감각내용만을 얻는 상황의 조건에 어긋난다. 타인의 의식을 이렇게 만들고 제 3자가 객관적으로 그 과정을 관찰할 방법도 아직은 딱히 없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만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록 이를 만들어도 좋은 느낌이 발생하는지를 관찰할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실재내용[#]
감각내용[!]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실재내용[#]만을 기초로 곧바로 좋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는가? 좋음의 느낌이 실재내용[#]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는 이를 긍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실재대상[#]과 주체[#]가 있는 상태에서 이를 곧바로 최초로 받아들일 기관을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반성해보면 최초로 내용을 얻는 것은 감각과정이다. 그런데 이 감각과정이 감각을 하는 순간 곧바로 좋음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입장을 취하기 쉽다. 그래도 감각내용도 전제로 하지 않고 곧바로 좋은 느낌을 얻는다는 것은 지나치다.
이 역시 엄밀히 실험하려면 감각-개념을 모두 얻지 못한 상태에서 좋음을 곧바로 얻는 경우가 있는지를 실험해야 한다. 어떤 주체가 생존하면서 감각과 개념을 얻지 못하는 순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비교되는 준거의 작동 가능성
앞에서 어떤 내용들이 좋음을 일으킬 기초내용인가를 대략 살폈다. 여기서 일단 조금 명료한 기초로서 관념을 들어 논의를 진행해보자. 예를 들어 잘익은 사과@라는 관념을 생각해보자.
이 사과@라는 관념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좋은 느낌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반면 어떤 이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또 좋은 느낌을 얻는 주체에게도 그것이 항상 그렇지는 않다. 어떤 때는 나쁜 느낌을 주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한다.
이처럼 좋음의 느낌을 얻는 과정이 일정하지 않다. 이렇게 좋은 느낌을 얻는 상황을 반성해보면, 좋은 느낌을 얻는 과정에 대해 약간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일정한 내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일정한 내용에 대해 정신내용을 얻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유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원 대상내용과 동일성여부
먼저 ① 원 대상 내용과 동일유사한 내용을 얻는 경우와 ② 원 대상과 매우 차이나는 내용을 얻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얻게 된 내용을 대상에 있는 성질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주체가 갖는 성질로 봐야하는가를 판단하게 해준다.
어떤 거울을 놓고 생각해보자. 이 거울 앞에 어떤 사물을 놓으면 거울에는 그 사물과 비슷한 영상이 맺힌다. 이 경우 거울은 주로 외부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반면 셔터가 달린 사진기는 거울과 유사하지만, 필름에 맺히는 모습도 반드시 외부모습과 동일하지는 않다. 다만 외부모습과 상응한 또는 비례한 변화를 보인다고는 할 수 있다. 우리 정신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정신작용은 감각내용[!]에서 1차적으로 곧바로 관념@을 직접 얻는 과정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각 관념@은 비교적 감각내용[!]에 충실하게 상응해 반응한 결과를 보인다. 즉 빨간 색[!]에 대해서는 빨간 색@, 연필[!]에 대해서는 연필@이라는 관념을 보통 얻는 것이다. 그러나 빨간 색[!]의 감각내용[!]이 개념내용[@]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진기와 유사한 관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면 어떤 관념이 과거 기억된 관념@가운데 몇몇을 재생해내는 과정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연필@이란 관념을 얻을 때 이것이 다시 재생해내는 관념@은 이와는 별개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연필@로부터 종이@나 책@을 연상해 꺼내는 경우와 같다. 이는 원래의 관념@ 예를 들어 연필@보다는 그 개별 주체의 과거 경험과 오히려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좋은 느낌을 얻는 관계도 비교적 뒤의 경우와 유사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사과@를 좋아하는 이가 사과@로부터 좋은 느낌을 가질 때 그 느낌은 사과@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내용으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원래 사과@에 좋은 느낌에 해당한 것이 본래 있었다고 볼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사과@에 대해 여러 주체는 늘 좋은 느낌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각 주체마다 또 시기 상황마다 어떤 느낌을 갖는가는 다르다. 따라서 좋은 느낌이란 그것을 준 대상에 있는 성질을 동일유사하게 얻어내는 것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주체별로 얻는 내용의 동일성여부
다수 주체가 모두 동일유사한 내용을 얻는 경우,
각 주체가 각기 다르게 내용을 얻는 경우,
-- 내용보다 각 주체가 갖는 특성에 더 영향받는가 여부 -- 각기 다르게 나타나게 하는 원인을 각 주체의 내부적인 특성에서 찾게된다.
대상이 있으면 늘 자동적으로 내용을 얻는 경우
대상이 있어도 내용을 얻거나 얻지 못하는 경우
-- 내용을 얻게 하는 어떤 기관의 작동여부가 어디에 있는가, 주체에게 있는가 등의 판단문제
그래서 거울은 그 사물을 놓으면 늘 그 모습을 규칙적으로 반복해 나타낸다. 또 거울은 늘 열려 있어 외부사물을 갖다 놓으면 늘 모습을 그대로 맺히게 된다.
셔터가 열릴 때만 모습을 맺힌다.
늘 동일한 내용을 얻는 과정
다수 주체에게 일정하게 작용할 때만 동일한 내용을 얻는 과정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일정하지 않다. 그것에 의해 얻어지는 관념@은
- 참고 -


우선 우리의 감각 인식기관 가운데 감각기관도 비교적 외부대상에 일정하게 반응하여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통 추리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외부 실재대상[#]의 내용은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실재대상[#]으로부터 어떤 감각내용[!]을 얻었는지를 상호 비교할 수 없다. 

그런 관계로 실재대상[#]과 얻는 감각내용[!]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추리할 근거를 얻기 힘들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사물을 반복해 관찰하면 눈은 그 사물에 일정하게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물이라는 것이 바로 이미 감각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감각내용[!]을 놓고 자신이 그 감각내용[!]을 대응시키므로 실재대상[
#]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물론 제 3자를 관찰하고 보고를 받으면 제 3자가 우리가 보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사물을 구별해 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는 사과라고 하며 촛불은 촛불이라고 구별한다. 그래서 제 3자의 눈은 외부대상[#]에 일정하게 반응한다고 추리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제 3자나 자신이나 모두 유사한 정도로 사물을 구별하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정작 실재대상[#]에서 A[#]나 B[#]를 자신의 감각이 모두 A라고 인식하는지, 아니면 A, B, C 등으로 구별하는지를 밝혀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좋음의 느낌을 얻는 과정은 일정한 감관[#]이 외부대상[#]에 반응하는 것과 같이 이해하기 곤란하다. 오히려 일정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재생해내는 과정에 오히려 유사하다.
왜냐 하면 만일 사과@에 좋음의 느낌의 요소가 미리 정해져 있고 정신과정에서는 단지 이런 내용에 반응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 관념@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상황에 일정하게 좋음의 느낌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관념@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각기 다른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정을 감관이 외부대상에 반응하는 것과 같이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 좋음의 느낌을 얻는 과정은 생각해보면 늘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뜻에 따라 행위를 한다. 그래서 움직이고 먹고 마시곤 한다. 그러나 이런 대부분의 행위를 뜻대로 하지만, 이 과정을 반성해보면 이런 과정에서 늘 좋음의 느낌을 얻는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딱히 나쁨의 느낌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음의 느낌을 얻지도 않는 것이다. 단지 주어진 상황에 몰두하며 행위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은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좋은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상황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뜻에 맞는 행위를 할 때와 같이, 이전 상황과 현재 상황이 대비되어 좋음의 느낌을 얻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일정한 감관이 그것을 열어두면 계속해 얻는 것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감관도 열거나 닫거나를 반복할 수 있다.
... [ 조금 숙고 필요 ]
한편 좋음의 느낌은 의식적으로 좋음의 느낌을 얻으려 노력할 때만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인위적으로 좋음의 느낌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을 때에도 자연스럽게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런 면들은 어떤 관념@의 재생과정과 일단 유사하다. 과거 기억이 재생되는 것도 반드시 인위적으로 노력할 때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념@의 재생과정과 다른 점은 위에 살핀 예에서 보듯 좋은 느낌은 어느 정도 기존 상황에 갖고 있던 판단이나 의식내용과 대비될 때 얻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식사는 그가 배고픈 상황에서 이를 대하면 좋은 느낌을 줄 수 있다. 반면, 그가 배부른 상황에 있다면 그런 느낌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차이가 좋은 느낌을 주고 안주고에 관여한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는 그것에 대해 어떤 기준 상태에서 그것을 대하게 되었는가에 따라
그 A에 대해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되기도 하고 또는 못 얻기도 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기존 상황이 일종의 중요한 요소가 됨을 인정할 수 있다.
좋음의 발생과정
기관과 작용과정의 문제
비록 눈이나 귀처럼 우리가 외부적으로 관찰할 기관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 안에서 좋음의 느낌을 얻는 한 이런 느낌을 얻게 하는 정신영역 자체를 추리할 수는 있다.
다만 늘 작동하는 기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또 어떤 대상 요소에 대해 늘 규칙적인 반응을 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어떤 고정된 형체로 대상요소에 대해 규칙적인 반응을 하며 또 이런 작동이 늘 작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결론만을 얻게 된다.
실험의 어려움
열어서 해부하여 자극과 반응의 내용을 관찰하기도 힘들다.
또 관찰자 자신이 스스로 이런 실험을 하여 내용을 파악하기도 힘들다.
비교되는 준거의 기관성 여부
어떤 A는 그것에 대해 어떤 기준 상태에서 그것을 대하게 되었는가에 따라
그 A에 대해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되기도 하고 또는 못 얻기도 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기존 상황이 일종의 중요한 요소가 됨을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을 어떤 내부적 정신기관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단지 기초대상과 함께 필요한 요소일 뿐 이것에 작동하는 기관이나 작용은 별개로 설정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여기서는 후자로 본다.
좋음의 요소의 변경과정
앞에서는 대략적으로 좋음이 얻어지게 되는 요소나 과정을 살펴보았다. 많은 것이 불확실한 베일에 감춰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먼저 어떤 요소들이 주체의 의지로 어떤 방식으로 변경가능한가를 검토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이를 이용해 좋음을 얻을 수 있는 기초지식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단지 관찰가능한 지식일 뿐 우리가 이용가능한 지식은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① 실재대상 - 행위를 통한 변경
② 감각내용 - 감각기관을 여닫음 [ 실재대상에 많이 지배됨]
③ 관념내용 -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
④ 기억 재생 - 초점, 자연발생, 의지
⑤ 판단 - 의지, ...
을 요소를 다음과 같이 구별해 볼 수 있다.
자신과 외부의 요소
어떤 주체가 놓인 현실을 자신의 요소와 외부의 요소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통상 객체, 주체, 객관, 주관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이들 용어는 철학적으로 많은 다른 설이 있어 통일적으로 의미를 정의해 사용하기가 곤란하다.
여기서는 앞에서 정의한 획득내용[*]을 기초로 자신의 요소와 외부의 요소로 구분해보기로 한다. 획득내용[*]은 앞에서 보았듯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1차적으로 변화가 파악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은 주체의 감각내용[!]에 속함을 보았다. 그리고 이 정신내용을 일으킨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얻지 못함을 보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획득내용[*]은 그 모두가 자신의 정신에 들어 있는 정신내용이 된다.
이 때 비록 실재내용[#]을 얻지 못하지만, 획득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을 구분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즉, 자신의 요소[#]와 외부의 요소[#]의 구별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꽃을 만져 촉감을 얻을 때, 그것을 스스로 보게 된다. 이 때 꽃에 대한 감각내용[!]을 손의 감각내용[!]이 접촉해 촉감을 얻는다고 이해하지는 않는다. 꽃[!]을 손[!]이 만진다고 보일 때 사실은 꽃[#]이 손[#]을 접촉해 우리에게 촉감[!]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꽃[#]과 손[#]의 실재내용[#]을 직접 얻지는 못한다.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꽃[!]과 손[!]의 감각내용[!]으로서만 이해된다.
따라서 이런 관계로 결국 획득내용[*]을 자신과 외부로 분리해 그것을 곧 꽃[#]과 손[#]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논의를 진행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감각내용[!]을 객관적 요소로 제시한다.
어떤 주체가 일정한 감각내용[!]을 얻을 때
앞의 연쇄과정에서
이들 연쇄과정에서 좋은 느낌이 어느 요소 이후에 발생하는가가 문제된다. 최소한 감각! 이후에 각 요소를 기초로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엄밀히 감각내용 만을 기초로 좋은 느낌을 얻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감각내용을 가질 때 그에 따른 관념을 얻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감각내용만을 갖고 관념을 갖지 않는 상황[예;식물인간,수면,최면,선정상태]를 만들어서 이런 경우에도 좋은 느낌은 얻을 수 있는가를 실험해야 한다. 또는 감각내용과 관념이 같이 얻어지고 좋은 느낌이 얻어질 때 이것이 무엇을 기초로 얻어졌는가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주관적 실험이 주된 실험방안이 된다. 실제로 이런 실험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결론을 얻기도 힘들다. 다만, 여기서는 감각내용을 기초로 좋은 느낌을 곧바로 얻는 해석을 취하기로 한다. 예를 들어 좋은 빛깔을 감각하고 곧 좋은 느낌을 갖는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좋은 느낌은 관념이나 언어 행위 분별 등을 각기 기초로 얻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칭찬을 듣고, 즐거운 소설을 보고, 춤을 추면서, 또는 비교판단을 통해서 각기 좋은 느낌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얻는 좋은 느낌도 하나의 정신내용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감각내용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관념내용이라고 분류하기도 그렇다. 이는 별도로 감정내용이라 분류해야 할 것이다. 다만 감각과 관념의 이분법을 고집하면 이런 감정은 관념의 영역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감각내용을 기초로 얻어내는 또 다른 정신내용물이기 때문이다.
느낌에는 물론 좋은 느낌과 나쁜 느낌이 있다.
이런 느낌은 이처럼 위 정신작용의 연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진다.
이 경우 외부의 요소 * 주체의 신체요소[감관]이 주된 요소가 된다고 본다.
그리고 나머지 얻어지는 정신내용은 매우 연쇄적인 결과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 단순히 감각을 하거나 개념을 갖고 이를 재생하거나 판단하는 작용들만 할 때가 있다. 이 때는 좋음과 나쁨의 느낌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떤 책상을 별 생각 없이 바라본다고 하자. 그리고 이런 감각내용을 기초로 책상이라는 관념을 갖거나, ‘그것은 책상이다’라는 식으로 판단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런 상태만으로는 만족 또는 불만이 나타나지 않는다.
만족, 불만 등이 있으려면 이런 감각이나 개념을 기초로 좋음이나 싫음을 느끼는 정신작용이 다시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에 빠뜨리기 쉬운 내용이 있다. 그것은 기존에 형성하고 있던, 기억내용, 관념 사실판단의 내용, 가치판단의 내용, 희망, 의지 등과 같은 일정한 정신적 내용물이다. 이들은 연쇄적으로 얻어지는 정신내용물과 함께 화합하여, 좋거나 나쁜 일정한 느낌을 만들어 내는데 관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을 과연 좋은 것으로 보는가에 대한 일정한 판단[ 또는 희망의 내용]이라고 본다. 이것을 좋음의 기준내용이라고 일단 부르기로 하자.
㉠ 먼저 어떤 현상을 대하여 감각하고 개념을 얻는 과정에서 좋음의 느낌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느낌] 예를 들어 어떤 책상이 정돈이 잘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거나, 책상에서 좋은 향기가 나서 기분이 좋은 경우와 같다. 이는 미리 무엇이 좋다는 가치판단이나 현상이 어떠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없었다는 점에서 다음의 ㉨과 구별된다. ㉡ 그 외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서 좋음(싫음)의 느낌을 다시 얻게되는 경우가 있다.[재생] 예를 들어 자신이 과거에 친구와 놀았던 때를 떠올리게 되어 좋은 느낌을 다시 갖거나 과거에 창피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싫었던 느낌을 다시 갖는 경우들이다. ㉢ 또 이런 좋음 싫음의 느낌을 기초로 ‘좋다’ ‘나쁘다’ 등의 관념(觀念)을 형성하고 이를 기억, 재생, 표현하는 과정도 있다.[관념] 예를 들어 ‘좋다[2]’는 언어관념은 ‘좋은 느낌’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관념으로 좋은 느낌[1]을 가리키게 된다. 또 그런 관념은 재생할 수 있고 또 ‘좋다[3]’라고 소리나 글자로 표현할 수도 있다. 여기서 [1],[2],[3]은 느낌, 언어관념, 소리나 글자로서 서로가 다른 차원의 내용임을 의미한다. ㉣ 그리고 다시 이것은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 깨끗하다, 더럽다,...등으로 판단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가치판단] 예를 들어 어떤 친구와 즐겁게 놀고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실을 기초로 ‘그 친구는 좋은 친구다’라고 판단하는 경우다. ㉤ 그리고 어떤 사실이 있(없)으면 좋을 텐데...라고 희망하거나, 반대로 어떤 사실이 있(없)으면 싫은데...라고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희망, 두려움] 예를 들어 자신이 돈이 많으면 좋을 텐데..., 사고를 당하면 안 되는데... 등으로 생각하는 경우다. ㉥ 한편 좋음(싫음)을 구성하는 내용들을 떠올리거나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경우에 좋음(싫음)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희망, 두려움을 그림] 예를 들어 돈이 생기면 그것으로 살 물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며 좋아하는 경우다. 이는 앞의 ㉤과는 조금 다른 상태가 된다. ㉦ 또 좋음(또는 싫음)의 의미를 ‘좋음(또는 싫음)이 아님’과 대비하여 명료하게 그 의미를 구별 인식하는 정신작용도 있다.[의미분별] 예를 들어 좋음의 의미는 사실 모호하게 생각될 때가 많다. 이 때 싫음과 대비하여 이 좋음을 이해하여 그 의미를 뚜렷이 자각하는 경우가 있다. ㉧ 또 어떤 인식내용을 떠올린 뒤 이와 또 다른 인식내용을 비교하여 그것이 이보다 낫다거나 못하다고 가치판단하는 경우도 있다.[우열분별] 예를 들어 지금 방이 춥지만, 그래도 밖에서 추운 것보다는 낫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 또 좋다 나쁘다는 가치판단 또는 희망(두려움)의 내용과 현실을 대비하여 어떤 현실이 이에 일치되었다거나 불일치되었다는 등의 비교판단도 행해진다. 방에 꽃이 있으면 좋다, 또는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꽃이 있다. 그래서 좋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다. ㉩ 그리고 어떤 좋음을 주는 것을 감각하려 하고 가까이 대하려고 하며, 이를 계속 감각할 수 있도록 자신이 지배하려고 하거나, 또는 그 대상에 좋음을 되돌려 주려고 희망하는 등의 경향을 계속 갖는 경우도 있다. 또 반대로 싫음을 주는 것에 대해 감각하지 않으려 하고 피하려하고, 그것에 가까워질까 두려워하고, 그 대상을 미워하고 싫음을 되돌려 주려고 희망하기도 한다. [기호, 심리상태] 예를 들어 철수는 장미꽃을 좋아한다라고 하는 경우다. ㉪ 또 실제로 좋은 것을 원하고 그것을 가까이 하거나 취하려는 행위를 하려 하거나 행하는 경우다. 또 반대로 싫은 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또 그렇게 행하는 경우다. [의지, 행위] 예를 들어 철수가 애인에게 꽃을 사주려고 한다는 경우다.
그런데 좋음과 싫음의 느낌은 이런 여러 과정에서 함께 얻어질 수 있다. 따라서 좋음은 본래 어떤 과정을 기초로 얻어지는가에 오히려 혼돈을 갖게 된다. 
관찰방법의 어려움
정신과정은 그것을 행하는 주체의 외부로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제 3자가 타 생명체의 정신 과정을 직접 관찰할 도리는 없다. 결국 각자 자기 자신의 정신내용을 되새겨보고, 이를 기초로 타 생명체의 정신과정을 유추 추리하고 언어소통을 빌려 이를 확인해보게 된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에게 가장 명확한 것은 자기 정신과정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과정도 그 과정을 다시 되돌아보는 노력은 쉽지 않다. 감각이나 개념 분별 등의 정신작용을 한편으로 행하면서 또 한편으로 자기 자신이 행하는 정신과정을 스스로 되새겨 보는 노력은 쉽지 않다. 또한 좋음(나쁨)의 느낌은 일상생활에서 매우 모호한 형태가 된다. 그것은 얻더라도 형체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얻게 하는 감각내용이나 개념내용과 뚜렷이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또 실제로 좋음 나쁨을 느끼지 못하고 그 중간상태에서 어떤 대상에 몰입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무엇을 좋은(나쁜) 느낌이라고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먼저 좋음(나쁨)에 대한 관념이 그에 상응하는 좋음(나쁨)의 느낌을 찾기 위해 먼저 개입하게 된다. 그 결과 이렇게 좋음(나쁨)의 관념이 먼저 선행하지 않는 일상적인 경우에는 어떤 형태로 좋음(나쁨)의 느낌이 일어나는가를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좋은 느낌의 형태
생각하건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좋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곳에 갔는데 막상 그 곳의 경치를 대하고 좋다고 느낀다거나, 어떤 음식을 맛보게 되었는데 좋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는 경우와 같다. 이 경우 그 좋음을 느끼기 위해 어떤 나쁜 상태를 떠올려 이와 비교하고 좋은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다른 경치나 맛 등을 떠올리고 다시 이와 일일이 비교한 다음에 낫다 좋다 등의 비교판단을 행한 후 좋음의 느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런 여러 경우에 얻는 좋음[1]의 느낌은 ‘좋음[2]’이란 언어표현 이전에 정신 안에 있다. 또 이런 좋음의 느낌은 그 이전에 반드시 어떤 가치판단이 있은 다음에 얻는 것도 아니다. 또 그 상황에 일치하는 희망이 반드시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따라서 좋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가치판단, 희망이 반드시 먼저 있고 다시 이와 일치여부를 일일이 판단하여 좋다라고 느끼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 느끼는 좋음의 느낌은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어떠한 내용에서 어떤 이가 좋다 나쁘다라고 느낄 때 그것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느끼게 되는가를 명확히 밝히기는 곤란하다. 단지 분명한 것은 어떤 감각이나 개념을 기초로 좋음의 느낌이 발생한다는 사실뿐이다. 그것은 마치 감각작용이 어떤 사물을 눈으로 대하여 어떤 구체적인 감각내용을 바로 얻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좋음의 느낌은 감각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감각내용이 감각기관과 대상이 서로 관계함으로써 곧바로 발생하게 되듯, 좋음의 느낌도 정신 안에서 어떤 감각내용 또는 개념을 기초로 곧바로 발생하게 되는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히 나타나는 좋음의 느낌이 다른 좋음의 관념, 가치판단, 희망 등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본다. 즉, ‘좋음’의 관념, ‘--이 좋다’라는 가치판단, ‘--이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형식의 희망, 또 이런 가치판단 희망과 현실의 일치 불일치 판단, 어떤 나쁜 내용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좋음을 일으키는 과정, 좋음을 나쁨과 비교하여 좋음의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는 과정 등은 모두 이런 좋음의 느낌을 기초로 해서 발생하게 된다고 생각된다.
최초의 좋음의 형성
우리가 좋음의 느낌을 얻기 위해서는 통상 자연적으로 어떤 경우에 좋음의 느낌이 발생하게 되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를 일률적으로 나열하는 것은 곤란하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좋음을 얻게되는 내용들을 획일적으로 단순히 나열하고 이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만을 문제로 삼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좋음의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는 각 주체마다, 각 시기, 상황마다 매번 다르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감각기관을 갖는 이들간에 꽃을 꽃으로 보는 것은 대부분 같다. 그러나 정작 그 꽃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는 사람마다 시기, 상황마다 다 다른 것이다. 따라서 좋음의 느낌을 갖는 상황을 일률적으로 나열하는 것은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생명체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생존에 이익이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좋은 느낌을 얻는 반응을 하게끔 되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만일 이렇지 못하다면, 그런 생명체는 세대를 이어서 계속하여 생존을 계속해나가기 곤란했을 것이다.
다만 좋은 느낌을 갖게 되는 모든 것은 생존에 반드시 이로운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생존에 해로운 대상 예를 들어 마약이나 술, 죽음의 위협이 따르는 모험행위 등에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좋다는 느낌을 갖는 경우 모두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선천적으로 정해져 고정된다고는 볼 수도 없다. 예를 들면 아이가 처음에는 젖을 좋아하다가, 다른 음식에 맛을 들이면 이제 젖을 멀리하게도 된다. 따라서 그 일부는 선천적으로 결정되고 이에 다시 후천적인 경험과정 등에 영향 받아 점차 변화되어 나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한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경험을 반복할수록 강화되어지기도 하고 또는 반대로 수정 변경되어지기도 한다. 또 하나의 대상에 대해 계속해서 동일한 좋음이나 나쁨을 얻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싫어하던 것을 나중에는 좋아하게 된다던지, 또는 그 반대로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른이 되면 술이나 담배나 매운 맛 같은 매우 자극적인 맛에 탐닉하게도 되고 반대로 어릴 때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도 된다.
또 각 주체는 각기 좋아하는 것을 달리하여 갖는다. 따라서 이들 관계는 어디까지나 각 주체, 시기, 상황마다 변동되는 유동적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인위적인 좋음의 느낌의 형성
자연발생적으로 얻는 좋음의 느낌을 일률적으로 나열하여 고정시키는 것은 앞에서 본 것처럼 곤란하다. 따라서 이를 획일적으로 나열한 뒤 그 관계를 이용하여 좋음의 느낌을 얻으려는 시도는 곤란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시기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고 모호하기는 하지만, 한 주체가 어떤 경우에 좋음을 느끼게 되는가를 스스로 판단해볼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은 비록 뚜렷하지 않더라도 그 주체가 갖는 좋음의 관념, 가치판단, 희망, 비교분별의 내용 등의 기초가 되어 준다. 앞에서 보듯, 좋음을 느끼는 경우가 유동적이듯, 이런 가치판단, 희망 등의 구체적인 내용도 변화하게 된다. 또 이런 내용은 주체별로 구체적인 차이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어느 정도 공통적인 감각기관과 정신구조를 갖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일반적으로 좋고 나쁨을 공통적으로 갖는 경우도 찾을 수 있다.
좋음을 인위적으로 찾으려 할 때는 좀더 우리에게 명확한 관념 형태로 존재하는 가치판단, 희망의 내용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게 된다. 어떤 이가 어떤 내용을 좋다고 판단하거나, 희망한다는 경우,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런 내용에서 좋음의 느낌을 많이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를 이용하여 좋은 느낌을 얻어내려 시도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결국 현실에서 좋은 느낌을 주는 요소를 찾아내는 한편 좋음의 느낌을 주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가치판단이나 희망의 내용은 무엇이 좋음의 느낌을 주는 것인가를 찾아내게 하는 근거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의 이용에도 한계는 있다. 즉, 자신이 좋아하지 않던 내용을 억지로 좋다라고 가치 판단하거나 희망을 갖는다고 하여 좋음의 느낌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바퀴벌레를 싫어한다고 하자. 그런데 억지로 바퀴벌레는 좋다라고 가치판단을 내려보거나, 바퀴벌레를 손으로 만지고 싶다라고 억지로 희망을 만들어 가짐으로써 바퀴벌레가 좋은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판단이나 희망 등이 일치되는 현실에서 좋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이런 가치판단이나 희망들이 본래 자신에게 좋은 느낌을 주던 요소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치판단, 희망의 내용들은 억지로 좋음의 느낌을 만들어 내는 요소는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좋은 느낌을 주던 것들을 현재의 순간에 다시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만 나쁜 느낌을 주는 것을 억지로 자꾸 좋다고 판단하거나, 희망을 억지로 자꾸 불어넣음으로써 싫음의 느낌이 줄어들고 좋음의 느낌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하튼 좋음의 느낌을 인위적으로 얻는 과정에서는 이들 가치판단이나 희망의 내용을 기초로 하게 된다. 그것은 이들의 내용이 결국 그 주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좋게 느끼는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이를 기초로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되는 과정을 살피기로 한다.
==================이하 내용폐기=====================
]]] ♡> 가치기준과 현실인식과의 관계
]]] ♡> 일치하는 경우
]]]]] □> 좋은 면 일치 인식-만족
]]]]] □> 좋은 면 기준 자체-
]]]]] □> 나쁜 면 일치 인식 - 불만
]]]]] □> 나쁜 면 기준 자체 -
]]]] ♥> 일치 않는 경우
]]]]] □> 좋은 면 불일치 인식 - 불만
]]]]] □> 좋은 면 기준 자체 - 희망
]]]]] □> 나쁜 면 불일치 인식 - 만족
]]]]] □> 나쁜 면 기준 자체 - 두려움, 걱정
]]] ♡> 평등성
인간이 행복과 관련하여 갖는 마음의 상태는 크게 만족, 불만, 희망과 걱정 두려움 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상태는 본질적으로는 모두 평등하다고 볼 수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 ♥> 좋고 나쁜 기준의 불확정성
요약 - 본질적으로 차별 없는 구체적 현상에 대한 다른 판단
좋고 나쁜 기준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람인 이상 서로 유사한 감각기관을 갖고 따라서 좋고 나쁘다는 판단도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구체적 형태가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예를 더 존중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국 구체적으로 어떠한 가치기준을 갖느냐 하는 것은 개별적인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좋고 나쁜 기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다 다르게 되면 구체적인 현상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느냐 불만 불쾌를 느끼느냐 하는 것도 그 주체의 개별적인 가치기준에 의하게 된다. 따라서 그 기준을 달리하면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어떠한 현상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만족을 주는가 불만과 불쾌를 주는 것인가 하는 것도 그 개별적인 기준에 의해서 차별적인 평가가 내려질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좋다 나쁘다하는 것은 모두 본질에서는 좋다 나쁘다는 차별이 있을 수 없는 평등한 상태인 것이다.
한편 그러한 기준은 각 주체별로 다를 뿐 아니라 한 주체 내부에서도 순간순간 변화하고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가운데 각 주체가 세운 기준에 따라서 차별적인 모습과 인식이 나타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 ♥> 기준에서의 좋고 나쁨의 동시존재성
우리는 좋다라는 느낌이나 만족만을 원한다. 그러나 반대의 면으로서 좋지 않은 느낌도 얻게 된다. 이런 점에서는 평등한 관계가 있다.
]]]] ♥> 좋고 나쁜 기준의 상대성
한편 좋고 나쁨의 문제는 어느 것을 좋다고 인식하면 그와 반대되는 것이나 일치하지 않는 것은 나쁘다 또는 좋지 않다라고 평가하게 되는 서로 상대적인 관계를 갖고 인식된다. 예를 들면 따뜻함이 좋다면 추운 것은 싫다라던가 춥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상태는 적어도 좋지는 않다라고 평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정한 현상을 좋다라고 판단했으면 그 나머지 현상과 그에 반대되는 현상을 나쁘다 또한 좋지 않다라는 영역으로 존재하게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그 양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라도 양이 많으면 그 질과 강도가 떨어져서 결국 평형을 이루게 됨으로써 상호 평등한 값을 유지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많이 있는 좋은 깨끗한 물에 대해 적게 있는 썩은 오물은 심리적으로는 동등한 값으로 매우 강한 불쾌로 평가되는 것이다.
]]]] ♥> 기준과 판단에서 쾌 불쾌의 값의 전체적 평등성
요약 - 쾌와 불쾌는 전체적으로 평등한 값을 갖게 된다.
]]] ♡> 변화성
만족 불만 희망 두려움 등은 전체적으로 쾌 불쾌의 값에서 평등한 값을 가지고 갈 뿐 아니라 한편 모든 현상과 감각 인식 판단의 경우와 같이 변화를 해 나가는 하나의 정신 현상이다.
]]]] ♥> 인식의 나타남과 사라짐 - 생주이멸(生住移滅)
만족 불만 희망 두려움의 나타남과 머무름과 변화함과 사라짐
모든 것은 변화를 계속한다. 인식자체가 변화하는 성질을 전제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쾌와 불쾌라는 현상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의 하나인 것이다.
+++ 원문끝 93.09.02 ++
+++ 원문 93.09.02 ++
+++ H25본문끝 96.01.25. ++
+++ H25본문 96.01.25. ++
++ h10 단문수정시작 99년07월10일(토)오후19-33 +
++ h10 단문수정마침 99년07월10일(토)오후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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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과 희망의 구조
] ⃝> /280
]] ●> 만족과 희망
앞에서 우리는 만족 불만 희망과 두려움의 전반적인 구조를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의 요소로서 만족과 희망에 집중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 만족과 희망의 구조
]]]] ♥> 전제
만족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과 인식이라는 정신 현상이 선행해야만 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비교 분별 종합 유추하는 정신 기능도 나타나야 한다. 여기서는 감각과 인식의 성립문제가 제기되어진다. 여기에는 외부 대상과 감각기관의 상호관계가 문제된다. 이는 철학적 심리학적으로도 깊게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비교기준으로서의 좋다 나쁘다의 판단과 비교대상으로서의 현실인식과는 어떠한 것이 선행해서 존재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도 부수적으로 문제 될 수 있다. 나누어서 자세히 보기로 한다.
+++ 원문끝 93.09.02 ++
+++ 원문 93.09.02 ++
+++ H11 96.02.11. ++
+++ H11 96.02.11. ++
++ h02 시작 2006년10월02일(월)16시36분 +내용9z-k510와동일하여삭제함**> /K/9Z/K51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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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구조
] ⃝> /290
]]] ♡> 희망의 구조
희망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 ♥> 욕구발생
우리가 무언가를 원한다고 할 때 그 속에는 무언가가 다른 것보다는 낫다거나 좋다는 판단이 잠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잠을 자고 싶다라고 생각하던지 먹고 싶다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 그리고 지금 발이 다쳐서 아픈데 이것을 치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 등등 우리가 원하는 사실은 다양하고 많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의 바탕에는 그 원하는 사실이 좋다든지 최소한 비교대상이 되는 그 어떠한 상태보다는 낫다고 하는 판단이 전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좋다 나쁘다는 판단은 어떻게 행해지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들어가면 대답을 얻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우리는 좋다라는 판단이 어떠한 경우에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의 구체적 내용이 어떻게 결정되어지는 것이냐 하는 의문은 파헤치기 힘든 문제이다. 좀 극단적인 경우들을 생각하여 보자.
예를 들어 파리는 동물의 배설물의 주변에 몰려든다. 사람은 이것을 싫어하고 피한다. 물론 파리가 배설물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 정확한 내용은 파리 자신만이 알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는 바에 의하면 파리가 그런 배설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상과 같이 서로 각 주체 별로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할 때 왜 그것을 좋아하고 다른 것을 싫어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한편 우리가 후천적으로 경험을 통하여 좋아하게 되는 것도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경험을 반복함으로서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처음에는 좋아했으나 계속 반복함으로서 싫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인지 또 그것을 왜 좋아하게 되는 것인지를 완전히 밝힌다는 것은 힘든 일이 된다.
그래서 일단 무언가가 좋다 그리고 어떤 다른 무언가를 싫어한다라는 판단이 전제가 돼 있을 때 비로소 희망의 발생이 문제된다.
그러나 단순히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희망의 상태와는 다르다.
]]]]] □> 현실인식과 기준의 불일치
]]]]] □> 과거, 현재, 미래 현실인식과의 불일치 - 욕구의 발생( - 의 제거, + 의 실현)
]]] ♡> 희망
일치하지 않는 기준내용에서 좋은 내용 (-의 제거, +의 실현된 상태)를 그리는 것
희망은, 좋은 면을 바라보는 상태이다. 좋고 나쁜 면이라는 것은 만족과 불만의 구별기준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좋고 나쁜 면의 양면 중 좋은 기준면 자체에 대한 응시(凝視)상태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자세히 보자면, 적극적으로는 추상적으로 좋은 상태(예를 들어 부자가되는 것)를 바라보거나 또는 구체적으로 좋은 상태(예를 들어 좋은 집)를 설정해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좋은 면이라는 것은 결국 만족,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가치감, 평온과 안정, 희망과 의욕, 희망의 성취상태를 그림, 그리고 희망의 성취자체의 상태 또는 그것들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구체적 상태들을 말한다.
소극적으로는 다음에 밝힐 가지가지의 나쁜 요소가 없는 상태를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나쁜 면이라는 것은 좋은 면의 반대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불만 가지가지의 욕구불충족 좌절 실패감 고통 억압 성남 분노 미움 질투 시기심... 불쾌 짜증 혼란 갈등 번뇌 번민 혼돈.슬픔 우울 ... 보람 및 가치감이 없음 무의미함 건조함 허무감 괴리감(乖離感) 박탈감 이질감 자책감(自責感) 후회감 양심가책 죄의식 소외 따돌림 미움 질투 시기 비난 제재 벌을 받음... 평온 안정감없음 앞에 밝힌 나쁜 상태들의 계속성과 ‘만족...희망의 성취상태를 그림’등 좋은 상태의 일시성(一時性) 초조 안달 긴장 불안 걱정 두려움... 무희망 무의욕 권태 따분함 물림 질림 침체(沈滯) 의욕상실 무력감 비관 절망 또는 희망이 있기는 있으나 위에서 밝힌 나쁜 상태 예를 들어, 강박감 번뇌 초조 안달 긴장 불안 걱정 두려움 등에서의 희망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의 희망추구...‘ 등등의 상태를 말한다.
]]]] ♥> 욕구발생의 모습
]]]]] □> 현실인식 선행
기준이 후에 성립하는 경우
]]]]] □> 기준 선행
현실인식이 후에 나타나는 경우
]]]]]] ■> 기준의 발생
]]]]]]] △> 기존인식의 조합-현재 과거 미래인식과의 불일치
]]]]]]] △> 현재의 기준- 과거 미래인식과의 불일치
]]] ♡> 욕구와 희망 상상 기대 의욕과의 차이
]]]] ♥> 비교기준판단-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 ♥> 희망- ...한다면 좋겠다.‘...한다면’
]]]] ♥> 욕구- ...한다면 좋겠다.(...하지않다. 따라서 좋지않다.)...하고 싶다.
]]]] ♥> 기대-‘...할 가능성이 짙다. 있다.’
]]]] ♥> 의욕- ‘...하고 싶다.’
]]]] ♥> 공상- ‘...은 아니지만 ...이다면’
+++ 원문 93.09.02 ++
+++ H31옮김본문 95.07월-08월 ++
+++ H31옮김본문 95.07월-08월.. ++
===
즐기 람가 평안
] ⃝> /300
]] ●> 만족의 양 질 시간적 평가
만족의 양 질 시간적 평가와 즐거움과 기쁨, 보람과 가치감, 평온과 안정,
]] ●> 즐거움과 기쁨의 의미- 만족의 양 강도,
만족의 + 적인 면, - 의 해소
]] ●> 보람과 가치감의 의미
]]] ♡> 질적인 서열
]]] ♡> 만족도의 서열
]] ●> 평온과 안정의 의미
]]] ♡> 시간적인 평가
]] ●> 인식과 만족
]] ●> 인식의 다른 면
]]] ♡> 만족, 즐거움 불만 고통 희망 두려움등등의 상태
]]] ♡> 무의식
]]] ♡> 꿈
]]] ♡> 일반 감각인식
]]] ♡> 존재 판단
]]] ♡> 가치판단
+++ 원문 93.09.02 ++
+++ 원문끝 93.09.02 ++
===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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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하반야바라밀경』42. 탄정품 (한 p.325)(T8. p308중) “佛言 一切法一性非二性 ..是一法性是亦無性是無性卽是性 是性不起不滅..”; 25. 십무품 (한 p.190)(T8. p270중) “是不滅法 非一 非二 非三 非異 ...以是故 色入無二法數...” 
2) 불교논서 가운데 중론(中論)의 오류는 대부분 이와 관련된다. 
3) 불교내 유부 경량부 유식 계열 논서의 오류는 이와 관련된다. 
4) 참고; 梶山雄一, 권오민 역, 『인도불교철학』(서울: 민족사, 1990), pp.48-. 
5) 『성유식론』(한 pp.285-295) (T31, pp.38하-40)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6) 참고; 『성유식론』(한 pp.352-355) (T31, pp.47하-48중)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相 生 勝義 無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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