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기쁨, 즐거움, 보람, 가치감, 평온, 안정 등은
만족의 양적 질적 시간적 차원의 문제이다.
이들은 앞에서 함께 보았다.
여기서는 만족과 희망을 그에 반대되는
불만 두려움과 함께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논의이유
만족, 희망, 불만, 두려움 등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를 살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는
1차적으로 심리과정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뿐만 아니라 이런 지식을 기초로 행복을 얻는 방법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행복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만족 희망, 불만, 두려움 등에 대해 그 발생
원리와 구조를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좋음의 느낌을 얻는 과정
만족 불만 희망 두려움은 각기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정신과정과 관련된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좋음이란 느낌이 어떤 정신과정을 거쳐서 얻어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좋음을 얻는 정신과정은 다양한 정신 과정을 거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정신과정을 대강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어떤 정신내용을 얻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다음이다.
그것은 외부대상과 주체의
감각기관[눈,귀,코,혀,몸]과 인식기관[뇌]이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주체의 정신 내부에서 많은 내용물[감각내용, 감정, 개념내용,
판단, 의지, 희망...]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런 요소를 기초로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된다.
정신작용의 기초, 실재내용[#]과 감각내용[!]
정신작용의 설명의 어려움
이를 살피기 위해 정신작용을 대강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에는 다음의 어려움이 있다.
[tr]
◈Doctr Gong 2014/01/07/화/11:48
● 서로 다른 차원의 정신내용
먼저 정신내용물에는
그 차원과 성격이 다른 여러 내용이 함께 섞여 있다.
그런데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서로 혼동이 일어나기 쉽다.
예를 들어 ‘꽃’을 예를 들면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외부에 실재하는 꽃[실재내용#]과 신체의 감관 예를 들어 눈[실재내용#]이 관계하여 우리 정신에서 꽃의 모습[감각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한다. 그리고 감각내용을 기초로 인식기관에서는 꽃의 관념내용[개념내용@]을 다시 얻는다. 여기서 관념내용이란 실제 꽃의 모습을 보지 않는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꽃들을 가리키기 위해 ‘꽃’이란 글자나 [kkot]이란 말소리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언어내용으로서 꽃[언어내용%]을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다. 참조로 언어내용의 본질은 앞의 내용과 같은 것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또 다른 감각내용[글자형체!나, 소리!같은 감각내용]이나 관념[글자관념@, 소리관념@] 또는 이들의 기초가 되는 실재내용[외부글자#나 소리#자체]들을 의미한다. 한편 이들 내부에 이들 각 내용을 일으키는 원천으로서 영원히 고정되고 불변적인 본체가 있으리라고 추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추리되는 꽃의 실체[실체내용$]를 또 하나 별도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모든 내용을 언어 ‘꽃’으로서 다 함께 표현할 수 있다. 실제 일상생활에서 ‘꽃’이란 언어표현은 이들 각각을 그 때 그 때 가리키면서 사용된다. 그러나 상호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다지 큰 혼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과정을 분석할 때는 이들 각각의 상호관계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각기 다른 차원의 내용들을 모두 같은 언어로 표현하다보면 혼동이 일어나기 쉽다. 예를 들어 꽃을 보고 꽃의 모습을 얻은 뒤 꽃의 관념을 갖고 이를 기초로 좋은 느낌을 얻는다고 설명한다고 하자. 이 때 각 부분에 사용된 꽃이라는 표현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내용을 가리킨다. 그 결과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따라서 이들을 서로 다른 기호로 구별해 표시할 필요성이 있게 된다. 여기서는 이를 위해 이들 서로 다른 차원의 내용을 실재내용[#] 감각내용[!] 개념내용[@] 언어내용[%] 실체내용[$] 등으로 구별해 표시하기로 한다. 이런 기호를 사용하면 위 내용을 ‘꽃#을 눈#이 대하여 꽃!을 얻고 다시 이를 기초로 꽃@을 얻으며 이 과정에서 좋은 느낌을 얻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 정신작용과 내용 관찰의 어려움
한편 정신작용의 관찰에는 다음의 어려움이 있다.
정신작용은 일상생활에서 늘 익숙하게 반복한다.
그러나 이를 실제로 분석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우선 타인의 정신작용은
그 내용 자체를 다른 제 3자가 파악하기 곤란하다.
물론 언어표현을 통해 어느 정도 추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자체를 제 3자가 직접 얻어 확인할 수 없다.
결국 언어로 표현된 내용이 어떤 정신내용을 가리키는 지는
자신의 정신작용을 스스로 음미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정신작용을 한편으로 수행하면서
또 한편으로 행해지는 정신작용을 음미하고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먼저 수행되는 정신작용 A와 별도로
이를 관찰하는 정신작용 b가 작동해야 한다.
또 이렇게 관찰하는 정신작용 b는
관찰대상인 자신의 정신내용 A를 대상으로 삼아
뚜렷이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관찰대상이 되는 정신내용은
그렇게 뚜렷이 파악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론상 다음 문제가 있다.
파악하고자 하는 정신내용이 A이고,
이 A를 파악하고자 하는 정신작용 b가 작동된다고 하자.
그러면 정신상태는 곧 A+b의 상태로 변질된다.
따라서 본래의 A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한 주체가 일상적인 정신작용 A를 수행하면서
또 별도로 이를 파악하는 의식 b를 작동시켜
A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실제로 쉽지 않다.
[tr]
한편 한 주체는 여러 특이한 정신내용을
골고루 자유롭게 경험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나 웃을 때를 파악하려할 때
각 주체가 늘 자유롭게 그 때 그 때
그런 정신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또 자연스럽게 그런 상황이 될 때는
이를 관찰하는 정신작용이 개입되지 않아,
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정신작용은
대부분의 생명이 매일 행하는 매우 손쉽고 친근한 내용이다.
사실상 정신작용에 대한 복잡한 이해가 없어도
보통 생명체들은 많은 정신작용을 자연스럽게 잘 행한다.
다만 앞의 사정으로 정신작용을 살피는 데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약간 복잡하지만,
정신작용을 이해하게 되면
행복을 얻는 과정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또 이를 이용해 선한 행복을 얻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전제에서 정신작용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획득내용[*]
● 논의의 대상으로서 획득내용[*]
정신작용의 설명을 위해
정신이 가장 기초적으로 얻는 감각내용[!]과
이를 얻게 하는 실재대상[#]과
실재의 주관[#]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감각으로 얻는 내용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대표로 시각만을 기준으로 살피기로 한다.
그런데 이에 관련한 논의는 대단히 많고 복잡하다.
그런데 각 논의들을 이해하는데
혼동을 일으키는
첫 번째 요소는 언어의 애매성이다.
즉, 각 논자별로 대상, 주관, 정신, 감각자료, 감각내용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각 논자가 사용하는 언어표현이
정확히 정신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각 주장의 내용이 함께 불명확해져
혼동을 일으킨다.
이제 본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논의대상을 좀 더 명확하게 가리키는 가운데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논의의 대상으로서 획득내용[*]
논의의 대상을 좀 더 명확히 가리키기 위해
가장 기초적으로 다음의 자기 실험을 해보자.
이제 가만히 앉아 우리 스스로 눈을 감고 뜨고를 계속 반복해보자.
그 때마다, 눈앞에 외부 대상물들과
신체의 일부[손, 발]의 모습이 함께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 경험한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
다음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를 그림으로 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가 가장 먼저 문제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매우 단순한 문제다. 그러나 이 논의가 정신작용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매우 다양한 주장이 있다. 여기서는 이를 논의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논의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시 앞과 같이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자. 그리고 그에 따라 가장 1차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용이 무엇인지 각자가 정확히 확인하자. 그 내용은 주체가 놓인 상황에 따라 먼 산, 도시의 빌딩, 바다, 하늘, 우주의 별의 모습 등 광대한 범위를 다 포함할 수 있다. 여기서 일단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용 전체를 ‘획득내용[*]’이라는 생소한 표현으로 나타내기로 한다. 그리고 획득내용[*]가운데 일부분을 가리킬 때는 그 부분을 가리키는 명칭 다음에 [*] 기호를 붙여 구별하기로 한다. 예를 들어 획득내용[*] 가운데는 산[*] 대상[*] 주체[*]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각 개인 상황마다 이런 획득내용[*]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이 획득내용[*]이 가리키는 내용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다음 논의를 이해해야 한다. 다시 한 번 획득내용[*]을 정의하면 그것은 각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가장 1차적으로 변화하여, 얻거나, 잃어버리는 내용이다. 획득내용[*]에는 획득내용[*]을 기초로 다시 얻는 개념내용, 판단 등은 획득내용[*]에서 제외한다는 것도 주의하기로 하자.
위 그림에서는 편의상 자신이 제3자[*]가 꽃[*]을 보는 것을 바라볼 때 얻는 모습[*]을 나타냈다. 획득내용[*]은 비교적 선명한 그림부분이며 가운데 표시를 하였다. 나머지는 이를 기초로 얻는 여러 정신작용에 대해 본서가 얻는 결론적 내용을 나타낸다.
획득내용[*]의 본질
이제 이런 획득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이해의 편의를 위해 본서에서 취하는 결론을 먼저 밝히면 다음과 같다. 본서에서는 이처럼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얻고 변화하는 획득내용[*]을 감각내용[!]으로 본다. 그것은 정신내용[감각내용!,개념내용@,...]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 감각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 내용[#]은 획득내용[*]과 별개로 있다고 일단 추리한다. 그러나 그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있다, -이 없다, -이다, -이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어떤 이분법적인 분별로도 분별할 수 없다. 한편 이처럼 실재내용[#]이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분별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불교에서는 ‘공(空)하다’라는 표현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상이 본서가 취하는 결론적 입장이다.
그런데 획득내용[*]을 과연 정신내용으로서 감각내용[!]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실재대상[#]과 주체[#]로 볼 것인가부터 문제될 수 있다. 또 획득내용[*]이 감각내용[!]이라면 그것을 일으킨 실재대상이나 주체[#]는 또 어떤 것으로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들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주장들이 많다. 이런 주장들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현상의 진리론’에서 보다 자세히 살피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본서에서도 좋음의 느낌의 발생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런 기초적인 내용이 필요하다. 또한 본서의 다른 논의에도 이런 기초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따라서 그 대강을 살피기로 한다.
우선 눈을 감고 뜸에 따라 1차적으로 변화하는 획득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우선 ㉠ 이 획득내용[*]을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주체자신(정신)[#]으로 나눠 파악하는 입장 ㉡ 이 획득내용[*]의 본질은 정신이라는 입장 그리고 이 정신내용을 외부대상으로 파악한다는 입장[唯心說], 또는 이 획득내용[*]은 단지 정신[識]의 내부 변화일 뿐이며 외부에 실재내용[#]은 없다는 입장[유식무경(唯識無境)-아뢰야식연기설(阿賴耶識緣起說)] ㉢ 이 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이며 이 부분 밖에 실재 대상[#]과 주체[#]를 추리해 설정하는 입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추리한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다시 그 실재내용[#]이 ⓐ 감각내용[!]과 동일한 모습이다 ⓑ 단지 감각내용[!]과 유사한 것으로 추리된다 ⓒ 정신은 이를 끝내 얻을 수 없다는 입장들로 나눌 수 있다.
본서가 취하는 결론은 ㉢의 ⓒ에 해당한다.
감각내용[!]
본서의 결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눈을 떴을 때 파악되는 획득내용[*]을 상식적으로 외부 대상물[#]과 자신의 실재내용[#]으로 나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이는 외부 대상이나 자신의 실재내용[#]이 아니고 자신의 정신내용물로서 감각내용들[!]이다.
우선 본 논의의 결론의 이해를 위해 다음 비유를 든다. ‘한 사람이 꽃을 바라보는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고 하자. 이 때 ㉮ 거울에 비친 ‘사람의 영상!’이 ‘꽃의 영상!’을 바라보는가. ㉯ 아니면 거울 밖 사람#이 거울 밖 꽃#을 보고 단지 그 모습!이 거울에 맺힌 것인가? 여기서 거울은, 이들을 바라보는 이의 정신을 비유한다. 한편 자신의 정신과정을 스스로 관찰하는 경우는 다음 경우에 비유하자. 거울이 둥글어 거울 밑받침까지 비춘다. 이 때 ㉮ 거울에 비친 ‘꽃!과 거울밑받침의 영상!’ ㉯ 또는 영상 밖의 ‘꽃#과 거울#’ 가운데 어느 것이 이 모습을 맺히게 한 것인가. ‘꽃!을 손!으로 잡는다’는 행위도 이들에 준한다.
우선 이는 비유다. 이 비유가 입증근거는 아니다. 다른 입장에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들 수 있다. 다만 본 논의의 결론을 위 비유로 미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 비유에서 모두 ㉯처럼 실재대상#과 주체#가 거울 표면에 영상!을 맺히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정신의 영상!은 외부 실재내용#에 의해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거울비유와 달리, 그 실재내용#은 비록 추리는 되지만 그 내용은 어느 정신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不可得, 空] 이런 결론은 앞에서 본 것처럼 ㉢ⓒ의 입장이다.
이는 우선 획득내용[*]에 대해 상식적인 입장에 반대된다.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획득내용[*]을 통상 ㉠처럼 자신#과 외부사물#로 나누어 해석한다. 그러나 본서의 결론은 이들 획득내용[*]이 ‘정신 안의’ 내용물[감각내용!]임을 의미한다. 이는 오늘날 의학지식과 관련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산에서 도시모습 전체를 획득내용[*]으로 본다고 가정하자. 그 경우, 그 획득내용[*] 전부는 사실은 자신의 뇌# 안의 스크린#에 맺힌 감각내용!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를 감각내용[!]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근거
우선 획득내용[*]을 정신내용[!,@] 가운데 하나로서 감각내용!으로 보게 되는 근거를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획득내용[*]을 대상#과 주체#의 부분으로 나눠 설정한다. 즉, 상식적인 이해에서는 획득내용[*]을 다음 방법으로 정신 밖의 실재대상[#]과 주체[#]로 나누어 생각한다.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우선 어떤 이가 눈을 뜨면 획득내용[*]으로 늘 자신의 신체 일부[*]와 그 외 외부내용의 모습[*]을 얻게 된다. 또 눈을 감으면 이들 모습은 사라진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가운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 부분[*]은 매번 공통해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미국을 가던 프랑스를 가던 자신의 몸 부분[*]만은 늘 얻는 내용이 된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자신의 주체’, 신체 자체[#]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머지 매번 달라지는 내용부분[*]은 외부대상 객체[#]로 생각한다.
한편 이런 판단은 촉각으로도 지지받게 된다. 예를 들어 손[*]을 대어 양 부분에 감촉이 느껴지는 부분은 자신의 신체부분[#]이 된다. 몸[*]에 손[*]을 대면 몸도 감촉을 느끼고 손도 감촉을 느낀다. 그리고 이와 달리 일방적인 촉감만 느끼는 부분은 외부대상[#]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이렇게 획득내용[*]을 자신[#]과 외부 영역[#]으로 나눈다.
그 다음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우선 이 몸부분[주체]#과 나머지부분[외부대상]#이 관계해 정신내용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내용은 획득내용[*] 가운데 자신의 몸부분[*]의 내부에 자리잡는다고 파악한다.
또 타인[*]이 꽃[*]을 보거나 만지는 것을 관찰할 때도 이처럼 판단한다. 즉, 획득내용[*] 가운데 ‘자신의 보는 타인부분[*]이 꽃부분[*]을 보거나 만진다’고 이해한다. 또 타인이 얻은 정신내용은 타인 부분[*]에 숨어 자리잡는다고 이해한다. 또 획득내용[*] 가운데 꽃 모습[*]이 향기를 준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입장과 해석은 일반 의학이나 물리학 또는 상식인의 해석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다음 난점이 있다. 만일 획득내용[*] 가운데 자신의 몸 부분[*]과 외부[*]가 직접 관계해 감각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감각내용!은 어디에 있는가. 사실상 감각기관을 여닫음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이들 획득내용[*] 자체다. 이들 획득내용[*] 외에 또 다른 감각내용은 찾을 수 없다. 물론 이들 획득내용[*]을 얻을 때 정신은 이를 기초로 개념내용[@]을 별개로 얻게 된다. 그래서 이런 개념내용@을 감각내용!으로 혼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따라서 통상 획득내용[*]에서 외부대상과 주체로 나눠 본 내용은 곧 자신의 정신이 얻은 감각내용!이라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실재 대상[#]과 주체[#]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획득내용[*]에서 대상부분[*]과 주체부분[*]을 나눠 이를 실제 작용 반응하는 실재대상[#]과 주체[#]라고 가정한다고 하자. 이렇게 해석하면, 일정한 획득내용[*]은 감각하는 대상[#]과 주체[#]인 동시에 그 대상에 대해 정신이 작용해 얻는 정신내용물[!]도 된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이상한 해석이 된다. 즉, 획득내용[*] 가운데 일부인 대상부분[*]에 다시 그 일부인 주체부분[*]이 작용하여 전체 획득내용[*]을 얻는다는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또 상식적인 해석에 의하면 다음 난점이 있다. 우선 자신이 눈을 감으면 이들 획득내용[*]은 모두 사라진다. 이처럼 이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정말 앞 순간에 그 안에 맺혔던 외부 대상[#]들과 신체일부[#]는 함께 사라진 것일까? 또 나타날 때는 없어졌던 대상[#]과 신체[#]가 다시 나타난 것일까? 획득내용[*]을 실재대상[#]과 주체[#]로 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획득내용[*]이 나타나고 사라질 때도 이들을 얻게 한 실재대상[#]과 주체[#]는 여전히 다른 감각들은 얻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외부대상[*]에 손[*]을 대고 있었다고 하자. 이제 눈을 감아 그런 모습들[*]이 사라져도 촉감[!]은 계속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획득내용[*]의 나타나고 사라짐에 관계없이 여전히 촉감[!]을 주는 실재대상[#]과 주체[#]는 계속 유지된다고 추리해야 한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는 획득내용[*]안의 외부대상[*]과 자신의 신체[*]는 사라진다. 따라서 이렇게 사라지는 획득내용[*]안의 외부대상[*]과 신체[*]를 그런 실재대상[#]과 주체[#]로 볼 수 없다.
한편 획득내용[*]을 실재대상[#]과 주체[#]로 보는 입장은 타인과 자신의 감각과정을 관찰할 때도 문제가 많다. 획득내용[*]과 별개로 실재 대상[#]과 주체[#]를 추리하는 근거를 다음 관찰로 살피자.
이제 이를 위해 옆에 한 사람을 놓고 그 앞에 꽃을 놓고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하게 하자. 그리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보고하게 하자. 그러면 그는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자신처럼 일정한 모습[=그 제 3자의 획득내용[*]]이 사라지고 나타난다고 보고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계없이 그가 ‘못 본다[%]’고 할 때 도 자신의 관찰에서 꽃[*]과 그 타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본다[%]’고 할 때도 꽃[*]과 타인[*]이 서로에게 들어가고 나오는 변화는 없다. 옆에서 계속 관찰하면 그런 보고와 관계없이, 외부물체[*]나 그 사람[*]은 모두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제 3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제 3자는 그의 획득내용[*]이 사라지고 나타남을 반복한다고 보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제 3자의 획득내용[*]과는 별개로 그 제 3자의 외부에 유지되는 외부대상[#]과 제 3자[#]가 있다고 추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제 3자가 얻는 변화는 관찰자가 직접 알 수 없다. 따라서 다음 문제를 계속 추리해보자. ① 우선 제 3자에게 일어난 변화는 어떤 내용일까? ② 이런 제 3자의 변화는 어느 부분에서 일어나는 내용인가? ③ 또 제 3자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어떤 것들이라고 해야 하는가? ④ 종국적으로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은 어떤 차원의 내용일 것인가?
① 먼저 제 3 자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이었을까를 다음 방법으로 추리해보자. 우선 자신도 그 제 3자처럼 다시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해보자. 이 때 자신이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함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내용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 본 자신의 획득내용[*]이다. 한편 자신과 제 3자는 신체가 유사하다. 한편 제 3자가 언어로 정직하게 보고해준다면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자신의 획득내용[*]과 유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기초로 제 3자가 보고한 변화도 자신의 획득내용[*]에 유사한 내용일 것으로 추리하게 된다. 즉, 제 3자의 획득내용[*]은 외부대상[*]과 제 3자 자신의 신체의 일부[*]의 모습일 것이다.
② 이제 제 3자가 일정한 획득내용[*]이 나타나고 사라진다고 보고한 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를 생각해보자. 제 3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외부대상과 제 3자는 관찰자의 관찰에서는 대부분 일정하게 유지된다. 제 3자가 획득내용[*]이 사라진다고 보고할 때에도 사라지는 내용을 관찰할 수 없다. 나타난다고 할 때도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할 수 없다. 단지 그 변화는 제 3자가 해주기 때문에 추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보고는 그 제 3자[*]만 한다. 따라서 그 변화는 꽃[*]과 제 3자[*] 가운데 그 제 3자[*] 영역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변화로 추리할 수 있다.
③ 이제 제 3자에게 그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는 무엇인가? 제 3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제 3 자쪽 영역[*]의 내부에서 제 3자만의 획득내용[*]을 갖는다. 이 때 관찰자는 관찰자가 본 제 3자의 눈[*]이 감고 뜸의 변화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관찰자가 본 대상[*]에 대해 제 3자가 눈[*]을 떠 이들이 관계할 때 제 3자가 획득내용[*]을 얻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관찰자가 본 제 3자의 눈[*]이 감겨지면 그 관계가 맺혀지지 않아 제 3자의 획득내용[*]의 사라진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는 제 3자의 경우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그 제 3자의 획득내용[*] 밖의 내용 관찰자가 본 대상[*]과 눈[*]의 관계에 설정한다. 이는 제 3자의 획득내용[*]을 얻게 한 실재대상과 주체를 제 3자의 획득내용[*] 안의 각 부분[*]에 설정하는 주장들과는 다른 내용이 된다.
따라서 이는 앞에서 자신의 획득내용[*]을 이해할 때와는 다른 해석이 된다. 앞에서 자신의 획득내용[*]을 이해할 때는 자신의 획득내용[*] 가운데 대상[*]과 자신의 신체부분[*]이 관계한다고 이해하였다. 만일 이를 제 3자의 획득내용[*]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앞과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 즉, 제 3자의 획득내용[*]은 관찰자가 본 외부대상[*]과 관찰자가 본 제 3자[*]과 관계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제 3자의 획득내용[*] 가운데서의 외부대상[*]과 제 3자의 획득내용[*] 가운데서의 제 3자 자신[*]이 관계한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쪽 해석이 타당할 것인가? 관찰자가 본 외부대상[*]과 관찰자가 본 제 3자[*]과 관계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 하면 제 3자가 눈을 감고 뜸의 변화에 따라 제 3자가 획득내용[*]을 얻고 잃고를 반복해 보고하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 3자의 획득내용[*]을 일으킨 실재 대상[#]과 실재하는 주체[#]를 제 3자의 획득내용[*] 밖에 설정해야 옳다고 추리할 수 있다.
④ 한편 제 3자의 획득내용[*]은 어떤 차원의 내용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제 3자의 획득내용[*]은 관찰자가 직접 관찰할 수 없다. 그것은 관찰자가 관찰 가능한 외부대상[*]이나 제 3자의 신체[*]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제 3자의 영역[*]에 숨은 제 3자의 정신적 내용으로 추리해야 타당할 것이다.
이런 내용을 기초로 이제 다시 자신의 획득내용[*]을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이제 자신이 눈을 뜨면서 얻은 획득내용[*]을 확인해보자. 이것은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의 변화와 유사할 것이다.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음에 따라 획득내용[*]으로서 꽃[*]과 자신의 모습[*]을 얻거나 잃는다. 이 때 이런 획득내용[*]의 변화와 관계없이 이를 일으킨 실재 외부대상[#]과 자신의 감관[#]이 획득내용[*] 밖에 따로 있다고 추리해야 옳다. 그리고 이런 획득내용[*]은 그 가운데 실재하는 자신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옳다. 즉, 획득내용[*]의 변화는 그 획득내용[*]의 일부인 자신[*]에서 일어난다고 추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획득내용[*]은 자신# 영역에 머무르는 자신의 정신내용물[!]로 추리해야 한다. 오늘날 타인의 정신 영역은 타인 신체 안의 뇌로 추리한다. 따라서 자신이 본 모든 사물[*]과 자신[*]의 모습은 아무리 광대해도, 모두 그런 뇌[#] 스크린에 자리잡은 모습[!]으로 추리해야 한다. 일단 이는 모두 다른 입장들과 다른 해석이다. 이제 손[*]을 내어 꽃[*]을 잡는다고 하자. 이때도 자신의 마음 속 손[!]이 꽃[!]을 잡는다고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감각내용들[!]의 변화에 상응한 손[#]과 꽃[#]의 변화[#]가 정신에 그런 모습[!]으로 맺힌다고 이해해야 한다.
감관이 외부대상과 관계하여 얻어낸 정신내용물 가운데 가장 1차적인 내용물을 감각내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각내용[!]을 기초로 다시 얻는 정신내용물을 개념내용[@]이라고 한다. 결국 자신이 눈을 감고 뜸에 따라 1차적으로 변화하여 얻는 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의 하나로서 감각내용[!]인 것이다.
이런 관계를 거울을 놓고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거울에 사람과 꽃의 모습이 맺힌다고 하자. 이 때 사실은 거울 밖의 실재 사람[#]이 꽃[#]을 바라보거나 만지고, 그 영상만이 거울에 맺힌 것이다. 그런데 거울 모습만을 보고 외부실재[#]를 보지 못하는 이가 거울만을 계속 본다고 가정하자. 그 경우에는 자칫 거울에 비친 ‘사람의 영상부분!’이 ‘꽃의 영상부분!’을 바라보거나 만진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작용은 외부의 사람[#]이 수행하고 그 영상!이 거울에 맺힌 것이다. 따라서 영상!의 한 부분이 다른 영상!을 실제로 보거나 만지는 것으로 이해함은 잘못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이 감각내용!을 실재내용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다음이다. 우선 실재대상과 주체[#]의 내용은 다음에서 살피는 것처럼 주체가 직접 얻지 못한다. 얻는 것은 오직 앞에서 본 감각내용[!] 밖에는 없다. 마치 앞의 거울의 비유에서 오직 거울에 비친 내용 밖에는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상황이 닫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그 감각내용[!]은 실재대상[#]과 주체[#]로부터 변화되는 내용을 즉시즉시 반영해준다. 그래서 결국 이 감각내용[!]을 실재대상과 주체[#]와 동일시하여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동일시해 이해해도 생활에서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컵[!]을 손[!]으로 만지거나[!] 들어올리면[!], 컵은 뜻대로 촉감[!]을 주거나 컵이 들어 올려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따라서 컵의 모습[!]을 굳이 정신내용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생활에 하등 지장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만일 이를 정신내용[!]으로 이해하면 부적절하게 생각되기 쉽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정신내용의 일부분인 손[!]이 또 다른 정신내용인 컵[!]을 만져 촉감[!]을 얻거나 컵이 들어올려진다고 이해하면 부적절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은 감각내용[!]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면 결국 그에 상응한 실재내용[#]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곧바로 감각내용[!]으로 얻어지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거울의 비유를 들면 거울에 비친 컵의 영상[!]자체가 거울에 비친 손의 영상[!]자체를 만질 수는 없다. 그러나 거울에 비춰진 컵의 영상[!]을 손의 영상[!]이 만져지는 모습을 얻으려 노력하면 실제 거울 밖의 신체가 그렇게 움직여주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곧바로 거울의 영상[!]으로 얻어지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모습의 변화를 감각내용[!]으로 이해하는 전제에 의하면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일정 주체부분[!]과 대상[!]이 관계 맺는다고 보여질 때 사실은 그 실재내용[#]들이 서로 관계 맺는다. 단지 그 내용이 우리에게 감각내용[!]으로 그와 같이 맺히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감각내용[!]안에서 손[!]으로 다리[!]를 만진다고 보일 때, 사실은 손[#]이 다리[#]를 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 각기 시각으로 그런 모습이 보이고, 또 촉각으로 감촉이 함께 느껴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현실생활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어떤 해석을 따르더라도 각 주체가 실제 얻는 내용은 감각내용[!]으로서 획득내용[*]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주체는 이 감각내용[!]을 기초로 활동한다. 그리고 이렇게 활동하면 실재내용[#]도 그에 상응해 변화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지장이 없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만 이 획득내용[*]을 실재 주체[#]나 대상[#]으로 이해하면 인식론적인 해석상 많은 오류가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는 논의의 결론으로 획득내용[*]은 정신적 내용으로 감각내용임을 보았다. 이제 다음은 이런 감각내용[!]으로서 획득내용[*]을 얻게 한 실재 주체[#]나 대상[#]은 어떤 내용인가를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실재 대상[#]과 주체[#]
본서의 결론
앞에서는 자신이 눈을 감았다가 떠서 얻게 되는 획득내용[*]이 정신내용물로서 감각내용[!]임을 보았다. 그리고 이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주체[#]는 획득내용[*]과 별개로 있다고 일단 추리했다. 그러나 그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어떤 주체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있다, -이 없다, -이다, -이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어떤 이분법적인 분별로도 단정해 판단할 수 없다. 한편 이처럼 실재내용[#]이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분별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불교에서는 ‘공(空)하다’라는 표현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상이 본서가 취하는 결론적 입장이다.
근거
앞과 같은 결론은 어떤 근거로서 도출되는가? 일단 앞에서 본 내용이지만 다시 정신과정을 이해해보자. 우선 제 3자의 정신작용의 관찰에서 다음 사실을 추리할 수 있다. 제 3자는 눈을 감고 뜸에 따라 획득내용[*]의 변화를 보고한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하는 제 3자의 획득내용[*]은 오직 그 제 3자의 영역 내부에 숨어 있다. 따라서 이는 제 3자의 정신 내부에 있는 정신내용이라고 추리한다. 그리고 제3자의 정신내용 자체는 관찰자는 직접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제 3자의 정신내용에 변화가 있음을 제 3자가 보고해줘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자신이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얻는 획득내용[*]과 유사하리라고 추리하게 된다. 그런 추리는 제 3자의 보고내용과 함께 제 3자와 자신의 신체가 갖는 유사성에 기초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관찰자는 제 3자의 정신내용의 변화와 관계없이 외부대상[!]과 제3자의 모습[!]이 일정하게 유지됨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기초로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 밖에 별도로 이를 얻게 한 실재대상[#]과 제 3자[#]를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를 기초로 자기 자신의 감각내용[!]으로 돌아오자. 자신도 눈을 감았다가 뜰 때 변화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얻은 감각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자신을 제 3자가 관찰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제 3자도 자신이 얻은 감각내용[!]은 직접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 3자는 내가 얻는 감각내용[!]과는 별도로 이를 얻게 한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내 모습에 대해 다시 감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얻은 감각내용[!]과 별도로 그 외부에서 나 자신과 제 3자에게 감각내용[!]을 얻게 하는 실재내용들을 나 자신의 획득내용[*] 밖에서 추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내용[!]을 얻게 하는 실재하는 자신#과 대상#이 일단 추리된다고 하자. 그럴 때 이 실재내용들#을 어떤 내용으로 정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 감각내용!으로 파악된 대상!과 자신의 모습!과 동일한 내용이라는 입장 ⓑ 단지 그런 모습들!과 유사하리라고 추리된다는 입장 ⓒ 정신은 그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어 그 유무나 내용을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 있다. ⓓ 또는 극단적으로 그런 실재내용#은 아예 전혀 없이 오직 정신이 자기분열을 통해 감각내용!을 만들어 냈다고 단정하는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불교의 아뢰야식설, 유식무경설 등]
본 논의의 결론은 ⓒ다. 즉, 앞처럼 실재내용#을 감각내용!과 별도로 추리 설정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 실재내용#의 유무와 그 모습은 단정할 수 없다. 이는 다음 이유 때문이다.
자신이 얻은 감각내용! 밖에 이를 얻게 한 실재하는 대상과 주체[#]가 있다고 가정한다. 이 실재하는 대상과 주체[#]의 내용은 무엇일까?
우선 자신이 제 3자를 관찰할 때를 생각해보자. 제 3자가 얻는 감각내용[!]과 별도로 이를 얻게 한 실재내용[#]은 무엇일까. 관찰자 자신은 제 3자가 얻는 정신내용의 변화와 별개로 제 3자!와 외부대상의 모습!을 확인한다. 이들은 제 3자가 보고하는 변화와 관계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래서 이로써 감각내용[!]의 외부에 감각내용[!]과 별개로 존재하는 외부 실재대상과 주체의 존재를 추리하게 한다. 그런데 이 때 자신이 본 외부대상[!]과 제 3자의 모습[!]이 제 3자에게 일정한 내부적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 자체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얻은 감각내용!에 불과한 것이다. 즉, 그것은 제 3자가 얻은 감각내용!에 대응한 실재내용#자체가 아닌 것이다.
이제 반대로 제 3자가 자신을 관찰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제 3자는 마치 자신이 제 3자를 관찰하는 경우와 같은 해석을 하게 된다. 내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감각내용!은 사라지고 나타남을 반복한다. 이 때 내가 얻은 감각내용!은 제 3자가 직접 확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제 3자는 내 내부의 정신내용의 변화와 별도로 외부에 일정하게 유지되는 대상과 내 모습을 감각내용!으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내게 정신내용을 얻게 한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주체[#]의 내용인가? 아니다. 그것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얻은 또 다른 감각내용!일 뿐이다. 즉, 그것은 나에게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자체의 모습은 아니다. 결국 제 3자가 본 감각내용!은 내가 얻은 감각내용!과 같은 차원의 감각내용!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자신이나 제 3자나 모두 정신내용! 외부에 있는 실재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없다. 각기 상대의 감각내용[!]과 별도로 그 외부에서 새로이 감각내용[!]만을 얻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한편 자신이 자신을 관찰할 때는 감각내용[!]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얻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이 타인을 관찰할 때는 타인의 정신내용[!,@]을 직접 얻지 못한다. 그리고 타인[!]과 대상[!]만을 얻는다. 결국 대상#, 자신#, 타인#의 실재내용은 어느 경우에도 누구도 직접 얻지 못한다. 자신이나 제 3자나 얻는 것은 모두 관찰자들 자신이 얻은 감각내용!뿐인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실재내용#의 유무를 단정할 자료를 끝내 얻지 못한다. 더욱이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정신내용[!]과 실재내용[#]간의 관계나 상호 내용의 일치여부를 단정할 근거 역시 얻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정신내용[!]을 얻게 한 실재대상과 주체[#]는 그 존재가 추리는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이 얻은 내용[!,@]이 있을 때 이런 내용을 얻게 만든 실재내용#을 직접 얻고자 한다. 그런데 자신이나 제 3자나 정신이 얻어낸 내용은 그런 실재내용# 자체가 아니다. 결국 자신이나 제 3자나 또 어떤 주체도 모두 이 추리에 해당하는 실재내용[#]자체를 얻어낼 길이 없다. 어떤 내용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실재내용#의 유무나 모습은 궁극적으로 그 누구도 직접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 -이 있다 -이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정신 내 일체의 이분법적 분별을 행할 수 없게 된다. 끝내 그 내용을 하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정신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려 할 때 생기는 한계가 된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실재대상#과 주체#의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런 실재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고[不可得] 따라서 이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으며[不二] 실재내용#이 이런 상태에 있음을 언어표현상 ‘공(空)하다’라고 표현한다. 이 때 ‘얻을 수 없음’ ‘불이(不二)’ ‘공’ 등의 표현은 예를 들어 꽃, 돌과 같은 외부대상#, 자신의 실재# 내용을 구할 때 공통해 얻는 실재#의 내용이나 특정한 성질#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용을 얻지 못하고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임시적으로 사용하는 언어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꽃, 돌, 나 자신의 실재내용#를 ‘얻을 수 없어’ 함께 공(空)하다고 표현하지만, 이들의 실재내용#이 공함으로서 서로 같다거나 다르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꽃과 돌이 함께 공하니, 서로 같고, 따라서 꽃은 곧 돌이고 돌은 곧 꽃이다는 식으로 분별함은 잘못이다. 이런 동가치환(同價置換)을 이 경우에는 행할 수 없다. 수학에서는 a=b c=b 일 때 동가치환을 행해서 a=c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런 동가치환이 성립하려면 역도 완전히 성립해야 한다. 수학에서는 a=b란 표현은 b=a도 의미한다.[합동] 따라서 위와 같이 동가치환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선 언어표현에서는 그런 관계가 항상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예를 들어 남자는 사람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따라서 ‘남자는 곧 여자다’라고 판단하면 논리적 오류가 된다. 더욱이 공하다는 표현은 어떤 직접적 성질을 가리키는 언어표현이 아님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a=공 b=공이라고 할 때 그 공은 어떤 의미나 값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 ]을 어떤 내용도 얻지 못함의 표시라고 할 때 a=공 b=공 등의 표현은 a=[ ] b=[ ]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값이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공이나 [ ]을 기초로 동가치환을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이라는 표현은 ‘-과 다름’을 의미하지도 않지만 적극적으로 ‘-과 같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를 이해하면 이런 관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실재내용#의 공함, 이분법적 분별을 떠난 상태임 등을 이해할 때 자칫 이를 ‘하나인 어떤 무엇’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실재내용#에 대해 자칫 하나의 근본정신[根本識] 일심(一心) 일물(一物) 등과 같은 개념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어떤 내용도 얻을 수 없다는 것과 어떤 하나를 세워 이해하는 것은 서로 엄격히 다르다. 그리고 함께 다 같이 공하다라는 표현도 이들이 적극적으로 같은 한 성품 한 상태임을 뜻하는 ‘하나’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1) 따라서 결론적은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정신은 그 실재내용을 일체 얻을 수 없다는 ⓒ의 입장에 머무르게 된다. 앞에서 본 나머지 입장들은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실재내용에 대해 모두 한계를 넘어선 지나친 주장이다.
정신은 일단 얻은 감각내용!과 개념내용@을 기초로 거꾸로 실재내용#를 추리한다. 그리고 이 실재내용#이 문제될 때 실재내용#를 얻지 못하므로 공하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실재내용#에 대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다르다 등으로 주장하면, 이들 자체는 근거 없는 주장이 된다. 그것의 참을 입증할 자료를 하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런 주장은 결국 ‘옳다 그르다’ 어느 쪽으로도 단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그런데 자칫 이를 넘어 어느 쪽 주장의 ‘참거짓을 단정’하면, 이 부분은 오류가 된다. 참이나 거짓을 입증할 자료를 모두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가 실재내용에 대해 근거없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도 공을 주장하면서 그런 주장의 ‘거짓을 입증’하는 논증은 성립할 수 없다. 비록 상대 주장이 참인 근거는 없지만 또 반대로 거짓을 ‘단정할’ 자료 또한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2) 그러나 또 일방이 스스로 실재내용#에 대한 자신 주장의 ‘참을 단정해’ 주장함도 오류가 된다. 그 참을 입증할 자료를 하나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3) 이들 모두 주장에 대한 ‘입증 근거 없이 주장의 거짓 참을 주장하는 부분’이 오류가 된다.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실재내용#자체를 얻을 수 없어 공하다라고 표현한다고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한편 실재내용#자체를 얻지 못하므로 현상에서 얻는 감각내용이나 개념내용에 있어서의 변화과정은 얻은 정신내용의 상대적 관계로만 설명하게 된다. 참고로 이렇게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불교의 연기관계다. 이 연기관계 내용을 실재내용#에서의 관계로 오해하면 다시 위 각 주장의 혼동들과 관련된다.
이제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획득내용[*]을 가져다 준 실재내용#의 존재는 획득내용[*]과 별도로 추리는 되지만, 그 내용을 끝내 얻지 못함을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얻은 감각내용을 일으키는 실재내용으로서 대상[#]과 주체[#]는 결국 그 내용을 얻지 못하여 공(空)하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실재내용[#]과 정신내용 가운데 감각내용[!]을 살폈다. 본서가 취하는 결론은 이와 같다. 그러나 사실상 획득내용[*]의 성질 및 이와 관련하여 감각내용[!]과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다른 주장들이 있다.
본서에서 이들에 대해 상세히 취급함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실제로 좋은 느낌의 발생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 모두를 이해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의 주장이 확실하게 옳은가, 혹시 다른 주장들이 옳지는 않은가의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앞으로 전개하는 모든 논의에서 공통적인 기초가 되어준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 독자를 위해서 관련된 논의를 좀 더 진행한다. 다만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는 본서에서는 이 부분을 지나치고 현상의 진리론에서 좀 더 상세히 살펴봐도 무관하다고 본다.
획득내용[*]에 대한 다른 주장들
앞에서는 획득내용[*]이란 생소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용어가 본서에서만 사용하는 생소한 표현이므로 또 한 번 획득내용[*]의 정의(定義)를 제시해보자. 획득내용[*]은 각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가장 1차적으로 변화하여, 얻거나, 잃어버리는 내용이다. 그렇게 획득내용[*]을 정의한 가운데 이 획득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에 대해 살폈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결론적으로 이런 획득내용[*]이 정신내용[감각내용!,개념내용@..] 가운데 하나로서 감각내용[!]임을 보았다. 그리고 이 감각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 내용[#]은 획득내용[*]과 별개로 있다고 추리하였다. 그러나 그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있다, -이 없다, -이다, -이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어떤 이분법적인 분별로도 분별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래서 이처럼 실재내용[#]이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분별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불교에서는 ‘공(空)하다’라는 표현으로 표현하게 됨까지 살펴 보았다. 이상이 본서가 취하는 결론적 입장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결론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획득내용[*]에 대해서는 이와는 다른 다양한 견해가 있다. 본서는 당연히 이들 견해가 잘못된 견해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견해들은 대강 어떤 것들이 있으며 이들이 왜 타당하지 않은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이하에서 이들에 대해 살핀다.
우선 눈을 감고 뜸에 따라 1차적으로 변화하는 획득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주장들이 있다.
우선 ㉠ 이 획득내용[*]을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주체자신(정신)[#]으로 나눠 파악하는 입장 ㉡ 이 획득내용[*]의 본질은 그것이 외부대상이면서 또한 정신적 본질을 갖는다는 입 장 그래서 이 정신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내용을 파악한다는 입장[唯心說], 또는 이 획득내용[*]은 단지 정신[識]의 내부 변화일 뿐이며 외부에 실재내용[#]은 없다는 입장[유식무경(唯識無境)-아뢰야식연기설(阿賴耶識緣起說)] ㉢ 이 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이며 이 부분 밖에 실재 대상[#]과 주체[#]를 추리해 설정하는 입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추리한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다시 그 실재내용[#]이 ⓐ 감각내용[!]과 동일한 모습이다 ⓑ 단지 감각내용[!]과 유사한 것으로 추리된다 ⓒ 정신은 이를 끝내 얻을 수 없다는 입장들로 나눌 수 있다.
본서가 취하는 결론은 ㉢ⓒ이다. 따라서 나머지 견해들에 대해서 이하에서 살핀다.
획득내용[*]은 실재내용[#] 그 자체라는 입장
상식적인 견해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획득내용[*]에 대해 상식적으로 갖는 판단은 본서와 같은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 내용이다.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통해 얻는 획득내용[*]을 곧바로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 자체[#]와 자신부분[#]으로 나눠 생각한다. 그것을 자신의 정신안의 내용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이런 가장 상식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하게 살폈다. 그리고 상식적인 견해가 잘못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견해를 쉽게 갖는 이유와 또 현실생활에서 이런 잘못된 견해를 기초로 생활해도 큰 지장이 없게 되는 이유도 함께 살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어떤 잘못이 있고 왜 본서의 결론이 타당한가도 이미 살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시 그것을 살피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 견해 외에도 여전히 상식적인 견해와 같이 획득내용[*]을 대상자체[#]와 자신[#]의 내용으로 이해하여 이론을 전개하는 입장이 있다. 그것들은 상식적인 견해가 갖게 되는 난점을 나름대로 해결하고자 구성된 이론들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획득내용[*]을 통상 외부대상[#]과 주체[#]로 나눠 생각한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임은 이미 보았다. 그런데 이런 통상적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단지 ② 주체가 감각내용[!]을 아예 얻지 않는다거나, ③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은 외부대상[#]에 맺힌다는 식으로 해석만 바꿀 수도 있다. 이들을 차례로 보자.
투영설, 감각내용[!] 부존재설
이 입장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얻게 되는 획득내용[*]을 그대로 실재대상[#]과 주체[#]로 이해한다. 이런 상식적인 해석을 기초로 한 다음 획득내용[*]을 얻고 잃는 가운데 정신은 수정(거울)처럼 전혀 변화하지 않으며, 단지 외부사물을 접촉 투영할 뿐이라고 본다.4)
이 입장은 다음 해석을 취한다. 우선 주체가 눈을 뜰 때 정신적 감각내용을 얻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정신에는 단지 외부의 실재대상[#] 그 자체가 투영(投影)되어 비추일 뿐이다. 그래서 주체[#]가 눈을 떠 얻는 획득내용[*]은 실재대상[#] 그 자체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그 실재대상은 자신[#]에 투영되지 않는다. 이 때 실재대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실재대상[#]은 눈을 떴을 때 얻는 그 모습[*] 자체로 존재한다. 단지 눈을 감아 투영되는 것이 차단되기 때문에 사라진 것처럼 인식될 뿐이다. 그리고 눈을 뜨면 실재대상[#]은 눈[#]을 통해 마음에 투영(投影)되어 맺히게 된다. 따라서 눈을 떠 획득내용[*]이 나타나는 것을 투영(投影)으로 표현하고, 획득내용[*]을 실재대상[#] 자체라고 주장한다. 이는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생기는 획득내용[*]의 변화를 외부에 실재하는 내용[#]이 마음에 투영되고 않고의 차이로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설은 투영을 수정구슬이나 거울을 통해 비유한다. 예를 들어 수정구슬이나 거울을 사물에 대하면 모습이 맺힌다. 이 때 수정(거울) 자체에 변화가 있거나 그 안에 어떤 내용물이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는 변화가 있다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를 비유로 들어 어떤 주체가 획득내용[*]을 얻는 것은 주체[#]가 실재내용[#]과 다른 별도의 정신내용을 얻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자 한다. 정신은 아무런 변화 없이 실재대상[#]을 비출 뿐이다. 따라서 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이 아니며 실재대상[#] 그 자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상식적인 견해가 갖는 난점을 일부 해결할 수도 있다. 이는 우선 주체가 눈을 떠 얻게 된 획득내용[*]을 주체 내부의 변화내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인정하면, 그것을 정신내용[!]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부정하기 위해 주체에서의 변화를 일단 부정한다. 한편 상식적인 입장을 앞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제 3자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획득내용[*]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변화를 보고한다. 그런데 이 때 관찰자는 그런 변화의 보고와 관계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제 3자와 대상을 관찰한다. 그래서 제 3자가 보고한 변화는 제 3자의 내부에서만 일어난 정신내용의 변화로 추리한 것이다. 그런데 제 3자의 변화를 투영으로 이해하면 이런 해석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즉 제 3자가 보고한 변화는 제 3자의 정신내용에서의 변화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감관을 여닫음에 따라 외부사물[#]이 투영되고 안 되고의 차이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눈을 뜨면 정신내용자체가 변화한 것이 아니다. 외부사물자체[#]가 그대로 투영되는가 안 되는가의 변화만 갖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다음 난점이 있다. 이 설의 주장대로 주체가 눈을 떠 얻은 내용물은 외부대상[#]자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때 주체는 도대체 어떤 변화를 하기에 외부대상[#]을 받아들이고 안하고를 반복하는가? 이것이 1차적으로 문제된다. 앞에서는 투영을 주체에서 변화가 전혀 없는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눈을 떠 투영이 될 때나 눈을 감아 투영이 안 될 때를 비교하여 주체나 정신에 아무 변화가 없다고 가정하자. 정말 그렇다면, 사실상 주체는 눈을 뜨고 감았다는 사실 이외에 투영 전후로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여야 한다. 그러나 투영이 이뤄지면 각 주체는 일정 내용을 얻고 잃는 변화를 경험한다. 따라서 자신이나 제 3자나 투영 전후를 통해 그 주체 쪽에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고 추리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주체가 눈을 뜸에 따라 얻어진 획득내용[*]을 단지 외부사물[#]자체라고 이해하는 것은 난점이 있다.
이를 수정의 비유로 이해하면 다음 비판이 가능하다. 물론 비유의 내용을 직접 비판하는 것은 논의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해를 위해 비유에 대한 비판을 해보자. 수정(거울)에 투영 또는 반사된 내용[모습들*]이 있다고 하자. 이 때 비유에서 수정(거울)은 아무런 실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일 투영으로 수정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어떤 모습이 수정에 맺혀 보이는 것도 인정할 수 없다. 그런 변화가 전혀 없다면, 어떤 돌이나 모래가 외부사물을 상대하는 경우를 비유로 들어야 한다. 돌이나 모래 따위는 어떤 변화도 없고 투영전후에 모습을 맺히는 변화도 없다. 그러나 수정은 모습을 맺히고 안 맺히고의 변화가 있다. 만일 아무 변화가 없다면, 수정은 수정의 기능을 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수정(거울)이 모습을 맺히게 할 때 수정 자체가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수정은 물체가 모습을 전달하는 과정 사이에 끼여 원 모습과 다른 또 하나의 모습을 맺히게 하는 변화를 일으킨다. 그것이 모래나 돌과 다른 차이다. 그리고 수정(거울)에 모습이 맺힐 때는 수정을 통해 보이는 모습과 별도로 수정 외부에 원래의 물체를 또 하나 보게 된다. 즉, 수정이 변화를 하던 않던, 원래의 외부물체와 다른 모습을 수정은 또 하나 비추는 것이다. 그래서 수정에서는 수정에 맺힌 모습과 외부의 원래 물체 둘을 보게 된다. 그리고 수정을 통해 맺히는 다른 모습이 바로 투영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외부 물체를 직접 바로 보는 것과 수정을 통해서 보는 것에서 차이가 있게 된다. 그런데 주체가 획득내용[*]을 얻을 때는 획득내용[*]만 얻는다. 따라서 수정에서 두 종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과 획득내용[*]의 관계가 들어맞지 않는다. 이 경우 원 외부물체와 수정을 통해 변화된 모습 가운데 무엇에 획득내용[*]을 비유한 것인지를 정할 수 없게 된다.
먼저 획득내용[*]을 수정을 통해 투영 변화된 모습이라 하면 이를 외부사물자체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수정의 비유라면, 수정에 투영된 모습과 별도로 외부사물[#] 모습도 하나 더 얻어야 마땅하다.
한편 획득내용[*]을 외부사물자체라고 하자. 이 경우 눈을 감아도 외부사물은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수정을 통해 투영된 모습만 사라져야 한다. 또 눈을 뜰 때는 외부사물은 그대로 있고 다시 이에 수정이 투영시켜 변화한 다른 모습을 하나 더 얻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관찰할 수 없다. 이 경우 자칫 개념내용을 이런 투영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오해할 수가 있다. 그래서 눈을 뜰 때 얻은 획득내용[*]은 외부사물자체이고, 개념내용[@]을 투영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정신이 얻는 감각내용은 없게 된다. 또 이런 이해에서는 눈을 감을 때 획득내용[*]이 사라지는 것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눈을 감을 때는 외부사물자체[#]는 그대로 있고 수정이 변화시킨 모습[개념내용]만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외부사물자체[#]가 사라지고 수정이 변화시킨 모습으로 본 개념내용은 사라지거나 않거나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내용을 가지고 이에 적용하는 것도 들어맞지 않게 된다.
이 설의 주장대로 수정의 투영과정을 단지 외부사물[#]의 변화내용으로 인정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를 수정의 투영과정으로 비유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결국 주체가 얻은 하나의 획득내용[*]을 투영이란 모호한 용어로 외부실재내용[#]으로 보는 동시에 곧 인식된 정신내용[!]으로 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즉 하나의 동일한 획득내용[*]을 성격이 다른 두 내용 모두에 적용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또 정말 정신에 변화가 전혀 없다면, 도대체 정신이 행하는 감각작용의 의미는 무엇인가도 문제된다.
감각내용 외부존재설
한편 앞의 획득내용[*]이 실재대상[#] 등이라는 상식적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식적 입장이 갖는 난점을 피하기 위해 다음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즉, 외부대상에 대해 감관을 열면 외부대상[#]에 그대로 자신이 얻는 감각내용[!]이 겹쳐 하나가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 역시 정신이 얻은 획득내용[*]을 외부 실재대상[#]으로 인정하려는 주장이다. 그리고 동시에 감각내용[!]은 이에 그대로 일치한 내용으로 맺힌다고 해석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에 의하면 하나의 획득내용[*]은 외부실재대상[#]이면서 동시에 정신이 얻은 감각내용[!]이 된다. 그런데 이 주장은 우선 주체 밖의 외부대상[#]에 주체가 얻는 정신내용[!]이 맺힌다는 이상한 주장이 된다. 한편 만일 획득내용[*]이 외부실재대상[#]이라면 눈을 감을 때 외부실재대상[#]은 그대로 남고 정신이 얻은 감각내용[!]만 사라져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주체만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을 감을 때는 외부실재대상[#]과 감각내용[!]이 함께 사라지는 결과가 나타난다. 따라서 이런 설명도 난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획득내용[*]은 실재대상이며 정신적 본질을 갖는다는 설
유심론(唯心論)
앞에서 본 입장들은 획득내용[*]을 실재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감각내용[!]은 없다거나, 또는 주체 밖에 있는 실재대상에 일치해 나타난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획득내용[*]을 실재대상[#]으로 보면서 다시 그 본질이 정신적 본질[!]을 갖는다는 해석을 하는 입장도 있다.
우선 이 설은 상식적 입장에서 획득내용[*]이 대상[*]과 주체[*]로 분리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또 한편 대상으로 본 내용이 사실은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낸 정신내용[!]임을 확인하게 된다. 대상으로 본 내용이 정신내용임을 확인한다면, 이를 얻게 한 실재대상[#]은 정신내용 밖에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장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단지 다음과 같이 해석의 변경만 하는 것이다. 즉, ‘실재대상[#]’은 그 본질이 ‘정신적 존재’라는 해석만 덧붙이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 -G. Berkeley)’라는 서양의 유심론적 해석이 이와 유사하다.
이는 다음 같은 유물론적 입장에 상대된다. 즉, 유물론적 입장은 획득내용[*]을 대상[*]과 주체[*]로 나누고 이들의 본질을 물질[사물, 육체]로 간주한다. 유물론은 획득내용[*]이 물질적 본질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들 획득내용[*]은 개념[@] 판단 등의 정신작용과 다른 물질적 본질을 갖는다고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정신 작용은 이들 물질을 기초로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장은 이와 반대로 대상과 주체의 본질을 모두 정신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내용[*]이 정신적 내용임을 인정하지만, 기존의 상식적 입장에서 획득내용[*]을 실재대상과 주체로 나눠 본 구조를 변경하지는 않는 것이다.
참고로 본질이 물질인가 정신인가는 획득내용[*] 밖에 실재 대상[#]과 주체[#]를 설정하는 경우, 이들에 대해서도 계속 문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는 무엇보다 먼저 물질과 정신의 개념이 먼저 확고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그래서 실체[$], 실재[#], 감각내용[!] 개념내용[@], 이를 얻게 한 정신작용#, 그 정신작용이 이뤄지는 기관#, 영역# 등에서 무엇을 물질이며 정신으로 보는가에 대한 개념정의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 다만 본서의 결론처럼 실재내용[#]을 얻어낼 수 없다면, 그것의 본질이 물질인지 정신인지 정할 근거는 없다. 어떤 내용도 얻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앞의 주장은 다음의 난점을 갖는다. 이 설을 따르면 획득내용[*] 가운데 일부 정신내용[대상*]이 일부 정신내용[주체*]과 관계해 그들 모두가 포함된 전체 정신내용[=획득내용전체[*]]을 얻는다는 이상한 구조가 된다. 이는 기존에 대상과 주체로 본 내용을 그대로 대상과 주체로 인정하고 단지 그 본질만을 정신내용으로만 인정해 나타나는 문제다. 또 제 3자가 획득내용[*]을 얻는 과정도 해석이 곤란하다. 이 설은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안에서 대상과 주체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관찰자가 볼 때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은 제 3자 영역에 숨어서 변화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관계없이 관찰자가 관찰하는 대상[*]과 제 3자[*]는 계속 일정하게 남는다. 그래서 이들은 제 3자의 획득내용[*]과 어떤 관계에 있는 무엇인가가 문제로 남는 것이다.
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이며, 실재대상은 없다는 입장
유식학설(唯識學說)
이 설은 지금껏 대상과 주체로 나눠 본 획득내용[*]을 정신내용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획득내용[*]을 포함하여 그 외 개념, 판단 등 모든 일체는 정신[識]이다. 그러나 이런 획득내용[*]을 얻게 한 어떤 실재대상#과 주체#는 외부에 별도로 없다[唯識無境]고 주장한다.5) 그리고 획득내용[*]이 나타난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들 대상[*]과 주체[*]의 모습은 모두 하나의 근본정신[根本識]이 자체 분열해 나누어진 것이다[相分, 見分]. 그리고 이 내용들은 근본정신에 씨앗[種子]처럼 잠재해 있다가 분열과정을 통해 획득내용[*]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現行]. 또 그것들이 사라질 때 이들은 다시 근본정신에 씨앗으로 저장된다.[熏習]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것이다.
이 설이 획득내용[*]을 정신적 내용으로 인정함은 일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이를 얻게 한 실재대상[#]과 주체[#]를 없다고 단정한 것은 지나친 주장이다. 우선 이 주장을 따르면 타 생명들과 타 근본정신[根本識]도 인정하기 곤란하다. 어떤 주체의 획득내용[*]에는 다른 사물[*]외에도 타 생명체들의 모습[*]이 맺힌다. 그런데 이 설은 정신에 맺힌 사물[*]에 대응한 외부 실재[#]가 없다고 부정한다. 따라서 획득내용[*]안에 파악되는 타 생명체[*]에 대응한 실재하는 타 생명체[#]는 없다고 부정해야 한다. 따라서 타 생명체들은 자신의 근본식 안에 씨앗[種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하면 오직 전 우주에 자신의 근본식(根本識) 하나만 있다고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타 생명체도 존재하고 근본식을 갖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는 어느 일방의 근본식 외부에 별도로 실재하는 다른 근본식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근본식 이외에 실재내용[#]은 일체 없다는 주장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만일 외부에 근본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일방의 근본식 안에 타 생명과 그 근본식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과 타 주체 가운데 누구의 근본식이 이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인가. 자신은 자신의 근본식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제 3자의 근본식이 그런 것이라고 해석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들 각자의 견해를 모두 맞다고 하려면, 이제는 다시 서로가 서로를 함께 포함한다고 해야 한다. 이 경우 어느 한 주체의 근본식은 다른 주체의 근본식도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각 주체는 각기 다른 획득내용[*]을 얻는 것으로 추리된다. 그리고 서로 타 주체의 획득내용[*]을 직접 인식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이는 이상한 결론이 된다. 이제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전체 근본식에서 각 생명체의 정신 모두가 함께 나타났다는 등의 이상한 해석도 나타난다.[如來藏說] 그러나 이 경우 각자의 획득내용[*]이 개별적으로 얻어지고 사라지는 관계를 설명하기 힘들게 된다. 그리고 이들 경우에 어떤 주체의 획득내용[*]이 사라질 때 그 획득내용[*] 밖에 다른 실재하는 대상이나 주체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주체의 획득내용[*]이 사라져도 타생명은 여전히 획득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이론은 이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유식설은 근본정신[根本識, 阿賴耶識]을 기초로만 정신현상의 출현을 이해한다. 따라서 앞의 이론상 문제들이 나타난다. 또 다음 근본 문제도 있다. 정신은 정신 외부 내용을 직접 얻을 수는 없다. 그런데 유식설은 문제된 실재대상[#]을 없다라고 단정한다.[唯識無境] 그러나 ‘얻을 수 없음’을 곧 ‘없음’[無境]으로 단정함은 근거 없는 주장이 된다. 한편 유식설도 최종적으로는 삼무성설(三無性說) 등을 통해 공(空)으로 귀결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선 이 삼무성(三無性)은 정신현상과 이들 근본바탕에 대해 개념내용[@], 감각내용[!], 실체[$] 차원과 관련한 논의다.6) 즉, 상무성(相無性)은 개념내용, 생무성(生無性)은 감각내용[!] 승의무성(勝義無性)은 실체차원에 대한 논의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실재내용[#]을 문제대상으로 함이 아니다. 또 각 경우의 무(無)의 주장은 모두 공(空)과 동일시할 수 없다.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空)함은 정신 외부에 어떤 내용이 있고 없음 어느 쪽으로도 밝히지 못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를 다른 차원 또는 실재내용[#]에 대해 ‘없음을 확인함 또는 단정함’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획득내용[*]은 감각내용[!]이며 실재내용[#]을 별도로 추리하는 입장
한편 어떤 획득내용[*]을 얻을 때 이는 감각내용[!]이며 실재내용[#]은 그것과 별개로 있다고 추리할 수 있다. 앞에서는 실재내용[#]을 별도로 추리는 하지만, 그 유무, 내용 등에 대해 일체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취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그 실재내용[#]을 얻은 획득내용[*] 즉, 감각내용[!]과 동일하다거나, 또는 최소한 유사하다는 식의 추리를 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실재내용[#]이 감각내용[!]과 일치된다는 추리
이런 추리는 다음 이유로 많이 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제 3자를 관찰할 때는 다음과 같이 추리하게 된다. 제 3자가 얻는 획득내용[*]은 제 3 자 쪽에 숨는다. 그러나 관찰자는 그와 별개로 관찰자가 얻은 외부대상[*]과 제 3자[*]의 모습이 일정함을 관찰한다. 이 때 관찰자가 얻은 외부대상[*]과 제 3자의 모습[*]을 제 3자가 얻는 획득내용[*]에 대한 실재내용[#]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찰자가 얻은 획득내용[*]이다. 그래서 관찰자의 감각내용[!]의 본질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실재내용[#]자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를 지나치고 그것을 곧 실재내용[#]이라 추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을 추리한다. 이 때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과 관찰자가 얻는 획득내용[*]은 같으리라고 추리한다. 사실 제 3자와 자신이 서로 유사한 감각기관을 가지므로 유사한 획득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이 엄밀히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지나친다. 그래서 결국 제 3자가 얻는 획득내용[*] 그리고 그것을 얻게 한 실재하는 제3자[#]와 외부대상[#]을 모두 자신의 획득내용[*]과 같다고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이들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또 자신의 정신과정을 관찰할 때에는 다음과 같이 추리한다. 관찰자는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얻어지는 획득내용[*]을 자신의 정신내용[!]이라고 정한다. 이 때 제 3자가 자신을 관찰하면 이런 자신의 획득내용[*]과 별도로 제 3 자의 획득내용[*]으로 자신의 모습[*]과 외부대상[*]을 얻게 될 것이라고 추리한다. 그리고 제 3자가 얻을 자신[*]과 외부대상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획득내용[*]에 대한 실재내용[#]일 것이라고 추리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제 3자가 얻을 자신[*]과 외부대상의 모습[*]은 역시 그 본질이 제 3자가 얻는 정신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역시 실재내용[#]을 얻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나치고 다시 다음의 추리를 한다. 즉 그 제 3자가 얻을 획득내용[*]은 다시 자신이 얻는 획득내용[*]과 같을 것이라고 다시 추리한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실재내용[#]이 감각내용[!]과 최소한 유사할 것이라는 추리
한편 자신의 획득내용[*]을 기초로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추리하는 경우도 있다. 일정한 획득내용[*]을 얻을 때 이를 얻게 한 실재대상[#]은 자신이 얻은 획득내용[*]과 엄밀히 같지는 않아도 최소한 유사하지는 않겠는가하고 단순한 추리를 하기 쉽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음 반론이 가능하다.
어떤 한 실재내용[#]을 가정하여 정하자. 그리고 이에 대해 얻는 획득내용[*]으로서 하나의 감각내용[!]은 원래 실재내용[#]과 유사할 것이라고 추리하자. 그러면 이 하나의 실재내용[#]에 대해 각기 다른 감각기관으로 감각내용[!]들을 얻을 때 이 모든 감각내용들[!]은 결과적으로 서로 모두 유사한 내용으로 얻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각 감관은 실재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모두 얻는 것이라고 추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기 다른 감관을 동원할 때 이들 내용은 서로 하나도 유사하지 않다. 예를 들어 시각[!], 청각[!], 냄새[!], 맛[!], 촉각[!]의 내용은 서로 하등 유사하지 않다.
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공통성도 세우기 힘들다. 그렇지만 이론상 이들 각 감각을 하나의 실재대상[#]으로부터 얻은 것인지부터가 먼저 문제될 수 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실험해보자. 우선 손에 물체를 잡고 이를 시각으로 대해보자. 자신이 눈을 감고 뜸에 따라 그 모습[!]은 사라지고 나타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자신이 계속해서 손으로 물체를 잡고 있음을 촉감과 시각으로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계속 물체를 손으로 쥐고 있다면, 이 때 시각을 나타나게 실재내용[#]은 촉각[!]도 나타나게 한 동일한 실재내용[#]이라고 추리해야 된다. 즉, 동일한 실재내용[#]을 시각과 촉각이라는 다른 기관으로 대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동일한 실재내용[#]은 시각에는 일정한 모습을 주고 촉각에는 일정한 촉감을 준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내용[!]은 서로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촉각의 미끈미끈함은 시각으로 본 빨간 모습과 하등 유사하거나 비슷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실재내용[#]이 각 감관에게 자신의 실재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갖게 해준다는 추리는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다음 반론을 할 수도 있다. 우선 하나의 실재내용[#]은 하나의 성질만을 갖지 않고 여러 성질을 골고루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과의 실재내용[#]은 빨간 모습, 사과향, 사과맛, 미끈미끈함과 같이 여러 성질이 복합된 것이라고 추리한다. 그래서 각 감관이 상대할 때는 다양하게 실재하는 성질[#] 가운데 그 감관이 얻을 수 있는 일부의 실재 성질[#]에서 그와 유사하게 감각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으로 사과[#]를 대하면 사과가 갖는 많은 성질[#] 중 일부분인 한 성질[#]과 유사한 감각내용으로 빨간 사과모습[!]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설은 우리가 얻는 감각내용[!] 하나하나가 모두 실재내용[#]을 대표할 수는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미리 밝히는 것에 불과하다. 즉, 빨간 색깔은 소리, 향, 맛, 촉감을 다 대표해주지 못한다. 더욱이 실재내용과 서로 관계 맺을 수 있는 감관이나 대상은 매우 다양하다. 우리는 5감각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눈에 다양한 색깔의 안경을 써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또 다른 생명체의 다른 감각기관들도 생각할 수 있다. 또 감관은 아니지만 다른 물체들도 수없이 관계시켜 다른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를 유리로 만지거나, 쇠로 만지거나 하는 등으로 여러 관계와 반응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떤 한 감각내용[!]이 실재내용과 유사할 것이라는 추리는 다른 실재내용[#]을 파악하는 데 사실상 의미 없게 된다. 또 유사하리라고 추리하는 한 성질은 다른 성질들과 전혀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욱 작아진다. 더욱이 그 한 성질이 극히 부분적으로라도 실재내용[#]과 유사한지 아닌지를 밝히려면 실재내용[#]을 직접 하나라도 얻어 와야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실재내용[#]의 하나도 직접 얻어오지 못한다. 따라서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과 같다거나 -과 다르다거나 하는 판단을 일체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실재내용[#]을 다른 감각내용[!]으로 추리하는 입장
어떤 획득내용[*]을 얻을 때 그것을 얻게 한 실재내용[#]을 다른 특정한 정신내용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획득내용[*]을 얻을 때 이에 대해 다른 감각기관이나 수단을 통해 별개의 내용을 정신이 얻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런 내용이 획득내용[*]에 대한 실재내용[#]은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색깔로 보던 물체에 대해 x선을 투시해 얻는 영상이 따로 있다고 하자. 또는 그 대상에 다른 감관 예를 들어 청각 촉각 등을 동원해 얻는 내용이 있다고 하자. 또는 소리를 들을 때 그 진동에 따라 음파를 그린 그림을 본다고 하자. 이런 경우 등에서 그런 내용을 실재내용[#]의 모습으로 추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신이 얻는 내용인 이상 또 다른 감각내용[!]이나 개념내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 하면 그것들 역시 획득내용[*]처럼 우리의 정신이 파악한 다른 내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론
획득내용[*], 그리고 감각내용[!] 실재내용[#]에 대해 여러 주장을 지금까지 살펴왔다. 상식적으로 획득내용[*]을 실재대상이나 주체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많은 이론적 문제가 발생함을 보았다. 획득내용[*]은 정신적내용으로 감각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이 때 이런 정신적 내용을 일으킨 실재내용[#]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유식설은 실재내용[#]을 없다고 단정한다. 또 다른 입장은 실재내용[#]을 감각내용[!]과 일치함, 유사하다고 추리됨 또는 있다 없다는 등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실재내용[#]에 대해 있고 없음, 더 나아가 얻어진 모습[!]과 일치 불일치[-이다, 아니다] 유사성[같다, 다르다]을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미 보았다. 실재내용[#]의 조그마한 내용도 얻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얻어올 수 없는 상태를 곧 없다라고 단정할 수 없는 사정도 이미 보았다. 특히 추리과정에서 관찰자가 얻는 획득내용[*]을 타인 정신내용 밖의 실재내용[#]으로 오해할 때, 이런 오류를 갖기 쉽다. 한편 이런 추리는 얻어진 획득내용[*] 및 다른 정신내용[개념@, 언어%..]들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감각내용[!]은 개념내용[@] 및 언어내용[%]과 또 다른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또 여러 감각내용들 사이에서도 사정은 같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본 내용을 손으로 대하면 질적으로 전혀 같지 않다. 또 자신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도 양쪽 상대 촉감은 서로 다르다. 이는 이들 내용을 서로 상대적 기준으로 삼을 때도 서로가 서로를 대표할 수 없음을 뜻한다. 또 이들을 모두 모아도 사정은 같다. 감관의 상태 등 각 조건이 변함과 함께 이들은 동일함을 세울 수 없다. 더욱이 이들 차원을 넘어 감각내용[!]과 실재내용[#]의 일치 불일치는 말할 수 없다.
감각내용[!] 이후의 정신과정
앞에서 정신내용을 얻는 가장 기초요소로서, 감각내용[!]과 실재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는 인식과정에 대한 복잡한 논의이지만, 본서에서도 각 부분에서 관련이 된다. 따라서 그 대강을 살펴보았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가 눈을 감았다 뜸에 따라 1차적으로 얻게 되는 내용을 획득내용[*]이라고 표현하자. 그런 경우, 이 획득내용[*]은 감각내용[!]이다. 그리고 이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그 존재가 추리되지만,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어서 공(空)하다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의 감각내용[!]을 가질 때 이를 일으킨 외부 실재대상[#]과 실재주관[#] 같은 것이 있으리라 추리한다. 그리고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자신의 감관, 및 인식기관[#]이 관계하여 정신내용을 얻는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들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내용[#]을 기초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 된다. 즉,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공(空)한 실재대상[#]과 역시 공(空)한 주관[#]이 관계하여 우리가 얻는 다양한 감각내용[!]을 얻는다라고 하게 된다. 보다 엄격히 말하면 내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대상[#]과 주체[#]를 나눠 그 관계를 제시하는 것도 곤란해진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매우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통상적인 설명에서는 현상에서 감각내용[!]과 개념내용[@]들로 파악되는 요소들간의 인과관계적 설명을 취하게 된다. 획득내용[*]에서 파악된 여러 내용들 간의 상호관계로 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어떤 상황에서 A가 있을 때[有,無,生,滅] B가 있고[有,無,生,滅] 바로 그 상황에서 A가 없으면[無,有,滅,生] B가 없는[無,有,滅,生] 관계가 파악될 때 이들 A와 B를 인과관계로 묶어 이해하는 것이다. 즉, 예를 들어 눈으로 얻은 획득내용[*] 가운데, 저 손[!]이 저 물체[!]를 움직이면 소리가 나거나 냄새가 나고 촉감을 얻는다는 식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는 눈을 뜨고 감음은 촉각으로 정하여 눈을 감고 뜰 때 시각[!]이 나타난다고 이해하는 식이다.
앞에서 보듯 획득내용[*]의 본질은 감각내용[!]이다. 그런데 앞 논의를 기초로 한다면, 어떤 시각내용의 일부분[!]과 일부분[!]이 직접 작용하여 청각이나, 후각, 미각, 촉각을 낸다고 이해할 수는 없다. 이는 엄격히 설명하면 저 손[!]이 저 물체[!]를 움직일 때 그에 상응한 실재내용[#]이 다시 이런 소리[!] 이런 냄새[!] 이런 촉감[!]을 얻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정신내용 뿐이다. 그래서 이런 정신내용들에서 관계를 파악하여 묶어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설명이 인과관계적 설명이다.
여하튼 우리 정신은 이런 관계에서 최초로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감[감각!]을 화합해 얻는다. 그 다음 다시 이를 기초로 생각[관념@], 기억재생, 말, 글[%], 행위, 태도[행위], 비교, 분별[판단]을 행하게 된다. 한 주체가 이런 정신내용물을 얻는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외부 대상[#] + (매개체,빛,파장..)[#] + 자신의 감관[#] +자신의 인식기관[#] -> 감각내용[!] -> 관념내용[@] -> 언어내용% [@->@->#->!->@->@]-> 행위[@->#->!->@] -> 분별판단내용@의 연쇄과정이다.
여기서 조금 복잡하게 표현된 언어와 행위 부분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언어작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언어는 처음 어떤 관념내용@을 갖고 -> 그 관념내용을 가리키는 언어관념내용@을 선택한 다음 이를 표현할 의지를 갖고 -> 그 언어를 표현[#]하며 -> 다시 언어표현내용에 대해 감각내용[!]을 얻고, -> 그 언어표현내용에 대해 직접 관념내용[@]을 얻은 다음 ->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관념내용[@]을 얻는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꽃과 관련된 언어과정은 다음의 연쇄과정이다. 꽃@ -> kkot이라는 말소리관념내용@ -> kkot이라는 소리를 냄 -> kkot이라는 소리내용를 감각함 -> kkot이라는 소리관념내용을 얻음 -> 꽃@의 관념내용을 얻음
또 행위과정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행위 태도 등을 취하려는 의지내용@를 갖고 -> 실제 동작[#]을 하고 -> 실제 동작에 대해 감각내용[!]을 얻게 되며 -> 동작에 대한 관념내용@을 얻는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손을 들어올리겠다는 의지 -> 실제 손을 들어 올림[#] -> 손을 듦에 대한 감각내용[!] -> 손을 듦에 대한 관념내용[@]의 과정을 거친다. 즉 한 주체는 이런 연쇄과정을 거쳐 말을 하고, 동작을 하며 또 스스로 행한 말과 동작에 대해 파악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소에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과를 현재 감각하지 않고 있어도 사과@라는 관념을 기억에서 떠올리면 좋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우선 관념@이 좋음을 일으킬 수 있는 기초요소임을 인정할 수 있다.
판단[@+@]
앞에서 관념이 좋은 느낌의 기초요소가 됨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관념이 결합된 판단도 좋음을 일으킬 기초요소가 된다.
그것이 사실에 관한 판단이든 가치에 관한 판단이든 같다.
실례로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방안에 있는 사과는 100개다’[사실판단] ‘사과는 아름답다’[가치판단] 는 등의 판단을 할 때에도 역시 좋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 때 판단을 구성한 개별 관념이 좋은 느낌을 불러온 것인가 아니면 전체적인 판단이 불러오는가도 문제될 수 있다.
이는 판단이 좋은 느낌을 얻게 하는 한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굳이 문제된다면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각 관념들은 좋음을 얻지 못하지만 전체판단은 좋음을 얻는 경우가 있다. [얄미운 사람이 맞는다]
또는 반대로 각 관념을 좋음을 얻지만 전체판단은 좋음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쁜 나비가 포도잼 속에 빠져 있다.]
이런 예에서 판단은 단순한 관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좋은 느낌을 일으키는 독립적인 요소가 된다고 할 것이다.
감각내용[!]
앞에서 관념, 판단 등은 그것이 감각내용을 전제로 하지 않고도 좋음을 얻는 경우를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념, 판단은 감각내용이 함께 병행할 때에도 역시 좋음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이 사과를 눈앞에서 보고 만지고 맛보면서 사과라는 관념을 갖는 경우에도 좋음을 얻을 수 있다.
감각내용은 많은 관념의 출발 기초가 된다. 또 감각내용이 관념과 병행할 때는 좋음의 느낌을 보다 강하게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관념만 있을 때 보다는 직접 사과를 보고 만지고 맛보면서 사과를 생각할 때 좋은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감각내용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과정 중에서 약간 논의가 필요한 것은 다음이다. 즉, 관념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감각내용만을 기초로 곧 좋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는 다음 문제와 관련된다. 감각내용은 이를 기초로 곧바로 관념을 일으키곤 한다. 이처럼 감각내용은 이를 기초로 곧바로 좋은 느낌도 곧바로 일으키는 것인가? 아니면 감각내용은 그를 기초로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이 관념이 기초가 되어서만 좋은 느낌을 일으키는가? 아니면 다시 관념을 일으키고 이와 비교할 어떤 다른 관념이 병행 비교되어야만 좋은 느낌이 얻어지는가? 즉, 좋은 느낌을 얻으려면 자극-반응의 체계로도 충분한가 아니면 비교과정이 반드시 필요한가가 문제된다. 이와 관련하여 좋음의 느낌은 감각내용만을 기초로 얻을 수 있는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의 실험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감각내용만을 얻고 관념이나 판단을 행하지 않는 정신상황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의 일반 상황에서는 감각내용을 얻으면 이에 상응한 관념을 바로 얻게 된다. 따라서 감각내용만을 얻고 관념을 얻지 않는 상태를 만들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런 경우는 깊은 수면이나 식물인간이 된 상태 등에서 가능할지 모른다. 또는 불교의 선정(禪靜)수행을 통해 관념작용 이상의 정신작용을 정지시키고 감각만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이르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에 이런 상태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감각내용만을 얻는 상황에서 실제 이를 기초로 좋은 느낌을 얻을 수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도 어렵다. 한편 이론상,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더라도 그 경우에 좋은 느낌이 얻어지는가를 관찰하려면 다시 이 상태에서 이를 관찰할 의식을 작동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는 감각내용만을 얻는 상황의 조건에 어긋난다. 타인의 의식을 이렇게 만들고 제 3자가 객관적으로 그 과정을 관찰할 방법도 아직은 딱히 없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만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록 이를 만들어도 좋은 느낌이 발생하는지를 관찰할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실재내용[#]
감각내용[!]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실재내용[#]만을 기초로 곧바로 좋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는가? 좋음의 느낌이 실재내용[#]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는 이를 긍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실재대상[#]과 주체[#]가 있는 상태에서 이를 곧바로 최초로 받아들일 기관을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반성해보면 최초로 내용을 얻는 것은 감각과정이다. 그런데 이 감각과정이 감각을 하는 순간 곧바로 좋음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입장을 취하기 쉽다. 그래도 감각내용도 전제로 하지 않고 곧바로 좋은 느낌을 얻는다는 것은 지나치다.
이 역시 엄밀히 실험하려면 감각-개념을 모두 얻지 못한 상태에서 좋음을 곧바로 얻는 경우가 있는지를 실험해야 한다. 어떤 주체가 생존하면서 감각과 개념을 얻지 못하는 순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비교되는 준거의 작동 가능성
앞에서 어떤 내용들이 좋음을 일으킬 기초내용인가를 대략 살폈다. 여기서 일단 조금 명료한 기초로서 관념을 들어 논의를 진행해보자. 예를 들어 잘익은 사과@라는 관념을 생각해보자.
이 사과@라는 관념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좋은 느낌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반면 어떤 이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또 좋은 느낌을 얻는 주체에게도 그것이 항상 그렇지는 않다. 어떤 때는 나쁜 느낌을 주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한다.
이처럼 좋음의 느낌을 얻는 과정이 일정하지 않다. 이렇게 좋은 느낌을 얻는 상황을 반성해보면, 좋은 느낌을 얻는 과정에 대해 약간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일정한 내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일정한 내용에 대해 정신내용을 얻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유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원 대상내용과 동일성여부
먼저 ① 원 대상 내용과 동일유사한 내용을 얻는 경우와 ② 원 대상과 매우 차이나는 내용을 얻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얻게 된 내용을 대상에 있는 성질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주체가 갖는 성질로 봐야하는가를 판단하게 해준다.
어떤 거울을 놓고 생각해보자. 이 거울 앞에 어떤 사물을 놓으면 거울에는 그 사물과 비슷한 영상이 맺힌다. 이 경우 거울은 주로 외부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반면 셔터가 달린 사진기는 거울과 유사하지만, 필름에 맺히는 모습도 반드시 외부모습과 동일하지는 않다. 다만 외부모습과 상응한 또는 비례한 변화를 보인다고는 할 수 있다. 우리 정신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정신작용은 감각내용[!]에서 1차적으로 곧바로 관념@을 직접 얻는 과정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각 관념@은 비교적 감각내용[!]에 충실하게 상응해 반응한 결과를 보인다. 즉 빨간 색[!]에 대해서는 빨간 색@, 연필[!]에 대해서는 연필@이라는 관념을 보통 얻는 것이다. 그러나 빨간 색[!]의 감각내용[!]이 개념내용[@]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진기와 유사한 관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면 어떤 관념이 과거 기억된 관념@가운데 몇몇을 재생해내는 과정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연필@이란 관념을 얻을 때 이것이 다시 재생해내는 관념@은 이와는 별개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연필@로부터 종이@나 책@을 연상해 꺼내는 경우와 같다. 이는 원래의 관념@ 예를 들어 연필@보다는 그 개별 주체의 과거 경험과 오히려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좋은 느낌을 얻는 관계도 비교적 뒤의 경우와 유사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사과@를 좋아하는 이가 사과@로부터 좋은 느낌을 가질 때 그 느낌은 사과@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내용으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원래 사과@에 좋은 느낌에 해당한 것이 본래 있었다고 볼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사과@에 대해 여러 주체는 늘 좋은 느낌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각 주체마다 또 시기 상황마다 어떤 느낌을 갖는가는 다르다. 따라서 좋은 느낌이란 그것을 준 대상에 있는 성질을 동일유사하게 얻어내는 것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주체별로 얻는 내용의 동일성여부
다수 주체가 모두 동일유사한 내용을 얻는 경우,
각 주체가 각기 다르게 내용을 얻는 경우,
-- 내용보다 각 주체가 갖는 특성에 더 영향받는가 여부 -- 각기 다르게 나타나게 하는 원인을 각 주체의 내부적인 특성에서 찾게된다.
대상이 있으면 늘 자동적으로 내용을 얻는 경우
대상이 있어도 내용을 얻거나 얻지 못하는 경우
-- 내용을 얻게 하는 어떤 기관의 작동여부가 어디에 있는가, 주체에게 있는가 등의 판단문제
그래서 거울은 그 사물을 놓으면 늘 그 모습을 규칙적으로 반복해 나타낸다. 또 거울은 늘 열려 있어 외부사물을 갖다 놓으면 늘 모습을 그대로 맺히게 된다.
셔터가 열릴 때만 모습을 맺힌다.
늘 동일한 내용을 얻는 과정
다수 주체에게 일정하게 작용할 때만 동일한 내용을 얻는 과정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일정하지 않다. 그것에 의해 얻어지는 관념@은
- 참고 -
우선 우리의 감각 인식기관 가운데 감각기관도 비교적 외부대상에 일정하게 반응하여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통 추리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외부 실재대상[#]의 내용은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실재대상[#]으로부터 어떤 감각내용[!]을 얻었는지를 상호 비교할 수 없다.
그런 관계로 실재대상[#]과 얻는 감각내용[!]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추리할 근거를 얻기 힘들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사물을 반복해 관찰하면 눈은 그 사물에 일정하게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물이라는 것이 바로 이미 감각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감각내용[!]을 놓고 자신이 그 감각내용[!]을 대응시키므로 실재대상[
#]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물론 제 3자를 관찰하고 보고를 받으면 제 3자가 우리가 보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사물을 구별해 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는 사과라고 하며 촛불은 촛불이라고 구별한다. 그래서 제 3자의 눈은 외부대상[#]에 일정하게 반응한다고 추리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제 3자나 자신이나 모두 유사한 정도로 사물을 구별하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정작 실재대상[#]에서 A[#]나 B[#]를 자신의 감각이 모두 A라고 인식하는지, 아니면 A, B, C 등으로 구별하는지를 밝혀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좋음의 느낌을 얻는 과정은 일정한 감관[#]이 외부대상[#]에 반응하는 것과 같이 이해하기 곤란하다. 오히려 일정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재생해내는 과정에 오히려 유사하다.
왜냐 하면 만일 사과@에 좋음의 느낌의 요소가 미리 정해져 있고 정신과정에서는 단지 이런 내용에 반응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 관념@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상황에 일정하게 좋음의 느낌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관념@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각기 다른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정을 감관이 외부대상에 반응하는 것과 같이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 좋음의 느낌을 얻는 과정은 생각해보면 늘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뜻에 따라 행위를 한다. 그래서 움직이고 먹고 마시곤 한다. 그러나 이런 대부분의 행위를 뜻대로 하지만, 이 과정을 반성해보면 이런 과정에서 늘 좋음의 느낌을 얻는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딱히 나쁨의 느낌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음의 느낌을 얻지도 않는 것이다. 단지 주어진 상황에 몰두하며 행위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은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좋은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상황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뜻에 맞는 행위를 할 때와 같이, 이전 상황과 현재 상황이 대비되어 좋음의 느낌을 얻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일정한 감관이 그것을 열어두면 계속해 얻는 것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감관도 열거나 닫거나를 반복할 수 있다.
... [ 조금 숙고 필요 ]
한편 좋음의 느낌은 의식적으로 좋음의 느낌을 얻으려 노력할 때만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인위적으로 좋음의 느낌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을 때에도 자연스럽게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런 면들은 어떤 관념@의 재생과정과 일단 유사하다. 과거 기억이 재생되는 것도 반드시 인위적으로 노력할 때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념@의 재생과정과 다른 점은 위에 살핀 예에서 보듯 좋은 느낌은 어느 정도 기존 상황에 갖고 있던 판단이나 의식내용과 대비될 때 얻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식사는 그가 배고픈 상황에서 이를 대하면 좋은 느낌을 줄 수 있다. 반면, 그가 배부른 상황에 있다면 그런 느낌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차이가 좋은 느낌을 주고 안주고에 관여한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는 그것에 대해 어떤 기준 상태에서 그것을 대하게 되었는가에 따라
그 A에 대해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되기도 하고 또는 못 얻기도 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기존 상황이 일종의 중요한 요소가 됨을 인정할 수 있다.
좋음의 발생과정
기관과 작용과정의 문제
비록 눈이나 귀처럼 우리가 외부적으로 관찰할 기관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 안에서 좋음의 느낌을 얻는 한 이런 느낌을 얻게 하는 정신영역 자체를 추리할 수는 있다.
다만 늘 작동하는 기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또 어떤 대상 요소에 대해 늘 규칙적인 반응을 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어떤 고정된 형체로 대상요소에 대해 규칙적인 반응을 하며 또 이런 작동이 늘 작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결론만을 얻게 된다.
실험의 어려움
열어서 해부하여 자극과 반응의 내용을 관찰하기도 힘들다.
또 관찰자 자신이 스스로 이런 실험을 하여 내용을 파악하기도 힘들다.
비교되는 준거의 기관성 여부
어떤 A는 그것에 대해 어떤 기준 상태에서 그것을 대하게 되었는가에 따라
그 A에 대해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되기도 하고 또는 못 얻기도 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기존 상황이 일종의 중요한 요소가 됨을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을 어떤 내부적 정신기관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단지 기초대상과 함께 필요한 요소일 뿐 이것에 작동하는 기관이나 작용은 별개로 설정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여기서는 후자로 본다.
좋음의 요소의 변경과정
앞에서는 대략적으로 좋음이 얻어지게 되는 요소나 과정을 살펴보았다. 많은 것이 불확실한 베일에 감춰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먼저 어떤 요소들이 주체의 의지로 어떤 방식으로 변경가능한가를 검토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이를 이용해 좋음을 얻을 수 있는 기초지식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단지 관찰가능한 지식일 뿐 우리가 이용가능한 지식은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① 실재대상 - 행위를 통한 변경
② 감각내용 - 감각기관을 여닫음 [ 실재대상에 많이 지배됨]
③ 관념내용 -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
④ 기억 재생 - 초점, 자연발생, 의지
⑤ 판단 - 의지, ...
을 요소를 다음과 같이 구별해 볼 수 있다.
자신과 외부의 요소
어떤 주체가 놓인 현실을 자신의 요소와 외부의 요소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통상 객체, 주체, 객관, 주관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이들 용어는 철학적으로 많은 다른 설이 있어 통일적으로 의미를 정의해 사용하기가 곤란하다.
여기서는 앞에서 정의한 획득내용[*]을 기초로 자신의 요소와 외부의 요소로 구분해보기로 한다. 획득내용[*]은 앞에서 보았듯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1차적으로 변화가 파악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은 주체의 감각내용[!]에 속함을 보았다. 그리고 이 정신내용을 일으킨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얻지 못함을 보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획득내용[*]은 그 모두가 자신의 정신에 들어 있는 정신내용이 된다.
이 때 비록 실재내용[#]을 얻지 못하지만, 획득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을 구분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즉, 자신의 요소[#]와 외부의 요소[#]의 구별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꽃을 만져 촉감을 얻을 때, 그것을 스스로 보게 된다. 이 때 꽃에 대한 감각내용[!]을 손의 감각내용[!]이 접촉해 촉감을 얻는다고 이해하지는 않는다. 꽃[!]을 손[!]이 만진다고 보일 때 사실은 꽃[#]이 손[#]을 접촉해 우리에게 촉감[!]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꽃[#]과 손[#]의 실재내용[#]을 직접 얻지는 못한다.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꽃[!]과 손[!]의 감각내용[!]으로서만 이해된다.
따라서 이런 관계로 결국 획득내용[*]을 자신과 외부로 분리해 그것을 곧 꽃[#]과 손[#]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논의를 진행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감각내용[!]을 객관적 요소로 제시한다.
어떤 주체가 일정한 감각내용[!]을 얻을 때
앞의 연쇄과정에서
이들 연쇄과정에서 좋은 느낌이 어느 요소 이후에 발생하는가가 문제된다. 최소한 감각! 이후에 각 요소를 기초로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엄밀히 감각내용 만을 기초로 좋은 느낌을 얻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감각내용을 가질 때 그에 따른 관념을 얻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감각내용만을 갖고 관념을 갖지 않는 상황[예;식물인간,수면,최면,선정상태]를 만들어서 이런 경우에도 좋은 느낌은 얻을 수 있는가를 실험해야 한다. 또는 감각내용과 관념이 같이 얻어지고 좋은 느낌이 얻어질 때 이것이 무엇을 기초로 얻어졌는가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주관적 실험이 주된 실험방안이 된다. 실제로 이런 실험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결론을 얻기도 힘들다. 다만, 여기서는 감각내용을 기초로 좋은 느낌을 곧바로 얻는 해석을 취하기로 한다. 예를 들어 좋은 빛깔을 감각하고 곧 좋은 느낌을 갖는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좋은 느낌은 관념이나 언어 행위 분별 등을 각기 기초로 얻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칭찬을 듣고, 즐거운 소설을 보고, 춤을 추면서, 또는 비교판단을 통해서 각기 좋은 느낌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얻는 좋은 느낌도 하나의 정신내용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감각내용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관념내용이라고 분류하기도 그렇다. 이는 별도로 감정내용이라 분류해야 할 것이다. 다만 감각과 관념의 이분법을 고집하면 이런 감정은 관념의 영역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감각내용을 기초로 얻어내는 또 다른 정신내용물이기 때문이다.
느낌에는 물론 좋은 느낌과 나쁜 느낌이 있다.
이런 느낌은 이처럼 위 정신작용의 연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진다.
이 경우 외부의 요소 * 주체의 신체요소[감관]이 주된 요소가 된다고 본다.
그리고 나머지 얻어지는 정신내용은 매우 연쇄적인 결과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 단순히 감각을 하거나 개념을 갖고 이를 재생하거나 판단하는 작용들만 할 때가 있다. 이 때는 좋음과 나쁨의 느낌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떤 책상을 별 생각 없이 바라본다고 하자. 그리고 이런 감각내용을 기초로 책상이라는 관념을 갖거나, ‘그것은 책상이다’라는 식으로 판단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런 상태만으로는 만족 또는 불만이 나타나지 않는다.
만족, 불만 등이 있으려면 이런 감각이나 개념을 기초로 좋음이나 싫음을 느끼는 정신작용이 다시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에 빠뜨리기 쉬운 내용이 있다. 그것은 기존에 형성하고 있던, 기억내용, 관념 사실판단의 내용, 가치판단의 내용, 희망, 의지 등과 같은 일정한 정신적 내용물이다. 이들은 연쇄적으로 얻어지는 정신내용물과 함께 화합하여, 좋거나 나쁜 일정한 느낌을 만들어 내는데 관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을 과연 좋은 것으로 보는가에 대한 일정한 판단[ 또는 희망의 내용]이라고 본다. 이것을 좋음의 기준내용이라고 일단 부르기로 하자.
㉠ 먼저 어떤 현상을 대하여 감각하고 개념을 얻는 과정에서 좋음의 느낌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느낌] 예를 들어 어떤 책상이 정돈이 잘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거나, 책상에서 좋은 향기가 나서 기분이 좋은 경우와 같다. 이는 미리 무엇이 좋다는 가치판단이나 현상이 어떠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없었다는 점에서 다음의 ㉨과 구별된다. ㉡ 그 외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서 좋음(싫음)의 느낌을 다시 얻게되는 경우가 있다.[재생] 예를 들어 자신이 과거에 친구와 놀았던 때를 떠올리게 되어 좋은 느낌을 다시 갖거나 과거에 창피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싫었던 느낌을 다시 갖는 경우들이다. ㉢ 또 이런 좋음 싫음의 느낌을 기초로 ‘좋다’ ‘나쁘다’ 등의 관념(觀念)을 형성하고 이를 기억, 재생, 표현하는 과정도 있다.[관념] 예를 들어 ‘좋다[2]’는 언어관념은 ‘좋은 느낌’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관념으로 좋은 느낌[1]을 가리키게 된다. 또 그런 관념은 재생할 수 있고 또 ‘좋다[3]’라고 소리나 글자로 표현할 수도 있다. 여기서 [1],[2],[3]은 느낌, 언어관념, 소리나 글자로서 서로가 다른 차원의 내용임을 의미한다. ㉣ 그리고 다시 이것은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 깨끗하다, 더럽다,...등으로 판단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가치판단] 예를 들어 어떤 친구와 즐겁게 놀고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실을 기초로 ‘그 친구는 좋은 친구다’라고 판단하는 경우다. ㉤ 그리고 어떤 사실이 있(없)으면 좋을 텐데...라고 희망하거나, 반대로 어떤 사실이 있(없)으면 싫은데...라고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희망, 두려움] 예를 들어 자신이 돈이 많으면 좋을 텐데..., 사고를 당하면 안 되는데... 등으로 생각하는 경우다. ㉥ 한편 좋음(싫음)을 구성하는 내용들을 떠올리거나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경우에 좋음(싫음)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희망, 두려움을 그림] 예를 들어 돈이 생기면 그것으로 살 물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며 좋아하는 경우다. 이는 앞의 ㉤과는 조금 다른 상태가 된다. ㉦ 또 좋음(또는 싫음)의 의미를 ‘좋음(또는 싫음)이 아님’과 대비하여 명료하게 그 의미를 구별 인식하는 정신작용도 있다.[의미분별] 예를 들어 좋음의 의미는 사실 모호하게 생각될 때가 많다. 이 때 싫음과 대비하여 이 좋음을 이해하여 그 의미를 뚜렷이 자각하는 경우가 있다. ㉧ 또 어떤 인식내용을 떠올린 뒤 이와 또 다른 인식내용을 비교하여 그것이 이보다 낫다거나 못하다고 가치판단하는 경우도 있다.[우열분별] 예를 들어 지금 방이 춥지만, 그래도 밖에서 추운 것보다는 낫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 또 좋다 나쁘다는 가치판단 또는 희망(두려움)의 내용과 현실을 대비하여 어떤 현실이 이에 일치되었다거나 불일치되었다는 등의 비교판단도 행해진다. 방에 꽃이 있으면 좋다, 또는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꽃이 있다. 그래서 좋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다. ㉩ 그리고 어떤 좋음을 주는 것을 감각하려 하고 가까이 대하려고 하며, 이를 계속 감각할 수 있도록 자신이 지배하려고 하거나, 또는 그 대상에 좋음을 되돌려 주려고 희망하는 등의 경향을 계속 갖는 경우도 있다. 또 반대로 싫음을 주는 것에 대해 감각하지 않으려 하고 피하려하고, 그것에 가까워질까 두려워하고, 그 대상을 미워하고 싫음을 되돌려 주려고 희망하기도 한다. [기호, 심리상태] 예를 들어 철수는 장미꽃을 좋아한다라고 하는 경우다. ㉪ 또 실제로 좋은 것을 원하고 그것을 가까이 하거나 취하려는 행위를 하려 하거나 행하는 경우다. 또 반대로 싫은 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또 그렇게 행하는 경우다. [의지, 행위] 예를 들어 철수가 애인에게 꽃을 사주려고 한다는 경우다.
그런데 좋음과 싫음의 느낌은 이런 여러 과정에서 함께 얻어질 수 있다. 따라서 좋음은 본래 어떤 과정을 기초로 얻어지는가에 오히려 혼돈을 갖게 된다.
관찰방법의 어려움
정신과정은 그것을 행하는 주체의 외부로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제 3자가 타 생명체의 정신 과정을 직접 관찰할 도리는 없다. 결국 각자 자기 자신의 정신내용을 되새겨보고, 이를 기초로 타 생명체의 정신과정을 유추 추리하고 언어소통을 빌려 이를 확인해보게 된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에게 가장 명확한 것은 자기 정신과정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과정도 그 과정을 다시 되돌아보는 노력은 쉽지 않다. 감각이나 개념 분별 등의 정신작용을 한편으로 행하면서 또 한편으로 자기 자신이 행하는 정신과정을 스스로 되새겨 보는 노력은 쉽지 않다. 또한 좋음(나쁨)의 느낌은 일상생활에서 매우 모호한 형태가 된다. 그것은 얻더라도 형체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얻게 하는 감각내용이나 개념내용과 뚜렷이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또 실제로 좋음 나쁨을 느끼지 못하고 그 중간상태에서 어떤 대상에 몰입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무엇을 좋은(나쁜) 느낌이라고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먼저 좋음(나쁨)에 대한 관념이 그에 상응하는 좋음(나쁨)의 느낌을 찾기 위해 먼저 개입하게 된다. 그 결과 이렇게 좋음(나쁨)의 관념이 먼저 선행하지 않는 일상적인 경우에는 어떤 형태로 좋음(나쁨)의 느낌이 일어나는가를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좋은 느낌의 형태
생각하건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좋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곳에 갔는데 막상 그 곳의 경치를 대하고 좋다고 느낀다거나, 어떤 음식을 맛보게 되었는데 좋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는 경우와 같다. 이 경우 그 좋음을 느끼기 위해 어떤 나쁜 상태를 떠올려 이와 비교하고 좋은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다른 경치나 맛 등을 떠올리고 다시 이와 일일이 비교한 다음에 낫다 좋다 등의 비교판단을 행한 후 좋음의 느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런 여러 경우에 얻는 좋음[1]의 느낌은 ‘좋음[2]’이란 언어표현 이전에 정신 안에 있다. 또 이런 좋음의 느낌은 그 이전에 반드시 어떤 가치판단이 있은 다음에 얻는 것도 아니다. 또 그 상황에 일치하는 희망이 반드시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따라서 좋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가치판단, 희망이 반드시 먼저 있고 다시 이와 일치여부를 일일이 판단하여 좋다라고 느끼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 느끼는 좋음의 느낌은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어떠한 내용에서 어떤 이가 좋다 나쁘다라고 느낄 때 그것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느끼게 되는가를 명확히 밝히기는 곤란하다. 단지 분명한 것은 어떤 감각이나 개념을 기초로 좋음의 느낌이 발생한다는 사실뿐이다. 그것은 마치 감각작용이 어떤 사물을 눈으로 대하여 어떤 구체적인 감각내용을 바로 얻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좋음의 느낌은 감각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감각내용이 감각기관과 대상이 서로 관계함으로써 곧바로 발생하게 되듯, 좋음의 느낌도 정신 안에서 어떤 감각내용 또는 개념을 기초로 곧바로 발생하게 되는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히 나타나는 좋음의 느낌이 다른 좋음의 관념, 가치판단, 희망 등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본다. 즉, ‘좋음’의 관념, ‘--이 좋다’라는 가치판단, ‘--이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형식의 희망, 또 이런 가치판단 희망과 현실의 일치 불일치 판단, 어떤 나쁜 내용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좋음을 일으키는 과정, 좋음을 나쁨과 비교하여 좋음의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는 과정 등은 모두 이런 좋음의 느낌을 기초로 해서 발생하게 된다고 생각된다.
최초의 좋음의 형성
우리가 좋음의 느낌을 얻기 위해서는 통상 자연적으로 어떤 경우에 좋음의 느낌이 발생하게 되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를 일률적으로 나열하는 것은 곤란하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좋음을 얻게되는 내용들을 획일적으로 단순히 나열하고 이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만을 문제로 삼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좋음의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는 각 주체마다, 각 시기, 상황마다 매번 다르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감각기관을 갖는 이들간에 꽃을 꽃으로 보는 것은 대부분 같다. 그러나 정작 그 꽃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는 사람마다 시기, 상황마다 다 다른 것이다. 따라서 좋음의 느낌을 갖는 상황을 일률적으로 나열하는 것은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생명체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생존에 이익이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좋은 느낌을 얻는 반응을 하게끔 되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만일 이렇지 못하다면, 그런 생명체는 세대를 이어서 계속하여 생존을 계속해나가기 곤란했을 것이다.
다만 좋은 느낌을 갖게 되는 모든 것은 생존에 반드시 이로운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생존에 해로운 대상 예를 들어 마약이나 술, 죽음의 위협이 따르는 모험행위 등에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좋다는 느낌을 갖는 경우 모두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선천적으로 정해져 고정된다고는 볼 수도 없다. 예를 들면 아이가 처음에는 젖을 좋아하다가, 다른 음식에 맛을 들이면 이제 젖을 멀리하게도 된다. 따라서 그 일부는 선천적으로 결정되고 이에 다시 후천적인 경험과정 등에 영향 받아 점차 변화되어 나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한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경험을 반복할수록 강화되어지기도 하고 또는 반대로 수정 변경되어지기도 한다. 또 하나의 대상에 대해 계속해서 동일한 좋음이나 나쁨을 얻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싫어하던 것을 나중에는 좋아하게 된다던지, 또는 그 반대로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른이 되면 술이나 담배나 매운 맛 같은 매우 자극적인 맛에 탐닉하게도 되고 반대로 어릴 때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도 된다.
또 각 주체는 각기 좋아하는 것을 달리하여 갖는다. 따라서 이들 관계는 어디까지나 각 주체, 시기, 상황마다 변동되는 유동적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인위적인 좋음의 느낌의 형성
자연발생적으로 얻는 좋음의 느낌을 일률적으로 나열하여 고정시키는 것은 앞에서 본 것처럼 곤란하다. 따라서 이를 획일적으로 나열한 뒤 그 관계를 이용하여 좋음의 느낌을 얻으려는 시도는 곤란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시기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고 모호하기는 하지만, 한 주체가 어떤 경우에 좋음을 느끼게 되는가를 스스로 판단해볼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은 비록 뚜렷하지 않더라도 그 주체가 갖는 좋음의 관념, 가치판단, 희망, 비교분별의 내용 등의 기초가 되어 준다. 앞에서 보듯, 좋음을 느끼는 경우가 유동적이듯, 이런 가치판단, 희망 등의 구체적인 내용도 변화하게 된다. 또 이런 내용은 주체별로 구체적인 차이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어느 정도 공통적인 감각기관과 정신구조를 갖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일반적으로 좋고 나쁨을 공통적으로 갖는 경우도 찾을 수 있다.
좋음을 인위적으로 찾으려 할 때는 좀더 우리에게 명확한 관념 형태로 존재하는 가치판단, 희망의 내용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게 된다. 어떤 이가 어떤 내용을 좋다고 판단하거나, 희망한다는 경우,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런 내용에서 좋음의 느낌을 많이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를 이용하여 좋은 느낌을 얻어내려 시도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결국 현실에서 좋은 느낌을 주는 요소를 찾아내는 한편 좋음의 느낌을 주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가치판단이나 희망의 내용은 무엇이 좋음의 느낌을 주는 것인가를 찾아내게 하는 근거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의 이용에도 한계는 있다. 즉, 자신이 좋아하지 않던 내용을 억지로 좋다라고 가치 판단하거나 희망을 갖는다고 하여 좋음의 느낌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바퀴벌레를 싫어한다고 하자. 그런데 억지로 바퀴벌레는 좋다라고 가치판단을 내려보거나, 바퀴벌레를 손으로 만지고 싶다라고 억지로 희망을 만들어 가짐으로써 바퀴벌레가 좋은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판단이나 희망 등이 일치되는 현실에서 좋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이런 가치판단이나 희망들이 본래 자신에게 좋은 느낌을 주던 요소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치판단, 희망의 내용들은 억지로 좋음의 느낌을 만들어 내는 요소는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좋은 느낌을 주던 것들을 현재의 순간에 다시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만 나쁜 느낌을 주는 것을 억지로 자꾸 좋다고 판단하거나, 희망을 억지로 자꾸 불어넣음으로써 싫음의 느낌이 줄어들고 좋음의 느낌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하튼 좋음의 느낌을 인위적으로 얻는 과정에서는 이들 가치판단이나 희망의 내용을 기초로 하게 된다. 그것은 이들의 내용이 결국 그 주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좋게 느끼는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이를 기초로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되는 과정을 살피기로 한다.
==================이하 내용폐기=====================
]]] ♡> 가치기준과 현실인식과의 관계
]]] ♡> 일치하는 경우
]]]]] □> 좋은 면 일치 인식-만족
]]]]] □> 좋은 면 기준 자체-
]]]]] □> 나쁜 면 일치 인식 - 불만
]]]]] □> 나쁜 면 기준 자체 -
]]]] ♥> 일치 않는 경우
]]]]] □> 좋은 면 불일치 인식 - 불만
]]]]] □> 좋은 면 기준 자체 - 희망
]]]]] □> 나쁜 면 불일치 인식 - 만족
]]]]] □> 나쁜 면 기준 자체 - 두려움, 걱정
]]] ♡> 평등성
인간이 행복과 관련하여 갖는 마음의 상태는 크게 만족, 불만, 희망과 걱정 두려움 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상태는 본질적으로는 모두 평등하다고 볼 수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 ♥> 좋고 나쁜 기준의 불확정성
요약 - 본질적으로 차별 없는 구체적 현상에 대한 다른 판단
좋고 나쁜 기준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람인 이상 서로 유사한 감각기관을 갖고 따라서 좋고 나쁘다는 판단도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구체적 형태가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예를 더 존중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국 구체적으로 어떠한 가치기준을 갖느냐 하는 것은 개별적인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좋고 나쁜 기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다 다르게 되면 구체적인 현상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느냐 불만 불쾌를 느끼느냐 하는 것도 그 주체의 개별적인 가치기준에 의하게 된다. 따라서 그 기준을 달리하면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어떠한 현상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만족을 주는가 불만과 불쾌를 주는 것인가 하는 것도 그 개별적인 기준에 의해서 차별적인 평가가 내려질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좋다 나쁘다하는 것은 모두 본질에서는 좋다 나쁘다는 차별이 있을 수 없는 평등한 상태인 것이다.
한편 그러한 기준은 각 주체별로 다를 뿐 아니라 한 주체 내부에서도 순간순간 변화하고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가운데 각 주체가 세운 기준에 따라서 차별적인 모습과 인식이 나타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 ♥> 기준에서의 좋고 나쁨의 동시존재성
우리는 좋다라는 느낌이나 만족만을 원한다. 그러나 반대의 면으로서 좋지 않은 느낌도 얻게 된다. 이런 점에서는 평등한 관계가 있다.
]]]] ♥> 좋고 나쁜 기준의 상대성
한편 좋고 나쁨의 문제는 어느 것을 좋다고 인식하면 그와 반대되는 것이나 일치하지 않는 것은 나쁘다 또는 좋지 않다라고 평가하게 되는 서로 상대적인 관계를 갖고 인식된다. 예를 들면 따뜻함이 좋다면 추운 것은 싫다라던가 춥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상태는 적어도 좋지는 않다라고 평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정한 현상을 좋다라고 판단했으면 그 나머지 현상과 그에 반대되는 현상을 나쁘다 또한 좋지 않다라는 영역으로 존재하게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그 양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라도 양이 많으면 그 질과 강도가 떨어져서 결국 평형을 이루게 됨으로써 상호 평등한 값을 유지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많이 있는 좋은 깨끗한 물에 대해 적게 있는 썩은 오물은 심리적으로는 동등한 값으로 매우 강한 불쾌로 평가되는 것이다.
]]]] ♥> 기준과 판단에서 쾌 불쾌의 값의 전체적 평등성
요약 - 쾌와 불쾌는 전체적으로 평등한 값을 갖게 된다.
]]] ♡> 변화성
만족 불만 희망 두려움 등은 전체적으로 쾌 불쾌의 값에서 평등한 값을 가지고 갈 뿐 아니라 한편 모든 현상과 감각 인식 판단의 경우와 같이 변화를 해 나가는 하나의 정신 현상이다.
]]]] ♥> 인식의 나타남과 사라짐 - 생주이멸(生住移滅)
만족 불만 희망 두려움의 나타남과 머무름과 변화함과 사라짐
모든 것은 변화를 계속한다. 인식자체가 변화하는 성질을 전제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쾌와 불쾌라는 현상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의 하나인 것이다.
+++ 원문끝 93.09.02 ++
+++ 원문 93.09.02 ++
+++ H25본문끝 96.01.25. ++
+++ H25본문 96.01.25. ++
++ h10 단문수정시작 99년07월10일(토)오후19-33 +
++ h10 단문수정마침 99년07월10일(토)오후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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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과 희망의 구조
] ⃝> /280
]] ●> 만족과 희망
앞에서 우리는 만족 불만 희망과 두려움의 전반적인 구조를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의 요소로서 만족과 희망에 집중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 만족과 희망의 구조
]]]] ♥> 전제
만족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과 인식이라는 정신 현상이 선행해야만 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비교 분별 종합 유추하는 정신 기능도 나타나야 한다. 여기서는 감각과 인식의 성립문제가 제기되어진다. 여기에는 외부 대상과 감각기관의 상호관계가 문제된다. 이는 철학적 심리학적으로도 깊게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비교기준으로서의 좋다 나쁘다의 판단과 비교대상으로서의 현실인식과는 어떠한 것이 선행해서 존재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도 부수적으로 문제 될 수 있다. 나누어서 자세히 보기로 한다.
+++ 원문끝 93.09.02 ++
+++ 원문 93.09.02 ++
+++ H11 96.0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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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02 시작 2006년10월02일(월)16시36분 +내용9z-k510와동일하여삭제함**> /K/9Z/K51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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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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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의 구조
희망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 ♥> 욕구발생
우리가 무언가를 원한다고 할 때 그 속에는 무언가가 다른 것보다는 낫다거나 좋다는 판단이 잠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잠을 자고 싶다라고 생각하던지 먹고 싶다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 그리고 지금 발이 다쳐서 아픈데 이것을 치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 등등 우리가 원하는 사실은 다양하고 많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의 바탕에는 그 원하는 사실이 좋다든지 최소한 비교대상이 되는 그 어떠한 상태보다는 낫다고 하는 판단이 전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좋다 나쁘다는 판단은 어떻게 행해지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들어가면 대답을 얻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우리는 좋다라는 판단이 어떠한 경우에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의 구체적 내용이 어떻게 결정되어지는 것이냐 하는 의문은 파헤치기 힘든 문제이다. 좀 극단적인 경우들을 생각하여 보자.
예를 들어 파리는 동물의 배설물의 주변에 몰려든다. 사람은 이것을 싫어하고 피한다. 물론 파리가 배설물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 정확한 내용은 파리 자신만이 알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는 바에 의하면 파리가 그런 배설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상과 같이 서로 각 주체 별로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할 때 왜 그것을 좋아하고 다른 것을 싫어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한편 우리가 후천적으로 경험을 통하여 좋아하게 되는 것도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경험을 반복함으로서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처음에는 좋아했으나 계속 반복함으로서 싫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인지 또 그것을 왜 좋아하게 되는 것인지를 완전히 밝힌다는 것은 힘든 일이 된다.
그래서 일단 무언가가 좋다 그리고 어떤 다른 무언가를 싫어한다라는 판단이 전제가 돼 있을 때 비로소 희망의 발생이 문제된다.
그러나 단순히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희망의 상태와는 다르다.
]]]]] □> 현실인식과 기준의 불일치
]]]]] □> 과거, 현재, 미래 현실인식과의 불일치 - 욕구의 발생( - 의 제거, + 의 실현)
]]] ♡> 희망
일치하지 않는 기준내용에서 좋은 내용 (-의 제거, +의 실현된 상태)를 그리는 것
희망은, 좋은 면을 바라보는 상태이다. 좋고 나쁜 면이라는 것은 만족과 불만의 구별기준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좋고 나쁜 면의 양면 중 좋은 기준면 자체에 대한 응시(凝視)상태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자세히 보자면, 적극적으로는 추상적으로 좋은 상태(예를 들어 부자가되는 것)를 바라보거나 또는 구체적으로 좋은 상태(예를 들어 좋은 집)를 설정해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좋은 면이라는 것은 결국 만족,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가치감, 평온과 안정, 희망과 의욕, 희망의 성취상태를 그림, 그리고 희망의 성취자체의 상태 또는 그것들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구체적 상태들을 말한다.
소극적으로는 다음에 밝힐 가지가지의 나쁜 요소가 없는 상태를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나쁜 면이라는 것은 좋은 면의 반대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불만 가지가지의 욕구불충족 좌절 실패감 고통 억압 성남 분노 미움 질투 시기심... 불쾌 짜증 혼란 갈등 번뇌 번민 혼돈.슬픔 우울 ... 보람 및 가치감이 없음 무의미함 건조함 허무감 괴리감(乖離感) 박탈감 이질감 자책감(自責感) 후회감 양심가책 죄의식 소외 따돌림 미움 질투 시기 비난 제재 벌을 받음... 평온 안정감없음 앞에 밝힌 나쁜 상태들의 계속성과 ‘만족...희망의 성취상태를 그림’등 좋은 상태의 일시성(一時性) 초조 안달 긴장 불안 걱정 두려움... 무희망 무의욕 권태 따분함 물림 질림 침체(沈滯) 의욕상실 무력감 비관 절망 또는 희망이 있기는 있으나 위에서 밝힌 나쁜 상태 예를 들어, 강박감 번뇌 초조 안달 긴장 불안 걱정 두려움 등에서의 희망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의 희망추구...‘ 등등의 상태를 말한다.
]]]] ♥> 욕구발생의 모습
]]]]] □> 현실인식 선행
기준이 후에 성립하는 경우
]]]]] □> 기준 선행
현실인식이 후에 나타나는 경우
]]]]]] ■> 기준의 발생
]]]]]]] △> 기존인식의 조합-현재 과거 미래인식과의 불일치
]]]]]]] △> 현재의 기준- 과거 미래인식과의 불일치
]]] ♡> 욕구와 희망 상상 기대 의욕과의 차이
]]]] ♥> 비교기준판단-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 ♥> 희망- ...한다면 좋겠다.‘...한다면’
]]]] ♥> 욕구- ...한다면 좋겠다.(...하지않다. 따라서 좋지않다.)...하고 싶다.